신을 섬긴다는 것의 의미 3 - 생명과 거룩 개독칼럼

구약성서 레위기 19장에 보면 이스라엘이 일상 속에서, 어느 특정한 상황에서 취해야 할 태도, 자세, 해야 할 것, 하지 말아야 할 것 등이 비교적 구체적으로 나열되어 있다. 예를 들어 추수할 때 가난한 자와 나그네를 위해, 그들이 먹을 수 있도록 조금 남겨두라는 것(9-10절), 도둑질과 사기를 금하는 것(11절), 이웃을 해코지하지 말 것(13절 이하) 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그 중간중간 “나는 여호와이니라”라는 언급은 이것이 신의 명령임을 가리킨다. 즉 이스라엘이 이 같은 규율대로 살아야 하는 근거가 바로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또한, 이 같은 삶의 자세 의미와 목적을 레위기 19장 1절과 2절에서는 이렇게 밝히고 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에 명한 거룩하라는 이 언급, 그리고 그 이후에 이어지는 구체적인 삶의 자세들, 이것들은 과연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것일까? 더 나아가 신자들을 넘어 사회 전체와 온 인류, 세계 전체에 보편적인 말씀일 수 있을까?


신자들이 보기에 너무 당연한 것 아니냐 반문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 같은 물음은 적어도 다음의 두 가지 차원에서 매우 중요할 뿐만 아니라, 회피할 수 없다. 첫 번째는 교회 역사에서 구약성서를 기독교의 경전에서 제외해야 한다는 주장이 끊임없이 있었다. 근래에 와서 20세기 초 베를린에서 교회사를 가르치던 하르낙(A. v. Harnack) 같은 신학자는, 종교개혁 이전까지는 구약이 필요했으나, 그 이후로는 구약을 기독교 경전에서 제외했었어야 했다며, 다소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구약을 기독교 경전에서 빼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의 주장을 거칠게  나마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유대교 경전인 구약성서는 기독교 신앙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 맥락은 좀 다르지만 신약의 갈라디아서에 보면 율법과 할례 문제가 나오는데, 사도 바울은 이걸 아주 적극적으로 거부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율법이 들어오는 것을 ‘복음의 왜곡’, ‘복음의 변질’이라고 할 만큼, 예루살렘 교회와의 결별을 불사하면서까지 강력하게 거부한다. 이 같은 상황과 문제의식 속에서 레위기 당시 이스라엘을 향한 율법의 조항들이 오늘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것이 첫 번째 측면이다.


두 번째는 좀 더 간단하다. 레위기에 나오는 율법의 내용을 한 번 생각해 보라. 예컨대 레위기 19장 11절에 “너희는 도둑질하지 말며 속이지 말며 서로 거짓말 하지 말며” 라고 되어 있다. 이렇게 하면, 즉 도둑질 안 하고, 안 속이고, 거짓말 안 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것인가? 이런 내용은 굳이 신의 권위를 부여하지 않더라도 인간이라면 마땅히 지켜야 하는, 그렇게 살아야 하는 기본적인 윤리이다. 다시 말해, 오늘날 사람들이 도둑질하지 않는 것은 그것이 신의 명령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게 옳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이 오늘날의 윤리 감각이다. 현대 사회는 굳이 하나님을 찾지 않더라도 이 정도 수준의 윤리 정도는 지켜낼 수 있는 법과 제도가 있고, 또 윤리의식이 있다. 인류의 문명과 문화가 그런 방향으로 발전해 왔다. 이런 상황에서 당시 이스라엘에 유효했던 것이 지금 상황에서 적어도 겉으로는 별로 힘이 없어 보인다. 이것이 두 번째 측면이다.


이 같은 상황 속에서 오늘 기독 교회는 여전히 구약을 경전으로, 즉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렇게 뭔가 어긋나 보이는 사태 속에서 신앙의 깊은 세계로 들어가고자 한다면 우리는 진지하게 묻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의 명령으로서 율법이 과연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것인가, 유효하다면 어째서, 어떻게 그런 것인가 하는 것을 말이다.


오늘의 눈으로 봤을 때, 어떤 것은 법과 질서에 해당하고, 어떤 것은 윤리이며, 또 어떤 것은 미덕에 해당하는 것들을 당시 이스라엘은, 그리고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명령으로 고백하고 있다. 여기에 현대인들이 까마득하게 잊고 지내던 하나님을 향한 영성이 있다. 바로 생명과 구원이다.


‘구원’이라는 개념은 처음부터 완결된 형태로 인식되어온 것이 아니라, 신앙의 역사 속에서 발전되어온 개념이다. 실은 구원뿐만 아니라 기독교 신앙 전체가 그렇다. 하나님에 대한 인식, 여러 가지 신앙고백은 모두 역사적인 것이다. 오랜 기간 수 많은 사람이 저마다의 삶의 자리(Sitz im Leben)에서 경험하고 그렇게 고백했던 신앙이 더해지고, 이를 통해 하나님과 구원에 대한 인식이 확장되었고, 그렇게 전해져 오늘에 이른 것이다. 그 가운데 구약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구원을 이야기할 때 이는 다소 현세적이다. 이 같은 구원 이해 속에는 이스라엘만의 고유한 역사와 그 가운데 있었던 하나님 경험이 있는데, 특별히 출애굽과 광야생활 속에서 이들은 자신들을 구원하는 하나님을 고백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갈라진 홍해 사이를 건넜고, 이들을 추격하던 이집트의 군대는 수몰되었다. 이 사건은 이집트 노예생활의 고통으로부터 완전한 해방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자신들을 죽이려는 칼날로부터 목숨을 건진 것을 의미한다. 이것을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구원으로 이해했고 또 그렇게 고백했다. 또 아무것도 없는 광야에서 발견한 나름의 먹을 것(만나)과 오아시스를 하나님이 내려준 양식과 물이라고 여겼다. 이 또한 하나님의 구원이었다. 이러한 과정들을 통해 구약의 이스라엘은 무사한 것과 살아 있는 것 자체를 하나님의 구원으로 이해하고 그렇게 고백했다. 현실 속에서 당하는 고난과 고통이 많았기에 그런 고난에서 벗어나는 것만도 그들에겐 구원이었다.


레위기 19장은 이 같은 맥락에서 읽어야 한다. 본문 속에 나오는 하나님의 규례가 잘 지켜지고 실현되는 곳이 있다면 거기엔 하나님의 정의가 있다. 정의가 구현되는 곳과 그렇지 않은 무법천지 중에서 힘없는 사람도 생존의 위협을 느끼지 않으면서 ‘무사 생존’이 가능한 곳이 어디인지를 생각해 보라. 당연히 정의로운 사회 아닌가? 따라서 하나님의 정의는 곧 구원이었다. 정의를 통해 생명을 구원하는 하나님은 거룩하시다.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에 참여하는 것은 율법과 규례들을 단순히 문자적으로 지키는 것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 가운데 담긴 하나님의 생명과 구원을 바라보는 영성을 통해서 가능하다. 이것이 바로 예수가 말한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다. 이처럼 삶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지극히 신비롭고 오묘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성경을, 특별히 율법을 규범적으로 적용하지는 못할 것이다.


마태복음 5장 후반부에 나오는 내용을 보라. 잘 알려진 내용이다.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가 어쩌면 이런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가 아닌 오히려 오른뺨을 맞으면 왼뺨마저 돌려대는 것, 속옷을 가지려고 자신을 고소한 사람에게 안 빼앗기려 맞고소를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겉옷마저 내어 주는 모습, 억지로 오리를 가자고 하는 사람에게, 나 오늘 바쁘다고, 아니면 몸이 좀 안 좋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십 리까지 가 주는 것, 그리고 원수를 사랑으로 갚는 것, 여러분들 보기에 어떤가? 어리석어 보이나? 저래서 어디 험한 세상 살아갈 수나 있겠나 걱정되나? 하지만 이것은 세상이 험악해서 만이 아니라, 본질에서 인간의 의지만으로는 해내기 어려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것들이다. 다만 이것은 예수가 율법 속에 담긴 하나님의 사랑을 끄집어내 우리에게 보여준 것이다. 거기엔 이해와 타산, 적과 동지, 선인과 악인의 틀을 뛰어넘는 완전한 하나님의 사랑이 있다.


인류가 그간 쌓아온 경험과 지혜로 일구어낸 문화와 문명은, 우리의 생활을 윤택하게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우리에게 생명을 주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생명과 구원으로서의 하나님의 율법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그래서 예컨대 도둑질하지 않는 순간이나 남을 헐뜯지 않는 순간에, 그리고 가난한 자와 나그네를 위해 이삭을 줍지 않듯, 약자를 위해 내 권리의 일부를 스스로 포기할 때, 그 순간 그곳에 사랑으로서 계신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영성이 있다면 그는 일상 속에서도 생명과 구원의 세계로 들어가 있는 것이다. 그게 아닌 그저 윤리적, 율법적 차원에 머물러 있다면 — 실은 그것 자체로도 현실 속에서는 매우 훌륭한 삶의 태도이지만 — 삶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진 못할 것이다.


기독교 신앙은 율법의 완성이 우리의 삶을 통해 이뤄내는 것이 아니라고 믿는다. 구약의 율법을 생명과 구원을 향한 하나님의 정의라는 차원으로 깊이 들어가지 않고 그저 단순히 겉으로 보이는 본문의 구조를 따라 이해해 버리고 만다면, 그래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했으니 우리도 거룩해질 수 있구나, 아 그럼 아래 나와 있는 내용을 잘 지키면 되는구나 하게 된다면 우리는 모순에 빠진다. 하나님의 속성인 ‘거룩함’이란 것이 생각했던 것보다 별것 아닌 시시한 것이어야 하거나, 그게 아니라 ‘거룩함’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차원을 달리하는 ‘구별됨’을 뜻하는 것이라면, 그래서 결코 시시한 것이 아니라면,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여라’라고 한 하나님은 애초에 우리가 할 수도 없는 것을 하라고 한 억지스러운 분이나 둘 중 하나가 되어야 한다.


기독교 신앙은 율법의 완성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뤄졌다고 믿는다. 예수가 율법을 완성했다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마태복음 5장 21절, 22절 속 예수의 말씀을 들어보라.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바보)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어떤가? 마음이 평안해지나? 오히려 읽을수록 좌절과 탄식이 나오지 않나? 또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는 말씀과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는 말씀은 어떤가? 이러다가 어디 우리 몸이 남아나겠나? 예수의 이 같은 말씀의 핵심은 율법을 문구대로 지킨 것 정도로 하나님의 속성인 ‘정의’와 ‘거룩’을 이뤘다고, 이룰 수 있다고 여겨선 안 된다는 것이다. 율법의 완성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뤄졌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 그 자신이 완성된 율법이라는 의미다. 기독교 신앙은 따라서 우리의 할 일이 율법의 완성인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의 모든 운명을 거는 것이라고 믿는다. 수영도 못하는 사람이 어설프게 물에서 허우적거리면 거릴 수록 물속으로 가라앉게 되지만, 가만히 누워 온몸에 힘을 빼고 물의 흐름에 자신을 맡기면 물 위를 유영한다. 그것이 믿음이다. 이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거룩함에 참여하게 된다고 믿는 것이 기독교 신앙이다.


그렇게 생명의 깊은 차원에서 하나님을 체험한 사람의 삶의 모습을 한 번 생각해 보라. 그런 사람이 도둑질하거나, 남을 속이거나 헐뜯겠는가? 고린도전서 3장 16절에서 사도 바울은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 한다. 공자가 자신의 나이가 70이 되었을 때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도 도리에 어긋남이 없었다’고 한 것과 같은 이치이다. 율법에 나오는 윤리적 삶과 선행은 바로 이런 결과로서의 열매이지 그것이 거룩한 생명의 근원과 뿌리가 아니다.


마태복음 5장 48절에 하나님이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여라’한 것과 같이 예수님 또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말한다. 이는 우리의 행실로 온전함에 도달하라는 요구가 아니라 거룩하고 온전한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라는 요청이자 초대이다. 교회에 나와서 헌금 꼬박꼬박 내라는 협박이 아니니 두려워할 것 없다. 이 땅에서 선한 마음으로 작은 것에서부터 정의롭게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축복이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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