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쪽으로 피난오다 - 프랑스에서 가장 햇살 좋은 도시, 페르피냥 기본 카테고리

IMG_0195.PNG
프랑스에서 가장 햇살 좋은 도시 페르피냥(Perpignan)은 바로 이 곳, 스페인과의 경계에 자리하고 있다.



프랑스에 처음 발을 내딛은 지 벌써 12년이 되었다. 프랑스어를 배우기는 했지만 아직 프랑스 말을 입 밖으로 내뱉기가 너무 어려웠던 그 시절, 처음으로 사귄 프랑스 친구는 같은 건물에 살던 16살의 고등학생 블랑딘이었다. 한국을 떠나 처음으로 타국에서 생활하게 된 나는 곧 외로움에 시달렸고, 친구 사귀기에 전념해 보았지만 그리 쉽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블랑딘과의 첫 만남은 산골 출신 그녀가 사진 공부를 하기 위해 리옹에 유학온 지 딱 일주일 된 날이었다. 그녀는 나머지 짐을 가지러 고향에 갔다 오는 길이었고, 한 눈에도 넘쳐 보이는 짐을 낑낑거리며 끌고 오는 그녀를 선뜻 도와준 것이 인연이 되었다. 나는 아직도 요리만 하면 양을 맞추지 못해서 며칠이고 한 가지 요리만 계속 먹게 되는 경향이 있는데, 그 때도 마찬가지여서 음식을 좀 많이 했다 치면 그녀의 원룸으로 가서 나누어 먹곤 했다. 타향살이 초보였던 우리는 생각보다 잘 맞았고, 그러다가 그녀의 고향집에 초대를 받아 처음으로 프랑스 시골에 가 보기도 했다.

 
226267_1041379523881_560_n.jpg
블랑딘의 고향, 프랑스의 한 산골마을 방트롤(Venterol)
알프스 산맥의 한 자락인 방투(Ventoux)산 기슭에 자리하고 있는, 주민 680여 명이 옹기종기 사는 작은 마을


227592_1041379643884_1227_n.jpg
2003년 10월, 나는 블랑딘의 부모님께 초대를 받아 태어나 처음으로 프랑스의 시골 마을을 방문했다.
프랑스의 가정식이란 것도 처음 맛 보았고, 프랑스 시골의 젊은이들이 어떻게 주말을 보내는지도 경험해 볼 수 있었다.
당시 프랑스어가 서툰 상태였는데도 모두들 끈기 있게 내가 문장을 마치기를 기다려 주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때의 기억이 너무 행복했기에 나는 리옹(Lyon)을 떠난 후에도 가끔씩 블랑딘에게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곤 했다. 하지만 멀리 떨어진 채로 그녀는 그녀대로, 나는 나대로 삶을 살다 보니 자연스레 사이가 멀어지게 되었다. 그렇게 12년이 지나 화장도 할 줄 모르고, 옷도 그냥 있는 거 주워 입던 수수한 아가씨는 한 남자의 아내가 되었다. 그동안 지금껏 한 번도 만난 적이 없기에, 그녀의 결혼도 축하할 겸 하여 그녀가 남편과 정착한 프랑스 남부의 페르피냥에 가 보기로 하였다. 드디어 D-day. 아침 일찍 일어나 파리의 리옹역(Gare de Lyon)으로 향했다. 정말이지 요즘의 파리 날씨는 얄궂다. 비는 추적추적 내리고 하늘은 회색으로 흐리고 으슬으슬 춥다. 올해 여름이 기록적으로 더웠던 것처럼 이번 겨울 역시 무지하게 추울 거라는데, 벌써부터 그 전초전을 보는 것 같아 슬쩍 두려워 지기도 한다.

리옹역에서 기차가 출발하였다. 3시간 여를 쉬지 않고 달린 TGV가 프랑스 남동부의 님(Nîmes) 근처에 도착하자, 그 때부터 창가에 앉은 내 얼굴로 햇살이 내려오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햇빛을 쬐니 한낮의 고양이처럼 졸음이 몰려 왔다. 그렇게 한 시간 정도 꾸벅 꾸벅 조는 동안 기차는 몽펠리에(Montpellier)를 지나 최종 목적지인 페르피냥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갑자기 내 눈에 들어온 광경은 정말이지 놀라웠다. 시속 380킬로미터로 내 옆을 지나쳐 가는 풍경들을 놓치는 것이 너무 아까워 사진을 찍을 새도 없이 그 속으로 빠져 들었다. 바다에서 그다지 멀리 않은 곳에서 해변을 따라 이어져 있는 철도를 달리는 기차, 그리고 그 안에 눈이 휘둥그레져 있는 내가 있었다. 정말이지 다시 파리로 돌아가는 여정이 기다려질 만큼 그 풍경은 환상적이었다.


27091-tgv-les-nouvelles-lignes-en-france.jpg
노란 선이 바로 몽펠리에에서 페르피냥까지의 철도 노선
곧 TGV 전용 노선이 건설되고 나면 해변가를 달리는 기차는 이제 볼 수 없어질 지도 모른다


정신없이 게걸스럽게 주변 풍경을 눈에 담는 동안, 파리를 떠난 지 5시간만에 페르피냥에 도착했다. 기차에서 내려 가장 먼저 한 일은 입고 있던 두꺼운 외투를 벗어 짐가방에 넣어 버리는 것이었다. 옷을 벗는 것도, 굳게 잠겨진 수트케이스를 열어 옷을 다시 개켜서 정리해 넣는 귀찮음보다, 외투를 입고 있음으로써 내가 느낄 더위가 더욱 성가실 것임이 확실했기 대문이다. 프랑스에서 가장 해가 잘 나는 도시라는 페르피냥의 명성은 역시나 헛되이 얻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페르피냥 역사는 양 방향으로 트여 있어서 외곽 방향인 동쪽으로도, 시내 방향인 서쪽으로도 나갈 수 있는데, 나는 멋모르고 사람들을 따라 동쪽으로 나갔기 때문에 길을 찾는 데에 꽤나 애를 먹었다. 다행히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시내에 가려면 어떻게 가야 하냐고 물었는데 알아 듣기 힘든 발음들이 되돌아 온다. 아! 남부 사투리! '앙'을 [앵]으로 발음하고 '오'와 '아'의 중간 발음을 [오]로 발음하는 남부 사투리는 꽤나 유명한데도 이렇게 실제로 대놓고 들어보기는 또 처음이었기에 당황스러웠다. '저기요~'하고 조심스럽게 접근하는 여행객에게 경계 섞인 눈초리를 보이지 않는 페르피냥 사람들의 반응 역시 새로웠다. (아니면 파리 사람들이 재수가 없거나...)


IMG_0197.JPG
페르피냥 기차역에서 나와 시내방향으로 걸어가는 길 가에는 야자수가 가로수로 서 있다.
이야말로 전적으로 페르피냥의 날씨를 한눈에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IMG_0200.JPG
10여 분 정도 걸어 시내에 도착했다.
사실은, 여기가 시내인지 프랑스 최대의 프랜차이즈 서점 FNAC이 위치한 쇼핑몰을 보고 바로 짐작할 수 있었다.
프랑스에서는 대강 맥도날드나 프랑스 패스트푸드점인 QUICK, 혹은 FNAC이나 극장이 있는 바로 그곳이 시내니까..!



그나저나 정말이지 날씨 한 번 기가 막히게 좋다. 그 날씨에 감탄하며 잠시 분수가 쏟아지는 광장 벤치에 앉아 햇살을 온몸으로 맞아 본다. 그러고 보니 이 날씨에 감탄하며 햇빛에 집중하는 이는 나밖에 없어 보인다. 파리에서였더라면 이미 잔디밭은 일광욕을 즐기려는 이들로 뒤덮여 발디딜 틈조차 찾기 힘들었을 터인데, 이곳은 그렇지 않다. 이는 이런 좋은 날씨가 일상이라는 증거이기도 하다. 항상 있는 것이기에 굳이 누리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다시 한 번 페르피냥 날씨의 위엄에 존경을 표하는 바이다. 그렇게 햇볕을 맞으며 빈둥거리고 있었더니 드디어 블랑딘이 나를 데리러 왔다. 이렇게 나의 페르피냥 여행이 시작되었다. 


IMG_0203.JPG
10년이 넘는 시간동안 어른이 되어 버린 블랑딘과 르노 부부는 그날 저녁, 나를 페르피냥의 핫 플레이스 La Fabrik에 데리고 갔다.
불타는 금요일이나 주말도 아닌데 사람이 넘쳐 식사를 하기까지 한 시간 여를 기다려야 했다.
라 파브릭은 고전적인 레스토랑이 아니라 타파스(Tapas) 전문점.
그러니까 식사를 하러 가는 곳이 아니라 약간의 안주를 곁들인 음주를 위해 가는 곳.
한국의 술집과 비슷한 분위기라고 보면 되겠다.



프랑스의 어떤 도시를 여행한다면 도시에 도착하자마자 가장 먼저 들려야 할 곳은 Office de Tourisme이라 불리는 관광센터. 보통 주요 관광지 근처에 자리잡고 있으며, 여행 코스를 알려 줌은 물론, 도시에서 가장 괜찮은 음식점이나 바, 클럽 등도 귀뜸해 준다. 여행이 발견을 통해 몰랐던 것을 알게 되는 기쁨, 알던 것을 새로이 알게 되는 즐거움이라면 진정한 정보는 다름이 아닌 현지에 있으므로 지나가는 사람을 붙들고 이것저것 물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 물론 여기에는 약간의 운이 필요하다. 우선 내가 고른 상대가 그 지역에 대해서 잘 알고 있어야 하며, 또한 나와 의사소통이 가능한 사람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브뤼셀 여행에서는 정말이지 아무 것도 모르고 가서 길에서 만난 사람들이 알려 주는 곳만 마치 무슨 미션을 수행하듯 돌아다닌 적도 있다. 지금까지 내 기억에는 브뤼셀 여행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페르피냥 관광센터에서 내게 추천해 준 코스는 페르피냥 시내의 역사적인 건물 위주의 코스였다. 매주 토요일 오후에는 가이드를 동반한 투어도 있다. 비용은 한 사람당 5유로, 1시간 반에서 2시간 정도가 소요된다.


IMG_0238.JPG
페르피냥 관광센터에서 진한 남부 사투리를 쓰는 남정네가 일러 준 관광코스
이전에 요새였던 페르피냥 시내 곳곳에 있는 곳들을 표시해 주었다.
군데군데 십자가 표시를 해 준 곳은 이 지역에서만 맛볼 수 있는 카탈루냐 음식을 전문으로 하는 괜찮은 식당들


페르피냥에 도착한 다음날인 금요일 아침. 블랑딘은 식탁에 마들렌, 빵 오 쇼콜라(초콜렛 빵), 시리얼, 등을 준비해 두고는 점심으로 먹을 고기파이, 샐러드, 초콜렛 케잌을 만들어 둔 뒤 출근했다. 내가 12년 전 알던 블랑딘은 아직 요리를 할 줄 모르던 작은 고등학생이었는데 이제는 이런 것까지 뚝딱뚝딱 해 내는 아가씨, 아니 새댁이 되어 있었다. 남편인 르노는 출근이 오후 1시인 관계로 블랑딘이 준비해 놓은 파이를 오븐에 구워 내놓았다. 서둘러 점심을 먹고 나를 페르피냥 시내에 내려다 준 르노는 일을 하러 갔다. "안녕, 저녁에 봐~!"

진정한 의미의 페르피냥 여행은 이제 시작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계속)


Leave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