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상 기본 카테고리

지난 일들이 생각이 났다. 문득 그럴 때가 있다. 딴지에 썼던 글들을 뒤져보았다. 딴지가 서버를 잊어버리면서 지워져 버린 글들과 재개발에 묻혀버린 글들이 있다. 그 글을 쓰던 자신의 모습과 지금 스스로를 비교한다.


지금의 눈으로 보기에는 많이 부족한 글이다. 물론 지금도 부족하다. 어느 분야나 타고난 재능이 탁월한 사람이 존재한다. 재능의 우월함이 사람의 우열로 나뉜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과거를 회상한건 후언니의 글을 읽었기 때문인 것 같다. 데마시안으로 떠난 사람들에 대한 분노가 느껴졌다.


후언니는 가끔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언젠가 물고기는 왜 물고기인가 하는 글을 읽고 이어지는 연상을 쓸까 하다 만적도 있다. 글을 쓰는건 읽는 것보다 에너지가 많이 소모된다.  피로가 근육에 누적되어 있는 동안은 더더욱 쉽지 않은일이다.  


한국인은 농경민족이다. 유목민족에 비해 단백질 공급원이 부족하다. 어쩌다 고기를 먹을 때는 다른 민족들이 먹지 않는 뼛속 골수까지 우려내어 먹는다. 


그럼에도 생산계층에게 고기를 먹을 기회는 쉽게 주어지지 않는다. 여름에 개를 잡고 겨울에 토끼몰이를 해도 쉽지 않다. 수전 농법은 농지의 지력을 약화시키지 않고 천년이상 한자리에서 단일작물재배를 가능하게 한다. 물이 들어찬 논은 하나의 순환생태계다.


여름이 막바지에 이르고 논에 벼가 고개를 숙이기 시작할 때 물길을 막는다. 논이 마르고 벼가 영그는 동안 작은 웅덩이에 물고기들이 모인다. 작은 공간에 버글거리는 작은 물고기는 지주들이 탐내지 않는 단백질이다. 모내기를 하기위해 저수지물을 퍼내고 남는 물고기들도 마찬가지다.


미꾸라지 붕어 피라미 버들각시 모래무지 각자의 이름이 물론 존재하지만 물고기로 부르는 게 이상하지 않다. 먹을 것이 중요했던 시절이 있었다. 하층민들은 지주에게 빼앗기지 않고 자식에게 먹일 수 있는 것들에게 참이란 접두사를 붙였다.


참새는 털을 벗기면 손가락 두 마디만한 몸통이 볼품없다. 독수리처럼 위풍당당하지도 않고 장끼처럼 화려하지도 않다. 그래도 빼앗기지 않고 자신과 자식이 먹을 수 있다. 참꽃도 마찬가지 화려하지도 향기가 진하지도 않다. 춘궁기에 겨우 허기를 달래주고 꽃 중의 꽃이란 이름을 얻는다.


참나무는 보다 영험하다. 모내기철에 비가 오지 않아 가을 수확이 흉년이면 산야의 도토리나무는 열매를 더 많이 맺는다. 바람에 꽃가루를 말리는 시기가 모내기철과 얼추 맞물린다. 그 시절에 비가 오지 않으면 수분률이 높아져 열매가 많아진다. 그 쓴 열매를 외려 꿀밤이라 불러야했던 궁핍을 온전히 이해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물고기에게 참고기란 이름을 주지 않은 게 이상할 정도다. 논에서 잡히는 물고기가 한 이름으로 퉁치기엔 다양한 종류다.


예수가 민중에게 자신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라고 했다. 참사람이란 이름으로 지칭되는 사람들도 그런 것 같다. 다수의 고통과 궁핍을 면하게 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희생한 사람들을 그렇게 부른다. 타인의 고통을 심하게 공감해서 타인을 타인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착취자의 입장에 설 수 있거나 외면하면 제 한 몸은 편히 살 수 있었을 사람들 중에서도 그런 사람들이 나온다. 신기한 일이다.


어찌 보면 자살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일이다. 사회성이 높은 생물들이 자살을 한다. 생존이 환경이 척박해질 때 다른 동족을 잡아먹는 선택을 하기보다는 스스로를 죽인다. 자살을 선택하는 개체가 이타적인 존재다. 아니 더 이타적인 존재가 자살을 선택한다. 횡령이나 비리사건에 연류되어 목숨을 끊는 사람들도 자신의 죽음으로 지켜고자 하는 대상이 있다. 우리라는 인식의 폭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딴지에 처음 글을 쓸 무렵 나도 사정이 좋지 않았다. 딴지도 마찬가지였다. 자세한 사정을 알지는 못했지만 운영이 심각하게 어려웠다. 보통의 사람들은 돈 벌자고 일을 하지만 노동은 경제적인 것 이상의 의미를 부여받기도 한다.


최근의 잠팅님을 비롯해 이런저런 이유로 그동안 딴지를 떠난 사람들이 아쉽기는 하다. 각자가 부여하는 것 만큼의 의미가 있다. 아마도 생활고를 이유로 퇴직을 하고도 전 직장이 잘되기를 바라던 대구라는 사람이 있었다.


삼년에 한번 씩 머리를 잘라 소아암환자들의 가발을 만들 재료를 제공한다 했다. 어느 날 술내음 묻어나는 글이 기억난다. 형의 죽음의 기억과 형을 죽음에 이르게 했던 병이 자신에게 잠복해있음을 말했다. 공명하는 부분이 있었다. 처음으로 그의 글에 댓글을 달았다. 답은없었다. 관계없이 묻어두려던 이야기들을 쓸 마음이 생겼었다. 인터넷으로 그의 죽음을 접했을 때 몸에 내제되었다던 폭탄이 터졌는 줄로 알았다. 


소아암 환자들과 관계된 이야기를 접하면 일면식도 없는 그가 연상된다. 돈을 벌려면 일을 해야 한다던 그가 딴지를 떠나면서 딴지의 계좌번호를 인터넷에 공개했었다. 운영이 심각하게 어려웠을 것으로 사료된다.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돈을 받는 순간 후원을 하는 사람들을 위해 움직이게 된다. 아마도 그런 논리였을 것이다.


온두라스의 김지수씨를 구해낸 일이나 홍석동씨 납치 살해사건의 전모를 파해치도록 한 원동력이 거기에 있지 싶었다. 장투 사건처럼 헛 발질을 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납치 살해범의 살해위협을 이겨내며 사건을 추적했다. 사건공론화를 위해 종편과 공중파에 소스를 제공해야하는 매체의 한계는 있었다. 아들의 살해범이 잡혔음에도 아들의 시신을 찾지 못한 아버지가 자살을 선택했다.


고고한 엘리트 의식이나 선민의식은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딴지에서 김구라도 배출했다. 성공한 다른 연예인들의 생식기를 난도질하는 방송을 했었다. 아마도 미국이었으면 김구라는 당사자나 팬들에게 살해당했다.


내부자가 아니기에 어느 쪽이 그들이 더 추구하던 가치인지 확신하진 못한다. 떠나는 사람들이 무엇을 찾아 떠나는 줄 모른다. 싫어서 떠날 수도 있다. 한때 좋아하던 이유가 되었던 것들이 싫어하는 이유가 되는 것이 사람이다.


지난 일을 생각하다 지난 사람을 생각하고 떠난 사람들 생각에 이르렀다. 몸을 구성하는 원소들이 교체되는 것처럼 조직을 구성하는 사람들도 변했다. 기억은 전이되고 가치는 공유한다. 조금은 변했겠지만 여전히 같은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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