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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산한 세상이었다. 1975년 4월 남베트남이 패망했다. '다음은 한국 차례'라는 불안감이 공공연하게 유포됐고 유신 정부는 나라 안 분위기를 소리나게 조이기 시작했다. 그 된서리를 직격으로 맞았던 분야 중의 하나가 대중음악계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젊은이들의 ‘퇴폐’ 풍조를 몸서리치게 싫어했는데, 70년대 초반 대학가를 휩쓸던 청바지와 통기타 문화는 그 주범으로 찍혀서 수많은 노래가 금지곡 딱지를 받았다. 또 75년 12월 시작된 대마초 파동은 한국 록음악의 전설 신중현 이하 수많은 가수들의 무대를 날려버렸다. 신중현은 악기를 팔아가며 그 시련기를 버텨야 했다.


1977년 9월, 이전에 없던 이름의 가요제가 오늘날 한국 연예계 절대 지존 중의 하나가 된 이수만의 사회로 정동 문화체육관에서 열린다. 이름하야 <대학가요제>. 그 이전부터 대학가의 축제마다 노래 자랑 대회는 빼놓을 수 없는 무대였고, 방송사 주최의 각종 컨테스트에서 이름을 날리던 그룹 사운드들도 대학마다 존재했지만, 그 모두를 망라하여 전국적인 '대학가요제'로 묶어낸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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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 예선 때부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당시 편성국장이었던 임성기의 증언.


"지방사 예선에서 행사장인 체육관의 문과 유리창이 몰려든 관중 때문에 여러 곳에서 부서졌다는 보고였다. 본사 임원실에는 청와대를 비롯한 거절하기 어려운 여러 곳에서 계속 입장권을 보내라는 전화가 빗발쳤다."


기대만발 화제풍성의 제1회 대학가요제의 대상을 거머쥔 서울대 그룹사운드 샌드페블스의 <나 어떡해>는 일종의 컬쳐쇼크였다. 단정히 서서 기타 반주 정도에 맞춰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만 해도 인식이 좋지 않았던 '밴드'가 악을 쓰며(?) 부르는 노래여서 그랬고, 그 편견을 지울 만큼 음악성이 뛰어나서도 그랬고, 그 노래를 부른 이들이 자그마치 ‘서울대생’들이라는 사실이 그랬다.


덕분에 밴드를 하겠답시고 섣불리 나서다가는 성난 부모님에 의해 기타와 다리가 동시에 부러지는 수가 있었던 젊은이들은 구원의 동앗줄을 얻게 된다.


"샌드페블스 보셨죠? 걔네 서울대 애들이에요."


동상을 받은 서울대 트리오의 <젊은 연인들>에는 한 슬픈 전설이 있다(사실 여부는 알 수 없으나 이미 공공연한 전설로 굳어져 있어 소개해 본다). 어느 대학 동아리에서 4학년들이 마지막 MT를 떠났는데, 선배들과 각별했던 한 명의 후배가 따라갔다. 그런데 등산 중 눈보라를 만났다. 가까스로 동굴 속에 몸을 피한 그들은 누군가 눈길을 헤치고 가서 구조를 요청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데에 의견을 모으고, 그 사람에게 옷과 식료품을 몰아 주기로 한다. 제비뽑기를 해 동그라미가 그려진 쪽지를 뽑는 사람이 내려가는 것으로 했다.


맨 먼저 후배가 쪽지를 뽑아 펴보니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었다. 선배들은 그를 채근해 내려보냈고 후배는 천신만고 끝에 구조대를 데리고 왔는데, 이미 때는 늦어 모두 얼어 죽어 있었다. 선배들 모두는 편안한 얼굴로 손들을 꼭 잡고 죽었는데, 남아 있던 쪽지에는 모두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었다. 후배는 선배들에게 속았던 것이다.


<젊은 연인들>은 눈보라 속에서도 연인들처럼 다정하게, 후배를 살렸다는 기쁜 마음으로 죽어간 학생들을 기리는 노래라는 전설이다. 이 사연을 들으며 노래를 부르면 뭔가 코끝이 시큰해지기도 한다.


'길은 험하고 비바람 거세도 서로를 위하여 눈보라 속에도 손목을 꼭 잡고 따스한 온기를 나누리'


위 얘기는 전설(?)이지만 <젊은 연인들>에는 또 하나의 슬픈 실화가 숨어있다. 이 노래의 작곡자는 서울 공대 출신 작곡가 민병무였다. 그는 '한국판 타워링'으로 유명한 대연각 호텔 화재 사건 당시 작사자 방희준의 생일 파티를 위해 그 호텔에 있었고, 끝내 빠져나오지 못한다. 그에게는 민병호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민병호는 형의 노래를 세상에 알리기 위해 동창들을 포섭해 '서울대 트리오'의 이름으로 출전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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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의 전통 있는 그룹사운드 샌드페블스(대상을 탄 이들은 그 동아리 6기생들이었다)와 대학생들의 슬픈 전설이 서린 <젊은 연인들>에서 보듯, 제1회 대학가요제는 참가자의 성격이나 노래 장르 등 모든 면이 다양하게 뒤죽박죽 섞인 무대였다. 충남대생 이명우가 불러 은상을 받은 <가시리>는 고려가요 가시리와 청산별곡을 섞은 가사에 이스라엘 민요를 버무린 퓨전(?)이었고, 혜은이의 <당신은 모르실 거야>를 성가곡풍으로 편곡해서 불러서 수상을 한 팀도 있었다.


즉, 준 프로페셔널부터 동네 대학생 형들같은 아마추어들까지 총출동한, 뭔가 빠진 듯한 엉성해 보이고 제각각이다 못해 파편적이기까지 했던 대회였다. 하지만 그 어색한 느낌들은 뜻밖의 신선함으로 전화되었고, <대학가요제>는 공전의 히트를 치며 70년대 말 대한민국의 특기할만한 문화 현상으로 자리잡는다. 당시로서는 상당한 사회적 위상을 지닌 대학생들이 주역으로 나선 점, 대중음악계를 초토화시킨 대마초 파동 이후 대중들이 일종의 문화적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었던 시대적 타이밍, 대학생들 속에서 성장해 온 문화적 역량 등이 어우러진 일대 사건이었던 것이다.


방송이란 뭔가 하나가 '터지면' 벤치마킹이 이뤄지는 것이 상례인 바, 민영방송 <TBC>도 바야흐로 떠오른 황금어장을 놓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더구나 <TBC>는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창작곡 컨테스트를 진행해 본 다년간의 경험을 쌓고 있었고, 공영방송인 <MBC>처럼 점잖은 분들의 눈치를 볼 일이 적었다.


그래서 TBC가 주최한 <해변가요제>는 저마다의 공력을 뽐내던 대학가 밴드들, 그리고 대학생이 아닌 젊은이들까지도 대놓고 활개치고 놀 수 있는 무대가 되었다. 이렇듯 <대학가요제>와 <해변가요제>는 암울한 사회의 철벽 사이로 뚫렸던 일종의 숨구멍이면서 동시에 지금도 우리 귀에 쟁쟁한 가객들이 처음으로 그 용틀임을 선보인 등용문이 된다. (이에 대항하여 1979년 MBC는 <강변가요제>도 열기 시작한다)


당장 1978년 열린 <대학가요제>에는 지금 보아도 화려한 면면들이 등장한다. 서울 대표로 나와 가공할 성량을 과시하며 민요풍의 <돌고돌아가는 길>를 부른 단국대생의 이름은 노사연이었고, <탈춤>을 불러 은상을 받은 항공대학교의 내공 있는 밴드 <활주로> 멤버 가운데에는 털털한 목소리의 청년 배철수가 끼어 있었다. 심민경이라는 여학생이 <그때 그 사람>이라는 노래를 기가 막히게 불렀지만 너무 '프로 같다'고 수상에서 탈락하기도 했는데, 그 심민경은 후일의 '심수봉'이 된다. <해변가요제> 또한 경쟁적으로 '인물'들을 토해낸다. 홍서범이 이끄는 옥슨80이 <불놀이야>를 목이 터져라 부르짖었고, 송골매는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로 기염을 토했다.


"내가 말 없는 방랑자라면 이 세상에 돌이 되겠소."를 노래한 김학래와 임철우는 79년 대학가요제의 대상을 거머쥐었고, 그룹 휘버스는 "그대로 그렇게 떠나간다면 난 정말 어찌하라구"를 신나게 노래하면서 78년의 해변가요제를 수놓았다. 갑자기 한국 대중음악계는 '별들이 떼로 쏟아지는 해변'이 되어버렸고 기성 가수와는 또 다른 신선함을 발산하던 대학생들의 노래는 지금까지도 사람들이 흥얼거리는 추억의 명곡으로 아로새겨진다. 그러나 10.26의 총성으로 유신 시대가 막을 내리고 광주의 피바람과 함께 열린 1980년대, 대학가요제는 또 다른 변화를 맞는다.



77년의 것들을 감상해 보시라.



* 이 글은 서울문화재단 블로그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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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딴지일보 챙타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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