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기사 추천 기사 연재 기사 마빡 리스트






한국 관객 수 1330만 명. 많은 분들이 영화 <아바타>를 보았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그 영화를 보는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백인들의 아메리카 침략의 역사가 오버랩되었기 때문이다. <아바타>에서 인간을 백인으로, 나비족을 인디언으로 바꿔놓으면 그대로 딱 맞아떨어진다. 아메리카라는 미지의 풍요한 대자연과 그 속에서 자연에 순응해 사는 토착민들을 말살하고 약탈한 백인들의 행위가 우주라는 광활한 차원에서 벌어지는 것이 <아바타>이다. 이 영화는 백인들의 식민지 약탈전쟁의 축소판이다.


1.jpg


이런 영화에서 너무나 익숙한 구도가 있다. 그 토착민을 파괴하는 것도 인간(백인)이지만 그들을 구원하는 것도 인간(백인)이다. 최신 첨단무기로 밀려오는 인간에게 활을 든 나비족(인디언)은 돈키호테나 다름없다. 그들을 구할 수 있는 것은 네이티리를 사랑하는 해병대원 제이크 설리이다. 인간이 패배한 것은 나비족의 힘 때문이 아니라 나비족을 통해 인간성을 회복한 제이크와 과학자 그레이스 오거스틴이 결국 탐욕이 아니라 양심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인간(백인)의 탐욕은 항상 관용이라는 이름으로 피해자의 용서를 받는다. 패전한 인간은 나비족의 보복을 받는 대신 그들의 관용으로 지구로 철수한다. 그러니 인간의 판도라 행성 침략은 인간으로선 전혀 손해 볼 것이 없는 장사였다. 영화에는 나와있지 않지만, 인간은 다시 판도라에 갈 것이며 끝내 판도라 행성을 정복해 나비족을 말살하고 그 자원을 약탈하게 될 것이다. 인간의 탐욕을 꺾기에는 몇 사람의 양심은 너무나 미약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든다. 지난 몇 세기에 걸친 유럽의 식민지배 동안 제이크 설리처럼 피지배자들을 위해 치열하게 싸운 백인들이 얼마나 있었을까? 영화가 화려한 영상으로 관객을 압도해 판단력을 마비시켜 감춘 진실은 이렇다. 실제 역사에서 수많은 식민지의 독립은 각성된 인간(백인)의 자비에 의해서가 아니라 식민지 스스로의 강고한 투쟁으로 얻을 수 있었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나비족 투쟁의 공을 백인이 가로채 버린다.

 

콜럼버스가 도착하기 이전 아메리카 대륙에는 얼마나 많은 인디언이 살았을까? 그건 아무도 모른다. 카를로스 푸엔테스의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를 보면 중앙 멕시코 지역에만도 5500만이 살았다고 한다. 그 인구가 50년 후에는 절반 정도로 줄어들었고 1605년에는 100만 명이 되었다. 하워드 진의 <미국민중사>에서는 아메리카 전체에 약 1500만에서 2000만 명의 인디언이 살고 있었다고 기술되어 있다. 다른 책들도 대체로 2000만 내외가 살고 있었다고 기술한다. 북미에는 약 500만 명의 인디언이 살았다. 반면에 러셀 쏜톤은 그 숫자를 약 7000만으로 추정한다. 그 중 적어도 500만이 오늘날의 미국에 살았다. 그 수는 당시 우랄산맥 서쪽의 전 유럽의 인구보다 더 많았다.

 

2010년의 인구조사에 따르면 지금 미국에는 약 200만이 조금 넘는 인디언이 생존하고 있다. 19세기 말 인디언 학살이 극에 달했을 때는 멸종 위기인 25만 명 정도까지 줄어들었지만 한 세기 남짓 만에 200만 명 정도로 늘어난 것은 놀랄만한 일이다. 그들은 끈질긴 생명력을 발휘해 멸종의 위기를 넘겼다. 그러나 3억 명이 넘는 미국 인구 중 그들이 차지하는 비율은 1퍼센트도 채 되지 않는다.


2.png


백인들의 아메리카 정복 초기에 인디언이 대규모로 죽은 가장 큰 이유는 백인들이 묻혀온 장티푸스, 천연두, 홍역, 수두, 성홍열, 폐렴 같은 전염병이었다. 수만 년 동안 청정지역으로 남아 있었던 아메리카에 유럽인들이 가져온 전염병은 치명적인 결과를 낳았다. 전염병에 대한 면역체계가 없는 원주민들은 병에 걸리면 거의 모두 목숨을 잃었다. 중남미 인디언의 90% 이상이 이런 전염병으로 짧은 시간에 비운을 맞았다. 백인들은 심지어 일부러 천연두 균이 묻은 담요를 원주민들에게 주어 대량 살상을 자행했다.

 

예를 들어 1763년 펜실베이니아의 피트 요새에서 영국군을 지휘하던 앰허스트 장군이 “해충(인디언)”에게 천연두를 퍼뜨리라는 명령을 내렸고, 그의 부하인 부켓 대령이 인디언 마을에 감염된 담요를 던져 넣었다. 오늘날로 치면 생화학전을 했다. 그나마 남은 인디언들은 아메리카 전역에서 학살당했다. 백인들은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흔히 원주민들을 미개인, 야만인, 또는 인간 이하의 존재로 보았다. 북미 인디언들 역시 백인들이 묻혀온 전염병으로 급속히 줄어들었으며, 남은 인디언들은 학살당했다.

 

스페인은 카리브 해와 남미 식민지들에 주로 남자들을 보냈다. 그 결과 그곳에서는 백인과 인디언의 혼혈이 대규모로 이루어졌으며, 오늘날 백인 문명과 인디언 문명이 혼합된 독특한 문화를 낳았다. 남미 여러 나라에서는 인종적으로도 백인이나 인디언이 아닌 메스티조로 알려진 백인과 인디언 혼혈족이 다수를 차지한다. 예를 들어 파라과이에서는 전체 인구의 95퍼센트가 메스티조이며, 에콰도르는 65퍼센트, 콜롬비아는 58퍼센트를 차지한다. 반면에 아르헨티나는 97퍼센트가 백인이며, 우루과이는 88퍼센트, 브라질은 54퍼센트에 달한다. 순수 인디언이 인구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나라는 없다. 페루는 인구의 45퍼센트가 인디언이며 에콰도르에서는 인디언이 전체 인구의 25퍼센트를 차지한다(미국 CIA 사이트에 가면 나라별로 인구구성이 잘 정리되어 있다).

 

남미와는 달리 미국에서는 일찍부터 백인들이 가족 단위로 이주하면서 유럽의 사회제도를 그대로 식민지에 이식했다. 미국 백인들은 원주민들과는 단절된 그들 자신만의 사회를 건설했다. 그들에겐 인디언이 필요하지 않은 존재였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개척과 팽창에 방해가 되었다.

 

인디언은 인종학적으로 몽골계통에 속한다. 몽골족이 민족 대이동을 하면서 아시아와 유럽과 아메리카로 뿔뿔이 흩어졌다. 아마 한 2만 년 전쯤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오늘날 아메리카 인디언들과 우리의 아득한 조상들은 부모 형제자매였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약 1만 4000년 전에서 1만 6000년 전에 베링 해를 건너 아메리카로 가서 수천 년에 걸쳐 서서히 남미 끝까지 진출했다. 베링 해는 그 무렵에는 육지였거나 얕은 바다여서 쉽게 건너갈 수 있었다.

 

Bering_Sea_Location.png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간 인디언은 수만 년 동안 흩어져 살면서 다양한 종족과 언어와 문화를 발전시켰다. 오늘날의 북미 지역에만도 약 2000개의 서로 다른 언어가 존재했다. 미국은 광활한 만큼 여러 개의 인디언 문화권이 있었지만 대부분의 인디언 사회는 기본적으로 농업사회였다. 그들은 농사를 지으면서 사냥과 고기잡이와 채집으로 생계를 꾸려갔다. 남자와 여자의 관계도 유럽에서보다는 훨씬 더 평등했다. 부족에 따라서는 여성들이 집단의 주도권을 쥔 경우도 많았다. 대부분의 부족에서 결혼은 부족과 부족 사이의 결속을 다지는 중요한 일이었다. 결혼에서 신부가 될 여성은 배우자를 선택하는데 상당한 권리를 지니고 있었다. 여자가 이혼을 하려면 남자의 집을 떠나거나 그 집이 여자 것인 경우는 남편의 물건들을 밖으로 내놓으면 되었다.

 

북미 인디언은 대체로 부족 단위로 생활했다. 그러다가 17세기에 와서 백인 문명과 맞닥뜨렸다. 최신식 총과 대포로 무장한 백인들에게 칼과 활로 맞선 그들은 애초에 게임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더욱이 부족 간 느슨한 유대관계를 맺고 있었던 인디언들은 백인들과의 싸움에서 효과적으로 결집하지 못했다. 대부분의 경우 그들은 총과 포를 가진 백인들과 부족단위로 싸워야 했다. 경우에 따라서는 인디언과 백인 사이에 싸움이 벌어지면 그 인디언 부족과 적대 관계에 있는 인디언들이 백인과 협력해 그들을 협공하기까지 했다. 백인들은 인디언들이 부족 단위로 분열된 상태를 이용해 인디언들을 효과적으로 견제할 수 있었다.

 

1607년과 1620년에 남부와 북부에 각각 영국인들이 발을 디딘 이래 미국에는 유럽인들(대부분이 영국인들이다)이 빠른 속도로 정착하기 시작했다. 특히 17세기 후반에 물밀듯이 밀려들어서 1700년까지 미국 땅에는 25만 명가량의 백인들이 거주했으니 가히 폭발적인 증가가 아닐 수 없다.

 

이 시기에 이토록 많은 영국인들이 몰려든 것은 영국의 독특한 상속제도의 영향이 크다. 그 당시 영국은 한사상속제도를 취하고 있었다. 쉽게 말해 전 재산을 장자에게만 물려주었다. 대를 이어가며 부를 각 자녀에게 분할 세습하게 되면 그 부는 소규모로 분산되어 결과적으로 가문의 위세가 줄어들기 때문에 장자에게만 재산을 몰아줌으로써 가문의 세력을 계속 유지하려 한 것이다.

 

딸에게는 재산 상속권이나 소유권이 없었다. 그러므로 딸은 어떻게든 돈 있는 집안에 시집을 보내야 했다. 에밀리 브론테의 <워더링 하이츠>에서 캐더린이 목숨과 같은 히스클리프를 버리고 에드거 린튼과 결혼한 것도,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에서 딸부자인 빙리 부인이 이웃집에 부자 총각이 이사 온다는 소식에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것도 다 딸에게는 재산 상속권이 없기 때문이다. 딸의 행복을 위해서는 오로지 돈 많은 남자에게 시집을 보내야 했다.

 

한편, 샤롯 브론테의 소설 <제인 에어>에서 남자 주인공인 로체스터는 둘째 아들로 카리브 해의 돈 많은 집안의 딸과 결혼해 한 재산을 차지했다. 그 당시에는 결혼한 여자는 재산 소유권이 없어서 결혼을 하면 재산은 자동적으로 남편의 소유가 되었다. 게다가 때맞춰 형이 자식 없이 죽는 바람에 부모의 재산까지 상속받아 대저택을 소유하게 되었다. 그 아내는 미쳐 다락방에 갇혀 지내는 신세였다. 어쨌든 로체스터는 운이 좋았다.

 

결국 영국의 차남 이하의 남자들은 로체스터처럼 형이 자식도 없이 일찍 죽지 않는 한 영국에서는 희망이 없었으므로 이 시기에 아메리카 식민지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들이 그곳에서 원한 것은 토지였다. 그렇다 보니 백인들은 인디언의 땅을 빼앗거나 때로는 구입했다. 그러나 그 거래는 대부분 기만으로 가득 찬 강도짓과 다름없었다. 계약을 할 때면 흔히 원주민들에게 술을 먹여 판단력을 흐리게 하거나 글자를 모르는 그들에게 영어로 작성된 문서를 들이밀며 협박과 감언이설로 서명하게 했다. 그런 가운데 북아메리카 식민지에서는 원주민들과 백인들 사이에 크고 작은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인디언과 백인의 관계가 나빴던 것은 아니었다. 초기에는 인디언이 백인들에게 양식을 주거나 사냥법과 옥수수 재배법 등을 가르쳐주면서 정착에 많은 도움을 주었기 때문에 백인들은 가급적이면 인디언을 자극하지 않고 그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인디언의 적대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그들에게는 자멸과도 같은 일이었다. 그러나 인구가 급속히 늘어나면서 정착할 땅이 점점 더 많이 필요했으므로 충돌은 불가피했다.

 

백인 인구의 급속한 팽창으로 인해 인디언은 조상 대대로 내려온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 점점 내륙으로 내몰리게 되었다. 그에 따라 백인과 인디언의 관계가 빠른 속도로 악화되어 크고 작은 충돌이 늘어나고 적대적인 감정이 강화되었다. 백인들은 세력이 커지면서 인디언에게 영국식 법을 강요하고, 인디언 부족을 고의적으로 공격하는 일이 빈번해졌다. 초기의 충돌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필립왕의 전쟁’으로 알려진 전쟁이다.

 

3.jpg


매사추세츠 일대의 백인들은 그 지역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지닌 포카노케트 족의 추장인 마사소이트와 긴밀한 우호 관계를 맺으면서 그의 비호 아래 안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었다. 한때 죽을병이 든 마사소이트를 백인이 살려준 덕분이었다. 너새니얼 필브릭은 <메이플라워>라는 논픽션에서 “마사소이트는 뉴잉글랜드에 반세기의 평화를 가져온 자비롭고 현명한 지도자로 알려져 있지만 이것은 영국인의 관점에서 본 이야기다. 해당 지역 인디언에게는 부족의 터전을 헐값에 넘겨 사리사욕을 채운 악당일 뿐이다.”라고 평가한다.

 

백인들의 이주 초기 인디언과 백인들 사이에 벌어진 가장 대규모의 충돌이 바로 ‘필립왕의 전쟁’이다. 포카노케트 족 추장인 메타코메트(필립)의 이름을 따 그런 이름이 붙었다. 메타코메트는 마사소이트 추장의 둘째 아들로 젊은 시절에 인디언식 이름을 버리고 필립이라는 영국식 이름을 얻었으며, 그의 오만하고 당당한 태도 때문에 백인들이 필립왕이라는 별명을 붙였다.

 

마사소이트가 죽고 맏아들 왐수타(알렉산더)가 땅 매매문제로 플리머스 법원에 출두한 후 의문의 죽음을 맞게 되자 동생인 메타코메트(필립)는 백인들이 독살했다고 믿게 되었다. 1662년에 포카노케트 족의 새 추장이 된 필립은 형의 복수를 다짐하며 인디언 부족들을 규합했다. 그 사이 포카노케트 부족을 비롯한 다른 인디언 부족들과 백인들 사이에는 크고 작은 충돌이 계속되었으며, 특히 1670년대에는 그 충돌이 위험수위에 이르렀다.

 

드디어 1675년에 필립왕을 필두로 한 인디언 연합 부대가 백인부락을 공격하면서 전쟁이 시작되어 이듬해인 1676년 필립이 사망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인디언 부족들은 이 전쟁에서 용감하게 싸웠지만 우월한 무력을 지닌 백인들을 이길 수는 없었다. 심지어 모호크 족 인디언 부족은 백인에 협력했다. 그들은 메타코메트를 죽이고는 그 머리를 잘라 백인들에게 가져다주었다. 그가 죽자 인디언 연맹은 와해되었다. 이 전쟁으로 백인들과 인디언은 서로 무참한 살육전을 벌여 수천 명의 인명 피해를 내고 결국 백인의 승리로 끝났다. 이 전쟁으로 미국 땅에서 인디언과 백인의 우호 관계는 사실상 끝이 났다. 이제 남은 것은 투쟁뿐이었다. 토지에 대한 백인의 끝없는 욕망과 청교도의 선민의식이 빚어낸 비극이었다.








지난 기사


콜럼버스의 두 얼굴, 미국의 두 얼굴

먹기 위해 찬양하는 백인 정복자

영국신랑과 포카혼타스

신의 나라를 원했던 청교도들





naemaeumdaero


편집: 딴지일보 cocoa

Profi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