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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46년, 필리핀 정치의 많은 것들이 변화한다. 대일 게릴라전은 농민들을 조직화했고, 정치화했다. CLO(committee on labor organization)이 결성됐고, Hukbalahap의 게릴라 리더들과 농민 노동자의 참여 속에 PKM(Pambansang Kaisahan ng Magbubukid) 농민동맹 정치조직이 만들어진다. 이 조직은 게릴라전을 통해 조직된 후에는 일본 식민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이 커진다.


기존 정치권은 친일 부역자 논란으로 분열되었다. 1945년의 정부는 공식적으로 친일 부역자를 배제하고 이들의 정치적‧사회적 영향력을 거세한다는 방침을 세운다. 그러나 대부분의 정부 관료들이 친일 부역자들이었으며 맥아더 또한 이들에 대한 숙청보다는 미국의 지배권 확립에만 관심을 두었다. 이 과정 속에서 친일조사와 재판은 무력화되었다.


이에 반발해 농민들과 일본에 지배에 가장 큰 피해를 본 중산계급층이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등장한다. CLO, PKM를 주축으로 광범위한 정치조직의 연대인 Democratic Alliance가 결성된다. DA는,


1. 조건 없는 독립을 지지
2. 민주주의를 지지하며 파시즘에 맞서 싸움
3. 친일부역자들에 반대
4. 사회 안정과 농업의 재편
5. 산업화



를 과제로 삼았다.



친일파 vs 공산주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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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뉴엘 로하스(Manuel Roxas)는 일본 통치 하에서 변절하여, 정부수반인 호세 라우렐(jose laurel)의 제1 자문위원으로 활동했다. 미군의 필리핀 재점령 이후에는 재빠르게 미군으로 넘어가서 군사지휘관으로 활동한다. 세르지오 오스메나(Sergio Osmena)의 국민당(Nacionalista Party)에 소속되었던 그는, 미국과 맥아더의 비호 속에서 빠르게 성장한다.


미국의 정치인이자 필리핀 주재 고등판무관이었던 Paul V. Mcnutt은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말한다.


“내가 아는 한 로하스만큼이나 만족스러운 딜을 할 수 있는 공무원은 없습니다.”


마뉴엘 로하스는 1946년 대선 직전, 국민당에 'liberal wing'을 붙여 분당시킨 후 대선 후보로 나선다. 세르지오 오스메나가 그를 친일 부역자로 매도한 건 당연했다. 


“그가 당선이 된다면 미국은 친일 부역자가 대통령이 된 필리핀에 원조자금을 보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Ncnutt은 이를 부정한다.


“우린 필리핀인들의 선택을 믿으며 어떤 사람이 대통령이 되어도 필리핀 원조자금을 제공할 것입니다.”


1946년 미국은 이미 마뉴엘 로하스를 초대 대통령으로 생각하고 있었고, 그를 공식적이진 않더라도 뒤로 지원하고 있었다.


DA는 세르지오 오스메나를 지원하기로 결정한다. 마뉴엘 로하스는 그들에 있어서는 친일 부역자였고 지주들과 연합하는 사람이었다. DA는 Hukbalahap의 지휘관들을 포함한 노동과 농민의 조직이었으며 이를 지지층으로 가지고 있었다. 친일 지주와 농민 모두 서로를 위협으로 느끼고 있는 상황에서 로하스의 반대편으로서의 오스메나가 그들에게 대안이 된 건 당연한 일이었다.


DA를 비롯한 민중들의 정치화는 미국에겐 과거의 친일 부역자들보다 훨씬 더 큰 위협으로 보였다. DA는 무장투쟁을 준비하는 공산주의자 취급을 받았고 세르지오 오스메나는 그들과의 접점을 가진 못 믿을 만한 인물이었다.


미국의 복심이 마뉴엘 로하스에 있다는 것이 드러나자, 많은 인물들이 마뉴엘 로하스를 중심으로 결집한다. 에밀리오 아기날도를 비롯한 수많은 친일 부역자 정치인들은 마뉴엘 로하스를 통해서 1946년 이후 정치적으로 부활한다.


1946년 대선에서 로하스는 53%의 지지를 받고 대통령에 당선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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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에서 오스메나를 지원한 DA는 의회에서 단지 6%의 지지를 얻었다. 대선 결과는 명확했다. 오스메나의 친일 부역자 청산론은 지지를 받지 못했고, 노동자-농민의 새로운 정치세력화는 성공적이지 못했으며, 1941년의 미국 식민지 의회가 재현되었다. 그중 친일파로 변절한 이들은 국민당-자유당(Nacionalista Party-liberal wing)에 있고, 그렇지 않았던 이들은 국민당 보수당(Nacionalista Party)에 있었을 뿐이다.


로하스는 철저하게 친미 식민지 사고로 필리핀을 복구하려고 했다. 다음은 당선 수주 후에 그가 미국에서 한 연설의 일부다.


“필리핀인들은 지정학적인 측면을 빼면 동양인이 아닙니다. 우리는 종교와 문화 이념과 경제에 이르기까지 서구사회의 일원입니다. 물론 우리의 피부색은 갈색이지만 우리의 정신은, 그리고 심장은 거의 여러분의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서구와 동양 사이에 있는 이념적 다리에서 우리는 서구에 남길 원합니다. 여러분은 우리들 속 있는 정치경제적 구조의 주인공입니다.”


그는 또한 “고향을 개발할 수 있는 것은 미국 자본과 사업가를 유치하는 뿐”이라고 선언했으며, 미국의 극동 아시아 정책에 대해서는 “미국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당연히 미국의 이익이 우선시 된 식민지 경제구조가 다시 고착화 된다.


로하스 앞에 놓인 필리핀의 당면과제는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필리핀 경제의 복구와 개발, 두 번째는 정치적으로 내전 직전까지 가게 된 Hukbalahap 농민 게릴라들을 진정시키는 일이었다.


로하스는 미 정부에 2억 2천 5백만 불의 원조와 10억불의 저리의 차관을 요청했다. 그러나 미 의회에는 오직 7천 5백만 불의 긴급차관만을 약속했고, 이후 2천 5백만 불로 줄었다. 그것도 10개월 간의 요청 끝에 천만 불만을 받을 수 있었다. 미국의 원조를 통해 경제를 복구하려던 그의 계획은 시작부터 꼬여가고 있었다.



필리핀 무역법


1945년 필리핀이 독립하기 전, 미 의회에서 필리핀 무역법(Bell Trade Act. Philippine Trade Act)이 통과된다. 법률적으로 1946년 독립과 함께 자동적으로 파기되는, 미국과 필리핀의 자유무역협정이었다.


주요한 내용은 이와 같다.


1. 관세가 없는 자유무역을 1954년까지 유지하고 향후 20년 간 조정기간을 둔다.
2. 달러와 페소화의 환율을 1:2로 고정하고 미국의회의 승인 없이 변경하지 않는다.
3. 미국상품의 수입을 제한하지 않는다. (하지만 필리핀의 농산품에 대해서는 쿼터가 있었다)
4. 미국인의 Parity Right(필리핀에서 투자, 세금 등 모든 방면에서 필리핀인과 동일한 권리)를 보장한다.



이 협정에 대해선 1946년 필리핀 독립 후 로하스 정부에서 다시 논의가 이루어진다. 법률적으로 이 협정은 필리핀 의회에서 다시 비준될 필요가 있었고, 정상적인 국가의 지도자라면 그 과정에서 수정과 협상을 요구해야 했다. 하지만 뼛속까지 친미주의자에 미국인 사업가와 정치인들을 자신의 후원자로 두고 있던 로하스는 이 협정을 그대로 비준하고자 했다.


이 협정이 비준된다면 필리핀이 미국의 경제적 식민지에서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했다. 환율이 고정되고 수입을 제한하지 못하면 필리핀은 미국의 막대한 채무에 묶일 것이고, 미국인의 투자가 무제한으로 가능해지면 미국인이 필리핀의 모든 산업과 토지를 소유할 것이 당연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미국은 재협상을 생각하고 있었다. 자유무역 협정만으로는 충분하다는 판단이었다. 그러나 필리핀 정부는 이를 협상할 의지도 능력도 없었다.


법률적으로 Parity Right은 헌법적 조항으로 필리핀 상원과 하원 3/4의 지지를 필요로 했다. 하지만 로하스의 국민당-자유당(Nacionalista Party-liberal wing)은 간신히 과반을 넘기는 의석을 가지고 있었다. DA와 국민당(Nacionalista Party)은 격렬히 반대하였다. 로하스는 먼저 3명의 상원의원과 8명의 하원의원(DA 소속의 하원의원 7명을 전부 포함한)을 허위사실 유포와 테러혐의로 구속한다. DA가 농민과 노동자연맹의 정치정당이고, 아직 Hukbalahap가 무장을 해제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감안할 때, 이는 정치적으로 미친 짓이었다.


로하스는 정부사업과 후원회를 통해 국민당 소속의 의원들을 매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원에 한 석이 부족했는데, 총 원수에서 DA소속 7명을 제외함으로서 3/4를 맞추는, ‘필리핀 식 사사오입’으로 이를 통과시킨다. Parity Right 조항은 마지막으로 국민투표만이 남아 있었지만, 정부 권력을 동원한 광범위한 대중운동을 통해 필리핀 민중들이 스스로를 노예로 만드는 조항에 찬성하게 만든다.


그로부터 3일 후에 필리핀과 미국 간에 미군 군사기지 임차 협정이 맺어진다. 기지 23곳을 99년 동안 무상으로 빌린 이 조항은, 심지어 99년이 지난 후에 다시 빌리는 것도 가능하게 했다. 조약에 따라 미군은 필리핀에 대규모 군을 주둔시켰다. 당연하게도 주둔지 조약에 따라 미군의 범죄는 필리핀 당국이 기소조차 하지 못했다. 방위조약에 따른 방위비 또한 필리핀 정부가 일부 분담했다.


그 이전에 DA의 주도로 Hukbalahap의 무장해제를 위한 협상이 있었다. 로하스의 친정부 민병대와 Hukbalahap의 충돌이 계속되고 있었는데, 이는 주로 로하스의 친정부 민병대의 농민에 대한 무차별 테러행위로 이어졌다. 필리핀 사를 가장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 중 하나가 ‘필리핀 초기의 내전이 공산주의자에 의한 내전’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Hukbalahap는 공산주의자도 아니었고 내전 시작에 책임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무장해제를 최후통첩한 후 전쟁을 선포한 것은 로하스였고, 애초에 농민이 무장해제를 하지 않았던 것도 그가 결성한 친정부 민병대의 위협 때문이었다.


Hukbalahap가 8월 17일 요구한 무장 해제를 위한 협상조건을 보자.


1. 정부는 모든 시민들이 등록된 총기를 소유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음을 인정한다.
2. 경찰을 제외한 모든 등록되지 않는 총기를 가진 무장집단은 총기를 반납하고 해산한다.
3. 평화와 질서를 회복할 동안 이를 보호할 수 있는 치안대를 결성한다.
4. Hukbalahap의 반(反)일본 게릴라 활동에 대한 모든 기소를 철회한다.
5. 반(反)농민적인 경찰 관료를 해임하고 농민이 수긍할 수 있는 인물로 대체한다.
6. 부당하게 체포된 DA의원들을 복귀시킨다.
7. 정부는 체포, 고문, 납치로부터 농민을 보호하겠다고 보장한다.
8. 소작분배법을 정확히 지킨다.



대부분의 주장은 농민 자신의 생존을 위한 주장이었다. 상식 있는 정부라면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는 요구였다. 그러나 정부는 먼저 무장해제할 것을 주장했고, 각지에 치안을 위한 군을 주둔시키겠다고 반대 제안을 한다. Hukbalahap와 PKM은 먼저 총기를 등록하는 등의 전향적 태도를 보였으나 요구는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24일 재협상에 나서기로 약속한다. 그러나 이 약속은 22일 로하스 정부의 무장 경찰대가 Hukbalahap의 본거지를 기습공격해 대규모 학살을 시작함으로서 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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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내전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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