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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의 연세는 고희를 훌쩍 넘긴 일흔 다섯 살. 몰락한 대갓집의 고명딸로 태어나 식민지 시절과 전쟁을 겪으면서 가문을 이으려고 기를 썼던 류의 인물과는 하등 연관이 없고 김밥 팔아서 대학에 몇 억 기증해 신문에 난 위인도 아니시지. 좀 특이한 점이 있다면 전직 점쟁이이시며 빨간 깃발 집 앞에 매놓긴 했지만 그 누구도 찾아와 보지않는 분이라는 거. 왜? 이 할머니의 처지가 스스로 돌팔이 점쟁이임을 입증하고 있었으므로.


내가 이 분을 찾게 된 건 할머니의 단골 은행원으로부터 할머니가 누구한테인가 말도 못하게 얻어맞고 얼마 안 되는 재산이나마 고스란히 뜯김을 당하고 있다는 제보를 들었기 때문이야. 핸드폰 카메라로 찍어 보내 준 할머니의 몰골은 가히 광주항쟁 사진전을 방불케 했어. 어떻게 줘 터졌는지 팬더곰 무늬 같은 멍자국이 얼굴을 뒤덮었더라고. 오죽하면 방송 제목이 '피멍 할머니'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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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예의지국에서 노령의 할머니를 그 지경으로 두들겨 패버린 흉악한 남정네가 누군가 낯짝이나 보자 했는데 비슷한 또래의 노인정 할배가 아니라 아들 뻘도 둘째나 셋째 쯤 되는 연배의 40대 남자더라고. 할머니 말로는 점을 보러 왔다가 오갈 데 없다고 해서 들여놨는데 그 뒤로 돈을 요구하고 말 안 들으면 주먹과 발길질을 고루 사용하더라는 거야. 그래서 구속까지 되었는데 어떻게 된 참인지 풀려나서 또 돈을 뜯고 주먹을 휘두르고 있다고 했지.


근데 은행원 말로는 할머니가 멀쩡한 정신에는 그 나쁜 남자 잡아가 달라 신고해달라 하다가도 술을 먹으면 그 남자가 좋다고 졸졸 따라다닌다는 거야. 술 먹은 뒤에 그 인성이 천지개벽으로 달라지는 사람 한두 번 본 것 아니니까 으레 그러려니 했어. 술을 안먹었을 때 촬영 동의를 받아 놓고 구조 요청 진술을 확보해 놓으면 술 먹고 뭔 소리를 하든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된다는 게 변호사의 자문이었거든.


할머니를 처음 만났을 때 할머니는 눈물을 글썽이며 우리의 방문을 고마워했어. 저 나쁜 놈이 또 와서 자기를 때리고 돈을 뜯어갈 거라면서 녀석을 잡아가 달라고 손을 꼬옥 잡는 거야. 죽 끓듯 한다는 변덕을 우려하자 할머니는 각서라도 쓰겠다고 덤볐어. 지금까진 인생이 불쌍해서 봐줬지만 더 이상은 그 남자를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지. 각서까지 쓰고 새끼 손가락 걸고 약속까지 한 뒤에야 할머니는 마음이 놓였나 봐. 느닷없이 내 옷이 허름하다며 옷을 사 주겠다며 시장으로 가자고 잡아 끄는 걸 사양하느라 진땀 꽤나 흘렸네. 그리고 당신 아들 하라며 뽀뽀까지 해오는데 안쓰러움과 떨떠름함이 범벅이 되어 한동안 온몸이 굳어지더라니까.


아마 오갈 데 없었던 알콜 중독자 녀석도 처음 점 보러 왔을 때 이런 환대를 받았으리라 짐작 돼. 세 번 결혼을 했다지만 자식과 인연 없이 수십년을 살았던 할머니의 외로움은 일흔 중반에 접어든 노안을 더욱 어둡게 했고, 아들뻘 되는 무뢰배는 이걸 거침없이 이용해서 할머니를 '아낌없이 주는 나무'로 만들어 버린 거야. 나는 할머니 밖에 없수 하면서 아양을 떨기도 하고 여의치 않으면 가차없이 도끼를 들어 그 나무를 피멍이 들도록 내려치면서 말이지.


이제 할머니가 정신을 가다듬으셨으니 멋모르고 나타나는 놈을 잡기만 하면 된다고 맘을 놓고 있었는데 어느 날 술에 완전히 잠겨버린 듯 엉금엉금 기어다니는 할머니를 부축하러 갔던 조연출이 사색이 되어서 돌아왔어.


"할머니가 이상해요. 우리보고 가래요. 남자한테 데려다 달래요. 보고 싶대요."


무시기? 보고 싶어? 나는 할머니를 붙잡고 물었어.


"와 이랍니까 할매."


"보기 싫어. 가. 만수(방송 때 남자의 이름으로 쓴 가명) 오라 캐. 만수 나쁜 넘 아이다. 니 가 잡아갈라 카재? 가 삐(가 버려), 씨발놈아 가 삐."


옆에 있는 조연출의 표정은 손가락으로 쿡 찌르면 으앙하고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고 내 얼굴도 다르지 않았을 거야. 뭐 저런 할망구가 다 있지? 알고 보니 경찰에 잡혀갔을 때 할머니는 경찰서에 복숭아 뇌물을 줘 가며 석방 탄원에 나섰고(자기가 고발해서 잡혀갔음에도), 검찰에 넘어갔을 때는 수십 킬로 떨어진 검찰청에 열두 번도 더 다녀갔었다는 게야. 그 남자를 풀어 달라고.


그 남자가 나타나 할머니 집에 똬리를 튼 지 1년 만에 할머니의 전 재산은 바람과 함께 날아가서 산산이 부서진 가루가 됐어. 녀석은 할머니의 마지막 남은 집문서까지 노리고 있었지. 할머니가 조금이라도 망설일라치면 가차 없는 주먹이 날아갔고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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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가 너무 어처구니없이 돈을 뺏기는 걸 보고 은행 남자 직원이 남자를 두들겨 패주려고도 했고 주위 사람들도 도와주려고 손을 내밀어 봤다지만, 할머니가 선보이는 저 가공할 변덕 신공에 진저리를 치고, "나 나라(냅둬라) 저래 살다 죽구로"를 합창하고 있었어.


배신감으로 따지면 나도 거기에 합류하고 싶은 맘이 백두산 천지였지만 일이 웬수지. 대체 왜 저러실까 정신과 의사한테 여쭤 봤더니 이런 말씀을 하시네.


"양가감정이란 게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나 사물에 대해 정반대에 가까운 호오의 감정을 동시에 지니는 것인데요. 독거노인인데다 무속인 특유의 외로움에다 판단력의 저하 등으로 인해서 할머니는 양가감정의 포로가 된 걸로 보입니다. 이성적으로는 그 존재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그것이 사라진다고 하면 견딜 수가 없는 거죠. 남자는 이걸 철저히 이용하고 있는 거구요."


양가감정, 그거 사람 잡는 거더군. 본인 뿐 아니라 주위 사람들까지 바보로 만들어. 문제의 '나쁜 남자' 장만수(가명)가 보석 취소로 다시 수배되어서 경찰의 포위망 안에 들었을 때 할머니는 녀석에게 위기를 알리려고 우리의 감시를 뚫고 탈출을 감행했어. 그러나 다행히도(슬프게도?) 만수가 체포된 다음에는 새벽까지 경찰서 앞을 서성이며 그 남자를 석방해 달라고 1인시위(?)를 벌이는 게야. 할머니에게 다가서려다 장만수를 보러 갔어. 녀석이 뭐라고 하는지 듣고 싶어 좀이 쑤실 지경이었거든.


우리가 찍은 모든 걸 보여 줬어. 녀석이 할머니 지갑에서 돈을 채가는 거부터, 은행에서 돈 수백만 원을 찾아 제 주머니에 넣는 것까지. ‘네가 아무리 망나니와 들병이의 자식이라고 하더라도 이런 생생한 그림 앞에서는 죄송하다고 고개를 숙이리라’는 나름의 의기양양함도 드러내면서 말이지. 근데 이 녀석 말하는 거 봐라.


"이거 다 내 돈이에요."


"아니 근데 왜 뺏어가요? 왜 할머니 통장에서 돈을 빼요?"


"맡겨 놨던 거예요. 할머니한테 물어봐요."


아마 그 문답 과정에서 녀석은 "할머니한테 물어 봐요"라는 말을 마흔 일곱 번은 넘게 했을 거야. 실실 웃으면서 때로는 큰 소리를 치면서, 할머니를 자신의 증인으로 신청하고 있었어. 그건 할머니의 충성도(?)에 대한 야비한 확신이었어. 얼굴이 팬더가 되든 통장 잔고가 마이너스가 되든 할머니는 자신을 편들 것이라는 능글맞은 믿음의 고백이었어. 그리고 너희가 아무리 발악을 해 봐야 할머니는 자기 손바닥에서 놀리라는 배짱이었어.


"왜 그렇게 때렸어요?"


"할머니한테 물어봐요. 키득."


"당신, 집까지 명의이전 하려 했다면서?"


"할머니한테 물어봐요 자기가 해 준다고 그랬지. 키득"


훗날 녹음실에서 기술감독이 나한테 그랬어. "너 저때 참느라고 몸에 사리 많이 생겼겠다." 글쎄, 사리가 그런 원리로 생긴다는 건 첨 들어봤지만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난 매일 아침 화장실에서 사리를 토해 내고 있을지도 모르겠어. 빨리 송치하라며 죄 있으면 형 받고 나오겠다며 태연히 호송차에 오르는 녀석의 뒤통수 한 번 갈겨주지 못한 걸 생각하면 지금도 입 안에 오색찬란한 사리가 괼 거 같다고.


녀석은 할머니의 약한 고리를 그악스럽게 파고들었고 할머니의 영혼의 절반 이상을 손아귀에 넣어 잔인할 만큼 철저하게 이용하고 있었어. 할머니도 그걸 알고 있었어. 때로는 적극적으로 경찰에 신고도 해 봤고 우리 앞에서는 눈물도 흘리면서 도움을 청했어.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그 남자가 사라지는 걸 견딜 수 없어 했고, 결국 녀석이 쳐 놓은 거미줄에 살포시 내려앉는 파리가 되었지. 불을 향해 뛰어드는 불나비가 되고 말았던 거야. "할머니에게 물어 봐요"라고 느물거리는 녀석의 질문에 "만수 말이 맞십니더"하고 맞장구치는 가관을 연출하면서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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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할머니의 복장 터지는 모습을 편집하면서 나는 점점 할머니에게 동화되는 느낌이 들었어. 찝찝함을 감출 수 없었지. 할머니처럼 만수에게 애정을 느낀다는 엽기가 아니라, 이 할머니의 모습에서 낯익은 나의 발냄새가 스산하게 풍겨나더라는 얘기야. 또 나를 포함해서 아주 정상적으로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선남선녀들의 체취도 묻어났고. 무슨 말이냐고?


지금 정권, 그리고 정권과 화음이 맞는 교육 관료들이 펼치는 무한경쟁의 시대와의 불화를 외치면서도, 이성적으로 생각할 때 원정출산으로 미국 땅에서 태어나서 한 학기 수백만 원짜리 키드 칼리지를 다니고 외국인 친구도 수십 명씩 되는 아이와 내 아이가 공정한 경쟁을 한다는 건 가당치 않은 일이라는 걸 분명히 알면서도 그 경쟁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잖아.


좀 넓히면 우리 동네가 뉴타운이 지정되면 결국 돈 버는 넘들은 따로 있다고 한탄을 하면서도, 다 알고 있으면서도 뉴타운을 외친 사람들에게 표를 줬잖아. 서민들 살기 어렵다고 비분강개하며 소주잔 들이붓는 선수는 많은데, 그 선수들 악착같이 부자들 대못 뽑아주는 정당을 바위처럼 지지하잖아. 어때? 할머니보다 나은 게 있을까? 할머니를 향해 혀를 찰 수 있을까?


어떤 인터넷 글에서 우리 국민들은 다 부자로 살 꿈을 꾸고 있기 때문에 부자를 공격하는 진보정당이 표를 못 얻는다는 걸 본 적이 있는데, 그 꿈이 할머니가 언젠가 나에게 얘기했던 꿈, "만수가 내 때리지만 않고 그냥 오순도순 살면 안 좋나?"라는 그 가련한 실현 가망성 제로의 꿈과 어떤 차이가 있을지 모르겠어. 빤히 보이는 만수의 수작을 할머니라고 모르는 게 아니었어. 우리가 아무리 부자의 꿈을 꾸더라도 사실 로또 외에는 길이 없다는 걸 잘 아는 것처럼 말이야. 오순도순 만수와 사는 꿈이란 건 어쩌면 '부지런히 일하고 저축해서 부자 되는 길'과 비슷한 망상인 것처럼 말이야.


한 대 쥐어박지 못해서 억울해 미칠 지경이었던 장만수(가명)라는 녀석에게도 이제는 연민이 느껴져. 그놈보다 천 배는 더 힘세고 얄미운 장만수가 지천인데, 당하는 사람이 수천만인데. 할머니 하나한테 그 정도 한 거 가지고, 할머니 하나 바보 만든 거 가지고 뭘 그리 분노했을까.




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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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딴지일보 챙타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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