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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하마드 알리가 세상을 떴습니다. 향년 74세, 팬의 한 사람으로 그의 명복을 진심으로 빕니다. 어렸을 때 무척이나 친근했던 사람들이 하나씩 떠나가는 것을 보니 세월의 무게가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고, 허무하기도 하네요. 불꽃처럼 살다간 그의 인생, 그의 수다스러운 ‘떠벌이’를 들을 수 없다고 생각하면 슬퍼지기도 합니다.



The Great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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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스포츠계에서 무하마드 알리만큼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이 있을까? 경제적인 효과 측면에서나 청소년에게 미친 영향에서는 불세출의 농구 스타 ‘마이클 조던’ 정도만이 알리의 비교 대상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정치적 혹은 종교적 영향을 포함해 전 세계 전반에 끼친 영향을 고려해 보면, 마이클 조던 조차도 무하마드 알리와는 비교할 수 없다.


그의 통산 전적은 56승 37KO 5패다. 조지 포먼처럼 KO 비율(76승 68KO)이 높은 것도 아니고, 메이웨더처럼 진 경기가 없는 것도 아니고, ‘5패’란 숫자에서 볼 수 있듯 성적만 보면 그냥 잘하는 선수다. 마빈 헤글러처럼 모든 패배나 무승부 경기에서 이론의 여지가 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의 승리 중에 판정이 잘못 된 게 아닌가 싶은 경기도 있다.


하지만 그는 복싱 역사상, 아니, 세계 스포츠 역사에서 가장 훌륭한 선수로 기억된다. 사람들이 링 위에서 보여준 복싱 기술 뿐 아니라 링 밖에서 그가 추구했던 가치를 높게 평가하기 때문이다.


그의 별명은 ‘The Greatest’다. 그는 지난 100년간 세계에 가장 널리 알려진 운동선수이며, <Sports Illustrated>에서 ‘세기의 스포츠맨(sportsman of the Century)’으로, <BBC>에선 ‘세기의 스포츠 인물(Sports Personality of the Century)’에 선정되기도 했다.


그는 ‘The Greatest’답게 당대의 내로라하는 선수들과 경기를 가졌다(그의 시절에는 소니 리스톤, 조 프레이져, 조지 포먼, 켄 노튼 등과 같은 괴수들이 많았다. 49승 무패를 기록하고서도 저평가 받는 록키 마르시아노를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당대 최고의 주먹이었던 세계 챔피언 소니 리스톤과의 2번의 대결, 클린치도 안하고 다운을 당하더라도 오직 전진 공격만 하는 ‘조 프레이저’와 목숨을 건 3번의 대결, 그리고 정치적인 이유로 빼앗겼던 헤비급 챔피언 벨트를 찾아온, 헤비급 역사상 최강 주먹 괴수 ‘조지 포먼’과의 대결. 그는 알리는 당대의 괴수들 사이에서 1964년, 1974년, 그리고 1978년, 무려 3번이나 세계 챔피언을 차지한다.


그의 입담은 경기 전부터 경기를 후끈 달아오르게 만들었고, 이긴 후 가지는 인터뷰 역시 본 경기보다 더 많은 이야기 거리를 만들어냈다, 그의 화려한 입담이 어우려져 괴수들과의 대결은 항상 전 세계적으로 엄청난 이슈가 되었다. 당시 눈부시게 발전하던 컬러 TV의 보급과 방송 기술의 발전으로 그의 경기는 전 세계에 생중계 되었다. 그의 경기를 보기 위해 집집마다 TV를 샀고, 이는 TV보급률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의 존재가 과학 기술의 발전을 촉진시켰다고 하면 오버일까?



케이셔스 클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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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셔스 클레이(Cassius Clay)’ 시절의 알리. 잘생겼다.

예전에 KBS 권투 해설 위원이었던 오일룡씨가 ‘알리는 흑인 치고 잘 생겼다’는 말을 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하면 큰일 날 인종 차별적인 말이었다. 당시 우리나라에서 흑인 이미지가 이 정도였다.


무하마드 알리, 그러니까 ‘케이셔스 클레이’는 1942년 1월 17일 미국의 켄터키 주 루이스빌에서 태어났다. 일반적인 복싱 선수들이 가난한 환경에서 배고픔을 이기기 위해 복싱을 했던 것과는 달리 클레이의 집은 중산층이었다.


케이셔스 클레이는 12살 때부터 복싱을 시작했다. 어렸을 때부터 재능이 있었는지 켄터키 주의 골든 글러브를 6번 차지하며, 1960년엔 로마 올림픽 미국 대표로 나가기도 한다. 그는 라이트 헤비급에서 금메달을 목에 건다. 그의 아마추어 총 전적은 100승 5패. 그리고 1960년 10월, 클레이는 프로로 데뷔한다.


프로 첫 데뷔전은 6회 판정으로 이겼지만, 그 후의 거의 모든 경기는 KO로 장식한다. 그의 현란한 발놀림은 플라이급의 선수들을 떠오르게 했으며(록키에서 나왔던 아폴론의 모습이라 보면 된다. 아폴론이 알리를 모델로 하기도 했다), 타고난 말빨은 사람들이 그를 더욱 더 주목하게 했다. 물론 챔피언이 되기 전 그의 지나친 언행이 사람들에게 좋은 이미지를 줬던 건 아니다.


세계 챔피언에 도전하기 직전의 전적은 19승 무패 15KO. 세계 타이틀에 도전하기 전에 한 경기 중에는 어려운 경기도 많았다. 소니 뱅크스나 헨리 쿠퍼와의 경기에서는 다운을 당하기도 했다. 특히 더그 존스와의 경기는 특히 힘들었는데, 당시 동영상을 보면 클레이에게 심판 전원 일치 판정승이 내려지자, 관중석으로부터 ‘우…’ 하고 야유하는 소리가 나온다.



알리에게 몹시 힘든 경기였던 존스와의 경기.

(44분 정도에 야유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경기장이 있던 곳이 존스의 고향 경기장이어서 그런 것도 있지만, 존스의 손이 올라갔어도 별로 할 말이 없는 게임이었다. 세계 타이틀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 경기는 나중에 ‘Fight of the Year’에 선정된다.


이후 있었던 쿠퍼와의 경기에서도 다운을 당하고 공 소리가 그를 살리기도 했지만, 결국 KO로 어렵게 이긴다.



쿠퍼와의 재대결에서 다운을 당하지만 KO로 승리한다.


세계 랭킹 1위가 된 클레이는 당대 최고의 강타자 챔피언 소니 리스톤이 가진 세계 타이틀에 도전하게 됐다.



세계 챔피언 소니 리스톤과의 경기


리스톤은 35승 1패를 기록 중이었다. 그는 알리와의 경기 이전 했던 14경기 중 13번을 KO로 장식했으며, 특히 그 직전 3경기를 모조리 1회 KO로 승리한 상태였다. ‘승승장구’라는 말이 부족할 지경이었다. 과거 범죄 집단에 있어 인상도 험악했던 그는 무서운 이미지로 상대방을 압도하면서 경기를 지배하는 스타일이었다.


만개하는 리스톤의 기량과 달리, 클레이는 존스와 쿠퍼의 경기에서 이기기는 했지만, 실망스러운 경기를 보여주고 있었다. 때문에 승리에 가장 민감하면서 가장 잘 예측한다고 알려진 도박사들은 7-1 정도로 리스톤의 승리를 점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클레이는 경기 전 리스톤을 놀리기 시작했다. “못생긴 큰 곰”, “리스톤에게는 곰의 향기가 난다.”고 약을 올리며, “나는 리스톤을 이긴 후 그를 동물원에 기증할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그는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쏘겠다(float like a butterfly and sting like a bee).”


라는 희대의 명언을 남긴다. 이 말은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 “너의 주먹은 네가 볼 수 없는 것을 때릴 수 없을 것이다”와 같은 말을 하며 자신의 스피드를 과장하기도 했다.


프로 레슬링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하는 클레이의 도발적인 입담은 결과를 알 수 없는 경기 전 극도의 긴장 상태에서 상대방을 자극시켰다. 당연히 경기를 주목하고 있는 사람들은 그의 인터뷰 내용에 집중했다.


그는 언론을 잘 이용했다. 복싱 경기와 상관없는 사회적 문제(인종 차별, 종교적 문제, 베트남 전 참전 반대와 징집 반대 등)에 대해 거리낌 없이 자유롭게 말을 했다. 조이스 캐롤 오티스는 “알리는 스포츠 계에서 자신의 표현으로 대중적 평판을 결정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운동 선수였다.”고 말하기도 했다.


다시 리스톤과의 경기로 돌아와서, 클레이의 이런 오바질은 경기 전 체중 측정을 할 때 극에 달했다. “오늘 경기에서 누군가는 죽을 것이다”라고 소리를 쳤다고 한다. 이런 혹은 비슷한 정도의 표현도 복싱 역사상 없었다고 하는데, 클레이도 꽤 흥분을 했는지 (혹은 두려웠는지) 평소 분당 54회였던 맥박수가 이때는 거의 120회 정도였다고 한다. 그 광경을 지켜 본 리스톤을 포함한 많은 관계자들은 클레이가 리스톤과의 경기를 앞두고 극도로 두려움을 갖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클레이가 경기에 안 나오는 게 아닐까 하는 걱정을 했다고. 


클레이의 첫 번째 세계 타이틀 전이었던 이 경기엔 논란의 여지가 많긴 하다만, 클레이는 경기 초반 현란한 스피드로 경기를 주도한다. 리스톤은 클레이를 KO 시키려고 공격적으로 나가지만 클레이의 빠른 발을 따라가지 못하고 계속 얻어맞는다. 결국 리스톤은 클레이에게 잽을 마구 허용하며 비틀거린다.


그런데 중반 이후 클레이가 이상할 정도로 리스톤에게 주먹을 허용한다. 나중에 밝혀진 것에 따르면 압도적 경기 내용에도 불구하고 클레이는 눈이 보이지 않아 경기를 포기하려고 했단다. 혹자는 클레이의 눈이 보이지 않았던 걸 리스톤의 글러브에 묻은 연고 때문이었다고 말하기도 한다(클레이 말고도 리스톤과 경기를 했던 다른 선수에서 이런 현상이 벌어졌었다고).


어쨌든 클레이의 매니저는 경기를 하라고 종용했고, 클레이는 7회 TKO로 세계 챔피언이 된다.



클레이와 리스톤의 경기. 나중에 리스톤은 어깨 부상으로 경기를 포기했다고 이야기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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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톤과의 경기에서 챔피언 벨트를 딴 후 발광하는 클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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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톤이 1회에 넘어지자 빨리 일어나라고 요구하는 장면
리스톤은 팬덤 펀치를 맞고 쓰러졌는데, 아무도 리스톤이 알리의 펀치를 맞은 걸 본 사람이 없었다.


경기가 끝난 후 클레이는 링 위의 인터뷰에서



“네 말이 틀렸지(Eat your words)”


“난 세상을 흔들었어(I shook up the world)”


“난 최고가 될 거라고 매일 신에게 말해왔어(I talk to God every day, I must be the greatest).”


라고 소리를 지른다.


클레이는 22살에 헤비급 세계 챔피언이 된다. 이는 86년 마이크 타이슨이 20살에 챔피언이 되기 전까진 가장 어린 나이에 챔피언이 된 기록이다(패터슨이 21세 때 챔피언이 되긴 하지만, 경기를 해서 챔피언이 된 것이 아니라 전 챔피언의 은퇴로 물려받은 것이어서 제외했다).


그 후 클레이는 이슬람교로 개종을 하고, ‘무하마드 알리’로 이름을 바꾼다.



소신 있는 남자


세계 챔피언이 된 알리의 경기는 정말 눈부실 정도였다. 특히 5차 방어전이었던 런던과의 경기에선 승부를 결정짓는 순간 고속 펀치를 퍼붓는데, 맞는 펀치가 모두 클린 히트여서 주위를 놀라게 했다. 카메라가 그의 속도를 못 따라갔을 정도였다고 한다. 알리는 복싱 자격증을 박탈당하기 전까지 총 9차례의 방어전 중 7경기를 KO로 장식한다.


60년대 당시 알리는 가드를 내리는 대신 현란한 스텝과 운동 신경으로 상대방의 공격을 무력화하며 속사포 같은 북두백열권으로 상대방을 초토화시켰다(나중에 나이가 들면서 스피드가 감소했지만 영리하게도 과거의 스타일인 노 가드 전술을 버리고 이른바 ‘Rope-a–dope’ 전술로 상대방의 공격을 흡수한다).


60년대 세계 챔피언이었던 알리를 이길 수 없는 사람은 나타나기 어려울 것 같았고, 영원히 알리의 시대가 될 것 같았다. 하지만 문제는 엉뚱한 데서 일어난다. 알리가 당시 징병제였던 미국 군의 베트남 전쟁의 징병을 거부한 것이었다. 누구처럼 몰래 징병을 피하는 게 아니라 아예 대놓고 베트남 전쟁을 반대하며, ‘그런 의미 없는 전쟁에는 자신은 나가서 싸우지 않겠다’고 선언해버렸다.


위에서 언급을 했듯이 알리는 인터뷰를 잘, 그리고 또 많이 하는 선수였는데, 대중적인 슈퍼스타가 경기에 대한 이야기보다 정치적인 이야기를 자꾸 하니 정부 입장에서는 답답했을 것이다.


어떤 베트콩도 나에게 깜둥이(nigger)라고 말한 적이 없다


베트콩과 싸우느니 흑인을 억압하는 세상과 싸우겠다


나는 10,000마일이나 가서 흑인들을 노예로 생각하는 백인들의 지배를 유지하기 위해 살인이나 사람을 태워 죽이지 않을 것이다. 이런 나쁜 정의를 끝내야 할 시기다


지금 읽어 보아도 자극적이고 직설적이다. 우리나라였으면 빨갱이로 몰렸을 것이다.


인권 차별 반대 투쟁인 흑인 인권 운동에 활발히 참여한 알리는 당연히 말콤 엑스, 마틴 루터 킹 목사와도 교류를 하였다. 그들 역시 지지를 더 얻기 위해서 알리와 함께 하였다(특히 킹 목사의 경우, 처음에는 당시 대통령인 존슨 행정부와 사이가 틀어질 것을 두려워하여 베트남 전쟁 반대를 공식적으로 반대하지 못했으나 알리의 영향을 받아 공식적으로 전쟁 반대의 목소리를 냈다).


하지만 알리는 많은 미국 국민들에게 비난을 받았고, 결국 미국의 모든 주에서 권투할 수 있는 권리(boxing license)를 박탈당한다. 심지어는 여권조차 빼앗겼다. 결과적으로 그는 1967년 3월부터 1970년 10월까지 경기를 하지 못하였다. 이 때 그의 나이 25~거의 29세. 운동선수의 전성기를 송두리째 뺏겨버렸다. 1971년이 되어서야 미국 대법원은 하급심을 뒤집어 무죄를 선고했고, 드디어 경기를 할 수 있게 된다.


참 아무리 보아도 대단하다. 평범한 사람들도 자신에게 나쁜 영향을 미칠 것 같으면 아무리 옳은 이야기라고 해도 소리를 죽이거나 말 바꾸는 것이 당연한데, 한참 전성기인 운동선수가 이렇게까지 자신의 소신을 지킬 수 있다는 게 대단하다.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미국이니까 가능했을 거라는 이야기는 하지 말자. 말콤 엑스나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어떻게 죽었는지 아는 사람이라면 그런 말 못한다. 매카시 광풍이 끝났다고는 해도, 2차 대전이 끝난 지 얼마 안 되어 소련과 군비 경쟁이 날로 심해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총기 소유가 합법인 미국에서 그가 암살당한다고 해도 하나도 이상한 상황이 아니었다.


알리와 정치적으로 생각이 같은 사람들은 엄청 고마웠을 것이다. 대중적 지지도를 가지고 있는 세계적 스포츠 스타가 이렇게까지 나서주고 광고해 주니 얼마나 기쁘고 힘이 되었을까? 


그 후 우연인지 아님 알리의 영향인지 그가 경기를 가지지 못한 그 시기, 베트남 전쟁은 점점 미궁에 빠지고 부상자와 사망자가 속출하면서 베트남전 반전 운동이 활활 타오른다. 알리는 더욱 더 사회적으로 동정을 받는다. 미국 군대도 징병제에서 모병제로 바뀌는데, 거기엔 분명히 알리의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대법원의 무죄 선고를 받은 그는 1970년 10월 재기전을 치른다. 사람들은 환호하였고 그의 경기를 엄청 기대했다. 그러나 알리의 몸은 예전의 몸이 아니었다. 몸무게는 불어 있었고 현란한 스텝은 볼 수 없었다. 이제는 얻어맞지 않기 위해 가드를 올리고 경기를 해야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리는 3년의 공백이 무색하게 제리 쿼리를 3회 KO로 누르고 성공적인 재기전을 치른다. 그 다음 경기도 KO로 장식했고, 새롭게 세계 챔피언에 오른 최고의 선수 중에 하나인 조 프레이저와 1차전을 치르게 된다.


무하마드 알리와 조 프레이져의 대결은 꿈의 대결이었다. 한 번도 지지 않았던 두 복서의 대결에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나타내었고, 미국, 아니 전 세계가 들끓기 시작했다. 파퀴아오와 메이웨더의 대결보다 아마 10배는 더 뜨거웠을 것이다. 오죽했으면 사람들이 그 경기를 ‘The Fight of the Century’라고 불렀을까?



The Fight of the Century


당시 조 프레이져는 26승 무패 23KO였고, 알리는 31승 무패 26KO였다. 서로 흠집 하나 없는 깨끗한 전적이었다. 프레이져에게 알리는 세계 타이틀 2차 방어전이었고 알리는 거의 4년 만에 갖는 세계 타이틀 경기였다.


알리는 평소대로 경기 전부터 프레이져를 놀려대며 자극했다. 알리는 프레이져를 ‘챔피언이 되기에는 바보 같은 넘’, ‘챔피언이 되기에는 못생긴 넘’이라고 놀렸으며, 심지어 ‘프레이져를 지지하는 사람은 백인’이라고 비난했다. 또 프레이져를 ‘Uncle Tom(백인에 순종적인 흑인을 일컫는 말)’이라고 말하며 그를 백인의 졸개 정도로 희화화했다. 알리의 프레이져에 대한 희화화는 프레이져가 죽을 때까지 계속 된다.


알리는 그 경기를 문화적, 정치적 국민투표로 규정지었다. 자신은 시민 권리의 챔피언이고, 프레이져는 백인의 희망으로 표현하였다. 알리는 자신의 신념에 따라 징병을 거부한 결과로 황금 시절을 잃어버린 것을 강조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자신이 복싱 계에 없을 때 챔피언이 되면서 잘 나가고 있는 프레이져에 대한 시기심도 있었겠고, 경기를 ‘선과 악’의 구조로 단순화하여 사람들에게 호소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프레이져야말로 진짜 가난한 슬럼가 출신이다. 슬럼가에서 소년들을 위해서 봉사하던 그는 특별히 백인들의 정책을 옹호하거나 지지한 적이 없다. 그리고 알리와 프레이져는 원래 친한 사이였다. 알리가 3년 동안 복싱을 못하게 되었을 때 프레이져는 그에게 돈을 빌려주었으며, 의회에서 증언을 하기도 했고, 닉슨 대통령에게 알리가 복싱을 다시 할 수 있도록 청원서도 제출했었다. 프레이져는 알리가 군대를 가지 않을 권리도 지지하였는데, “만일 침례교에서 싸우지 말라고 하면 나 역시 싸우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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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ht of Century


대중적으로 더 인기가 있었고 또 입담이 좋아 언론에 더 자주 노출 되었던 알리의 행동은 실제로 많은 흑인들이 프레이져를 싫어하게 만든다. 언론에서 ‘조 프레이져는 까만색 피부를 가진 백인의 챔피언인가?’라는 기사가 나오기도 했다. 프레이져의 아이들은 학교에서 왕따를 당했으며, 그의 가족은 죽음의 위협을 받고 경찰에게 보호를 요청할 지경에 이른다. 이는 프레이져가 죽을 때까지 계속 되었고, 둘 사이의 앙금은 끝까지 사라지지 않았다.


많은 가십거리를 만든 이 세기의 대결은 1971년 3월 8일에 열렸다. 35개의 외국에 생중계 되었고 760개의 방송국이 참여할 정도로 뜨거웠다. 경기는 그들의 입담처럼 치열했다. 프레이져의 저돌적인 공격에 알리는 당황했는데, 11회에 확실한 우위를 점한 프레이져는 15회에 알리의 턱에 전광석화 같은 레프트 훅을 작렬시킨다. 프레이져는 심판 전원 일치 판정승을 거뒀고, 알리는 프로 첫 번째 패배를 했다.




경기가 끝난 후 알리와 프레이져 모두 경기 후 병원 신세를 진다. 알리는 턱뼈가 부러졌고, 프레이져 또한 기존에 가지고 있던 고혈압과 신장염이 악화되어 한 달 동안 병원에 입원한다. 알리는 턱뼈가 부러진 상태에서도 어눌한 발음으로 인터뷰를 했는데, 그는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다.


첫 패배 후 알리는 착실히 승리를 쌓기 시작한다. 복싱은 심리적인 운동이라 아무리 위대한 선수도 잘 싸우다가 한 번 지면 나락으로 떨어지기 쉬운데, 알리는 이를 잘 이겨낸다. 과거의 스피드는 사라졌지만 클린치를 적절히 이용하면서 노련하게 위기를 벗어난다.


이렇게 다시 일어서는가 싶었는데 이번엔 그만 켄 노튼이라는 선수에게 판정패 당한다. 두 번째 패배였다. 켄 노튼과는 총 3번의 경기를 가졌는데, 알리는 켄 노튼과의 재대결에서 어렵게 판정승한다.


알리의 다음 상대는 다시 조프레이져, 거의 3년 만의 재대결이었다.


다음 회에 계속.


raksumi


편집: 딴지일보 챙타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