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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RO


개인적인 사정 때문에 연재를 잠시 놓쳤지만, 독자여러분들을 잊은 적은 없다. 다 알잖아? 우리 그렇게 서운한 사이 아니잖은가? 




1.


'난(亂)'


우리나라 근대문학을 보면 농경사회의 전통 커뮤니티가 잘 묘사되어 있다. <토지>, <태백산맥>, <학마을 사람들> 등을 보면 마을은 공간에 묶인 운명공동체다. 공동체는 역사의 부침에 몰락하기도 하고 분절되기도 한다. '패풍(패현과 풍읍. 행정구역상으로는 풍읍이 패현에 속해 있지만 원래는 패와 풍으로서, 패택 땅과 풍 땅은 이웃 마을이었다)' 주민들도 지역공동체의 운명을 걱정하게 됐다. 지난 편 말미에 썼다시피 패풍에 진승/오광의 난이라는 역사적 사건의 그림자가 드리웠기 때문이다. 


어찌한단 말인가. 


어차피 결과적으로 두 가지 경우밖에 없다. 


첫째, 난이 실패한다. 이 경우 성문을 굳게 닫고 상황이 정리될 때까지 숨을 죽이는 게 상책이다. 혹여 난에 참여하거나, 협조적인 모습이라도 보였다간 제국이 반란을 제압한 후에 어찌 될지 뻔하다. 이세황제 호해의 성격상 패풍의 주민들을 도륙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둘째, 난이 성공한다. 혹은 진 제국이 멸망까지는 아니더라도 회복할 수 없는 타격을 입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난에 참여하지 않은 지역은 원칙적으로는 진나라의 영토다. 즉 토벌 대상이다. 어떤 꼴을 당할지 알 수가 없다. 물론 패풍에 들이닥친 장초군의 지휘자가 "그동안 진나라의 폭정에 고생이 많았수다"는 식의 덕담을 건네며 현지 사내들을 군대에 흡수할 수도 있다. 문제는 아닐 수도 있다는 것. 그건 오직 장초군의 마음이다. 


그 무시무시한 진 제국이 장초군에 무너질까?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패현 사내들의 큰형님, 즉 유방의 친구들인 소하와 조참 그리고 동서지간인 번쾌는 난에 참여하기로 결정했다. 일본 역사물의 영향을 받은 데다 일본보다 마초적이기까지 한 한국의 사극에 익숙한 우리는 이런 결정을 심리적인 결과로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 '그릇이 커서', '야심이 남달라서', '난세라는 큰물을 만난 고기라서' 등등. 얼핏 듣기엔 멋진 표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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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말하지만 나는 이 시리즈를 유물론적 관점에서 쓰고 있다. 지역공동체의 운명이다. '남자다워서' 평생을 함께해 온 사람들의 생사를 결정할 미친놈이 있을까? 역사엔 정말 그런 미친놈들이 자주 등장한다. 공감능력이 결여된 인간들이다. 반면 패현의 '두뇌'인 소하는 매우 현실적인 사람이었다. 소하의 선택은 조금만 생각해보면 지극히 당연했다. 첫 번째 경우, 즉 진 제국이 승리할 경우를 가정한다고 쳐도 그렇다. 


제국이 난을 진압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그 전에 장초군에 죽느니, 나중에 제국에 처단당하더라도 일단은 생명연장을 해야 한다. 차분히 머리를 굴릴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시간이 없다. 반란이 미친 듯이 퍼져나가는 중이었다. 아무튼 가장 다급한 과제는 명확했다. 


'누가 우리를 이끌 것인가?'




2.


첫 번째 후보 소하, 입장과 동시에 탈락. 패풍을 위해 현실적인 생각을 했던 소하는 자신과 가족에게도 현실적이었다. 소하는 보스가 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왜? 반란이 진압되기라도 하면 소씨 집안은 구족이 처형당할 테니까. 2인자가 되면 보스를 보좌하다가 일이 잘못되면 자기 혼자만 죽는 것으로 끝날 수 있다. 소하 아웃.


두 번째 후보 조참. 역시 자기 자신이면 몰라도 가족과 일가친척까지 제국의 표적으로 만들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소하와 함께 광속 탈락.


세 번째 후보 번쾌. 동네 젊은이들의 영웅이자 괴력의 사나이. 허심탄회한 성격에 화끈함마저 갖춘 남자 중의 남자. 하지만 너무 직선적이고 순박하다는 게 문제다. 번쾌는 장군으로 대성할 인물형이지, 지도자와는 거리가 멀었다. 


소하, 조참, 번쾌는 난세에 뛰어들 보스로 누가 적당한지 생각했다. 대부분은 소하의 고민이었겠지만... 그들이 고려했을만한 조건은 다음과 같다. 


1. 혈기왕성한 젊은이들이 앞뒤 재지 않고 따를 만큼 친밀한 선배여야 한다.  


2. 낙천적이어야 한다, 지도자란 부하들을 자신이 꿈꾸는 장밋빛 미래에 감염시킬 수 있어야 한다.


3. 성실한 농부나 직장인은 고향의 운명을 어깨에 지고 도박을 하는데 소심할 수밖에 없다. 번쾌는 소심함과 상관없는 전형적인 영웅호걸형 인물이지만 이상한 짓을 벌일 만한 상상력이 부족하다. 엉뚱한 인간이 좋다.


3. 예측 불가능한 인간이어야 한다. 난세는 예측 가능한 인간들이 사냥당하기 딱 좋은 때다. 천재가 아니라면, 범재가 바보만 못하다.


4. 허풍선이가 좋다. 패현은 까놓고 말해 뭣도 없는 동네다. 패현의 오합지졸을 이끌고 천하의 호걸들을 상대로 대등하게 흥정하는 건, 상식적인 인간에겐 외려 힘들다.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무장한 한량이 낫다.


5. 고대 중국에서 외교, 담판, 거래, 흥정은 모두 술자리에서 이뤄진다. 그렇다면 술이 센 인간이 지도자로서 유리하다.


6. 운을 타고나야 한다. 패현의 사내들은 천하의 기준에서 한 줌의 패잔병과 다를 바 없다. 이들은 영웅호걸들이 미쳐 날뛰는 장기판에서 생존할 역량이 없다. 그런데 수십 년간 땡전 한 푼 없이 뻔뻔하게 먹고 사는 걸로도 모자라 술, 여자, 심지어 아리따운 부인을 거느리는 가정생활까지 너끈하게 해내는 인간이 있다면? 그렇다면 패현은 이 사내의 생존(?)에 기대야 하지 않을까?


7. 사람들이 믿고 따를만한 권위가 필요하다. 어차피 패현 주민들 중 제국에 반항할 만한 지위나 상징성이 있는 사람은 없다. 그렇다면 심상치 않은 소문의 주인공이 그나마 가장 권위적이다.


8. 겁이 없어야 한다. 꼭 대단한 담력의 사나이일 필요는 없다.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지 않는 습관만 있어도 된다. 소하와 조참도 지도자 자리를 떠맡는 상황을 가정하지 않은 게 아니다. 하지만 반란이 진압되면? 자신 뿐 아니라 가족까지 연좌제로 엮여 처형당하게 된다. 고향을 위해 그 정도 각오를 한다고 쳐도 문제다. 세포에 각인된 두려움은 운신의 폭을 줄인다. 


위의 조건에 부합되는 인물은 단 하나밖에 없었다. 날건달 유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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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드라마 '초한지'에서의 유방




3.


유방의 성격을 보건대 패현의 지도자 자리를 덥석 물 게 뻔했다. 상황의 심각성보다는 재미와 흥분을 잔뜩 느낄 인간이다. 하지만 유방을 패풍의 지도자로 세우기 전에 처리해야 할 인간이 있었다. 


패현의 현령.


중앙정부에서 파견된 군수와 현령들은 양자강 오리알 신세가 되어버렸다. 반란군이 제국의 교통망에 범람하면서 중앙정부와의 네트워크가 끊겨 버렸다. 군대도 마찬가지였다. 제국이 각지에 파견한 200만 명이 넘는 병력은 일단 앉은 자리에서 임무를 수행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도 제국 내부의 병력은 반란군에 패퇴하거나 기꺼이 흡수되는 중이었다. 


정부는 멀고 반란은 가깝다. 사또들은 자신이 통치하던 주민들에게 목이 날아가지 않으면 다행인 상황이었다. 그나마 조국에 대한 충성심이 낮고 현지 주민들과 관계가 좋은 수령들은 반란에 동참하기도 했다. 하지만 사람의 인격이란 게 모 아니면 도다. 두 가지 훌륭함 중 하나만 취사선택하는 하는 경우는 드물다. 인간은 대체로 둘 다 갖추거나, 아니면 반대다. 


담당 지역을 사수하기로 한 강직한 수령들은 주민들을 병력으로 모집할 수 있었다. 이때는 주민들이 애매해진다. 수령에게는 애정이 있지만 제국은 증오하기 때문이다. 일단 주민들은 조국에 충성하고 자신들에게 관대한 수령을 배신하기가 미안해서 어쩔 수 없이 그의 명령을 듣는다. 미적지근하게 싸우는 척만 하다가 홀로 분전하던 수령이 전사하면 곧바로 장초군에 합류하는 식이었다.


패현의 현령은? 비정한 평가지만 충성심도, 주민들과의 스킨십도 별로였던 것 같다. 유방의 아내인 여치에게 청혼했었으니 대략 그녀와 동년배였고, 몇 살 많아 봐야 난이 일어난 현재 30대로 추정된다. 정말 많아 봐야 마흔 정도. 진시황에게 지방 수령으로 임명된 후 벌써 10여 년간이나 패현을 통치했으니 '엘리트'라는 말에 빠짐이 없는 남자다. 그러나 멀쩡해 뵈는 사람도 위기 앞에선 바닥이 드러난다. 현령은 눈앞에 열린 난세 속에서 어찌할 줄 모르고 허둥댔다. 무엇보다 일단 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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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령의 비서이자 패현의 '공인회계사'인 소하는 현령의 심리를 이용하기로 했다. 그는 현령에게 제안했다. 


"우리는 유방을 옹립할 생각인데, 현령께서 패현의 통치권을 순순히 이양하는 형태로 봉기에 동참하신다면... 그렇다면 신변도 안전할 것이고, 봉기가 잘 되면 한 몫 주장하실 수도 있고, 혹 일이 잘못됐다 하더라도 반란의 수괴로 지목당하는 일을 피하지 않겠습니까?"


그래도 진 제국 중앙정부에 찍히는 일은 무섭다. 그래서 소하는 현령을 이렇게 달랜다.


"진승과 오광의 군대에 합류하지 말고, 그냥 난을 일으킨 상태만 유지하십시오. 잘 되면 갈 곳을 찾지 못하고 헤매는 실력가들을 여럿 불러 모으십시오. 세력을 과시해서 누구도 편히 건드리기 껄끄러운 상태를 유지하면 되지 않습니까?"


그럼 나중에 제국이든 진승이든, 또 제삼자든 최후의 승자 편에 붙으면 그만이라는 얘기. 말도 안 되지만 당장 현령의 불안한 심리상태를 진정시키는 데는 효과적이었다. 현령은 소하의 제안을 수락했다. 


현령의 목을 쳐 버리는 옵션은? 우리 눈에는 간단해 보이지만 소하의 안전제일주의엔 어긋났다. 현령이 부임한다고, 당사자 한 명이 달랑 내려오는 게 아니다. 진나라 본토에서 온 인력과 장병이 끼어 있다. 이들을 제압하려면 필연적으로 희생이 따른다. 어쨌거나 10년간 부대끼며 어느 정도는 내밀한 관계가 됐다. 현지인들 중에도 이들의 편이 있다. 무력으로 해결하면 몸과 마음이 상할 사람들이다. 


우리의 소하, 담대함과는 거리가 멀지만 참 사려 깊다. 좋은 사람이다. 




4.


유방이 술에 젖어 세월을 보내던 망탕산에 번쾌가 들이닥쳤다. 


"봉기하기로 결정했으니 형님께서 패현을 통치해 주셔야 하겠는데요."


우리의 유방. 평생을 여기저기서 놀다가, 지금은 망탕산에서 늘어져 있을 뿐인데 한 지역의 수장으로 옹립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고향 주민들의 생사가 그의 손아귀에 떨어지려는 참이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제아무리 영웅호걸이라도 고민을 하게 마련이다. 고민을 하지 않더라도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며 비장한 감정에 휩싸일 법하다. 그러나 유방이 어디 보통 사람인가. 그의 태도는 다음과 같았다. 


어, 그러지 뭐.


하긴 거절할 리가 없다. 고작 정장 자리를 차지했을 때도 '내가 난데'라며 난리를 피우던 인간 아닌가. 고향 일대의 영주를 시켜주겠다는데 뒷일 따위 그때 가서 생각하면 된다. 유방이 망탕산에서 몸을 일으켜 고향을 향했따. 그러나 패현의 성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갈팡질팡하는 현령 때문이었다. 


현령은 정작 유방 일당이 성 밖에 모습을 드러내자 두려움에 휩싸였다. 원래 사람이 막연할 때는 남의 말에 귀가 펄럭이는 법이다. 구체적인 현실을 목도하면 그제야 생각이 바뀌는 게 우유부단한 사람의 특징이다. 망탕산에 틀어박혀 도적 생활이나 하던 유방과 부하들은 참으로 거칠고 막돼먹은 꼴이었을 게 분명하다. 저런 불한당 무리의 두목에게 내 목숨을 맡긴다고? 이미 자기 목숨을 지키는 것만 급급해진 현령은 토벌도 협상도 생각지 못하고 무작정 성문을 걸어 닫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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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령은 유방을 평소에 싫어했다. 자신이 반해서 청혼했던 여인, 여치를 차지한 중늙은이를 좋게 볼 리 없다. 실연의 상처를 준 미모의 여성이 날백수에 날건달인 놈에게 시집가더니 자기 남편이 세상에서 제일 가는 호걸인 것처럼 군다. 엘리트 남성의 자존심에 대못을 박는 일이다. 이제는 상황이 거꾸로 되어, 누군가를 싫어할 권리는 유방에게 있었다. 현령은 한때 자신의 아내를 쫓아 다닌 놈이다. 유방의 즉흥적인 성격을 보건대 '야, 저 새끼 죽여!' 한들 이상할 게 없다.


현령은 머리를 굴리면서 유방을 필요 이상으로 두려워하게 되었다. 유방의 무리는 도적 떼였지만 기록 어디를 찾아봐도 살인이나 약탈 등의 범죄행위가 발견되지 않는다. 사마천은 유방의 말실수 하나까지 낚아채 죽간에 기록한 사람이다. 그런데도 망탕산에서 제대로 저지른 범죄가 기록된 바 없다. 착해서가 아니라 게을러서다. 유방은 도적으로서도 백수였다. 하지만 깔끔한 생활만 해 온 현령에게 유방의 꼬락서니는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 


일이 틀어진 이상 유방의 팔다리를 잘라내야 했다. 패현에서 소하, 조참, 번쾌가 낮의 큰형님이라면 유방은 밤의 큰형님이었다. 그리고 이 넷은 친구다. 둘은 성 밖에 있지만 나머지 둘은 아직 자신의 부하다. 당연히 수중에 있는 소하와 조참을 죽이려고 했다. 


윗사람들은 언제나 자기 눈에는 예스맨으로 보이는 아랫것들을 단순하게 보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아랫사람들의 눈치가 얼마나 빠른지 모른다. 10년이나 사또생활을 한 현령은 소하와 조참을 죽이려는 분위기를 풀풀 풍겼다. 소하와 조참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바보 연기를 하다가 빈틈을 노려 득달같이 성벽을 넘었다.




5.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인 4인방-유방, 소하, 번쾌, 조참. 평소대로라면 반갑게 술을 퍼마실 사이지만 그럴 때가 아니다. 성벽을 다시 넘을 것인가, 아니면 몸을 피할 것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일단 백여 명의 오합지졸들을 대충 줄 세워 전투를 준비할 것인가? 이런 상황에서도 유방은 느긋했다. 사고방식이 유연한 그는 간편하면서도 창조적인 제3의 길을 아무렇지 않게 제안했다.


성안의 주민들을 선동해 현령을 처리하게 한 후 걸어 들어가면 된다.


어떻게?


유방은 비단 천에 글을 적어 서신을 만든 후, 그것을 화살에 묶어 발사, 성안에 뿌려댔다. 일종의 '삐라'를 생각해낸 것이다. 서신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패현의 부로(나이든 남성) 님들은 보시오. 천하가 진나라의 잔혹한 통치에 신음한 지 오래되었소. 지금 여러분들은 현령의 말을 듣고 성을 지키고 있지만 지금 그럴 때가 아니오. 각지의 제후들이 군사를 일으켜 지금 우리를 도륙하기 위해 달려오고 있소(지금 상태로는 패현은 진나라의 영토이기에 반란군에게 토벌 대상이라는 말). 여러분들은 모두 힘을 합쳐 현령을 죽인 후, 여러분의 자제들 중 한 명을 수장으로 옹립해야 합니다. 그리고 당장 우리를 학살할 수도 있는 다른 제후들에게 호응해 한 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들의 집안을 안전히 지킬 수 있습니다. 지금처럼 수동적으로 패현을 지키려고만 한다면 아비와 아들이 모두 살해당해 패현의 모든 것이 사라질 것입니다."


선동이라지만, 이렇게 현실적인 상황판단과 제안을 듣고 어찌 행동하지 않을 수 있을까. 패현의 어르신들은 젊은 동생과 아들들에게 당장 현령을 쳐 죽이라고 주문했다. 패현의 현령은 자신이 통치하던 주민들에게 순식간에 포위되어 속절없이 죽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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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문이 열렸다. 유방이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고향에 입성했다. 그리고 여기서 유방은, 사람들이 그에게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섬뜩한 정치력을 발휘한다. 




6.


유방은 자신을 지역의 수장으로 옹립하려는 사람들에게 순식간에 태도를 바꿨다.


"전 못하겠는뎁쇼."


그게 무슨 소리냐고 되묻는 사람들 앞에서 유방은 평생 처음으로 진지하고 겸손한 모습을 보이며 말했다. 


"천하에 대란이 일어났습니다. 각지의 제후들이 모두 궐기했습니다. 이런 혼란한 세상에서 저처럼 유능하지 못한 인간을 대장으로 세운다면 패현의 운명이 어찌 되겠습니까? 전쟁이 장난입니까? 단 한 번의 전투로 우리 모두의 운명이 끝장날 수도 있습니다.


제가 감히 저 자신의 신변을 아껴서 이러겠습니까? 제가 걱정하는 바는 제 능력의 부족으로 패현의 어르신들과 젊은이들의 생명을 온전히 보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제가 무어라고 감히 그런 짓을 하겠습니까? 봉기는 워낙에 큰일입니다. 부디 다시 상의를 하셔서 다른 이를 뽑아주시길 바랍니다."


패현 사내들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특히 어르신들, 유방이 태어나 자라서 늙어온 과정을 지켜본 노인들의 기분이 어땠을지! 이놈이 내가 아는 유방이 맞나 싶었으리라. 


유방에게 욕심이 없었을까? 그럴 리가. 유방에게 일생일대의 기회가 왔을 때 침착해지는 능력이 숨어있다는 사실을 아무도 몰랐을 뿐이다. 권력을 쥐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약간의 뜸을 들이더라도 '확실한 권력'을 가지는 게 중요하다. 천하를 놀러 다니며 실력 좀 되는 사람들과 술을 마신 공력이 이때 나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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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유방의 사의 표명을 주민들이 그대로 받아들였으면 어쩌려고 그랬을까? 그러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을까? 아니다. 유방은 패현의 지배권을 차지하려고 망탕산을 떠났다. 그러나 거꾸로 생각해보자. 유방이 아니면 안 된다는 결론이 나오지 않았다면 애초에 번쾌가 찾아오지 않았다. 


이제 유방이 패현의 지배자가 되어야 할 이유를 설명해야 하는 것은 유방 자신이 아니라 주민들이 되었다. 사람은 보통 생각한 것을 입 밖에 낸다. 하지만 필요에 의해 어떤 내용을 말하게 되면, 그대로 생각하게 되는 경향이 있다. 노인들은 평소에 불한당 녀석으로 치부하던 유방을 둘러싸고 사정한다. 


"우리가 듣기에 유 씨네 막내인 네게 진기한 일이 많이 일어났다고 들었다."


참백사 사건과 여치의 프로파간다였다.


"그리고 우리가 점을 쳤는데, 막둥이 네가 가장 좋게 나왔다."


반은 사실이고 반은 거짓일 것이다. 내 생각으로는 유방의 점괘가 가장 좋게 나올 때까지 점을 치고는 그걸 증거로 들이밀었을 것 같다. '진기한 일'과 '점'이 이유의 전부라... 이때까지 유방의 커리어가 백지처럼 깨끗하다는 뜻이다. 


유방은 쉽게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다. 이러면 유방을 추대하기로 한 소하와 조참의 입장이 난처해진다. 유방은 자신보다 좋은 사람을 찾으라고 했다. 당연히 소하와 조참이 고향 선배 및 아저씨들의 '표적'이 된다. 소하와 조참은 유방 앞에서 사실 자신들은 어디까지나 겁이 나서 나서지 못했다는 이실직고까지 하고 만다. 이로써 유방은 '우월한 수컷'의 지위를 차지한다.




7.


소하와 조참은 담력이 적은 인간들이 되었다.


반면 유방은 모든 걸 갖췄지만 겸손한 인물이 되었다. 


이런 구도에서 감히 "저는 어떻겠습니까?"하고 나서는 모지리는 없었다. 유방은 패현 주민들이 납작 엎드릴 때까지 기다리다가 못 이기는 척 지방정권의 수령직을 수락한다. 백수였다가 최말단 공무원인 정장이었고, 바로 직전까지는 도적이었던 유방은 '패공(沛公, 패현·풍읍 일대의 영주)'이 되었다. 


유방의 천연덕스러운 연기는 이후 동아시아에서 실력자가 군주로 추대될 때 보여주는 매너이자 기술로 자리 잡았다. 고려 태조 왕건도, 조선 태조 이성계도 이 방식을 따랐다. 지금도 한국과 일본의 정치인들은 '시대적 요구'나 '국민의 명령' 따위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나선다는 내용으로 출마선언을 한다. 중국 공산당의 실력자들도 내부 사정이야 어떻든 겉으로는 주변에 의해 추대되는 형식으로 권력의 수면 위로 떠오른다. 


'패공' 유방과 그의 아내 여치는 참백사 사건을 둘러싼 소문을 기정사실화하는 작업에 착수한다. 백제의 아들을 죽인 적제, 유방을 상징하는 색은 당연히 빨강으로 결정되었다. 패현의 깃발과 군기는 붉은색으로 통일되었다. 앞으로의 성공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낼 장소도 기가 막히게 선정되었다. 보통 큰 제사를 지낼 때는 마을의 광장이나 큰 집의 마당, 가까운 산의 정상, 수령이 오래된 나무가 있는 물가 따위에 사람이 모인다. 하지만 유방과 여치에겐 상식을 벗어나는 엉뚱한 상상력이 있었다.  


제사 장소는 이때까지 패현을 다스리던 관아의 뜰로 정해졌다. 진나라의 공권력에 저항하고, 아래에서 위로 뚫고 올라가는 느낌을 제공하기 위해서였다. 여기에 상징색인 빨강과 매치되는 강렬한 행위가 수반된다. 짐승들을 잔뜩 죽여 제사상에 올렸는데(번쾌가 무척 바빴을 것이다), 도축하면서 나온 피를 버리지 않고 북이란 북에는 모두 발랐다. 제사는 피칠갑을 한 북들을 두들기면서 진행되었다. 사방을 적시고 휘날리는 붉은 색의 향연, 표면에서 튀어 오르는 핏방울들의 이미지는 상상만 해도 굉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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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들은 지역의 정체성에 붉은색을 입히는 과정을 함께하면서 유방이 적제의 아들이라는 소문을 사실로 증명했다. 여럿이 믿으면 사실이 된다. 유방은 '공식적으로' 적제의 아들이 되었다. 유방 부부가 이만한 정치력을 지금껏 어떻게 억누르고 살아왔나 싶다. 그런데 역시 유방은 유방이다. 그는 엉뚱한 짓을 저질렀다. 황제(黃帝 한족의 누런 왕)와 치우蚩尤(묘족의 전쟁신) 둘에게 동시에 제사를 지낸 것이다. 




8.


중국 신화에서 황제와 치우는 철천지원수로, 제삿밥을 겸상할 사이가 아니다. 다음 편에 나오겠지만 항량과 항우는 치우에게만 제사를 지냈다. 두 사람이 묘족이기도 해서고, 원래 중원에서 군사를 일으키거나 출정할 때는 치우에게 제사를 지내는 관습이 있기도 해서였다. 


황제와 치우의 대결 이야기는 신화이자 픽션이지만, 황하를 중심으로 한 농경권과 양자강을 중심으로 한 수렵권의 갈등을 잘 보여준다. 묘족의 조상신인 치우는 소의 뿔과 발굽을 지녔다. 박치기에 유리함은 물론 전투화도 필요 없었을 것 같다. 구리로 된 머리와 쇠로 된 이마를 자랑했는데 이를 '동두철액(銅頭鐵額)'이라고 한다. 또 6개나 되는 팔로 다섯 가지의 무기를 사용했다고 한다. 무기의 종류는 기록마다 제멋대로지만 왜 6개의 무기가 아니냐 하면, 하나는 활이나 노(弩) 같은 투사 무기라서 한 손이 비어 있어야 투사체를 당기거나 장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호감 가는 외모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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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우


치우는 혼자서 맹수와 대적했다고 한다. 기본적으로 사냥꾼이라는 얘기다. 전설에 따르면 구리로 된 병사들을 부렸다고 하는데, 당연히 청동제 갑옷과 무기를 표현한 것이다. 다만 '구리로 되었다'는 표현에서 중무장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첫째, 직업적인 전사들이다. 둘째, 많은 양의 청동기를 구비하는 비용을 유지하려면 약탈을 일삼았으리라. 치우의 군대는 오랫동안 천하무적이었고, 중원의 강물을 수천 년간 적의 피로 물들였다고 한다. 


치우의 속성을 알려주는 또 하나의 특징은 그가 안개를 자유자재로 부렸다는 전설이다. 주술사다. 장군과 무당을 겸한다는 점에서 자연히 원시사회의 '족장'이다. 전쟁, 수렵, 약탈의 전문가 치우. 그 자신이야 꽤 신나는 삶을 살았겠으나, 이런 이웃이 있으면 생활이 고달파진다.


고달픈 이웃인 황제를 설명하기에 앞서 먼저 그의 전임자 신농(神農 신농씨 혹은 신농제. 후대로 가면 염제와 동일시된다)을 이야기해야 한다. 신농은 이름 그대로 농사의 신으로, 신치고는 매우 서민적이고 선량한 캐릭터를 가지고 있다. 그는 사람들에게 농사짓는 법과 의학을 가르쳐주었다. 열성적인 연구자이자 아낌없이 베푸는 그는 의학실험을 자기 몸에 실시한 후 안정성을 확인한 뒤에야 의료지식을 배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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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농


인류 초기 문명에서 농사와 의학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진다. 농사는 한정된 공간에서 많은 인구를 부양케 한다. 인구밀도가 높아지면서 전염병 등 의료문제와 위생의 필요성이 대두된다. 또한 식단에서 채식의 비중이 높아지면 어떤 식물이 식용 가능한지 경험치가 쌓이게 된다. 자연히 약이 되는 식물과 독성을 지닌 식물이 경험을 통해 데이터화된다. 신농의 자가 실험은 이런 귀납적 결론을 상징한다. 인류사 전체를 보면 유목 문명(혹은 기마 문명)과 농경 문명은 대체로 대등한 관계를 형성하지만 의술에 있어선 하늘과 땅 차이다. 


(건축술도 천지 차이다. 이것도 인구밀도 때문인데, 다만 농경 문명이 건축에 있어 압도적인 기술력을 보유한 것은 좁은 공간에 많은 인구를 수용할 필요성 때문만은 아니다. -18세기까지 농민들은 세계 어디에서나 조잡한 가옥에서 살았다.- 그보다는 권력자들이 단기간/특정 공간에 많은 인력을 동원할 수 있었던 게 이유다. 또한 농경 문명의 건축술은 축성기술과 관련이 깊다. 땅에 묶여 사는 사람들은 자연히 그 땅을 외부로부터 지켜야 한다.) 


농사를 통해 축적되는 잉여생산물은 치우 같은 이웃에게는 먹음직스러운 사냥감이었다. 수풀을 헤치며 도망 다니는 사냥감도 아니다. 특정한 땅에 의존하는 농사꾼과 그의 재산은 언제나 거기 그곳에 있다. 수렵 집단(특히 묘족)은 농경 집단을 신나게 털어먹었다. 거칠게 구분하면 사냥은 운동이고 농사는 노동이다. 운동은 신체를 단련시키지만 노동은 건강을 깎아 먹는다. 농경은 많은 인구를 부양하지만 개인들의 영양 수준은 떨어뜨린다. 수렵이 전투의 예행연습 역할을 한다는 사실까지 더하면, 묘족의 전성시대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치우의 몰락은 농경 생활권 내부에서 시작되었다. 신농이 다스리는 농경 지역에 황제가 등장한다. 신농은 황제를 이겨내지 못하고 몰락한다. 농경 생활권은 왜 새로운 지배자를 필요로 했을까? 신농은 농경신이다. 황제는 '농경문명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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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


농경 자체와 농경 문명은 다르다. 


농경은 생활경제의 형태를 가리키는 말이다. 농경 문명이란 농경 생활권을 하나의 시스템에 묶어두고 특정한 목표(전쟁이든, 건축이든)에 인력과 물자를 집중시킬 수 있는 상태를 말한다. 역사학자들에 따르면 황제는 외부(아마도 서쪽) 침입한 이민족 집단을 가리킬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이민족 왕조가 농경 문명을 지배한 사례는 많다. 이게 사실이라면 황제의 黃은 서부의 황막한 모래바람을 상징한다. 황제는 침략자이며 압제자이다. 그러나 지배엔 책임이 따른다. 황제는 곧 농경 문명의 대변자이자 보호자가 된다. 이 과정은 비록 권위적이고 폭력적일지언정 전체적으로 보면 지배세력과 민중의 '합의'를 통해 이루어졌다. 민중의 입장에서는 치우로 대변되는 외적보다는 우리 편 지배자가 낫다. 


역사를 통틀어 보호와 착취는 대체로 같은 말이다. 하지만 조세와 부역이라는 단어로 순화된 '보호비'가 고급 문명의 토대가 되는 것도 사실이다. 생활공간이 단순한 농경이 아니라 구체적인 문명으로 정돈되자 농사꾼들은 문화공동체로 변모했다. 한족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는 이 공동체를 '화하족(華夏族, 이 말은 사계절 중 곡식이 익는 여름을 지목하고 있다.)'이라고 한다. 이 단계까지 오면 황제의 누런 빛깔은 최초의 성격과 상관없이 농경지를 풍요롭게 적시는 황하의 색, 누렇게 익은 곡식의 색이다. 그는 중원 농경 문명의 총 책임자가 되었다. 


(이하의 내용은 기록마다 디테일이 다르므로 학계에서 대체로 합의된 개괄만 다루겠다.)


신농과 황제, 치우를 한데 일컬어 중화삼조(中華三朝, 중화문명의 세 조상)라고 한다. 중화 문명의 세 줄기 원류를 보여주는 원시 집단이다. 이 중 신농이 쓰러지고 황제와 치우의 대결만이 남았다. 황제는 순박한 신농과는 차원이 다른 적이었다. 지배자의 뜻에 따라 한 가지 목표에 압도적인 인구가 집결하자, 치우의 소수정예 군대는 밀리기 시작했다. 치우와 황제는 처절한 싸움을 벌였다. 


치우는 전세가 불리해지자 안개를 부려 황제의 군대를 혼란하게 했다. 이에 대적하는 황제의 방식이 의미심장하다. 황제는 지남거(나침반)를 발명해 방향을 되찾아 싸움을 계속한다. '주술에 대항하는 문명의 기술'이다. 또한 치우는 혼자 싸우지만 황제는 태양의 여신, 응룡(應龍, 매처럼 하늘을 나는 용으로 말뜻이 말뜻이니만큼 날개가 있는 것으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다)을 부리는 등 가능한 모든 인력과 신력, 물자를 동원한다. 요즘 식으로 치면 '국가총력전'이다. 농경 문명의 압도적인 생산력을 전쟁으로 돌리자 치우는 드디어 패배한다.


약탈자는 (곡물)생산자를 살려둘 필요가 있다. 그래야 두고두고 뜯어먹을 테니까. 반대로 생명과 재산을 지켜야 하는 쪽에서 외적은 철저한 박멸 대상이다. 황제는 치우를 집요하게 추적해 생포한 후, 신체를 토막 내 처형한다. 


치우의 최후에 대해서는 다른 이야기들이 많다. 그렇지만 한족뿐 아니라 묘족도 치우가 패배했다는 데엔 동의한다. 황제와 치우의 대결은 농경 문명이 중원의 주류가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리고 다시 말하지만 치우의 패배 이후 주류의 방식을 따라 중원화된 묘족들이 세운 국가집단이 초나라다. 


사정이 이럴진대, 대체 얼마나 편리한 사고방식을 가지면 황제와 치우의 제사를 같이 모시냐는 거다. 귀족이나 학자였다면 하나만 선택하는 게 상식이다. 그러나 농부의 아들이자 건달인 유방은 논리적 정합성 따위는 내다 버렸다. 좋은 게 좋은 거 아닌가? 자신은 농부의 아들이고 중원 민중의 일원이니 황제에게도 제사를 드리고, 또 한 편으로 굳이 국적을 따진다면 초나라 출신에다 출정식을 겸한 제사이니 전쟁신 치우도 챙겨드리고, 치우가 짱 세긴 하지만 최후의 승자는 황제니까 뭐 이참에 둘 다 사이좋게 어쩌구...


<좋은 게 좋은 것>. 유방을 설명하는 중요한 키워드 중 하나다.




9.


이제 유방과 함께할 인물들의 화려한 면면을 소개해 올리겠다. 읽다 보면 자연스레 코웃음이 나올 것이다. 


소하 : 시골 아전인 그는 훗날 통일제국의 승상이 된다.


조참 : 소하의 뒤를 이어 승상이 된다. 


유교 : 유방의 아버지가 밖에서 실수해 낳은 이복동생이자 진짜 막내. 지식은 중요하다. 정치적 거래를 하려면 편지도 쓰고 어려운 말도 동원할 줄 알아야 한다. 무식한 유방을 보좌하기 위해 적합한 인물이었다. 유방은 유학자를 싫어하면서도, 요즘으로 치면 '고학생 출신 교수'쯤 되는 이복동생을 끔찍이 아꼈다. 유교는 불륜으로 생긴 '잉여 가족'인 만큼 전통사회에서 천대받기 딱 좋은 위치였다. 그러나 규율이나 관습 따위 개나 줘 버린 유방이다. 건달 유방은 유교에게 든든한 형이었다. 


하후영 : 둘도 없는 친구가 패공이 되었다는 소식에 자신이 끌던 진 제국 소유의 마차를 끌고 득달같이 달려와 합류했다. 탈영이다. 이 사람의 얘기는 이미 해 놨다.


번쾌 : 무시무시한 힘과 외모, 담력 등 난세를 헤쳐 나가기 위해 태어난 듯한 인물. 유방이 없었다면 그가 패현의 군주 후보 1순위였을 것이다.


주창 : 유방의 논두렁 후배인 한량. 입에 걸레를 문 것으로 유명했다. 유방도 입이 거칠었지만 주창만은 못했다. 입이 뚫리면 선배들도 슬금슬금 자리를 뜰 정도였다. 주창의 욕설을 들어 넘기는 인간은 유방뿐이었다. 그러나 정작 심하게 흥분하면 말을 더듬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주발 : 누에를 치며 먹고살았다. 그래서 흔히 '양잠업자'라고 하는데, 주발은 무일푼의 건달이었다. 뽕나무와 뽕나무가 자랄 공간, 누에를 치는 시설 등은 상당한 자본이었다. 주발은 양잠업자가 아니라 누에 치는 기술의 보유자라고 봐야 한다. 즉 '알바생'이다. 그는 피리를 부는 부업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동네에 잔치가 있을 때마다 피리로 흥을 돋워 술값을 벌었다. 주발은 유학자들이 어려운 말을 늘어놓는 것을 유방만큼 싫어했는데, 유방보다는 예의가 발랐다. 그는 어른이 하는 말이니 일단 듣고 잊어버리자는 심산으로 꾹 참다가, 말이 길어지면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거 참 빨리빨리 좀 말하슈!"라고 소리치는 버릇이 있었다. 


... 훗날 제국의 승상이 된다.


이하 유방 형님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논두렁 '꼬붕'들과 농부들이 속속들이 합류했다. 


출정식이 끝났으니 출정을 해야 할 터.


어디로?


패공 유방의 군대(?)는 성이나 두어 개 함락시켜보자는 심산에 일단 만만한 산동성 지역으로 무작정 행군을 시작했다. 건달, 백정, 백수, 광대, 알바, 농부, 범죄자, 탈영병으로 이루어진 무리의 장대한 천하행(天下行, 큰 뜻을 위해 천하를 모험함)이 시작되었다. 이렇게나 처절한 오합지졸은 역사에서 찾아보기도 힘들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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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209년. 유방의 나이 47세, 한국 나이로는 48세나 49세의 일이다. 요즘으로 치면 아무리 최소로 잡아도 환갑의 나이에 성공을 향한 도전을 시작한 유방, 그리고 평생 놀고먹은 '적제의 아들'만 바라보는 그의 부하들. 이따위 집단은 살아남기만 해도 운수대통이다. 사마천은 이때의 패현 사내들을 딱 잘라 표현한다. 


"별 볼일 없었다."


말이 길었으니 이번 편을 딱 한 줄로 요약해보자. 


유방이 군사를 일으켰다.


그렇다. '거병(擧兵 군사를 일으킴)'이다. 




OUTRO


다음 편에선 항우가 떨치고 일어선다.





안물어봐도 알려주는 남얘기, [안알남]이 이번 주에도 어김없이 절찬리 다운로드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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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에는 아마도 한국어 팟캐스트 역사상 가장 야한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한다. 뭐, 나의 '지적이고 감수성 있으며 섹시한(어디까지나 공식적으로 확인된 청취자의 의견이다. 정 불만이 있으면 객관적인 미적판단기준을 지닌 그분에게 찾아가 따지시라. 난 모른다.)' 목소리에 내용의 수위가 가려질 수는 있겠으나, 그래도 할 말은 한다. 


...아아, 시지포스의 돌처럼 운명 지워진 미모로도 부족하단 말인가! 연재 2주 쉬었다고 이렇게 서운하게 할 거냐. 당장 가서 좀 들어라. 주변에 방송을 추천하는 방식은 피라미드식 다단계 사업을 참고하면 된다. 


팟빵 : http://bit.ly/1UmcWhZ
아이튠즈 : http://apple.co/1UIilQ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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