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6월 13일, 저는 을지로4가 언저리에 있는 한 순대집에 있었습니다. 그 집의 상호는 ‘알래스카 순대’였죠. LA갈비 같은 거냐고 물으니 그런 건 전혀 아니고, 한때 함경도 지역을 두고 알래스카라 칭할 때가 있었답니다.
이른 아침 가게에 먼저 도착한 것은 저였습니다. 얼마간 기다린 뒤에야 수십 년 동안 알래스카 순대와 가자미식해를 팔아 온 주인 할머니가 여러 명의 할머니들과 함께 가게 문을 밀치고 들어서셨습니다.
“오늘은 특별한 날이잖아요. 꽃단장하고 왔지.”
“에고, 뭐 방송 출연한다고 꽃단장까지.”
“예끼. 오늘 대통령 평양 가는 날이잖아. 간만에 이북 친구들 모이기로 했다구.”
아주 잠깐 카메라 앞에 선 후 할머니는 서둘러 TV가 있는 방안으로 향하셨지요. 잠시 뒤 TV 화면에 나타난 김대중 전 대통령. 그는 딱히 표현할 길이 없는 표정을 지으며 트랩 아래 북녘 땅을 돌아보았지요. 전쟁 이후 처음으로 북의 수도에 발을 디딘 남의 대통령, 그리고 아래에서 박수를 치고 있는 북의 국가원수.
“순안… 저기가 내 고향이야. 근데 와 저리 서 있기만 하는 거이가.”
“나도 저기 서면 얼어붙을 것 같다 야.”
할머니들의 목소리는 조금씩 젖어들고 있었지요. 그리고 두 정상이 악수를 하는 순간 몇 분은 그예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나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나”하면서 말입니다.
하루 종일 TV 앞을 떠나지 않으시는 주인 할머니께 고향하면 뭐가 떠오르시냐며 말을 붙였습니다.
“부모 형제 다 이북에 있구요. 장남을 못 데리고 나왔어요. 장손이라고 할아버지랑 같이 있어야 된다 해서. 그 아이 생각만 하면 복장이 터져요.”
카메라 앞에서 눈물을 보이기 싫었던지 할머니는 벌떡 일어나 주방으로 향했습니다. 가마솥 안에서는 스물 몇 가지 재료로 그득히 채워진, 소시지 네 개쯤 되는 굵기의 순대가 펄펄 끓는 물에서 헤엄치고 있었고, 할머니는 벽에 걸린 대꼬챙이로 순대를 푹푹 찌릅니다.
”이렇게 숨구멍을 내야 순대가 잘 삶겨요. 순대도 답답하면 복장이 터져서 풀어진다고.”
그 말을 들으며 저는 수십 년간 숨구멍도 없이, 고향과 부모 형제와 완벽히 차단된 가마솥 안에서 터져나는 속을 다스려야 했던 할머니의 50년을 떠올렸습니다. 그 세월 속에는 실낱같은 숨구멍이라도 뚫리나 기대에 찼던 나날도, 이제는 맘 편히 내 고향 땅을 밟을 수 있을까 보다 하고 가슴 벅찬 때도 있었겠지요. 그러나 또 그 숨구멍이 다시 냉혹하게 틀어 막혀 기대가 체념으로, 희망이 절망으로 순식간에 바뀌는 악몽도 여러 번이었을 겁니다.
기나긴 시간의 터널을 지나 다다른 2000년 6월 15일은 할머니를 가둬 왔던 가마솥이 다시 한 번 열리는 날이었습니다. 터질 듯한 복장에 숨구멍이 나는 날이었습니다. 고향 땅에서 부모님과 즐기던 순대와 가자미식해가 있는 곳에서, 역사의 한 순간을 맞으러 몰려든 분들에게도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구요.
저녁나절 풍성한 알래스카 순대를 앞에 두고 취흥이 도도히 오른 노인들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처음에는 한 테이블에서 시작했지만 끝날 때는 가게 전체를 울리는 합창이 되었지요. 그때 알래스카 할머니는 평소의 두 배 가까이 팔리는 통에 부족해진 순대를 거듭 삶고 계셨지요. 아침보다 완연히 새로운 기운이 샘솟는 몸짓으로 말입니다.
산하
페이스북 : @88sanha
편집: 딴지일보 챙타쿠
추천
[경제]영국은 EU를 탈퇴할 것인가, 브렉시트 8문 8답 씻퐈추천
[은수미칼럼]재벌이 말하지 않는 21가지 돈 버는 비법2: 금수저, 기술탈취, 개인정보 장사 은수미추천
[사회]정운호 게이트 정리 3 : 노무현 전 대통령을 저격했던, 부동산왕 홍만표의 등장 문화병론가 고성궈추천
[기획특집]초한쟁패(楚漢爭覇): 7. 거병(擧兵 군사를 일으킴) 필독추천
[사회]대한항공 하네다 사고, 20년차 기장인 제가 재구성해 보겠습니다 핑크 마후라추천
[김광진칼럼]프롤로그 : 다시 7분의 전투를 시작합니다 김광진검색어 제한 안내
입력하신 검색어는 검색이 금지된 단어입니다.
딴지 내 게시판은 아래 법령 및 내부 규정에 따라 검색기능을 제한하고 있어 양해 부탁드립니다.
1. 전기통신사업법 제 22조의 5제1항에따라 불법촬영물 등을 기재(유통)시 삭제, 접속차단 등 유통 방지에 필요한 조치가 취해집니다.
2. 성폭력처벌법 제14조, 청소년성처벌법 제11조에 따라 불법촬영물 등을 기재(유통)시 형사 처벌을 받을 수 있습니다.
3.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 제11조에 따라 아동·청소년이용 음란물을 제작·배포 소지한 자는 법적인 처벌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4.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및 시행령에 따라 청소년 보호 조치를 취합니다.
5. 저작권법 제103조에 따라 권리주장자의 요구가 있을 시 복제·전송의 중단 조치가 취해집니다.
6. 내부 규정에 따라 제한 조치를 취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