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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약한 정통성을 지닌 정권은 대개 색다르고 거창한 이벤트를 기획하여 국민들의 관심을 그쪽으로 돌려 자신의 구린 데를 감추고자 한다. 5공화국 정권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른바 ‘3허’라고 하여 실세 중의 실세라고 불리우는 세 명의 허씨가 있었다. 그 중 하나인 허문도는 자신들이 언론 통폐합으로 문을 강제로 닫게 했던 민영방송사 <TBC>가 만들었던 한 프로그램에 관심을 갖는다.


TBC는 제1회 <전국 대학생 축제 경연대회>를 연 바 있었다. 허문도는 이 소박한 규모의 프로그램을 엄청나게 뻥튀기하고 제 5공화국 헌법에 새로이 삽입된 ‘민족 문화 창달’ 조항에 부응하는 어마어마한 관제 축제로 만든다. 이것이 그 이름도 고풍스런 ‘국풍 81’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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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나는 로케트도 떨어뜨리는 세도가의 기획이었다. 자그마치 ‘한국신문협회’가 주최하고 <KBS>가 주관하는 가운데 국풍 81은,


“새 역사를 창조하는 것은 청년의 열과 의지의 힘이다”


라는 가슴 벅찬 슬로건을 내걸고, 1981년 5월 28일 대단원의 막을 올린다. 198개 대학의 수천 명의 학생들과 그만큼의 일반인들이 벌이는 온갖 민속놀이와 흐드러진 술판으로 온 여의도가 흥청거렸다. 정권은 통행금지를 일시 해제하는 파격까지 베풀었다. 그런데 정작 허문도에겐 아쉬운 것이 있었다.


'민족 문화 창달'의 취지에 맞는 대학생 탈춤반들의 참여가 전무했던 것이다. 물론 섭외는 해보았지만 정권의 속이 뻔히 들여다보이는 국풍 81에 참여하겠다는 탈춤반은 없었다. 그래도 포기할 수 없었던 허문도는 졸업생이나 군대에 있던 사람들까지 총동원하여 ‘서울대 탈춤반’을 급조하기까지 한다.


국풍 81에서 민족 문화 창달을 위한 차전놀이나 풍물이나 고싸움 등보다 월등한 인기를 누린 것은 역시 대학생들의 가요제였다. 여기서 서울예전에 다니던 이용은 <바람이려오>라는 곡으로 누가 봐도 압도적인 가창력을 선보인다.




누구나 대상은 이용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대상은 서울대 그룹사운드에게로 돌아갔다. 정권의 실세께서 기획하신 행사 수상자의 ‘네임밸류’도 고려해야 한다는 정치적 이유로 이용이 타야 할 상이 엉뚱한 곳으로 갔다고 사람들은 수군거렸다. 하지만 이용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본격 가수로 데뷔하여 한국 가요계를 평정한다. 그를 한국 가요계 꼭대기에 올려놓은 노래가 지금도 10월 하순이면 항상 흘러나오는 명곡 <잊혀진 계절>이다.


이렇게 대학가요제는 상업적인 대중문화와는 엷게나마 구분되었던 대학생들의 문화적 터전으로서의 성격을 급속도로 잃고 대중가수 입문의 장, 신인가수의 등용문으로 고착되어 간다. 대학가요제 출전과 우승이 대학생의 젊은 날의 낭만의 최고봉이 아니라 양양한 전도가 보장되는 신인가수 탄생 길로 대체됐던 것이다. 대학가요제 출신의 가수들은 급속도로 기존의 가요계의 ‘젊은 피’로 흡수되어 연예계의 일원이 되었고, 그 세계에 물들어 갔다.


대학가요제 최고의 낭만송이라 불리는 <내가>의 김학래는 “해야 해야 내가 간다!”를 노래하며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지만 개그우먼과의 뜻밖의 스캔들로 홍역을 치렀다. 국풍 81에서 화려하게 등장한 이래 조용필과 맞먹는 오빠 부대를 자랑하던 이용의 굳건해 보이던 상승가도도 단 한 번의 치명적인 스캔들로 무너졌다. 대학가요제의 화려한 스포트라이트 뒤로 둘러쳐진 그림자들이었을 것이다. 비슷한 예 하나를 더 소개해 보자.


1985년 대학가요제 대상작은 부산 동의대학교 듀엣 <높은음자리>가 부른 <저 바다에 누워>였고, 나는 동의대학교 밑에 고등학교 1학년이었다. “저 바다에 누워 외로운 물새 될까. 물살의 깊은 뜻을 항구는 알까…” 시원스런 창법과 탁월한 하모니는 음악적 문외한인 내가 봐도 단연 대상감이었다. 그런데 방송에서 ‘이종사촌’이라고 소개됐던 그 듀엣은 사실 연인 사이였다. 이미 동의대학교 일대에는 ‘걔들이 무슨 사촌이냐?’는 조소가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이 호재(?)를 매스컴이 놓칠 리 없었고, 집요한 추적 끝에 진실은 드러났다. 거기다가 동거 중이었던 남학생이 여학생을 폭행한 사건까지 빚어져 그들은 파국을 맞았다. 남자는 천하의 나쁜 놈이 되어 가요계에서 매장당하다시피 했고, 심지어 다른 여자와 결혼한 후에도 사람들이 그 부부의 아이를 <높은음자리> 여자 멤버의 아이로 오해하여 냉가슴을 앓았다고 한다. 대학가요제의 전성시대가 낳은 가장 슬픈 풍경화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삶이 아무리 우리를 속일지라도 슬퍼만 하거나 노여워만 해서는 안 되는 법이다. 대학가요제의 ‘대학’이 대학 고유의 문화 발현이 아니라 또 하나의 상품화를 위한 상표로 이용되었다고 하더라도, 때로는 대학생들의 실질적 고민과는 유리된 무대이기 일쑤였다고 하더라도, 밤새워 목청을 돋우고, 손가락이 부르트도록 기타를 치고, 머리를 쥐어뜯으며 오선지와 씨름하던 음악과 창조에 대한 열정, 그리고 그들에게 박수치고 열광하던 또래 대학생들이 즐겨 입에 담던 노래는 그 세대, 나아가 우리 모두의 문화적·역사적 자산으로 남았다.


1988년 즈음 신입생들에게 노래를 시키면 열에 여덟아홉이 부르는 노래가 있었다. 약간 비음을 섞어서 부르는 <이 밤을 다시 한 번>. 노래에 자질이 있건 없건 “이 빰을 이 빰을 똬시 한 번. 땅신과 보낼 수 있다면~”이라는 호소력 있는(?) 가사로 대학생들의 혼을 두려뺐던 노래의 주인은 조하문이었다. 그는 80년 대학가요제에서 <해야>로 은상 입상했던 연세대 그룹 <마그마>의 일원이었다.


그들은 연세대 교수였던 박두진의 시를 가사로 써먹으면서도 박두진 교수에게 양해를 구하는 것을 생략하는 대죄를 범하고 말았다. 박두진 교수는 대노했고 조하문을 호출해 “다시는 그 노래를 부르지 말라.”고 했으나 81년 이 노래가 연세대학교의 응원가로 지정되고, 정기 고연전에서 수만의 학생들이 ‘해야 떠라!’를 노래하며 한 몸이 되는 것을 보고 노기를 누그러뜨렸다고 한다. 그리고 그로부터 30년이 흐르도록 연세대학생들은 <해야>에 목청이 찢어지고 있다.


1982년 대학가요제 대상곡 <참새와 허수아비>는 실연을 당하거나 연인과 피치 못 할 이별을 경험한 젊은이들의 애창곡 베스트에 반드시 들어가는 곡이었다. 이 노래를 작사한 것은 가수 임지훈이다. 그는 병으로 여자 친구를 잃었고 그녀를 묻고 돌아오던 가을 벌판에 참새 한 마리가 끈질기게 자신을 따라오는 것을 보고 처연한 심정으로 이 노래를 지었다고 한다. “보내야만 해야 할 슬픈 나의 운명, 훠이 훠이 가거라. 산 너머 멀리 멀리”를 구성지게 부르다가 목이 메어 꺽꺽거리는 모습은 나 자신이 자주 목격했거니와 유달리 시대적 아픔과 그로 인한 이별이 많았던 80년대와 본의 아니게(?) 화학적인 결합을 일으키기도 했었다.


1984년 강변가요제에서 한국 가요사에 남을 대형 여자 가수 이선희는 ‘4막 5장’이라는 좀 애매한 이름의 듀엣으로 혜성과 같이 나타났다. ‘J’ 이니셜을 가진 사람들은 그들의 노래 <J에게>를 들으며, 마치 그 노래가 자신을 위한 노래인양 흐뭇해했었다.




듀엣 중 남자가 군대에 가버린 후 이선희는 솔로로 전향하였고, 대형 히트곡들을 내면서 일약 스타덤에 오른다. 그 인기가 얼마나 출중했던지 내가 다니던 학교에서 벌어진 참사로 넉넉히 입증할 수 있다. 이선희가 공연차 부산을 방문했을 때 시커먼 고등학생들이 ‘누나’를 보러 가겠다며 2층 교실에서 수십 명씩 화단으로 뛰어내리다가 그 중 한 명의 다리가 부러졌던 것이다.


“지금 지금 그대로의 모습으로(86년 대학가요제 대상)” 사랑하는 사람이 언제까지나 내 옆에 있기를 소망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헤어진 뒤에는 “아무리 험한 산일지라도 난 그대를 잊을 수 없어 아무리 미운 너였지만은 난 아직도 널 사랑해(87년 대학가요제 <난 아직도 널>)”라고 울먹이면서, “그대 가슴에 작은 새가 되리라(84년 대학가요제 <그대 떠난 빈들에 서서>)” 다짐하고, 시간이 흐르면 “이젠 지나버린 이야기들이 내겐 꿈결 같지만 하얀 종이 위에 그릴 수 있는 작은 사랑이여라(83년 대학가요제 <잃어버린 우산>)”고 담담하지만 씁쓸하게 소주 한 잔과 더불어 토로하다가 또 다시 “내 젊음에 흰 노트에 무엇을 써야만 하나(86년 강변가요제 <젊음의 노트>)”고 당돌하게 묻고 “담다디 담다디 담다디 담(88년 강변가요제 대상 <담다디>)”을 신나게 부르며 날 떠나지 말라고 협박 같은 애원을 하기에 이르기까지, <대학가요제>의 이름으로 묶였고, 불렸고, 기억되는 노래들은 밤하늘의 별처럼 많고 초롱초롱 빛난다.


<대학가요제>는 90년대 이후 점차 쇠퇴기로 접어든다.


“전에는 강변(대학)가요제가 신인의 등용문이었죠. 하지만 지금의 신인들은 방송국 주최의 콘테스트가 아니어도 얼마든지 데뷔할 수 있게 됐습니다. 인디도 있고 바로 음반을 낼 기회도 많죠.”


<우리 대중음악의 큰 별들, 이선희편> - 임진모, 민미디어


이선희의 말이 가장 큰 이유가 될 것이다. 대학 문간도 들어가지 않았던 서태지가 대중의 우상으로 등극한 것이 90년대 초반 아니었던가. 주관적으로 하나 덧붙이자면 대학가요제의 융성기는 한국의 대학생들이 그 현대사에서 가장 역동적이고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던 70년대 말과 80년대를 관통하고 있다. 90년대 이후의 사회적 변화에 따라 대학생 집단이 그 영향력과 독자성을 급격히 상실해 가면서, 대학가요제 자체의 활력 또한 비례하여 잦아들었던 것은 아니었을지.


대학가요제도 강변가요제도 이미 대가 끊겼다. 대학가요제에서 우승한 사람이 그 이후 뉴스에서나 방송에서 소개된 기억의 물줄기 역시 몇 년째 말라붙었다. 하지만 앞으로 더 세월이 가고 대학가요제 자체가 역사 속에 묻힐지라도 나는 대학가요제, 그리고 강변가요제와 함께 했던 노래들을 흥얼거릴 것이고, 그 노래를 전해 주었던 젊은, 아니, 젊었던 가객들의 이름을 설레는 마음으로 꼽을 것이다.


한 번 손가락을 구부려 보자. 샌드페블스, 배철수, 노사연, 심수봉, 홍서범, 정오차, 조하문, 이선희, 우순실, 노사연, 조정희(참새와 허수아비), 유열, 신해철, 이상은, 이상우, 박미경, 주현미, 김경호, 김동률, 그리고 <어머나>의 장윤정까지. 대충만 꼽아도 두 손이 모자란다. 여기에 하나 더 의외의 가객 하나를 덧붙이며 대학가요제 추억의 여행을 마쳐 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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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강변가요제에서 <덧마루>라는 동국대팀이 참석하여 <길 잃은 친구에게>라는 노래로 장려상을 탄다. 그 멤버 가운데 한 명의 이름은 한석규였다. 드라마 <아들과 딸>에서 목소리 근사한 조역으로 화제가 된 것을 시발로 <접속>의 주인공과 <쉬리>의 중앙정보부원부터 <8월의 크리스마스>의 사진관 주인을 거쳐, 육두문자 잘 내뱉는 세종 대왕과 <베를린> 첩보원에 이르는 다양한 모습을 우리 앞에 보여 주었던 그 배우 한석규도 강변가요제의 일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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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딴지일보 챙타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