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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규 감독의 <마이웨이>란 영화를 보면, 오다기리 죠가 이끄는 일본군이 부대가 소련군 전차부대에 돌격하는 장면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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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는 관객에겐 이해하기 힘든 ‘광기’로 기억되어질 이 장면을 역사에서는 ‘노몬한 전투(혹은 할힌골 전투)’라 부른다. 태평양 전쟁의 시작을 알린 ‘진주만 공습’에 비해서는 덜 알려진 ‘변방의 전투’로 회자되고 있지만, 이 노몬한 전투는 일본의 이후 행보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다.


당시 일본 군부는 남방공략파와 북부공략파로 나뉘어져 향후 일본이 나아갈 길을 두고 싸웠다. 간단히 말해 남쪽으로 쳐들어갈까, 북쪽으로 치고 올라갈까를 두고 고민했다. 할힌골 전투 이후 북부공략파의 목소리는 그 힘을 잃었고 일본은 남방자원지대라 칭한 곳으로 치고 내려간다. 제2차 세계대전의 격랑 속으로 몸을 던진 것이다. 만약 할힌골 전투가 없었다면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의 시작을 진주만이 아닌 소련으로 바꿨을지도 모른다.



분쟁의 시작


1932년 만주국이란 괴뢰정부를 세운 일본을 보는 소련의 심기는 불편했다. 만약 일본이 독일과 손을 잡고 양면에서 공격해 온다면 소련은 이를 어떻게 막아낼 수 있을까?


여기서 등장하는 것이 근대국가로 재탄생한 ‘몽골’이다. 러시아의 반혁명 분자였던 운게른 남작은 혁명세력들에게 패퇴한 후 몽골로 피신하고, 몽골은 운게른 남작의 도움을 받아 독립을 선포한다.


300년간 이어져 온 청나라의 지배에서 벗어난 몽골(청나라 자체의 혼란도 한몫 했지만), 문제는 이때부터였다. 갓 독립한 몽골의 지정학적 위치가 애매했던 것이다. 일본은 만주에 만주국이란 괴뢰국을 만든 상태. 이들은 러일 전쟁 이후, 언제나 러시아(소련)를 제1 가상적국으로 삼고, 30여년 가까이 전쟁을 해왔던 존재였다.


이들은 만주국을 만든 후 여세를 몰아 중일전쟁을 일으켰고, 중국과의 전쟁을 정리한 다음 병력을 몰아 바이칼 지역을 확보해 시베리아로 짓쳐 들어가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이런 일본을 바라보는 소련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스탈린은 독일과 일본이 손을 잡고 소련을 공격하는 최악의 상황을 늘 걱정했었다. ‘할힌골 전투’가 소련에게 끼친 영향은 국제정치학적으로 ‘꽤’ 컸는데, 이후 소련이 ‘독소 불가침 조약’을 맺은 것엔 이 양면전에 대한 두려움을 제거하기 위한 의도도 포함돼 있었다. 후술하겠지만 ‘할힌골 전투’가 일본과 소련에 끼친 군사적·정치적 영향은 ‘상당히’ 컸다)


러시아 혁명이 안정기에 들어가고, 소련으로 이름이 바뀐 북구의 패자는 반혁명 세력을 축출하기 위해 몽골까지 쫓아왔다가 독립 국가 ‘몽골’을 목도한다. 처음에는 반혁명 세력의 지원으로 독립한 몽골의 출생배경이 마음에 걸렸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사소한’ 이야기였다. 옆에는 관동군의 나라 ‘만주국’이 호시탐탐 몽골과 소련을 노려보고 있었고, 전 세계의 자본주의 국가들은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 소련을 무너뜨리기 위해 도끼눈을 뜨고 있는 상황이었다. 


만약 이런 상황에서 일본이 만주국을 발판으로 몽골로 치고 들어온다면? 갓 걸음마를 뗀 근대국가 몽골은 국력 면에서 일본을 상대할 수 없었다. 군사력이라 불릴만한 무력도 부족했다. 아니, 국력 자체가 상대가 안 됐다. 소련으로선 일본이란 야수를 상대할 ‘발판’이 필요했다. 몽골에게 있어서도 나쁜 이야기가 아니었다.


“갓 건국한 몽골의 주변은 호랑이와 늑대들로 가득 차 있다. 중국은 언제 어느 때곤 청나라 시절의 역사를 들먹이며 치고 들어올지 모르고, 바다 건너 일본은 만주국이라는 괴뢰 정부를 핑계로 우리를 집어 삼키려 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몽골이란 나라를 지켜내기 위해서는 소련의 위성국으로 들어가는 것 말고는 마땅한 대안이 없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조선과 만주국의 상황을 본다면, 몽골이 일본에게 먹히지 말란 법이 없었다. 게다가 ‘관동군’은 무슨 일을 벌려도 이상할 게 없는 망나니들이었다. 이런 망나니가 바로 옆에서 도끼눈을 뜨고 몽골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몽골이란 나라가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소련의 위성국보다 더한 모욕이라도 견뎌내야 했다. 소련의 위성국이 된 건 오히려 싸게 먹힌 것인지도 모른다.


부딪쳐야 할 게 부딪혔다.


소련은 몽골과 상호 원조 조약을 맺은 상태였고, 만주국은 실질적으로 ‘관동군의 나라’였다. 언제 싸움이 붙어도 이상할 게 없는 상태였다. 수시로 충돌이 있었다. 만주국과 몽고는 1932년부터 노몬한 전투가 일어나는 1939년까지 무려 759번의 국경충돌을 일으켰다. 국경충돌의 원인은 아주 단순했다.


“등기부 등본을 떼보니 이 땅이 내 땅이었다.”


근대국가 이전시절에는 몽고와 청나라 국경에 대한 개념이 희미했다. 청나라는 몽고 초원이 원래 자신의 땅이었고, 몽고 역시 유목민족이었기에 국경에 대한 개념이 희미했다. 그런데 만주국과 몽골이라는 ‘국가체계’가 완성되자 서로의 ‘땅’이라며 국경분쟁에 나선 것이다.


일본군이 주장한 국경선은(당시 관동군 사령관은 ‘주만특명전권대사駐滿-特命全權大使’이라는 긴 직함의 직책을 겸임하고 있었는데, 한 마디로 만주국의 입법·사법·행정권을 모두 가진 실질적인 총독이었다. 즉, 만주국은 일본 식민지라는 의미다) 할힌골이었는데, 몽골은 할힌골 앞에 있는 노몬한 고지가 자신들의 국경선이라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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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인 의미가 없다면 이 국경선은 정말 ‘사소한’ 문제였다. 만약 여기에 고부가가치 천연자원이 매장돼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졌겠지만 이곳은 그냥 모래와 잡초가 넘실대는 황무지였고, 할힌골과 노몬한 고지 사이의 거리 차이도(서로가 말하는 국경선) 좁은 곳은 10km, 길어봤자 20km 내외의 차이였다. 눈 감고 모른 척 하면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 일이었다.


문제는 일본이나 소련은 언제 어느 때고 싸우겠다는 ‘투지’로 불타고 있었다는 거다.


할힌골 전투가 벌어지기 2년 전(1937년 6월 19일)에 건차자도(흑룡강에 있는 하중도 중 하나)에 40명의 소련군이 상륙해 요새화 작업에 들어가자, 사단 단위의 병력이 진출(제1사단) 출동해 소련군을 흠씬 두들겼다. 소련군 사상자가 많이 발생했지만, 소련은 대규모의 군부숙청으로 내부가 혼란한 상황이었기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물러났다. 


1년 후(1938년 7월 29일) 일본과 소련은 장고봉(張鼓峰)에서 ‘격하게’ 싸웠다(장고봉 전투). 두만강 근처의 해발고도 150미터의 작은 고지, 아, 아니, 언덕이었던 이곳은 만주, 조선, 소련 사이에 절묘하게 걸쳐 있었는데, 문제는 이 땅이 누구 소유였냐는 것이다. 이런 상황이면 보통 서로 눈치를 보며 무풍지대로 남겨놓는 것이 상책인데, 소련과 만주국(만주국이라 쓰고 일본이라 읽는다)은 이게 서로의 땅이라고 핏대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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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움직임은 소련에서 나왔다. 이들이 먼저 장고봉 정상에 진지를 구축했다. 이를 확인한 일본군은 정찰대를 파견했지만, 소련군이 정찰대에 사격을 가하면서 충돌이 시작됐다. 당시 일본군, 정확히 표현하자면 관동군은 중국 전선에 대한 공세를 준비하고 있었기에 대규모 접점을 원치 않았다.


그러나 이 당시 관동군은 이미 ‘독자적인 군대’였다.


1937년 대본영이 상설기관이 됐고, 중국 전선이 장기화되면서 총력전 태세로 접어들던 시기, 관동군은 일본 본토의 육군성과 해군성과 함께 독자적인 군사집단이 됐다. 이제까지 보여준 엄청난 ‘짓’들을 생각해보라. 야전에 있는 군인들이 본토의 정치적 판단 없이 독자적으로 군사충돌을 일으키고, 전쟁을 시작하지 않았는가? (당시 관동군은 일본 정부의 입장에서도 명백히 초법적이고, 위법적인 행동을 한 것이다)


중국과의 전쟁이 시작된 마당에 굳이 소련과 싸워야 할 이유가 있을까? 관동군이 아무리 생각이 없어도 그 정도 바보는 아니었다. 그러나 관동군에게는 주변 상황을 자신들 편의대로 합리화하는 놀라운 재주가 있었다.


“장고봉 일대는 대단위 부대가 주둔하거나, 회전(會戰)해서 싸울 공간이 없다.”


“지역 자체가 좁기 때문에 전투가 확대 돼 확전까지는 이어지지 않을 것이다.”


“소련군이 전차를 많이 보유하고 있다지만, 이 좁은 지역으로 끌고 오지는 못할 것이다.”


이 모든 생각의 총합은,


“건차차도 때처럼 가볍게 밟아주고 오자.”


라는 지극히 ‘관동군스러운’ 결론이었다. 중국이라는 거대한 늪에 뛰어들어 허우적거리는 상황에서 병사 1명이라도 아껴야하고, 불필요한 적을 늘리는 짓이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인지는 삼척동자라도 다 알 터인데, 관동군은 긍정의 화신으로 빙의해 주변 상황을 지극히 본인 위주로, 멍청하리만큼 낙관적으로 바라보았다.


물론 일본군에게 무조건 불리한 상황은 아니었다. 소련에는 ‘스탈린’이라는 약점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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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30년대


192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소련이란 나라는 서구 자본주의 국가들에게 눈엣 가시 같은 존재였었다. 이런 시선은 30년대 까지 이어졌다(가시적인 압력은 줄어들었지만 다른 의미에서의 압박이 또다시 시작됐다).


미국의 역사에서 1930년대는 ‘붉은 30년대’라고 불리던 시절이었다. ‘추악한 30년대’란 표현이 더 어울리는 시절이기도 했다. 대공황이라는 미증유의 대 경제위기 앞에서 미국은 ‘뉴딜 정책’으로 활로를 모색하던 시기였다. 같은 시기 독일은 히틀러로 대변되는 파시즘으로, 소련은 공산주의로 이 경제위기를 돌파하려 했다.


이 대목에서 주목해 봐야 할 것이 대척점에 있던 독일과 소련의 성공이었다.


대공황의 핵심은 ‘수요의 실종’이다. 누군가가 물건을 사줘야 돌아가는 것이 경제인데, 수요가 사라지면서 경제가 멈춰버린 것이다. 이 경우 경제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대책은 ‘수요의 창출’이다.


히틀러는 아우토반을 건설하고, 재군비를 선언함으로써 독일 내의 수요를 창출해냈다. 더불어 좌파 정당과 노조를 해체해 노동자들의 단결권을 박탈해 버렸다. 반면 소련은 국가계획경제를 실행했다. 농민들의 대규모 이주와 그에 따른 부작용도 엄청났지만, 당시엔 이런 사실이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다. 덕분에 소련은 1930년대 노동자들과 핍박받는

민중들의 유토피아가 됐다.


“완전고용, 완벽한 사회보장제도, 노후연금. 소련은 노동자들의 천국이다!”


당대 지식인, 예술가, 노동자치고 소련을 찬양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미국의 파워 엘리트들이나 유럽 선진국의 기업가치고 공산주의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던 이는 없었다. 이른바,


‘적색공포’


였다. 소련과 같은 공산혁명이 자국에서 일어나지 말란 보장이 어디에 있는가?


그런 그들에게 희망으로 등장한 것이 ‘히틀러’였다. 공산주의를 배척하고, 소련 땅을 점령해 ‘레벤스라움(Lebensraum. 189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의 독일의 팽창 정책. '독일의 영토를 넓혀서 독일 민족이 살 공간을 마련해야만 독일 아리아 민족이 살아남을 수 있다')’을 건설하겠다는 그의 엄청난 포부. 사실 거기까지 갈 필요가 없었다. 노조를 해체하고, 노동자들의 단결권을 없애버린 것 하나만으로도 히틀러는 기업가들의 영웅이었다.


뉴딜 정책으로 인해 노동자들의 입김이 엄청나게 강해진 미국 기업가들의 입장에서 ‘히틀러의 독일’은 기회의 땅이자 미국이 쫓아갈 롤모델과 같은 곳이었다.


1933년 GM의 회장 크누센은 독일을 방문해,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재건된 독일 경제를 보며,


‘20세기의 기적’


이라며 칭송을 했는데, 이는 단순한 레토릭이 아니었다. 1930년대부터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미국 기업가들과 정치인들은 히틀러와 독일을 사랑했고, 독일을 위해 물심양면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심지어 전쟁 중에도 말이다).


1933년 히틀러의 집권 이후 독일과 미국이 전쟁을 시작하는 1941년까지 미국 기업 중 독일에 투자한 기업은 대충 헤아려 봐도 20개가 넘어간다.


포드, GM, 코카콜라, 듀퐁, IBM, ITT, 스탠다드 오일 오브 뉴저지(지금의 엑슨 모빌), J.P 모건…


다들 이름만 들어도 눈이 돌아갈 것이다. 이들은 전쟁 전에도, 제2차 세계대전 중에도 독일과 히틀러를 사랑했다. 어느 정도였는지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포드와 GM은 각각 독일에 자회사를 만들었는데, 이들은 제2차 세계대전 초창기까지 미국에게 엄청난 이익을 안겨줬다. 대서양에서 영국과 독일이 잠수함 전쟁을 벌이고, 미국 정부가 무기대여법으로 영국과 연합국에 무기를 공급할 때 이들은 독일 공장에서 무기를 찍어냈다. 하청업체가 부품을 공급하는 수준은 ‘물론’ 아니었다.


1939년까지 GM과 포드의 독일 자동차 시장 점유율은 70%였는데, 이들은 2차 대전 내내 전쟁 수행에 필요한 각종 트럭과 자동차를 생산했고, 심지어 탱크와 장갑차까지 납품했다. IBM의 독일 자회사 데호막(Dehomag)은 카드 천공기 기술을 독일에게 제공했는데, 이 기술을 바탕으로 나치 독일은 유태인 색출과 재산 압수, 처형 자료를 보다 신속하고 정확하게 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개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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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카콜라 역시 독일에 엄청난 기여를 했다. 원래 독일인의 음료수는 맥주였다. 나치 독일은 노동자들이 술에 취하지 않고, 더 많이 일하고, 더 열심히 일할 수 있도록 맥주 대신 콜라를 권장했는데, 이 덕분에 독일에서 콜라 소비가 비약적으로 늘어난다. 1934년엔 독일 내에서 콜라가 24만 3000박스가 생산됐는데, 1939년엔 450만 박스로 늘어난다. 코카콜라는 만약 독일과 미국이 전쟁을 하게 되면 콜라를 수출할 수 없게 될 것이라 판단해 독일 공장에 콜라의 대체재를 개발하게 했다. 바로 ‘환타’다.


스탠다드 오일은 비롯한 미국 석유 기업들은 히틀러에게 디젤유, 윤활유, 고무 등의 전략물자를 계속 보냈고, 심지어 합성석유 기술까지 건넨다. 히틀러의 전쟁 물자를 담당했던 알베르트 스피어는,


“합성 석유가 없었다면, (히틀러는) 결코 폴란드 침공을 꿈꾸지 못했을 것이다.”


라고 말했을 정도다. 이들 미국 기업인들은 히틀러가 폴란드를 점령하고, 프랑스를 함락했을 때 미국 내에서 승전 파티를 열 정도로 히틀러에게 호의를 보였다. 이유는 앞에서 설명한 그대로다. ‘빨갱이들을 처단하고, 기업들의 이익을 수호했기’ 때문이다.


독일에 진출한 미국 기업들은 노동자들이 스트라이크를 일으켰을 때, 불과 1시간도 걸리지 않아 게슈타포가 출동해 이들을 모두 제압하고, 공장을 정상화시키는 기적을 목도했다. 독일은 기업하기 좋은 나라였고, 히틀러는 자신들의 친구였다.


그럼 소련은? 그 대척점에 있던 나라였다. 빨갱이들의 온상이며, 노동자들에게 불온한 사상을 전파하는 악의 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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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유명한 오펠트럭, 세계 최초의 실용 제트 전투기인 ME-262의 엔진은 뤼셀하임의 오펠 공장에서 생산됐다.



이게 ME-262다.


오펠은 GM의 자회사였다. 독일에 진출해 있던 미국 기업들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착실하게 돈을 벌어 미국에 보냈다. 이때 등장한 것이 스위스의 은행이었다. 스위스의 지사가 독일로부터 돈을 송금 받고, 이걸 다시 미국에 보낸 것이다. 경영도 가능해 미국 정부의 외교 행낭을 통해 중립국이나 피점령국을 통해 직접 경영을 했었다. 독일은 자국 내 미국 기업을 ‘적성국 자산’으로 분류해서 압류한 것은 미국에 선전포고를 한 1년 뒤인 1942년이었으나 경영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미국 정부도 자국 기업이 독일과 거래하는 걸 알고 있었고, 이를 법적으로 제재하려 했다. ‘적성국 교역 금지법’으로 말이다.


1942년 이 법이 발의됐을 때, 스탠다드 오일의 유명한 ‘발언’이 나온다.


“우리가 공급하는 석유가 없다면 미국은 승리할 수 없을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을 ‘석유전쟁’이라 부르기도 한다. 석유가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데, 그 석유를 교전국인 독일에게 주겠다는 것이다. 실제로 히틀러에게 약간의 벌금을 낸 다음 계속해 독일에 석유를 공급했다. 정말 놀랍도록 뻔뻔한 행동이 아닌가? 하지만 이건 약과다. 전쟁이 끝나고 나서 미국 공군의 폭격으로 독일 내 공장이 부서졌다며 미국 기업들이 미국 정부에 배상을 요구했고, 실제로 미국 정부는 이를 배상했다. 이 정도면 뻔뻔함을 넘어 블랙 코미디라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첨언

1. <전쟁으로 보는 국제정치> 1, 2권이 출간됐다. 책은 안 팔리지만, 나름 도서관에서 대출은 되는 것 같다. 2권인 <조약>편은 5월 국회도서관 대출 TOP 10에 들었다고 한다. 대출이다. 판매가 아니다. 판매도 10위 권 안에 들었으면 한다. 이게 1만부 이상 팔려 돈을 벌 수 있는 책이 아니란 건 나도 잘 안다. 그렇지만, 용기 내서 책을 찍어낸 출판사 사람들이 종이 값은 건져야 하지 않겠는가? 솔직한 심정이다.


이 연재를 하는 이유의 90%는 내 개인적인 흥미다. 돈은 다른 글로 벌고, 이 연재는 개인적인 흥미와 재미를 충족하자는 취지였다. 그런데 어찌어찌 책이 출판되고 나니 출판사 사람들의 사정을 생각할 수밖에 없다. 최소한 초판은 건질 수 있게 도와주길 바란다. 도서관 가는 이 있으면, 책 신청이라도 해줘라. 내 평생 이런 부탁 처음 하는 건데, 출판사 사람들 보기 안타까워서 그렇다. 3권인 <태평양 전쟁>까지 찍어낸다는데, 연재 보면 알겠지만(씨바, 아직 진주만 기습 나오려면 한참이다!!) 3권은 좀 두껍게 나오든가 2~3권으로 나눠서 내야 하는데 많이 힘들어 하는 거 같다.


2. 연재가 갑자기 중단(?) 된 건 모처에 감금 돼 2달 째 영화 일을 하고 있어서 그렇다. 지금 잠깐 짬이 나 쥐어짜낼 수 있는 걸 다 쥐어짜내 이 글을 쓰고 있다. 만약, 중간에 다시 연재가 끊긴다면, 내가 딴 글(!?) 쓰는 게 발각됐다는 거다. 레지스탕스도 아니고 씨바 몰래 글 써야 한다니.



참고자료

1. 전쟁국가 일본/ 살림출판사/ 이성환

2. 호호당 선생의 ‘프리스타일’

3. 세계전쟁사/ 육군사관학교 전사학과/ 황금알

4. 러일전쟁과 을사보호조약/ 이북스펍/ 이윤섭

5. 조선역사 바로잡기/ 가람기획/ 이상태

6. 다시 쓰는 한국근대사/ 평단문화사/ 이윤섭

7. 대본영의 참모들/ 나남/ 위텐런 지음, 박윤식 옮김 

8. 나모위키

9. 쇼와 16년 여름의 패전/ 추수밭/ 이노세 나오키 지음

10. 『중일 전쟁』 용, 사무라이를 꺾다/ 미지북스/ 권성욱 지음

11. 나는 일본군, 인민군, 국군이었다 / 서해문집/ 김효순 지음





1부 

[러일전쟁]


2부

드레드노트의 탄생

1차 세계대전, 뒤바뀐 국제정치의 주도권

일본의 데모크라시(デモクラシー)

최악의 대통령, 최고의 조약을 성사시키다

각자의 계산1

8년 의 회, 던 축 

일본은 어떻게 실패했나2

만주국, 어떻게 탄생했나



외전

군사 역사상 가장 멍청한 짓

2차대전의 불씨

그리고, 히틀러

실패한 외교, 히틀러를 완성시키다

국제정치의 본질



3부

태평양 전쟁의 씨앗1

태평양 전쟁의 씨앗2

도조 히데키, 그리고 또 하나의 괴물

일본을 늪에 빠트린 4명의 '미친놈'

대륙의 각성완료, 다급해진 일본

대동아(大東亞)의 환상에 눈 먼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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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업 작가로서 바라본 먹고사니즘에 대한 적나라한 통찰


'글이 돈이 되는 기적'





펜더


편집: 딴지일보 챙타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