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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망하지 않고 배기겠느냐?" 


우리 기록에 귤강광(橘康廣)으로 남은 일본인이 있다. 대마도주의 가신으로 1586년 풍신수길의 편지를 가지고 조선에 온 자다. 머리도 반백에 나이도 들 만큼 들었는데 언행은 얄미울 만큼 거침이 없었다. 일본 사신이 올 때 고을마다 병사들을 늘어세워 놓고 위의(威儀)를 갖추는 것이 관례였는데 귤강광은 어느 고을을 지날 때 병정들이 창을 짚고 도열한 앞을 지나다가 피식거리며 툭 한 마디 던진다. "너희들 창 자루 한 번 짧구나." 아마도 몇 마디 더 덧붙였으리라. 그걸로 뭘 찌르겠느냐 우리 일본도 길이랑 비슷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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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고약한 주둥아리는 그침이 없었다. 상주 목사 송응형과 마주 앉았을 때 귤강광은 빙글빙글 웃으면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일생을 전쟁터에서 보내 이렇게 머리가 세어 버렸지만 목사 영감은 호의호식했으면서 머리가 왜 그렇게 허예지셨소?" 조선의 문약을 비웃는 말이었고 자신들의 무력에 대한 은근한 과시였다. 그 이전까지 대마도 사람들은 그저 하이 하이 거리면서 조선 사람들 비위를 맞추기 일색이었는데 귤강광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한양에 올라와 예조판서가 주최하는 연회에 참석한 그는 여전히 밉상이었다. 악공들이 풍악을 울리고 기생들이 간드러지게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는 와중에 기분 나쁜 미소만 흘리고 있던 귤강광이 갑자기 일어서 좌중 앞에 나선다. 풍악이 멈추고 기생들도 똘망똘망 귤강광을 쳐다보는데 귤강광이 통역을 불렀다. "내 말 잘 통역하거라." 그리고는 품 안에서 뭔가를 꺼낸다. 


"이게 뭔지 아느냐?" 


다들 얼굴만 마주 보며 귤강광의 손 위의 물건을 뜯어보는데 귤강광이 낄낄거리며 외쳤다. 


"귀한 것이다. 너희가 후추란 걸 아느냐?" 


그리고는 아주 우아한 폼으로 돗자리에 후추 열매를 뿌려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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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추에 목을 매달았던 서양 사람들만큼은 아니었겠지만, 조선에서도 후추는 금만큼이나 귀한 물건이었고 그 순간 연회장은 아수라장이 된다. 그래도 예조판서가 좌정한 국가 공식 연회장이었는데 관청 소속이었던 악공이나 역시 관기(官妓)들이었던 기생들이 꺄아악 우아악 환성을 지르며 돗자리 위의 후추들로 돌격해 들어갔던 것이다. 


좀 지체 높은 관리들은 어쩔 줄 모르고 예조판서도 입을 떡 벌리는데 귤강광이 자신이 연출한 아수라장을 굽어보며 깔깔 웃었다. 잡아 뜯고 주머니에 넣고 네 것이다 내가 먼저 주웠다 드잡이질을 한참 지켜보다가 숙소로 돌아가면서 귤강광은 통역에게 음산한 한 마디를 남긴다. 


"너희 나라는 망했다. 기강이 이미 무너졌으니 어찌 망하지 않고 배길 것이냐." 


국가 기관장이 '천황폐하 만세'를 부르짖고도 멀쩡하다. 전 재산 13억 검사가 퇴임한지 몇 년만에 수백억 재산가가 되었는 데도 탈세 외에는 아무 혐의도, 전관 예우도 없었다고 한다. 현직 검사장은 업체 돈으로 주식을 사서 대박을 쳐도 그냥 그러려니 해준다. 대통령의 복심이란 자가 언론사 보도국장에게 전화해서 별 지랄을 다 해도 그냥 '좀 지나쳤다' 하면 넘어간다. 모 대기업 사장은 조 단위의 분식 회계를 일삼더니만 회사가 망해가는 와중에 이르렀는데도 성과급은 챙겨야겠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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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나라 꼴을 보면서 문득 귤강광의 말을 떠올린다. 


정의고 체면이고 정직이고 절차고 그런 거 없다. 돈만 벌면 장땡이다. 숫자가 모든 것을 말하고 돈이 되면 공신이고 돈 안되면 역적이다. 대통령 아버지 추모 사업에는 수백억이 푼돈이지만 300명 넘게 죽은 참사의 원인을 밝히는 돈은 무조건 세금 낭비다. 과연 우리는 후추 앞에서 악다구니를 친 기생과 악공들하고 무엇이 어떻게 다를까. 


귤강광의 웃음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너희가 망하지 않고 배길 것이냐. 깔깔깔."





산하


편집 : 딴지일보 퍼그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