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기사 추천 기사 연재 기사 마빡 리스트

 

 

14759_29903_3247.jpg

 

정조의 성질 더러움은 널리 알려져 있다. 실록에서도 그 면목이 들어나지만, 실록은 필터링을 거친 기록이기에 진면목을 알 수는 없었다. 정조가 화를 냈다는 건 알겠는데, 정확하지 않게 기록되는 경우도 종종 있었고.


그런데 2009년, 정조가 노론의 중신 심환지에게 보낸 편지 297통이 공개되었다. 그동안 공식기록 외에는 추측만 할 수 있었던 정치의 뒷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이 귀한 자료는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간밤에 잘 있었는가? 나는 요사이 놈들이 한 짓에 화가 나서 밤에 이 편지를 쓰느라 거의 오경이 지났다. 나의 성품도 별나다고 하겠으니 껄껄 웃을 일이다.



이렇게 스스로 인정하듯 정조의 성질에 대해서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이정도 일 줄은 몰랐다. 지금부터 정조가 심환지에게 보낸 편지를 쭈욱 읽다보면, 매 편지마다 심환지를 갈구를 정조를 만날 수 있게 될 것이다. 아무리 왕과 신하라지만, 심환지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정조의 특기는 고급스러운 어휘를 사용해 맥이기. 특히 심환지의 일 처리에 있어 마무리가 부족한 점이 성상의 심기에 몹시 불편하셨나보다. 무엇이 부족한고 하니, 주로 정조와 심환지가 짜고 치는 고스톱이 외부에 살짝 알려진다든지, 아니면 정조의 의중 파악을 제대로 못해서 지시사항 1은 해놓고 2는 어정쩡하다든지 하는 것들이었다. 



얼마 전 이문원에서 조용한 틈을 타서 노론의 시패와 벽배 중 어떠한 자가 오입한 일을 이야기하였는데, 경이 그것을 서용보에게 말했다고 한다. 서용보가 듣는 것이야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마는, 내가 그에게 말하지 않은 것을 경은 함부로 이야기하였다. 나는 이처럼 경을 격의 없이 여기는데 경은 갈수록 입을 조심하지 않는다. 앞으로 경을 대할 때 나 역시 입을 다무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이 없으니 우스운 일이다. 이른바 '이 떡 먹고 이 말 말아라.'는 속담을 다시금 명심하는 것이 어떠한가?


경은 이제 늙어서 머리가 세었다. 게다가 처지와 신임이 어떠한가? 그런데 매번 입조심 한 가지 일에 대해서만은 탈이 생기는 일을 면치 못하니, 경은 생각 없는 늙은이라 하겠다. 너무나도 답답하다.

1797년 4월 10일



"경은 생각 없는 늙은이야!"라며 돌직구를 날리는 그의 성격이 느껴지는가? 요약하자면, 이런 상황이다. 


무한도전.E327.무한상사_1부.130427.HDTV.XViD-HANrel.avi_20130428_205258.299.jpg


심환지는 툭하면 쿠사리를 먹었고, 그것을 해명하는 편지를 보내야 했을 것이다. 특히 정조는 심환지와 나눈 비밀이 조금이라도 새어나가면 매우 민감하게 반응했고, 중요한 정치적 내용이 담겨있는 편지의 처리에 대해서 각별한 관심을 가졌다.




이 편지를 보고 나면 즉시 찢어버리든지 세초하든지 하라. 늘 한가지 염려가 떠나질 않는 것은 집안에서라도 혹시 조심하지 않을까 해서다......이러한 서찰은 경이 스스로 세초하는가 아니면 경의 아들을 시켜 세초하는가? 처리하는 방법을 듣고 싶으니, 나중의 편지에 반드시 한번 알려주어 이 의심을 풀어주기 바란다.

 1797년 7월 7일



이런 내용에도 불구하고 심환지는 편지를 없애지 않았다. 아마도 '네 이렇게 저렇게 잘 처리하고 있습니다' 라고 답장을 보내놓고 집안 깊숙히 보관해온 듯 싶다. 그것은 심환지가 훗날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정치적 위기에 대비한 실탄이었다. 다행히도 이 편지들이 정조를 향하는 화살이 되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한편 심환지가 불충한 마음으로 태우지 않던 편지들이 그대로 남아 지금 아주 귀한 자료가 되었으니 심환지의 불충에 감사해야 할 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정조가 심환지를 마냥 갈구기만 한 것은 또 아니었다.



부인은 쾌차하였는가? 삼아를 보내니 약으로 쓰도록 하라

1796년 11월 30일


요새는 내가 편지를 보내지 않으면 애당초 경이 먼저 인편을 보내는 경우가 없으니, 경도 근래에 이러쿵저러쿵 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그러는가

1797년 6월


소식이 갑자기 끊겼는데 경은 그동안 자고 있었는가? 술에 취해 있었는가? 아니면 어디로 갔었기에 나를 까맣게 잊어버렸는가? 혹시 소식을 전하고 싶지 않아 그러하였던 것인가? 나는 소식이 없어 아쉬웠다. 이렇게 사람을 보내어 모과를 보내니 아름다운 옥을 얻을 수 있겠는가?

1797년 6월 24일


 

심환지도 휴먼일진데, 맨날 갈굼만 먹었다면 정조의 정적이 됐을 것이다. 하지만 이 양반의 이 엄청난 츤데레력을 보라. 심환지 와이프의 병환을 노심초사하는 것은 기본이요, 종종 약재를 보내기도 하였다. 심환지에게서 편지가 잘 안오면 찡찡거리는 것을 너머, "왜 내가 꼭 먼저 보내야 답장이 오는건데?! 너님이 먼저 좀 보내봐"라며 마치 연애하는 커플같은 다툼을 하기도 한다. 저 문구를 보고 머리가 희끗한 심환지는 유치함을 느끼고 실소를 지었을까, 아니면 성상의 불편한 심기를 느끼고 식은 땀이 났을까.


한번은 정조가 심환지를 불평하는 말을 다른 사람에게 했는데, 이것이 심환지에 귀에 들어가 잠시 관계가 소원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심환지는 정조에게 먼저 편지를 보내고, 정조는 '님 삐진거 같아서 마음이 안좋았는데 사실 그 때 내가 너무 심했어 미안ㅋ"이라며 화해하기도 한다.


베지터.jpg


이렇게 정조가 심환지를 갈구는 것은 한편 심환지를 고급 인력으로 키워 써 먹고자 하는 의도도 있었다. 꼼꼼하고 예민하기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그의 뜻을 정확히 처리해주지 못하는 심환지를 보며 화가 나는 것도 그의 성격상 일면 이해가 가기도 한다.



정리곡은 피곡이다. 봄에 한 알을 나눠주어 가을에 만 알이 익도록 하겠다는 지극하고 성대한 뜻은 미물도 감동시킬 만하다. 그런데 어떤 놈의 관리가 이처럼 공적인 일을 빙자하여 사사로운 이익을 챙기는 짓을 하는가? 자애로운 은혜를 널리 펴기 위해 마련한 본뜻이 도리어 원망을 부르는 단서가 되었으니, 여기에 생각이 미치면 분통이 터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1797년 10월 5일



정조의 수원 화성 행차는 수차례 시행되었던 정치적 이벤트였다. 이런 행사 후에는 늘 인민에게 베푸는 곡식이나 물자를 충분히 준비하였고, 행사 후에 남은 곡식을 봄에 꿔주고 가을에 거둬들이는 제도를 시행하게 하였다. 그런데 이 정리곡을 가지고 일선에서 장난을 치는 일이 발생하자, 정조는 진노한다. '어떤 놈의 관리가' 운운하며 '분통이 터지'는 심경을 토로한다.

 

그런데, 정조는 이 일 처리를 심환지가 총대를 메도록 편지로 지시한다. 정리곡의 폐단과 처리 방법을 심환지가 상소케 하여 심환지의 공을 만들어 주려는 의도였다. 심환지는 정조의 말대로 상소를 올리니, 실록을 보자.



정조 21년 10월 7일 1797년 <정리곡을 돈으로 나눠주고 쌀로 받아들이는 등의 폐단을 논의하다>

 

우참찬 심환지가 아뢰기를,

 

(중략)

 

"그런데 만일 감영이나 군읍의 신하가 한결같이 법을 농락하는 간인(奸人)에게 내맡겨둔 채 성상의 뜻을 세상에 알리는 방법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참으로 사람의 마음이 없는 자입니다. 더구나 재작년 호서에서의 거행이 소란해짐으로써 비변사의 계(啓)가 올라가서 신칙하는 하교가 계시기에 이르렀고 보면 듣고 보는 바에 여러 사람이 모두 경동(警動)하여 두려워할 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듣건대, 남쪽 지방의 여러 읍에서는 오히려 혹 돈으로 나누어 주고 정미(正米)를 강제로 거두어들이는 곳이 있는데 돈 수십 문(文)을 나누어주고 쌀 7, 8두를 거두어들이고서 그것을 정리곡(整理穀)이라 한다 합니다. 그밖에 제도(諸道)에서도 봄에 수십 닢을 흩어주고 가을에 3, 4배를 거두어 들이는데, 돈을 돌려주는 것이 습속이 되어 이익을 꾀하는 수단으로 삼고 있다 하니, 민간에서 전하는 말이 듣는 이로 하여금 놀라고 의혹스럽게 합니다.

 

성상께서 먼 지방과 가까운 지방을 균일하게 보아 자전의 은덕을 널리 베풀려 하는 지극한 정성과 간절한 마음을 막아서 행해지지 못하게 하고 도리어 민간에 폐해를 끼치는 실마리를 제공하게 하다니 생각이 이에 미치면 어찌 통분하지 않겠습니까. 묘당으로 하여금 엄히 조사해서 적발하게 하소서."



심환지에게 "야 정리곡 문제 고발하는 상소 올려"라는 편지를 보내고 이틀 뒤, 심환지가 고대로 상소를 올린다. 정조는 심환지에게 상을 내리며 적극적으로 이 문제를 처리하였다. 자신이 아끼는 다른 신하들에게 주어도 되는 공을 굳이 심환지에게 준 것을 보면, 심환지를 매우 아꼈나 보다.

 

실제로 정조는 심환지를 위해 수차례 애쓰기도 했다. 이렇게 농담 반 불평 반 하는 편지를 보내면서 말이다.



경을 위해 허둥대는 것이 마치 신부의 수모(새신부의 단장을 도와주던 여성)꼴이니, 배를 잡고 웃을 일이다. 

1797년 12월 1일



심환지는 정조와의 친목질을 사적으로 이용하기도 했는데, 서자가 여전히 과거에 붙지 못해 걱정하고있다는 글을 보냈나 보다(추측이다). 아무리 그래도 "이번에 과거 좀 붙게 잘좀 봐주십쇼 헤헤"이러진 않았겠지. 정조가 해 줄 수 있는 건 과거 날짜를 앞당기는 것이었는데, 300명 중에도 들지 못하자 "그 놈 떨어질 줄 알았어. 경은 너무 아쉬워 마셈."이라며 병주고 약주는 위로를 보내기도 한다.



심능종의 일은 이미 마음 속에 굳게 정하였다. 어찌 사양하는 것을 용납하겠는가? 과연 과거를 치르기 전에 올라오겠는가? 경은 그가 글을 못하는 것을 잘 아니, 경의 아들 한 명을 일으켜 일하게 하는 것이 어찌 남들과 별다르다고 할 수 있겠는가? 다만 하는 방법은 반드시 각별히 잘 도모해야 할 수 있을 것이다. 무슨 의견이 있는가? 언제쯤 올라올지 자세히 답하는 것이 어떠한가?

 

300장 안에 들지 못하였으니 이미 그럴 것이라 생각하였다. 앞으로 기나긴 세월이 있으니 어느 때인들 못하겠는가? 하지만 내가 굳이 이번에 하려고 한 까닭은 경이 많이 늙기 전에 자식이 과거에 합격하는 경사를 보도록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1797년 7월 13일




물론 정조가 주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때론 삥을 뜯기도 했다. 



대저 여름에 접어든 이후로 오랫동안 꿩을 맛보지 못했는데, 받은 꿩 몇 마리를 나누어주어 식사 때 반찬으로 삼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니, 소홀히 여기지 말라. 이만 줄인다 


 

'소홀히 여기지 말라'라고 적었지만, '소홀히 여겼다간 가만 안둘거야'라는 반 협박성 문구가 사뭇 귀엽기까지 하다.

 

 

b1654a6d2d70844ab6d2234cb32b2ceed1260eb7098a3168fd3e9dfae54d0db9.JPG

 

한편 심환지가 일생 일대의 휴가인 금강산 여행을 가려고 하자, 정조는 적극적으로 배려해준다. 정조는 한 번도 가지 못한 곳이고, 앞으로도 가기 힘들테지만 부러워하는 것과 동시에 휴가 일정을 조정해주며 인삼, 양위탕, 육군자탕, 청심원, 소합원, 제중단, 구미청심원, 사탕환, 계자환 등등등의 약재까지 보내준다.

 


만 이천 봉을 유람하는 일이 얼마나 통쾌한 일이며 대단한 구경거리인가? 공명을 실컷 누린 사람이 또 산수의 즐거움까지 누리니, 과연 치우친 것인지 온전한 것인지 모르겠다

1798년 8월 10일 

 

금강산 여행은 목욕하러 간다는 명분을 내세운다면 흉년이라도 안 될 것이 없을 듯하다. 모쪼록 하루 이틀 안에 단자를 올리고 출발하는 것이 어떠한가? ...단지 양양에서 약수를 마시고 이천에서 목욕한다고만 하는 것이 좋겠다.

1798년 8월 11일



'공명을 실컷 누린 사람이 또 산수의 즐거움까지 누리니, 과연 치우친 것인지 온전한 것인지 모르겠다'는 말은 "씨바 나도 못 가는 금강산인데 넌 가냐?"라는 말의 귀여운 투정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조정의 중신이었던 심환지가 유유자적 여행을 가는 것에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사람도 있었다.



아침에 서용보의 편지를 받아보니, 경의 이번 여행은 전혀 긴요하지 않은 일이라면서 심지어 장차 사설이 많아질 것이라고 하였다. ......이 사람은 그저 염량세태만 볼 뿐이다. 참으로 호로자식이라 하겠으니, 답답한 노릇이다. 근래의 꼴은 본색을 점점 가리지 못하고 있으니 어찌하겠는가? 



그런데 이 서용보란 사람이 정조나 심환지의 정적이면 이렇게 '호로자식' 운운하며 까는 것이 이해가 가는데, 서용보는 이조참판, 대사헌, 이조판서, 예조판서를 역임하였던 정조의 측근이었다. 정조의 최측근은 아무래도 욕을 바가지로 먹는 위치인 것 같다.



서용보의 일 처리가 이처럼 더디고 둔하니, 껄껄 웃을 일이다 

1798년 1월 19일


이조판서는 늘 습속에 익숙한 경우가 많아 곳곳마다 이처럼 파탄을 드러내니, 참으로 아껴도 도와줄 수 없는 사람이라 하겠다. 이서구의 편지는 나도 보았다. 어두운 거리의 밝은 등불이라 하겠다. 과연 이조 판서에게 힘써 권하여 받아들이고 사죄하도록 하였다

1799년 12월 26일


이렇게 제3자가 들으면 난감할 정도로 신나게 깐다. 물론, 정조와 서용보만 친한 것은 아니었고 정조-심환지-서용보간에는 상호간의 비밀 통신망이 있었다. 정조는 때론 서용보를 이용하여 심환지를 움직이게 하고, 또 때로는 심환지를 이용하여 서용보를 움직이게 하며, 아예 두 명에게 동시에 명을 내리기도 했다.


250px-Sim_Hwan-ji.jpg

심환지


서용보가 이처럼 중용된 이유는, 정조의 정보통이었기 때문이다. 서용보는 신하들이 서로 주고받은 편지도 입수하여 정조에게 보고할 정도로 정보 수집 능력이 탁월한 정조만의 국정원이었다. 지금 국정원처럼 일 처리가 다소 미흡하여 쪼인트 좀 까였나 보다. 물론 이런 능력은 점점 성장해 정조 사후에도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1819년 영의정에 오를 정도로 정치적인 비중이 높아져 갔다. 

 

서두에 언급한 것처럼 정조는 서용보 뿐 아니라 심환지의 일 처리도 졸라 맘에 안 들어 했다.



이조판서의 정사는 경이 서용보에게 모두 맡겨 성과를 이루도록 요구하는 것이 어떠한가? 경은 일하는 것이 맹렬하지 않아 성과를 이루도록 요구하는 것이 분명치 않으니 어찌 답답하지 않겠는가?

1797년 7월 7일



이렇게 하여 "야 그 따위로 할려면 서용보한테 일 다 줘"라며 면박을 준다. 심환지에겐 자존심이 팍 상하는 편지였을 것이다. 심환지도 이러한 정조의 핀잔을 듣고 일 처리를 개선했는지



황필이라는 놈을 잡아 가두었다는 소문이 사실인가? 그렇다면 경에게도 이처럼 호탕한 기운이 있으니 신기한 일이다. 

1798년 7월 19일



늘 물러터지기만 했던 심환지가 엄격한 일 처리를 했다는 소문을 듣고 '헐 님한테도 그런 면모가..?'하고 놀리듯 감탄하는 편지도 보냈다. 매일 같이 갈구는데 심환지도 변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1-8.jpg

 

서찰에서 정조의 측근 중 정조에게 욕을 얻어듣지 않은 인물은 어용겸이란 사람이다. 그는 1796년 이후 승지와 이조참의를 역임하는 등 정조의 측근으로 떠오른 인물이었다. 1798년 9월 그가 사망하자 '그의 후임자를 구하기 어렵다'고 할 만큼, 그는 정조의 막후 역할 중개자 노릇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어용겸이 후임으로 김희순을 지목하였지만, 정조는 김희순에 만족하지 못했다. 



대저 김희순은 어용겸에 한참 못 미친다. 게다가 그의 지혜와 나를 향한 정성도 고인 보다 못하니, 늘 고인을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탄식이 나온다

 1800년 5월 30일



이렇게 아꼈던 어용겸이 병에 걸려 사망하자, 어용겸의 약재를 담당했던 심환지는 또 엄청나게 까인다.



강(의관 강명길로 추정)의 말을 들어보니 어용겸의 병에 삼계를 썼다가 통증이 심해졌다고 하는데, 말이 되는가? 이전에 경을 통해 당부한 말이 있었는데, 어째서 전혀 반대로 약을 썼는가? 사소한 일 같지만 왜 이렇게 내 말을 믿지 않는가? 약 처방이 크게 잘못되었으니 편작인들 손쓸 방법이 있겠는가? 이태만이라는 자는 도대체 누가 권하여 보냈는가? 이런 무리들을 어찌 가까이 할 수 있겠는가?

1798년 8월 6일



한의학에 대해서 공부를 많이 한 정조는 스스로 약을 처방할 정도로 약재 쓰는 법에 대해서 누구보다 자신 있게 주장했다. 그가 승하할 때에도 스스로 처방을 내려왔으니. 전하, 약은 약사에게 진료는 의사에게입니다... 이런 깐깐한 정조가 어용겸에 대한 처방을 마음에 안 들어 했으니, 편지에서 보듯 심환지에 대해 몹시 화를 냈다. 그도 그럴 것이, 정조는 승하할 때까지 어용겸 같이 자신의 의도를 정확히 수행하는 아바타를 찾지 못했나 보다. '쓸만한 승지가 없다'며 심환지에게 불평을 하기도 하였던 것을 보면 말이다.


물론 우리의 츤데레 정조가 화만 내었던 것은 아니었다.



지금 내리는 비는 감로와 같다. 이를 보자 너무나도 기뻐 나도 모르게 손과 발이 덩실덩실 춤을 춘다,

1798년 5월 4일



오랫동안 가뭄이 지속되어 걱정을 많이 하던 정조는, 오랜만에 내리는 비를 보자 '덩실덩실' 춤을 춘다. 군주로써 백성과 국가를 염려하는 마음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돈녕부 참봉과 선공감 가감역의 일을 듣고서 배를 잡고 웃었다. 

 1797년 12월 23일



이건 또 골때리는 에피소드다.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새로운 돈녕부 참봉으로 김기서를, 선공감의 아전으로 윤두전을 임명했다. 그런데 김기서의 기(基)를 기(箕)로 잘못 써서 김기서는 관직을 받지 못한다. 또 선공감의 아전이 임명장을 전하기 위해 윤두전을 찾았으나, 윤두전이 아직 입사할 나이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관직을 받지 못한다. 이 무슨 아마추어 같은 일 처리인지. 심환지는 이조판서였기에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의 책임자였고, 죄를 청하였다. 정조가 보고를 받고 난 뒤의 반응은 가히...


e0020102_03085040.jpg

 

정조는 심환지를 이용하여 처리하기 난감한 문제를 아주 능숙하게 풀어나갔다. 두 건의 에피소드를 준비했는데, 첫 번째는 죄수의 사형에 관한 에피소드다.


충청 감영의 장교가 선전관이 풀어준 죄수를 도로 잡아 놓고서, 충청도 관찰사는 다시 가두고서 장계를 올리는 일이 발생한다. 정조는 이에 몹시 빡친다. 선전관이라 함은 왕명을 받은 사람인데, 왕명으로 풀어준 죄수를 충청 감영의 장교와 관찰사가 도로 가두었으니 화가 날 만도 하다.



명색이 감영의 장교라는 자가... 어찌 도로 잡아갈 수 있으며 어찌 도로 가둘 수 있으며 어찌 사유를 갖추어 장계를 올릴 수 있단 말인가?


이제 다른 말은 필요 없다. 장계를 입계하거든 하교를 낭비할 것도 없이 해당 장교를 효수하게 하는 수밖에 없다. 난들 어찌 이처럼 어질지 못한 일을 하고 싶겠는가? 하지만 나라의 체모와 일의 체면에 관계된 일이니, 한때의 어질지 못함은 사소하지만 만세토록 전해질 법도는 중요하기 때문이다. 사람의 목숨은 지극히 중요하다. 해당 장교에게 무슨 책임이 있겠는가? 하지만 이러한 일들은 소홀히 할 수 없다. 누차 헤아린 일이다. 세 명의 죄수는 뭇사람들의 청에 따라 법대로 처형한다 하더라도, 해당 장교도 마찬가지로 법대로 해야 한다. 이 또한 하교할 수는 없지만 신하들이 청할 수 있는 일이다. 사람을 살릴 일을 생각하여 장계는 아무쪼록 입계하지 않는 것이 어떠한가? 한시바삐 도모하도록 하라.


즉각 도모하여 사람을 살리고 선을 쌓도록 하는 것이 어떠한가?

1798년 6월 13일 



왕명을 정면으로 어긴 충청 감영의 장교는 법대로 처결할 시 사형의 중죄였다. 또한 풀려났던 세 죄수가 다시 감옥에 들어온 만큼, 세 죄수를 법대로 처형한다면 해당 장교 역시도 법대로 처형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이에 정조는 심환지에게 "아예 이 건에 대해 장계를 올리지 마. 그럼 다 살릴 수 있어. 어때?"하며 은근히 권유하고 있다. 

 

이러한 막후 정치는 화완옹주를 처리하는 문제에서 절정을 발한다. 화완옹주는 사도세자의 동생이자 정조의 친고모였지만, 그녀의 양자 정후겸, 홍인한과 함께 정조를 음해하였다. 정조는 즉위 직후 정후겸과 홍인한을 죽였지만, 화완옹주는 보호하였다. 결국 1799년 화완옹주를 석방하라는 어명을 내리는데, 신료들은 정조에게 일제히 상소를 올려 반대하였다. 정조가 이를 단호하게 거부하자 정치적 긴장감은 며칠째 이어졌다. 그러자 정조는 출구전략으로 심환지와의 공작을 모의한다.



일전의 처분에 대해서는 알아들을 만큼 이야기하였고, 의리가 지극히 엄중하다. 경의 경우에는 김종수가 죽은 뒤로는 경이 주인의 자리를 양보해서는 안 된다. 일이 명의록의 의리와 관련되니, 차라리 지나칠지언정 미치지 못해서는 안 된다. 내일 신하들을 소견할 것인데, 반열에서 나와서 강력히 아뢰고 즉시 뜰로 내려가 관을 벗고 견책을 청하라. 그러면 일의 형세를 보아 정승의 직임을 면해주든지 견책하여 파직하든지 처분할 것이다. 그 뒤에 다시 임명하는 방법도 생각해 놓은 것이 있으니, 이렇게 마음먹고 있으라.



심환지는 정조의 서찰을 받고 훌륭한 연기를 선보이며 정조의 말을 그대로 실행한다. 실록을 보자.



정조 23년 3월 7일 1799년 <정처 석방 문제로 신하들과 차대하다>

 

심환지가 아뢰기를,

 

"신이 무슨 면목으로 정승의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을 수 있겠습니까. 나라의 은덕을 두터이 입었는데 어찌 감히 물러가기를 구하는 마음을 먹겠습니까. 그러나 정성이 부족하여 성상의 마음을 돌리지 못하였으니, 의당 물러가서 처벌내리기만을 기다리겠습니다."

 

하고, 섬돌 아래에 엎드려 관을 벗었다. 

(중략)

이어 하교하기를,

 

"지금에 있어서는 국사(國事)의 체면이 중하기 때문에 공경하는 예는 돌아볼 겨를이 없다. 더구나 오늘 하교한 것을 듣고 이런 행동을 하였으니, 이는 내가 이 대신에게 알고 있던 바가 아니다. 우의정 심환지를 파직하라."



이것은 정조가 출구전략으로 "심환지야 너가 총대 좀 메라" 라고 시킨 것이다. 심환지는 모든 신료들의 반대 의견을 대표하여 파직당하는 척을 했지만 심환지는 심환지대로 조정에서의 위상이 올라갔고, 정조는 심환지의 파직을 통해 화완옹주에 대한 석방 건을 관철시켰다. 그리고 정조는 얼마 지나지 않아 심환지를 영중추부사에 제수하여 심환지의 정치적 등급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켜준다.


이것은 하나의 '공작'이었지만 난국에 빠진 정국을 풀어가는 동시에 정조와 심환지와 화완옹주 모두를 살리는 방법이었다. 친박님네들은(특히 황 총리께서는) 심환지의 이 훌륭한 아바타 정치력을 좀 본받아야 할 것 같다.


정조와 심환지 간의 편지는 정조가 승하하기 전까지도 오갔다. 

 


편지를 받고 위안이 되었다. 나는 뱃속의 확기가 올라가기만 하고 내려가지는 않는다. 여름 들어서는 더욱 심해졌는데, 그동안 차가운 약재를 몇 첩이나 먹었는지 모르겠다. 앉는 자리 옆에 항상 약바구니를 두고 내키는 대로 달여먹는다. 어제는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기에 어쩔 수 없이 체면을 차리려고 탕제를 내오라는 탑교를 써 주었다. 올 한 해 동안 황련을 1근 가까이나 먹었는데, 마치 냉수 마시듯 하였으니 어찌 대단히 이상한 일이 아니겠는가? 이 밖에도 항상 얼음물을 마시거나 차가운 온돌의 장판에 등을 붙인 채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는 일이 모두 답답하다. 이만 줄인다.

1800년 6월 15일



이 편지를 보내고 약 보름 뒤, 정조는 승하한다. 정조가 죽자 심환지는 너무나도 비통해했다.



정조가 세상을 떠나니 부군이 애통해하며 살고자 하지 않았다. 국상에 상복을 벗은 뒤 집으로 돌아와서 집안사람과 함께 서로 향하여 곡을 하였다. 그때에 흘러내리는 눈물이 물결처럼 얼굴을 덮어 흐르니, 보는 사람이 감동하여 울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아침저녁으로 국상의 곡하는 자리에 참여하였다. 슬픔이 이르면 무시로 사실에서 곡읍하니 곁에 있는 사람들이 곡을 그치라고 권할 수도 없었다. 

심환지의 손자 심의요



비록 신하와 군주라는 한계가 있었지만 평생의 정치적 동지이자, 소중한 벗을 잃은 슬픔은 매우 컸을 것이다. 이후로 심환지는 영의정에 올랐으나, 정조 승하 후 순조 2년 그도 세상을 뜬다. 영의정이었지만 정조의 승하는 심환지, 서용보 등 정조의 측근들에게 정계에서의 영향력이 급격히 줄어들게 하였다. 심환지 역시 이를 예감했을지도 모르겠다.

 

 images (1).jpg

정조 어찰 중 한글로 '뒤쥭박쥭'이라고 써져 있는 편지


정조어찰 중 이미 가가(ㅋㅋ), 호로자식(호종자)등의 표현은 대중에게도 많이 알려졌지만, 가가는 생각보다 사용빈도가 높아서 다소 의외였다. 그런데 "배꼽을 잡고 웃었소 ㅋㅋ"라는 표현이 붙은 사연들 중 많은 케이스가 정조가 누군가를 엿멕였거나(생명이나 귀양 등 중형을 내리지 않게 멕이는), 누군가 멍청한 짓을 했거나, 정조와 심환지가 짜고 벌인 일에 조정이 그대로 흘러가는 것에 성공했을 때라는 것을 보면 확실히 심보가 고약하긴 하다. 별로 친해지고 싶지 않은 상사일 것 같다. 어느 날은 아침부터 날씨가 좋아서 유생들을 모아다가 서로 재주를 겨루게 하였고 그래서 기분이 좋아썽 헤헤 이러는 것을 보니 정말로 가까이하고 싶지 않은 상사다..

 

또 한가지 단어를 두 번 이상 써서 강조하는 표현도 보이는데, 이를테면 "결불가불가야"라는 표현이다. 번역은 '절대로 불가하다'로 쓰였는데, 왠지 나 같은 무뢰배가 느끼기엔 "그거 하면 죽는다 진짜"정도의 뉘앙스로 다가온다. 사실 정조만 쓰는 것도 아니지만, 정조와 우의정이나 되는 국가의 최고 수장들의 대화라니 '격의 없이 좋아 보인다'라고 받아들여야 할까.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정이, 군왕과 신하 사이의 규범이, 정치인과 정치인 사이의 합의가 그대로 남아 있는 이 서찰들을 독자제현께서는 어떻게 읽으셨는지. 더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으시다면 관련 도서를 꼭 읽어보시기 바란다. 필자의 졸문에 다 담지 못한 많은 이야기들이 아직도 남아있으니.




* 참고 및 출처

<정조어찰첩> 안대회, 이상하, 김문식(성균관대학교출판부)

<어찰첩(御札帖)으로 본 정조(正祖)의 인간적 면모> 안대희

<『정조어찰첩(正祖御札帖)』의 사료적 성격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와의 대조를 중심으로> 장유승






 빵꾼


편집 : 딴지일보 cocoa

Profile
내꿈은잉여왕http://jabmoonga.tistor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