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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그녀는 '일생'을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공통점을 지닌 것 같다. (아직 '일생'이란 단어를 쓰기에는 나의 신체와 정신적 능력은 쇠퇴하지 않았다고 생각하지만, 통상적으로 쓰이는 이 단어의 용례에 따라 표현해보겠다.) 이건 어쩌면 나의 아버지가 그녀의 아버지와 기질적으로 구십 퍼센트 이상의 동질성을 지닌 분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녀 아버지의 이력이야 워낙 많이 알려진 터라 따로 서술할 필요는 없을 듯하지만, 나의 아버지에 대해서는 모르는 이가 대부분일 테니 간략하게 몇 가지 기억나는 사실을 토대로 이야기하고자 한다.

 

아버지는 열여덟 나이에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고향 마을에 진주한 인민군의 소집령에 자원입대를 하셨다. 믿지 못하는 나에게 '김일성 장군의 노래'를 완창하는 것으로 아버지는 자신의 이력을 증명하였다. 요즘이야 유튜브 검색하면 각종 버전의 '김일성 장군의 노래'를 찾을 수 있지만, 걸핏하면 간첩단 사건이 뉴스에 등장하던 당시에 안방에서 울려 퍼지는 그 노래는 은은한 공포감과 생소한 호기심을 동시에 불러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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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당시 인민군의 모습


낙동강 전투 투입을 목전에 두고 훈련을 하던 아버지는 인천상륙작전으로 인민군이 후퇴하자 고향 마을에 남겨졌다고 한다. 그는 곧바로 인민군복을 벗어 던지고, 이번에는 빨치산 잔당들을 토벌하기 위해 개설된 조직인 '의용 경찰'에 지원해 소백산맥 일대의 빨치산 토벌에 동원되었다. 이것 역시 강요가 아닌 자원이었다. 남한 운동권에 주체사상을 보급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했던 강철 김영환이 사상전향을 하고 북한민주화운동을 시작하자 그의 옛 동지 하나는 '사상적 널뛰기'라 비난한 바 있는데, 나야말로 나의 지적 능력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아버지의 사상적 널뛰기의 배경이 무엇 때문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어느 날 작정하고 질문을 던졌을 때 답변하던 아버지의 살기 어린 눈빛을 나는 잊지 못한다. 


"총을 잡고 싶어서였지. 전쟁통에 어깨에 총대 메고 돌아다니면 아무도 감히 나랑 눈도 못 마주쳐. 그 기분이 얼마나 끝내주는지 아냐? 안 겪어본 사람은 죽었다 깨나도 몰라." 


아버지의 말에서 나는 '큰 칼을 차고 싶어서' 가르치던 학생들을 내팽개치고 일제의 허수아비 만주국 육사에 입대한 그녀의 아버지를 떠올린다. 해방 이후 국군에 입대하여 남로당 프락치로 활동하다가 동료들을 모조리 밀고하고 자신만 살아남았던 그의 행적과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김일성 장군의 노래를 크게 부르며 거리를 활보하다가 다시 빨치산을 토벌하기 위해 지리산 일대를 뒤지고 다녔던 나의 아버지의 행적. 사상이라는 관점으로 바라보면 죽는 날까지 풀 수 없는 수수께끼이지만, '권력의지'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면 순식간에 모든 의혹이 풀려나간다.

 

하지만 아버지에 대한 나의 평가가 처음부터 박했던 것은 아니다. 어린 시절 나는 아버지를 무척 좋아하고 존경했었다. 아버지는 학원에서 서예와 일본어를 가르치는 것을 일생의 업으로 삼았던 사람이었다. 틈만 나면 책을 읽었고,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아버지가 한 마디씩 위대한 철학자의 말을 인용해가며 삶의 지혜를 전할 때면 좌중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끄덕이며 '역시~'와 같은 추임새를 넣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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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최종학력이 국졸이라는 것이 나에게는 오히려 또 다른 존경의 이유가 되었다. 33년생인 아버지는 소학교 졸업과 함께 해방을 맞이했고 할아버지는 아버지를 중학교에 진학시키지 않고 옛날식으로 서당에 보냈다고 한다. 할아버지가 무슨 마음으로 그런 결정을 했는지 나는 모른다. 혹시 일제가 물러났으니 다시 조선왕조가 들어서고 과거시험이 부활할 것이라고 내다본 탓은 아니었을지 추측은 하지만, 본인에게 직접 확인해볼 기회는 없었다. 아무튼 할아버지의 결정 때문에 아버지는 소위 '간판'을 획득하지 못했고, 그럴싸한 직장에 취업할 기회는 원천봉쇄되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독학으로 깊은 지식을 쌓았고, 비록 그럴싸한 졸업장은 없지만 누구 못지않은 통찰력을 획득했다. 아버지가 틈만 나면 뒤적이시던 누렇게 빛바랜 삼성당출판사의 세계사상전집, 나에게는 정체 모를 단어들의 기묘한 조합에 불과했지만, 아버지는 그 책들을 읽고 또 읽으며 마음에 드는 책 속의 구절들을 노트에 필사하셨다. 하지만 세상은 그런 노력을 알아주지 않았고, 좌절한 천재들이 흔히 그러하듯, 아버지는 저녁이면 술잔을 기울이며 울분을 삭였고, 그런 심정도 알아주지 않고 돈 못 번다고 바가지를 긁어대는 어머니에게 가끔, 실제로는 꽤 자주, 손찌검도 하셨지만, 아버지에 대한 나의 믿음은 확고한 것이었다.

 

아버지는 내가 학문에 대한 자세를 갖추는 데 여러 측면에서 지대한 영향을 끼친 분이셨다. 어느 날 아버지는 시골 촌로들의 소위 지식 자랑이라는 것에 느꼈던 환멸을 내게 말한 바 있었다. 


"시골 노인네들이 말하는 지식이 뭔지 아냐? 어디 옥편에서도 찾기 힘든 글자 하나 찾아내서 그거 아냐고 물어보고 모르면 면박 주고 그런 게 그 사람들 말하는 지식이야. 어이, 자네, 공부 좀 한다고 설치는데 '자지 조' 자를 어떻게 쓰는지는 아는가? 뭐 이런 식으로." 


그러나 나는 보라는 달은 쳐다보지 못하고 손가락을 쳐다보고야 말았다. 


"예? '자지 조'요? 세상에 그런 글자도 다 있어요?" 


"이놈의 자식, 있으니까 있다고 그러지 없는 걸 있다고 그러냐?" 


그렇지만 나는 확인해보고 싶었고, 대략 사만오천 자가 수록된 '장삼식 옥편'을 뒤져 기어이 자지조를 찾아내고야 말았다. 그곳에는 '고무레 정(丁)'자를 뒤집어놓은 형상의, 누가 보더라도 한자는 상형문자임을 강렬하게 납득시키는 두 획의 글자가 우뚝 솟아 있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중국 남성들 전원에게 생식기가 없지 않은 이상, 그것을 나타내는 글자가 있는 것도 당연한 일이지만, 어린 나는 오롯이 자지만을 뜻하는 한자가 있다는 사실이 마냥 신기할 따름이었다. 어쨌든 아버지가 하시고 싶었던 말씀의 요지는 부분보다는 전체를 중시하라는 말씀이셨는데, 워낙 강렬한 예시 덕에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교훈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이런 아버지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기 시작한 것은 중학교 2학년 무렵부터였다. 당시 보이저 2호가 토성에 근접비행하며 토성의 숨겨진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사진을 전송... 아뿔싸 나의 연식을 적에게 알려서는 안 된다...이 아니라, 마션이 화성에 착륙하는... 아무튼, 엄청난 대사건이 벌어졌다. 또래의 아이들에게 천문학 붐이 일었고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는 아이들이 읽고 싶어 하는 책 일 순위에 등극했다. 나 역시 코스모스를 읽었고, 그것으로 성이 안 차 천문학 관련 서적들을 읽던 중, '상대성이론'을 접하게 되었다. 나에게는 무척이나 친숙했던 그 이름, 상대성 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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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성 이론은 아버지의 단골 레파토리였다. 술자리에서 갑론을박이 벌어졌을 때 좌중을 제압하는 필살기로 아버지는 상대성이론을 들고 나왔고, 내 기억에 그것은 단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었다. 


"여러분 인류 최고의 천재라는 아인쉬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들어보셨습니까? 여름이 있으면 겨울이 있고, 남자가 있으면 여자가 있고, 모든 것은 상대적인 것이다. 대충 이런 것인데, 지금 여러분에게 힘든 일이 있다면 또 반대로 좋은 날도 찾아오겠죠." 


대략 이런 식으로 아버지는 말씀을 이어나갔고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탄복하곤 했다. 아버지는 술자리에 나를 합석시키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 덕에 나는 여섯 살의 나이에 아인쉬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이해한 인류사에 보기 드문 천재로 성장할 수 있었다. 가끔 인류 최고의 천재가 말했다기에는 심하게 평범한 내용이 아닌가 하는 의혹이 들기는 했지만, 아버지의 지식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는 그런 의혹을 떨쳐버리게끔 작용했다. 그런데 조경철 박사의 저작으로 기억되는 그 책에서 접한 상대성 이론은 내가 알던 것과는 전혀 상관없는 내용이었다. 빛의 속도가 나오고 중력이 나오고, 빠르게 움직이는 물체와 정지한 물체는 서로 다른 시간의 적용을 받는다는 등, 지금도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는 하지만 당시의 내 지적 수준으로는 전혀 감조차 잡을 수 없는 복잡한 내용이었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아버지는 상대성 이론에 대해 아예 접해본 적이 없다는 것.

 

아버지의 지적 수준을 결정적으로 평가절하하게 된 계기 또한 곧 찾아왔다. 고등학교 때 내가 아는 상식과 너무나 동떨어진 내용만을 이야기하는 교회에 대한 비판적 관점을 아버지에게 말한 바 있었다. 그러자 아버지는 내 신앙을 되돌리기 위해, 지구가 떨어지지 않고 우주에 떠 있다는 것이야말로 신의 섭리이며 신이 존재한다는 확실한 증거라 말씀하셨지만, 나는 지구가 떨어지지 않는 이유는 (굳이 인류 역사상 최고의 천재 아인쉬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들먹일 필요도 없이)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반론을 펼쳤고, 아버지는 버럭 화를 내셨다. 


한 번 신뢰를 잃게 되자 아버지에 대한 나의 의혹 역시 나날이 커져갔고, 급기야 아버지의 독서 노트라는 것이 철학자가 말하고자 한 본질과는 거리가 멀고 오직 다른 사람들과 말싸움할 때 제압용, 혹은 좌중을 압도하는 연설용으로 써먹기 좋은 구절만을 모아놓은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아버지는 스스로를 골방 속의 철학자라고 여기고 있었으나 대학에서 철학 강의를 듣고 난 뒤 나는 아버지가 한 분의 평범한 개똥철학자에 불과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사실상 아버지가 철학에 대해 아는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아버지의 지식이라는 것은 본인이 그토록 혐오했던 시골 노인네들의 '자지 조' 자랑의 업그레이드판에 불과했고, 삼십 년 넘게 책장의 한가운데를 차지했던 삼성당출판사의 세계사상전집은 아버지에게는 그저 수많은 '자지 조' 자가 담겨 있는 옥편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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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다시 그녀를 떠올린다. 뜬금없는 지식 자랑을 좋아한다는 점에서 그녀는 나의 아버지와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나는 그녀의 지식 자랑에서 두 개의 패턴을 찾아냈다.

 

1. 가급적 일반인에게 생소한 사례나 구절을 인용하기 좋아한다.


2. 그렇지만 전체 맥락과 동떨어져 겉돌 때가 많고, 아예 팩트 자체가 틀리는 경향이 있다.

 

부모를 잃은 슬픔을 어떻게 이겨냈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보통 사람이라면 솔직한 자신의 감정부터 이야기하기 마련이다. 아마 머릿속에 지식이 가득 들어차서 화산처럼 분출되는 세계적인 석학들에게 그런 질문을 던져도 결과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런데 그녀는 이 지극히 사적인 경험을 묻는 기자에게 뜬금없는 인용구를 날린다. 그것도 일반인에게는 비교적 생소한 윌리엄 블레이크의 격언을 인용한다. 더구나 괴상망측한 버전으로. 


"바쁜 벌꿀은 슬퍼할 겨를이 없다."

 

우리 집 싱크대에는 마트에서 육천 원에 구매한 아카시아꿀이 한 병 있는데, 반병 정도 쓰고나서 몇 달간 방치상태이다. 한 번 물어봐야겠다. 슬퍼하고 있는지. 그가 슬퍼한다면 좀 더 바빠질 수 있도록 자주 요리에 첨가해야겠다.

 

청와대에서 무역투자진흥회의를 주재한 자리에서는 '더 나은 쥐덫'이라는 비유를 전혀 엉뚱한 맥락으로 사용해 빈축을 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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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원문 - 경향신문


대통령도 사람인 이상 말실수할 수도 있지 그걸 물고 늘어지느냐는 반론도 물론 나름의 일리는 있다. 그러나 나는 이 해프닝을 통해 반복되는 그녀의 행동패턴을 읽는다. '더 나은 쥐덫'이 경영학의 대표적인 실패사례라고는 하지만, 경영과 관련 없는 분야의 일반인들에게는 생소한 비유라 할 수 있다. 나 역시 어제까지 '더 나은 쥐덫'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었다. 이런 인용은 쉽게 말해 '우리 대통령이 이렇게 다방면으로 해박한 지식을 지니고 있다'라고 일반인에게 어필하기 좋은 내용이다. 대통령이 뭐 하는지 잘은 모르겠는데 프랑스 가서 프랑스어로 연설도 하고 기립박수도 받고 내가 모르는 좋은 말도 많이 알고 하는 걸 보니 똑똑하긴 똑똑한가 보네. 아마도 이런 정도의 반응을 기대했던 것 같다. 


그러나 '자지 조'자를 안다고 해서 그가 한학에 통달한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나의 아버지가 일찍이 간파했듯이, 인용구 몇 개 읊어대는 것과 지성 사이에는 별다른 연관관계가 없다.

 

다시 나는 아버지와 그녀를 동시에 떠올린다. 아버지의 행동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최종학력 소학교 졸업이라는 열등감에 시달리던 아버지로서는 독학으로 동서고금의 지식을 섭렵한 한학자라는 이미지를 미치도록 갈구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아버지의 후광 외에 별다른 능력을 보여준 바가 없다는 주위의 의혹을 불식시키기 위해 그녀 역시 자신의 지적 능력을 과시해야 할 필연성이 있었으리라. 


그러나 자신에 대한 냉철한 분석 없는 막연한 동경은 결국 자신의 삶을 리플리 증후군으로 몰고 갈 뿐이다. 그것은 본인보다도 주위 사람을 힘들게 한다. 다만 스케일의 차이 때문에, 아버지의 허영은 우리 가족을 괴롭히는 정도에 그쳤지만, 일국의 지도자라면 상황은 또 다르다.

 

전체 국민의 수준을 시골 꼰대 취급하는 졸렬한 이 정부의 행태는 한심함을 넘어 분노를 일으키게 한다. 대한민국 역사상 오직 이승만 정부에나 비견할 수 있을 정도의 함량 미달 정부와 함량 미달 지도자가 벌이는 수준 이하의 작태에 기억 저편에 묻어두었던 씁쓸한 추억들이 새록새록 돋아난다.




 

도비공


편집 : 딴지일보 퍼그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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