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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04. 19. 금요일

산하

 

 





 

 

1954년 4월 16일 어느 서북청년단원의 총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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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지슬>이 화제다. 이 영화에서 거의 인간성을 상실한 괴물처럼 보이는 군인은 평안도 사투리를 구사한다. 노인을 칼로 몇 번이나 찔러 그 피를 뒤집어쓴 채로 “내 어머니도 빨갱이 손에 갔소.” 라고 뇌까리는 그 사람. 그는 군인이었지만 군인이 아니더라도 그 말씨를 구사하는 수백 명이 설치고 있었다. 군인도 아니고 경찰도 아닌, 하지만 군대식 편제를 갖추고 함께 합숙하며 무력을 키운 사람들. 그들은 서북 청년단이었다. 서북이라는 뜻은 관서와 관북을 통틀어 말한 것이다. 즉 함경도 사람도 있었고 황해도 사람도 있었지만 평안도 출신들이 꽤 많았다.

 

 

 

일제 시대 이전부터 조선 서북 지역, 즉 평안도 지역은 개화의 물결을 빨리 수용했던 지역이었다. 특히 기독교의 성장이 눈부셨다. 제너럴 셔먼 호를 불태웠던 평양은 ‘동방의 예루살렘’으로 불리울 정도였고 선천같은 곳은 군민 가운데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의 수가 더 적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신심 깊은 곳에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는 구절을 숭상하는 붉은 군대가 들이닥치고 뒤이은 공산화 과정에서 생존의 위협을 느낀 사람들은 대거 넘어왔다. 그들은 자신들의 터전을 빨갱이들에게 빼앗겼다는 분노가 턱밑까지 차 있었고 이 분노는 구약성서 속 신이 보여주는 ‘진멸’(盡滅 - 죄다 멸망(滅亡)하거나 또는 멸망(滅亡)시킴)의 의지로 승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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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북청년단은 1946년 11월 30일 지금도 남아 있는 종로 YMCA 회관 강당에서 그 깃발을 처음으로 올렸다. 그들이 그 실력을 선보였던 것은 1947년 3월 1일 전국 각지의 3.1절 기념식장에서였다. 이들은 좌익 계열의 기념식을 습격하여 잔인한 테러를 가하면서 그 악명을 천하에 떨치기 시작했다. 



“다 쓸어버리라우.”



그들이 부르는 서북청년단가는 우리도 아는 독립군가를 개사한 것이었다. “동지는 기다린다 어서 가자 서북에” 그들에게 서북은 이민족에게 폐허가 된, 돌아가야 할 예루살렘이었다. 자신들은 바빌론 유폐 중인 셈이고.

 

 

 

이 서북청년단의 사업부장으로 이름을 세상에 알린 이가 있었다. 그가 김성주다. 평안북도가 고향으로 꽤 유복하게 살았다는 그는 해방 이후 일가족과 함께 월남한 ‘삼팔 따라지’ 중의 하나였다. 그는 돈 나오는 구멍을 아는 사람이었다. 



“(서북청년단은) 배급표 과다할당이란 소박한 단계에서 적산물자 불하라는 좀 더 과감한 대규모의 협잡을 통해 자금을 확보한 것이다. 서청 간부들은 이러한 협잡을 상징적으로 표현하여 미 군정청을 ‘건너마을 과방(果房)’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러한 협잡에 김성주(사업부장, 섭외부장)가 큰 역할을 했다. 김성주는 미군 장교와도 개별적인 선을 대어 소위 보급작전에서 많은 수확을 얻어냈다.”


(임대식, 제주 4-3항쟁과 우익 청년단<제주 4-3 연구> 215쪽)

 

 

 

김구 암살 후 '애국청년 안두희를 석방하라'는 벽보를 붙이기도 했던 그는 서북청년단 부위원장까지 올라갔지만 청년단의 분화와 이합집산 과정에서 얼마 못 가 팽을 당하고 만다. 서북청년단 위원장에 훗날 치안국장까지 차지하는 문봉제와도 살기어린 눈초리를 주고받는 처지가 되었고. 그 와중에서 그가 토해낸 한맺힌 말들은 그의 명을 재촉하게 된다. 암살자 안두희의 상관이었던 장은산 포병사령관도 쥐도새도 모르게 죽어갔던 판이었으니 그가 평온하게 죽기는 그때부터 이미 그르지 않았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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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 당한 이후 벌어진 전쟁판에서 그는 마침내 <어서 가자 서북에>에 동참한다. 진격하는 UN군에게 편승하여 평양으로 들어간 것이다. 거기서 그는 또 한 번 이승만과 충돌한다. 군사 작전권을 헌납하기는 했으나 이승만의 기조는 줄곧 '한반도는 내가 다스린다'였다. 새로이 수복된 북한 지역도 당연히 자신이 지명한 이가 다스려야 한다고 봤고 실제로 평남 지사를 임명하여 파견한다. 그러나 UN군 측 미군의 반응은 '누구 맘대로'였다. 북한 지역에 UN군의 군정(軍政)을 편다고 선언한 것이다. UN군에 의해 임명된 평남 지사가 바로 김성주였다. 이승만이 파견한 사람들은 김성주측에 의해 물을 먹거나 UN군 측에 쫓겨나 남쪽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승만이 평양 시민 앞에 연설하는데 나타나지도 않는 불경죄마저 서슴지 않았다. 이승만, 아마 펄펄 뛰었을 것이다. 자기 말 안듣는다고 참모총장을 포살하라고 으르렁거리던 양반이니 아마 능지처참을 시키라고 하지 않았을까 싶다.

 

 

 

 

'성격이 불같다.'고 했던 관서 사내 김성주도 재빠르게 변신을 시도한다. 이승만에 맞서는 조봉암 진영에 찾아와 이승만에 대항해 싸우겠다고 했을 때 입을 벌린 사람은 한 두 명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경력 때문에 조봉암 진영은 그를 수용한다. 



“그가 서청에 있으면서 온갖 못된 짓을 다한 걸 우리도 알고 있었지요. 김구 암살에 협력하고, 이승만의 단독정부수립, 단독선거에서 실력행사를 했었고, 그러나 자기도 이승만과 싸우고 싶다 한다고 조봉암 선생이 의견을 물어오더군요. 우리는 오히려 조봉암 선생을 공산당으로 몰아 붙이면서 국민과 유리시키려는 이승만 진영의 공작이 심했기 때문에 김성주 같은 인물을 선거본부에 두는 것이 유용하기도 하다는 데 의견을 모았지요."


<신창균 증언, 한국현대사인물 발굴>

 

 

 

 

그 선택은 결국 김성주의 죽음을 부른다. 이승만은 어떻게 해서든 김성주를 잡을 요량이었다. 1953년 여름 헌병대에 의해 소리소문없이 연행된 그는 '정부시책에 불만을 품고 사회민주당추진위원회를 결성하는 한편 이승만 대통령 살해음모를 꾸민 혐의'로 군법회의에 회부됐고 7년 징역을 구형받는다. 이 시기에 대통령 살해 음모를 꾸미고 징역 7년이라면 혐의가 없다는 얘기와도 통한다. 그러나 이승만은 그 정도에 만족할 사람이 아니었다. 선고공판 3일을 남기고 면회간 가족들은 선고가 무기 연기됐다는 소식을 들었고 며칠 뒤엔 사형이 선고됐다는 기사가 떴다. 변호사도 모르고 가족도 모르는 사형 선고. 그리고 시신도 온데간데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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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이후에야 김성주의 최후가 밝혀진다. 1954년 4월 16일 그는 감옥에서 나와 원용덕 헌병 사령관의 집으로 끌려온 후 원용덕의 운전병의 권총에 총살된다. 시신은 근처 방공호에 파묻혔다가 화장돼 버린다. 물론 가족에게는 일언반구 알리지 않은 상태였다. 후일 그 어머니와 아내가 시신이라도 찾아달라고 진정하여 조사가 이뤄지는데 그 과정에서 원용덕의 집에서 나온 이승만의 친필 밀서는 이승만이 얼마나 무서운 사람이었는지를 새삼 짐작케 한다. 



“김성주는 내가 임명한 문봉제를 해치려는 자이며 손원일 국방장관에게도 말했으니 극형에 처하라...

너는 잔말 말고 즉시 내 명령대로 처단하라” 



이런 인간이 국부라면 그 애비에게서 나온 자식이 참 가련하지 않은가

 

 

 






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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