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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전남편은 아내의 가족들에게도 금전적 피해를 줬다. 그래서 아내는 이혼 후에도 아이들을 버리고 오면 받아준다는 가족에게 돌아갈 수 없었다. 빚쟁이들에게 시달린 경험은 사람을 무서워하게 만들었다. 벌어야 먹고 사는 세상이라 일을 나가야하는데 아이들을 맡길 곳이 없었다. 배고파서 울던 아이에게 젖병에 보릿차를 타서 먹였다.


하루는 개장수의 처분을 기다리던 비루한 모습의 강아지에 눈길이 갔다고 한다. 일을 나간 사이 아이들이 강아지와 어우러져 있으면 덜 불안할 것도 같아 데려오게 되었다. 아이들도 강아지를 좋아했다. 진돗개의 덩치에 슈나우저의 얼굴을 가졌다. 이빨이 자라는 동안 장판을 뜯고 벽지를 찢었지만 듬직한 덩치가 되었다. 개는 자라서 목양견처럼 충실하게 아이들을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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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와 아이들을 품고 세상이 무서워 움츠리다 보니 큰 아이가 학교 갈 나이가 지났다. 인근에 있는 화정초등학교에 찾아가니 학기가 시작되었다는 이유로 교장이 돈을 요구했다. 돈을 주고라도 입학시키고 싶었지만 줄 돈이 없었다. 교육청에 찾아가 사정을 이야기했다. 사정을 들은 교육위원이 학교에 전화를 넣었다. 아내는 반쯤 넋을 놓은 상태로 살던 시절이라 그분의 이름을 묻지 못한 걸 가끔 아쉬워했다.


다세대 주택에서 위 아랫집으로 십 년을 살았다. 목줄에 묶여 계단참에 앉아 있는 개에게 지나며 간식을 줬다. 개와 아이들과 서서히 익숙해졌다. 여름날 새벽 옆집에 화재가 났다. 소방차가 오고 불길이 번졌다. 주인 할머니의 문 두드리는 소리에 겨우 잠을 깼다. 지갑과 통장을 챙겨서 밖으로 나왔다.


여자는 베개를 안고 있었다. 딸아이는 엄마 손을 잡고 개는 사내아이 손에 목줄이 잡혀있었다. 일렁이는 불빛과 웅성이는 사람들 속에서 얼굴을 알아보았다. 잠이 덜 깬 아이들이 인사를 했다. 아직은 서로 잘 알지 못했고 오래 본 이웃 주민이었다. 한 시간 만에 한집안을 모조리 태우고 불이 잡혔다. 유리창이 몇 개 깨졌지만 불이 옮겨붙진 않았다.


아이들을 보러 오가기 편한 곳에 일을 잡으려니 제대로 된 직장을 다니지 못했다. 월급이 70만 원인 재봉공장을 7년간 다녔다. 월세를 내고 아이들을 기르기엔 부족한 돈이었다. 요령이 없고 고집스러워서 생활보호대상자로 등록되지 못했다. 계단참에 부업박스가 항상 쌓여있었다. 막상 아이들을 버리고 오라던 부모님은 농사지은 쌀과 찬거리를 택배로 보냈다. 항상 씩씩한 얼굴이고 아이들도 밝아서 그땐 그런 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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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감기 증상이라도 보여야 순댓국 한 그릇을 포장으로 사다가 세 식구가 나눠 먹었다. 다치고 아프면 속절없이 죽는다는 강박관념이 있었다. 어느 날 집 앞에서 어렵게 일자리를 물어왔다. 염색공장을 다니던 때라 생산직 주·야간을 말했더니 작게 한숨을 쉬었다. 봉제공장사장이 한참 불던 중국열풍을 타고 중국으로 사업을 이전했다고 말했다.


급여가 상대적으로 좋은 공단에 취직을 알아보았다가 아이들이 엄마를 찾아서 다시 집 가까운 곳에 일자리를 찾았다. 식용 본드와 고기조각들로 삼겹살과 돼지갈비를 만드는 식품공장이었다. 미래에 대한 확실함은 아직 없었지만 그 무렵부터 좀 더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사람을 가리고 부담을 주기 싫어하면서도 기댈 곳이 필요했다.


고기조각이 풍기는 냄새 때문인지 식품공장에 쥐가 있었다. 일하는 사람 하나가 쥐를 잡으라고 조막만 한 길 고양이 새끼를 데려왔다. 사람을 무서워하는 새끼고양이에게 날고기를 먹이라고 던져주는 모습이 안쓰러워서 새끼 고양이 먹이를 샀다. 식품공장에서 고양이를 기르는 것은 불법이었다. 갈 곳이 없어진 새끼 고양이를 집에 들였다.


아이들은 새끼 고양이를 환영했다. 개는 새끼 고양이에게 달려들어 온몸을 정성껏 핥았다. 식구가 늘었다. 아이들은 당시 최고의 몸값을 받는 여배우의 이름을 고양이에게 주었다. 개와 고양이와 애들이 함께 자랐다. 아직까지 나는 손님이었다.


산책길에서 목줄이 풀린 개가 신호를 위반한 차에게 횡단보도에서 치었다. 내 출혈로 살 가망이 없었다. 안락사를 시키고 화장을 했다. 며칠을 슬퍼하던 아내는 개가 산책코스에서 좋아하던 나무 아래 조금씩 뿌렸다.


오랜 시간을 개와 함께 자라온 아이들이 허전해 했다. 사내아이가 친구 집에서 강아지를 데려왔다. 다행히 덩치가 작은 포메라니안이었다. 주인의 사랑을 받아야만 생존하도록 만들어진 애완견은 자기 새끼를 질투하기도 한다. 어미젖을 얻어먹지 못했다. 새로 온 개는 고양이를 따라다니며 귀찮게 했다. 그루밍을 따라하다 털이 목에 걸려 켁켁거렸다. 다 자란 후에도 앞발을 혀로 핥고 얼굴에 문지른다. 개는 고양이와 달라서 얼굴에서 침 냄새가 난다. 고양이 세수를 개가 하는 모습을 보다보니 보고 배운다는 말이 무게감이 있게 다가온다. (아이들을 자녀들을 어린 세대들을 원망하면 안 된다. 다 보고 배우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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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를 하기 전에 아내는 예전 일을 이야기했다. 이제 힘든 시절은 잘 기억이 안 나지만 언젠가 다친 까치를 데려다가 집에서 아이들과 약을 바르고 치료해 준 적이 있다고 했다. 가족에게 돌아간 까치도 기쁘고 기다려준 까치의 가족들도 참 고맙더란다. 몇 번인가 까치가 집 근처에 찾아와서 울면 행복한 일이 생길 것 같았다고 말했다. 어디서 들어본 이야기 같아서 혹시 무슨 박씨 같은 건 안 물어오더냐고 물었다. 수줍게 웃으며 내 손을 잡았다.


이사를 한 후에도 집사람은 길고양이들과 한데 묶여 있는 개들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집 앞에 조립식 판넬로 지은 작은 공장이 헐리게 되었다. 그 공장 뒤뜰에 묶여있던 강아지 한 쌍이 갈 곳이 없어졌다. 말라뮤트와 도사견의 혼종이라 좁은 집에서 키울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아직 강아지 시절인데도 덩치가 진돗개만 하다.


아내는 거두고 싶어 했지만 똥 당번인 내가 거부권을 행사했다. 가둬서만 키울 수도 없고 성체가 되어 짓기라도 하면 건물 사람들이 다 항의할 거다. 동물들을 싫어하는 사람도 많다. 우리는 다세대 주택에서 사람들과 산다. 나중에 마당 있는 집에서 살게 되면 그때 저런 애들 거두면 된다. 지금 그러면 서로 고문하는 거다. 아직도 소녀감성으로 사는 그녀를 겨우 설득했다.


놔두면 흘러 흘러 보신탕집으로 갈 덩치들이었다. 아내는 어느새 이름을 지어주고 불렀다. 이름을 부르고 반응하는 과정을 거치다 보면 외면하기가 더 힘들어진다. 처가에서 개들을 받아 주기로 했다. 명절인사를 가면서 개들을 씻기고 진드기를 잡아주고 회충약을 먹였다.


개들이 멀미를 했다. 개가 딸아이 바지에 토를 했다. 딸아이가 비명을 지르고 개도 울었다. 우는 딸아이와 함께 휴게소가 나올 때까지 달랬다. 명절 길에 차가 막혔다. 아이가 울다 잠이 들었다. 다시 비명소리가 들렸다. 이번엔 다른 개가 딸아이 바지에 오줌을 지렸다. 다시 한참을 울다 지쳐 잠이 들었다. 아내는 딸아이를 달래며 웃었다. 딸아이가 엉엉 울면 개들도 따라 울었다. 개들이 울면 딸아이가 화를 내며 울었다. 울다 지쳐 잠이 들었다가 깨서 또 울었다. 은근 짜증이 나면서도 웃음이 나온다.


처가에 집을 얻은 개들은 금방 송아지만 하게 자랐다. 아기 팔뚝만 한 똥들을 보니 개 수발드는 장인어른이 힘들겠다 싶었다. 장모님은 개들의 안부를 묻는 아내에게 질투를 했다. 너는 에미보다 개가 중하냐? 개짓는 소리와 냄새 때문에 40년 알고 지낸 아랫집과 싸움이 났다. 장모님이 똥차라며 타이어를 발로 찬 건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지금은 개들의 행방을 모르게 됐다. 얼추 짐작을 하면서도 손을 떠난 문제다. 그래도 아내와의 인연으로 몇 년간 세상을 더 보다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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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가 나이를 먹었다. 식구들이 집에 돌아오면 다리에 머리를 한번 스윽 비볐다. 온몸으로 격하게 환영의 몸짓을 표하는 개에게서 늘 한걸음 떨어져서 자신의 공간을 찾았다. 먹이를 달라고 할 때와 외출을 하게 문을 열어달라는 의사표시를 할 때는 울음소리에 애교와 애원을 넣었다.


고양이가 나이를 먹었다는 생각은 했는데 알지 못하는 사이 노령이 되었다. 작은 것들의 시간은 빠르고 짧다. 먹이를 먹지 않고 걸음을 잘 걷지 못했다. 경련도 했다. 아내가 사료를 사던 동물 병원에 문의를 하니 큰 병원으로 가란다. 입원치료를 며칠 했다. 병원비가 부담이 되었다.


고양이를 집에서 돌보기로 했다. 아침저녁으로 등가죽을 찔러 수액을 놓아주고 주사기로 먹이를 먹였다. 수액 주사를 맞는 동안 고양이는 발톱을 세웠다. 먹이를 먹이다 보면 흘렸다. 그래도 아내는 포기하지 못했다. 집에는 수액 냄새와 환자 냄새와 제 몸을 가누지 못하는 고양이에게서 나는 묘한 냄새가 뒤섞였다. 불평하는 사람은 없었다.


아내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고양이는 점차 말라갔다. 두 걸음 걷고 현기증이 오는지 비틀거리고 잠시 쉬었다 이동하는 것도 모자라 자리에 소변을 흘렸다. 날렵하고 우아하던 고양이 특유의 걸음걸이가 사라지고 정갈하게 관리하던 털들도 윤기를 잃었다. 근육이 사라지고 울음소리가 떨렸다. 죽어가고 있었다. 수의사는 다른 분들은 이 정도로 오래 고양이를 돌보지 않는다며 은근하게 돌려 말했다.


처음 수액을 맞을 때는 발톱을 세우고 날카롭게 울며 몸부림쳐서 아침마다 식구 세 명이 달라붙어야 했다. 어느 사이 아내 혼자 수액을 놓아도 힘없이 울기만 할 뿐 몸부림을 칠 힘도 없이 쇠약해졌다. 연명치료가 함께 있는 시간을 좀 더 갖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연장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울음소리에 고통이 묻어 나옴을 느낀다.


아내가 드디어 고양이에게 편한 죽음을 주는 게 맞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한번은 동물병원에 데리고 갔다가 다시 돌아왔다. 발끝에 손이 닿을 때마다 화들짝 경련을 하며 애처롭게 우는 고양이의 작은 머리와 가는 목을 쓰다듬어주다가 그냥 목을 비틀어 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군대에서 닭의 목을 처음 비틀어야 했을 때 뼈가 뒤틀리는 소리와 죽어가는 경련이 남긴 체온이 오래 남았다. 손안에서 사라져 가는 생명의 느낌이 더 오래 좋지 않은 기억을 남기리라는 예상과 행여 분노할 아내와 작은 위안을 받고 있는 고양이의 힘겨운 모습이 생각을 찰나에 그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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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비하면 많이 좋아졌지만 여전히 하위 노동계층이다 보니 맞벌이를 하지 않으면 사람 노릇 하고 살기가 어렵다. 아내도 일을 다닌다. 아침 출근 전에 식탁 의자에 앉아 나를 부른다. 나는 그녀의 양말을 들고 가서 그녀의 발에 신긴다. 냉소로 세상을 보며 조금씩 뒤틀려가던 나를 사람 모습으로 잡고 있다. 홉사 생명을 품은 지구와 운석에 얻어터져 곰보빵 같은 달의 관계와 같다. 달은 지구 곁에서 온기를 느끼고 지구는 달 덕분에 안정된 자기장으로 생명을 품는다. 지식이 부족하고 경제관념도 약하고 사람에게 잘 속고 화도 잘 낸다는 단점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우월하다. (물론 그런 그녀도 내가 윤창중 씨 같은 일을 벌인다면 다시는 보지 않겠다고 말하긴 한다. 윤창중 씨 부인의 인품을 미루어 짐작한다. 윤창중 씨는 날마다 그분의 발을 닦아주는 편이 좋겠다.)


고양이는 7월 5일 죽었다. 일터에서 돌아오니 아내가 깔개를 깔아준 장롱 칸에 꼬리를 내어놓고 누워 있었다. 어릴 적 이불 속에 들어갔다 몇 번 밟힌 뒤에 어느 곳에 들어가든지 꼬리를 내어놓고 흔드는 버릇이 생겼다. 관절이 뻣뻣하게 굳고 체온이 식었다. 파카한일유압 창립 기념일에 받은 수건으로 고양이의 사체를 감싸고 상자에 담았다. 아내는 눈이 붉어지고 눈물이 맺혔다. 이별을 슬퍼했지만 많이 고통스러워하진 않았다. 이별을 받아들이기 위한 충분한 시간이 있었고 스스로가 할 수 있는 걸 했다.


딸아이는 죽기 직전 고양이의 모습을 무서워했다. 고통의 울음을 울다 심장이 멈추고 호흡의 끊어지는 마지막 순간 자기 방에서 무섬증에 떨었다. 사고사가 아닌 이상 우리의 마지막 모습도 이와 유사하다고 말해주었다. 동물 병원에서 화장을 부탁하고 나오는 길에야 이별을 실감했는지 눈물을 흘린다. 고양이가 딸아이를 좋아했다. 몸이 아프고부터 안방으로 거처를 옮겼지만 건강할 때는 딸아이 방에서만 잠을 잤다.


세월호에서 아직 나오지 못한 아이 하나를 아내가 잘 안다. 딸아이와 같이 교회 유치원에 다녔다. 그 아이의 엄마가 가끔 뉴스에 나오면 한숨만 쉰다. 그 아이의 엄마에게도 이별을 슬퍼할 시간이 주어지길 바란다. 공중파 뉴스에서는 세월호 유가족의 무리한 요구로 단원고 재학생들이 피해를 입는다는 뉘앙스로 편 가르기를 한다. 2년이나 지난 일로 남의 집 아이들의 공부할 공간을 뺏는 몰지각한 사람들이 되었다. 별 시답지 않은 협상을 지지부진한 상황으로 몰고 가고 말 바꾸기를 해야 하는 담당자의 곤혹스런 모습이 그려진다. 극단적인 상황으로 유가족들을 몰아가 그들을 격리하고 분리하려는 의도와 설계가 보인다. 그들도 언젠간 죽는다. 한숨이라도 더 들이키려고 몸부림치다 죽을 수도 있지만 되도록 죽음 앞에 후회가 적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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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 4.16연대





범우


편집 : 딴지일보 퍼그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