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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그리스인 조르바(안소니 퀸 분)> 중



1.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에 등장하는 조르바 형님은 ‘자유인’으로 유명해.


환갑이 넘은 나이에도 한 곳에 정착하지 않고 세상 곳곳을 떠돌아다니는 방랑자셨고, 방랑 중에 만난 여인들(특히 과부)에게 허리하학적 노익장을 과시한 자유연애가기도 하셨으며, 오직 자기 자신만 믿을 뿐 어떤 신도 믿지 않았던 무신론자셨어.


"두목, 나는 아무것도 믿지 않소. 내가 사람을 믿는다면, 하느님도 믿고 악마도 믿을 거요... 오직 조르바만 믿지. 조르바가 딴 것들보다 나아서가 아니오... 내가 조르바를 믿는 건, 내가 아는 것 중에서 아직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조르바 뿐이기 때문이오. 나머지는 모조리 허깨비들 뿐이오."


심지어는 공들인 사업이 쫄딱 망해도 미친 듯이 춤을 추던... 정말 미친놈이기도 하셨드랬지. (자기 돈으로 벌인 사업이 아니었다는 게 함정이긴 하지만)


이 뿐만이 아니야.

욕망과의 사투 끝에 자신의 성기를 스스로 거세함으로써 성자의 반열에 오른 이를 두고 냅다 "병신은 천국에 갈 수 없다."며 가공할 박력과 호탕한 내세관을 선 보인 철학자기도 하셨어.


하지만 이것들은 자유인적 현상에 불과해.

털이 많다고 총수일 수는 없는 거고, 못생겼다고 다 딴게이일 수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야. 그러니까 앞서 열거된 것들은 자유인의 스타일일 뿐, 자유인의 본질로 여길 수는 없다는 거지.


그렇다면 조르바는 어쩌다가 무려 자유인의 상징이 돼버린 걸까.



2.


사실 조르바는 태어났을 때부터 자유인은 아니었어.


당연한 얘기야. 자유인이란 게 부모님한테 물려받을 수 있는 유산도 아니고, 자유능력시험에서 시험 잘 보면 따낼 수 있는 자격증 같은 것도 아니니까. 뭔가 특별한 계기가 있었겠지. 모든 일에는 다 원인과 맥락이 있는 법이잖아.


조르바는 젊은 시절, 조국 그리스의 자유를 위하여 터키, 불가리아 등 주변 국가를 상대로 테러를 일삼던 투사였어.


언뜻 보면 젊어서부터 자유에 관한 탁월한 재능을 타고났던 것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것 같아. 조국의 자유를 위해 청춘을 바쳤을 테니 말이야. 하지만 꼭 그렇지는 않아. 당시 조르바가 추구했던 자유는 가짜 자유였기 때문이야.


어린 시절의 조르바에게는 자기의 조국만 있을 뿐 남의 조국은 안중에 없었어. 특정 국가의 국민으로서만 인간을 인식할 뿐, 인간 그 자체로서 인간에 대한 인식은 없었던 거야. 그래서 과거의 조르바는 애국이라는 이름으로 다른 나라 사람들을 죽이고 강간하는 데 일말의 거리낌도 없었어.


고로 나의 자유만 중요하고 남의 자유는 알 바 아닌 모순된 자유를 추구했던 가짜 자유인이었다 말할 수 있는 거지.


“내게는 터키 놈, 저건 불가리아 놈, 이건 그리스 놈, 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두목, 나는 당신이 들으면 머리카락이 쭈뼛할 짓도 조국을 위해서랍시고 태연하게 했습니다. 나는 사람의 멱도 따고 마을에 불도 지르고 강도 짓도 하고 강간도 하고 일가족을 몰살하기도 했습니다. 왜요? 불가리아 놈, 아니면 터키 놈이기 때문이지요. 나는 때로 자신을 이렇게 질책했습니다. <염병할 놈, 지옥에나 떨어져, 이 돼지 같은 놈! 싹 꺼져 버려. 이 병신아!> 요새 와서는 이 사람은 좋은 사람, 저 사람은 나쁜 놈, 이런 식입니다. 그리스인이든, 불가리아인이든 터키인이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좋은 사람이냐, 나쁜 놈이냐? 요새 내게 문제가 되는 건 이것뿐입니다. 나이를 더 먹으면(마지막으로 입에 들어갈 빵 덩어리에도 놓고 맹세합니다만) 이것도 상관하지 않을 겁니다. 좋은 사람이든 나쁜 놈이든 나는 그것들이 불쌍해요. 모두가 한가집니다.”


<그리스인 조르바> 열린책들 p.326



책에서는 조르바의 과거에 대해 글 몇 줄로밖에 설명되어 있지 않아. 하지만 조르바가 위와 같은 고백을 할 수 있기까지는 정말 쉽지 않은 과정을 겪었을 거 같아.


아마도 한참 나이를 먹은 후에야 조르바는 과거 자신이 자유며 진리라 여기던 것들이 어쩌면 허상일 수도 있겠다는 의문을 품기 시작했을 거야. 애국심이란 게 자기편에게는 자유이고 진리일 수 있지만 남의 편에게는 얼마든 테러이고 거짓일 수도 있다는 모순을 깨닫기 시작한 거지.


그러던 어느 날, 조르바는 보다 잔인한 깨달음에 직면했을 지도 모르겠어. 사실은 애국심도 아니었다는 것을. 그러니까 애국심을 가장한 증오심이었고, 또 증오심을 핑계로 상대의 생사여탈권을 쥐락펴락 하며 쾌락을 즐긴 존재감 투쟁의 광기에 불과했다는 것을 말이야.


바로 그런 이유로 조르바는 어느 한 곳에 정착할 수도 없었고, 한 여인에게 의지할 수도 없었으며, 어떤 신에게도 용서를 구할 수 없었던 건지도 몰라. 사업 실패의 순간에 미친 듯이 춤을 췄던 것도 어쩌면 살아있음에 감사하는 기쁨의 표출임과 동시에 자신에게 죽임 당한 이들에게 속죄하는 살풀이였을 수도 있고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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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정리하자면, 동서고금의 문학작품을 통틀어 최고의 자유인으로 손꼽히던 조르바는 사실 과거 누구보다 지독한 관념에 사로 잡힌 노예였다는 거야. 애국심이라는 실체 없는 관념의 노예가 되어 다른 생명들을 짓밟는 악행을 저지른 죄인이기도 했고. 게다가 자기가 관념의 노예가 되어 죄를 짓고 있다는 것 자체를 모르는 머저리기도 했던 거지. 나쁜 짓을 하면서 나쁜 짓인 줄은 모른 채 훌륭한 일을 하고 있다 착각하는 일종의 병신춤의 트리플 악셀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이후 조르바는 영장류 최강의 자유인으로 거듭나게 돼. 자신이 영장류 최악의 노예였으며, 병신이었다는 잔인한 깨달음이 있었기 때문이지.


아마도 그 깨달음은 처음엔 조르바에게 거대한 고통을 줬을 거야. 별 문제 없었다고 자부했던 자기 인생이 송두리째 부정 당하는 느낌이 들었을 테니까. 자기가 살육했던 악마들이 사실은 자기와 별다를 바 없는 평범한 사람들일 수 있겠다는 생각은 더욱 끔찍했을 거야. 그 순간 자신이 악마가 되어야 했을 테니까.


어쩌면 차라리 악마인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지도 몰라. 가장 괴로웠던 건 그때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던, 자랑스럽게 죄를 짓고 당당하게 병신 같았던 당시의 자신을 직시하는 것이었을 지도 모른다는 얘기야.


그래서 조르바는 꽤 많은 시간 그 깨달음과 싸웠을 것 같아. 그렇잖아. 조국의 자유와 동포의 해방을 위해 목숨 걸고 싸우다 남모를 마음의 상처를 안고 전역한 불행한 군인 정도의 우수에 젖은 이미지 뒤로 얼마든 숨을 수도 있었을 거잖아. 그 과정에서 벌어진 살인과 방화, 강도 강간 등은 전쟁 통에 벌어진 비밀스런 해프닝, 혹은 전쟁의 광기 때문에 순간적으로 이성을 상실했던 실수 정도로 변명하면서 말이야.


당장의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조르바는 끊임없이 변명하고 진실을 회피했을 거야. 하지만 남을 속일 수는 있어도 자신을 속일 수는 없는 거잖아. 어느 순간 변명하고 회피하는 자신의 모습에서 더욱 큰 역겨움과 환멸을 느끼다가 마침내 그 깨달음을 온전히 인정한 때가 왔던 거겠지.


그래. 자유인 조르바는 바로 그때 탄생한 거야. 자신이 얼마나 끔찍한 과오를 저질렀는지를 직시하고 인정하던 순간이 탄생의 순간이었던 거지. 과오가 주는 고통과 수치심을 제대로 경험한 후에야 조르바는 그 고통을 다시 겪지 않기 위해서라도 과오를 반복하지 않으려 정말 진심으로 애썼을 테고.


또한 과오를 정확히 인지하고 나서야 스스로 사죄할 수도 있었겠지. 전에는 뭘 사죄해야 하는 건지도 몰랐을 테니까.


더 나가서는 그제야 다른 사람들의 과오도 이해할 수 있었을 것 같아. 다른 사람들이 과거의 자신과 마찬가지로 중요한 게 뭔지를 모른 채 허상에 사로잡혀 있는 중이라는 걸 그때의 조르바는 알 수 있었을 테니까.


아마 그래서 이런 말을 했던 것 같아.


"요새 와서는 이 사람은 좋은 사람, 저 사람은 나쁜 놈, 이런 식입니다. 그리스인이든, 불가리아인이든 터키인이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좋은 사람이냐, 나쁜 놈이냐? 요새 내게 문제가 되는 건 이것뿐입니다. 나이를 더 먹으면(마지막으로 입에 들어갈 빵 덩어리에도 놓고 맹세합니다만) 이것도 상관하지 않을 겁니다. 좋은 사람이든 나쁜 놈이든 나는 그것들이 불쌍해요. 모두가 한가집니다."


조르바는 요새 국적이나 인종에 상관 없이 '좋은 사람이냐, 나쁜 놈이냐'의 여부로 사람을 판단한다고 얘기해. 더 이상 껍데기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겠다는 얘기지. 그래. 지당한 말씀이야. 어쩌면 그 단순한 진리를 깨닫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던 건지도 몰라.


하지만 중요한 건 나이를 더 먹으면 이것도 상관하지 않을 거라는 말이야. 좋은 사람이든 나쁜 놈이든 조르바는 그것들이 불쌍하다는 거지. 왜냐면 모두가 한가지라서.


좋은 사람이나 나쁜 놈이나 언젠가는 다 죽을 운명이라 불쌍하다는 말이라면 얼추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아. 그럼 둘 다 불쌍할 수도 있겠지. 존재의 소멸은 존재의 선악 여부와 상관 없이 벌어질 명백하면서 또 쓸쓸한 일일 테니까.


하지만 좋은 사람이나 나쁜 놈이나 '모두가 한가지'라 불쌍하다니. 이건 대체 무슨 개똥 같은 소리인 걸까.



4.


세상은 어쩌면 균형을 지향하는 거대한 양손저울 같은 건 지도 몰라. 어느 한쪽에 무게가 쏠리면 수평을 잡기 위해 반대편의 무게를 늘려야 하거나, 아니면 쏠린 곳의 무게를 덜어야 하는 저울 말이야. 어둠과 빛이 공존하고 공과 색이 함께 있는 이치도 어쩌면 저울의 균형을 위한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나무에 비유할 수도 있을 것 같아. 땅 위로 솟은 나무 기둥과 땅 밑으로 뻗은 나무의 뿌리는 서로 비례해서 자랄 수밖에 없잖아. 나무의 기둥이 높게 뻗으려면 뿌리 역시 깊게 뻗어야 하지. 뿌리가 짧으면 기둥도 더 이상 자랄 수 없어. 그래야만 나무라는 존재 자체가 지탱될 수 있을 테니까.


선해서 악이 될 수 있어. 국가에 충성하려다 인류에 불충했던 조르바의 경우가 바로 그 예라 말할 수 있을 거야. 그 악이 다시 거대한 선으로 전환되기도 해. 지독한 악행을 경험한 후에 진정한 자유를 깨달은 것으로 보이는 조르바처럼 말이야.


그래서 오스카 와일드도 이런 얘기를 했을 거야.


"어떤 성인에게도 과거가 있고, 어떤 죄인에게도 미래가 있다."


(마치 조르바처럼)어떤 죄인이 미래에 성인이 된다면, 혹은 (마치 장발장처럼)어떤 성인이 과거에는 죄인이었다면 우리는 그 사람을 죄인이라 규정해야 할까 아니면 성인이라 규정해야 할까.


죄인에게 피해를 받았던 사람 입장에선 그 사람은 여전히 죄인일까? 성인에게 축복을 받은 사람에겐 그 사람은 계속 성인이어야만 할까?


어느 한쪽이라 규정해야 한다면 그건 상대적 입장 차이가 있을 것 같아. 보다 분명해 보이는 건 그냥 한 사람이 성인과 죄인 둘 다 될 수 있다는 사실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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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선과 악은 서로 대립하는 뭔가가 아니라 비례해서 함께 커지는 나무의 기둥과 뿌리 같은 것인지도 몰라.


그렇다고 나무의 기둥과 뿌리가 '저절로' 함께 커지는 건 아닐 거야. 나무의 기둥은 태양을 찾기 위해 스스로 몸을 뻗거나 뒤틀고, 나무의 뿌리는 물을 찾기 위해 바위를 뚫기도 하잖아.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에게도 뭔가가 필요하겠지.


그 뭔가가 뭔지는 나도 잘 몰라. 각자 구해야 할 거야


…………………………….


꼰대 같다고 지랄들 할까봐 잘 모른다고 했지만 사실 나는 그 뭔가가 경험과 성찰이 아닐까 싶어.


잘 모르더라도 부딪쳐보는 경험이 쌓여 성찰의 토대가 되고, 또 성찰은 불필요한 경험을 줄이고 적절히 필요한 경험들이 뭔지를 안내할 것 같거든.


결국 그 뭔가는 연습인 거지. 인생 연습.


시지프스의 바윗돌처럼 영원히 멈추지 않을 인생 연습. 조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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