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호구 아니었던 사람 있으면 한번 나와봐라.
세상 살다 보면 복 받았구나, 정말 귀티 나네, 싶은 사람이 가끔은 있다. 내가 마음이 덜컥, 하고 불편해질 때는 그 사람들이
동그랗고 천진한 눈을 뜨고 불행이란 것을 믿지 않을 때. 돈 때문에 사람이 어디까지 끝없이 떨어질 수도 있고 한 때 사랑했던
사람이 어디까지 천해질 수 있으며 가장 잔혹한 폭력은 흔히 가족 사이에서 일어난다는 사실. 누구의 벽장에도 해골이 들어 있다는 사실. 내가 말하려는 것은 그 해골에 대해서다. 그나마 위로가 되는 것은 그 해골들은 풍화된 후 가끔 재미있는 표정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고통에 시간이 더해지면, 코미디가 된다. 우리 모두에게 시간의 축복이 있기를. 특별히 당신에게. 그리고 당신의 해골에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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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이후, 나는 커다란 물체가 심해에 가라앉듯이 계속 가라앉는 일만을 되풀이해왔다. 딴지일보 지면이 내게 경제적으로 큰 도움이 못 될지라도, 페미니스트들에게 불편한 곳이라 해도, 누군가 정말 빻은 글을 쓴 걸 봤을 때도 나에게 딴지는 그런 곳이었기 때문에 버릴 수 없는 지면이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쓰레기 버리라 가다 말고 좁은 방에서 굴러다니다 발에 귀찮게 걷어채이는 오빠나 동생들을 보는 것 같은 곳. 아 쫌!!!! 비켜!!! 하고 큰 소리를 치면 다음 번에는 내가 굴러다닐 수 있게 잠자코 쓰레기를 버려 주는 반지하의 다세대주택에서 다 함께 자빠져서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는 것 같은. 물론 남성 독자가 압도적으로 많고 여성혐오나 페미니즘 같은 안건에 대해서 첫 합부터 의견이 일치할 순 없지만 내가 시간과 마음을 들여 설명한다면 적어도 내 말을 들어 줄 거라는 믿음이, 이상하게 사라지지 않는 곳. 그렇게 애정을 갖고 있으면서 <박복규수전>을 하다 말고 왜 갑자기 사라졌냐 하면, 내 이름이 언급되진 않았지만 나를 겨냥한 것이 틀림없는 딴지 기사를 본 다음이었다.
차라리 이름이 거명되어 저격을 당했다면 당당히 변명이라도 할 수 있었을 텐데, 가만히 있자니 속상하고 가만히 안 있자니 주책 같고 뭘 하기에도 애매했다. 물론 나는 – 내 인생에서 늘 그래 왔듯이 – 그 기사 중 그닥 중요한 부분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뭔가 타격을 받았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저렇게 비열하다고 굳게 믿었으니까 저런 글을 쓰겠구나, 생각하니 슬퍼졌다. 글쎄, 나는 비겁한 인간일 순 있어도 저 기사에 나오는 만큼 비열하거나 비굴하지는 않는데... 타인을 제물로 삼아 제 보신을 담보할 만큼 영리하지도 못하고 얻은 것도 없는데, 하며 풀이 죽었다. 무슨 기사냐고 묻지는 말아 주시길. 그때 댓글로 마타도어라고 지적해 주신 딴지스들께는 마음 속 깊이 감사하고 있다. 편들어 줘서 고맙다는 게 아니라, 믿어 줘서 고맙습니다.
팟캐스트 때문에 딴지에 방문했을 때 그 글을 쓰신 분을 우연히 만났고 쓰신 부분 중 이러저러한 점은 모두 오해입니다, 라고 설명을 했고 정중한 사과를 받았다. 사람 사이에 얼마든지 오해가 있을 수 있음을 알며 그것을 풀고 사과를 받는다는 일도 좀처럼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니 고마운 일이다.
그렇지만 뭔가 돌이킬 수 없는 어떤 부분에 손상을 입은 것 같았다. 사람의 마음이란 것은 도대체 얼마나 무궁한 가능성이 있는 걸까. 그토록 많은 상처를 받아도 아직도 아플 수 있는 재주가 남았다니. 앞서 말한 반지하 다세대주택, 더워 죽겠어 선풍기 이쪽으로 좀 해봐! 하면서 서로 소리소리를 지르며 다같이 자빠져 있는 그 주택에서 혼자 쫓겨난 느낌이랄까. 넌 여기 있을 자격이 없어. 아무도 나를 쫓아내지 않았지만, 여기에서도 내 자리가 없는 것 같은 느낌. 그래서 다시 <박복규수전>을 재개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뭐 대단한 글을 쓴다고 참 한심하긴, 싶지만 좁아터진 반지하 다세대에서 야 라면 좀 끓여라, 싫어 니가 끓여 븅신아, 뭐 이렇게 지내다가 이게 가짜 가족이었음을 안 순간 다시 돌아간다는 게 너무 어려운 것이다. 사실 그렇게 생각한 것도 나 혼자였지만. 더구나 나는 사적으로 친구가 많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독자와 소통할 수 있는 작은 공간도 무척 마음 속으로 소중하게 여기는 편이다. 근데 그걸 누군가가 야 착각하지 마, 하면서 척척 밟고 지나간 기분이었다. 글을 쓴 그분이 짓밟았다는 게 아니라, 내 마음 속에서 뭔가가 망쳐진 기분이었다. 마분지를 꼬깃꼬깃 접어 인형의 집을 만들었는데 지나가던 사람의 실수로 다 망가져 버린 것 같은 그런 것. 어차피 종이잖아? 다시 만들면 되잖아? 하고 말하는 건 쉽지만 사실 그걸 돌이키기는 생각처럼 쉽지 않다.
심해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면, 3년 전 나는 왜 나에게 이런 일이? 라고 몇 번이나 되풀이해서 중얼거릴 법한 일을 겪었다. 도무지 그 고통을 극복하지 못해서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잘 알 법한 어른에게 물어 보자, 하여 주고받은 이메일이 2년 후 <가장 사소한 구원>이라는 라종일 쌤과의 서신집으로 엮여 나오게 된다. 심해로 빠져 들어가면서, 빨리 해가 드는 수면으로 올라가야지 하고 파닥대며 헤엄을 친 것도 수백, 수천 번이나 된다. 그 때마다 이상하게 얻어맞는 일이 많았다. 진보랍시고 이쪽 바닥에서 꽤 유명한 ‘꿘놈’들에게 황당한 짓을 당한다거나, 뭐 각종 지저분한 일들. 정말 다시 정신 차려 보려고 수많은 시도를 했다. 그때마다 되는 일은 왜이리 없던지, 점점 밖에 안 나가게 되고 운동 안 하게 되고 처묵처묵만 하게 되고 xx킬로가 늘고 몸에 맞는 옷이 없게 되고(그렇다고 큰 옷 살 돈도 없고) 히키고모리가 되어 가면서, 내 인생은 이제 끝났다고 생각했다. 물론 돈도 없었다.
그때 나에게 손을 내밀어 준 사람이 있어서 나는 다시 직장생활 비슷한 것을 시작했다. 직장생활이면 직장생활이지, 왜 비슷한 것이라고 했냐면 고용주의 배려로 반은 프리랜서처럼 일하고 있기 때문이다. 글 조금 깨작거리는 재주 말고는 아무것도 없어서 다시 일 같은 걸 하기는 무리겠구나, 이제 나한테 남은 건 아무것도 없구나, 하고 쓸쓸하게 생각하던 차에 나를 불쌍히 여긴 고용주가 나타났다. 글 쓰는 일 몇 가지를 그냥 외주로 맡길 생각이었던 모양인데 내가 덜컥 남양주까지 이사를 와버렸다. 천안 집이 계약기간이 다 되기도 했고 고용주가 하고 있는 사업이 너무나 매력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사업이 매력적인 게 아니라 사업이 다루고 있는 것들이랄까.
내가 온 곳은, 대중교통도 다니지 않는 남양주의 어느 야산이다. 물론 집은 산에서 내려간 곳에 구했지만. 이 야산에는 20여 마리의 말들이 있다. 한 마리는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말에 가까운 ‘한라마’이지만, 나머지 녀석들은 100kg이 넘지 않는 ‘미니어처 호스’들이다.
승마장 아냐? 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나의 고용주는 미국까지 가서 요 꼬맹이 말들을 직접 사 가지고 왔다. 20개월 이상의 어린이들이 여기를 방문해서 물론 말을 타기도 하지만, 먹이를 주거나 줄을 끌거나 하면서 말과 교감하는 시간을 가진다. 조랑말도 키가 1.4m인데 얘들은 제일 큰 녀석도 0.8m를 넘지 않으니 아가들의 안전을 위해서는 무척 좋은 선택인 것 같다. 어쨌거나 나는 장사 같은 건 잘 모르고, 그건 고용주가 한다. 말 길들이기나 훈련, 아이들 말 태워주기는 승마 교관이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말똥 치우기나 말들의 솔질, 빗질 정도다. 그리고 어딘가에 내놓아야 할 글자가 필요할 때 그걸 쓰는 일을 한다.
이제 한 달 정도 되었을까. 갑자기 박복규수전 시즌2를 시작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어쩌면 그 반지하 다세대 셋방에 여전히 내 자리가 있을지도 모른단 기대를 하면서. 그 생각을 한 건 어디에도 내 자리가 없고, 내가 지나온 길엔 흉한 자국뿐이다, 하는 생각에 짓눌려 있다가 요 키 작은 말들이 내가 무릎을 굽히고 앉아서 눈을 쳐다보면, 같이 눈을 맞춰 준 다음부터였다. 이제부터 박복규수 재활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말 녀석들과 함께.
P. S.
작년 10월에 책을 하나 냈습니다.
도서정가제 탓인지 책이 더럽게 안 나가네요. 좀 도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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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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