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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 25일. 북한의 인민군이 38도선을 넘어 진군을 시작한다. 그리고선 신속하게 남한 지역의 대부분을 점령하는 데에 성공한다. 


김 씨는 10대 소녀였다. 꽃다운 나이. 떨어지는 나뭇잎만 보아도 웃음이 나는 나이. 보다 찬란해야 할 때였지만 전쟁 앞에서 소녀의 사춘기 따위는 그 어떤 의미도 부여받지 못했다. 38도선 이남의 소녀들은 전쟁을 피해 남으로 남으로 도망을 갔다. 북쪽의 소녀는 광산에 끌려가 착취를 당했다. 전쟁에 소요되는 물자를 채우기 위해서는 어린 소녀의 노동력조차 아쉬운 상황이었다.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국군과 연합군은 북한 지역의 대부분을 점령하기에 이른다.


인민군은 퇴각하면서 김 씨 소녀를 풀어 주었다. 소녀는 고향으로 향했다. 남으로, 남으로. 그러던 중, 미군과 한국군으로 이루어진 부대를 만났다. 소녀는 그저 어린아이에 불과했지만 군인들에게는 빨갱이였을 뿐이었다. 그저 조금 더 어린 빨갱이. 소녀는 포로가 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다른 소녀들을 만났다. 그들은 낮에는 군인들의 식사와 빨래 등 뒤치닥거리를 했고 밤에는 군인들에게 불려 다녔다. 소녀들은 군인들의 성욕을 해소하는 분출구에 다름 아니었다. 한국군 위안부.


1953년 휴전. 하지만 김 씨는 고향에 돌아갈 수 없었다. 힘 센 나라들이, 높으신 나리들이 임의로 정해 버린 휴전선을 넘을 수가 없었다. 그녀처럼 고향을 잃은 이들이 휴전선 근처에 모여 마을을 만들었다. 풍진 세월과 함께 소녀는 할머니가 되었다. 복숭앗빛 뺨은 어느새 빛을 잃고 주름만이 지나간 시간을 켜켜이 쌓아 두고 있었다. 


96년 겨울, 할머니는 한 박사과정 여학생을 만났다. 한국전쟁 당시를 묻는 학생에게 할머니는 그때 보았던 소녀들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그 여학생이 바로 2016년 오늘까지도 한국군 위안부 문제에 한한 유일한 연구자인 김귀옥 교수.


김귀옥 교수는 김 씨 할머니의 증언을 토대로 한국군 위안부에 대한 연구에 착수했다. 그러던 어느날,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서가 어딘가에 꽂혀 있던 <후방전사>에서 결정적인 증거를 발견한다. 대한민국 육군의 공식적인 사료에 한국군 위안부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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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프레시안>


이후 연구는 급물살을 탄다. 그리고 2002년, 일본에서 열린 제5회 ‘동아시아 평화와 인권 국제심포지움’에서 한국군 위안부의 존재를 공개한다.


이 엄청난 사실은 <아사히신문>과 <오마이뉴스>(링크)에 동시에 보도됐다. 국내 주요 일간지와 뉴스에서도 이 충격을 다뤘다. 하지만 이 사실은 곧 묻혀 버리고 만다. 누구나 열람이 가능했던 <후방전사>는 외부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으로 치워졌고, 김귀옥 교수는 윗선으로부터 입김을 받은 대학 당국으로부터 ‘조심해 달라’는 경고를 받았다. 한국의 지식인들은 ‘당신의 연구 성과는 인정하지만 굳이 민족의 수치를 이렇게 드러내야 겠느냐’며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에 방해가 될 것을 우려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역시 이른바 ‘커밍아웃’을 하기까지 많은 고민을 했으리라. 단, 이들은 일본 제국주의의 피해자였기에 한국 사회가 껴안을 수 있었다(이조차 상당히 험한 과정을 거쳤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처음에는 쉬쉬했던 문제가 한국인의 애국심을 자극하는 요소 중 하나로 사용되기까지 한다. 그 프로파간다 안에서 일본 제국의 군인은 더럽고 변태 같은 절대악으로 그려진다. 그리고 그의 대척점에 식민지 조선의 여성이 있다. 그 여성은 일본 남성의 야만스러움에 찢겨나갔음에도 여전히 꽃같이 고운 모습의 절대선으로 존재한다. 이런 대립구도 안에서 한국인은 터질듯한 분노를 느낀다. 그리고 이 땅에 다시는 이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국가의 힘을 기르는 데에 몸 바쳐 충성할 것을 다짐한다. 바로 한국 사회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보는 지배적인 시선 중 하나.


이 대립구도 안에는 멋모르던 소녀들을 납치하거나 속여 일본군에 팔아넘긴 조선인이라던가, 피지배인이면서도 일본군 혹은 만주군으로 역할 하면서 위안부 제도의 수혜를 누리던 조선인 남성들의 존재는 잊혀진다. 이들의 존재까지 계산에 넣는 순간, 일본인 위안부 문제가 너무 복잡해 지기 때문. 절대선과 절대악의 대립구도가 그 선명성을 잃어버리기 때문. 한 사회에서 어떤 시각이 절대 다수의 동조를 얻는다면, 아마도 이와 같은 선악의 대립구조 속에서 해당 사회가 절대선의 위치에 포지셔닝 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반면, 한국군 위안부 문제는 그 자체로 복잡하다. 가해자는 한국 남성. 국가를 위해 몸 바쳐 싸운 영웅들을 우리는 차마 더러운 변태 같은 일본 군인과 동일시할 수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있었던 사실에 귀 닫고 눈 감고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는다면 우리가 그리도 증오하는 일본 제국주의와 다를 것이 무언가.


2016년 오늘, 우리는 과연 국가와 이데올로기라는 꺼풀을 벗겨낸 이후에도 인권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대한민국 육군 특수위안대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 발발 이후, 북한의 인민군은 빠르게 남한 지역의 대부분을 점령했고, 같은 해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계기로 국군과 연합군은 북한 지역의 대부분을 점령하기에 이른다. 이후 중국 인민지원군의 참전으로 1950년 12월부터 1951년 초 사이, 북한이 서울을 재점령하는 1.4 후퇴가 있었다. 1951년 3월에는 남한이 서울을 재탈환하고 전쟁은 현재의 휴전선 부근에서 고착되었다. 이는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체결되기까지 계속되었다. 한국전쟁 전체 기간의 2/3가량을 차지하는 이 기간 동안 전선에서는 전투가 끊임없이 계속되었고, 대한민국 육군 본부는 한국군 위안부, 즉 ‘특수위안대’를 설치했다. 이 특수위안대는 휴전 이후인 1954년 3월에야 폐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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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 시기가 2011년에 개봉한 장훈 감독의 영화 <고지전>의 배경.
294만 명의 관객이 들었다고 하는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영화 속에 묘사된 참담함을 기억할지는 모르겠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3년이 지난 1956년, 육군본부는 <후방전사(인사편)>이라는 책을 낸다. 책의 서언에는 이후 군대에 대한 후방 지원 업무를 발전시키는 데에 기여하고자 함을 출간 목적으로 밝힌다. 바로 이 책에 특수위안대에 대한 내용이 밝혀져 있다. 이는 특수위안대가 한국전쟁기 군인에 대한 후방 지원을 목적으로한 군대 시설의 하나이며, 국가에 의해 창설된 것임을 보여준다. 


그 설치의 배경 및 목적을 보자.



표면화한 이유만을 가지고 간단히 국가시책에 역행하는 모순된 활동 이라고 단안하면 별문제이겠지만 실질적으로 사기앙양은 물론 전쟁사실에 따르는 피할 수 없는 폐단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장기간 대가 없는 전투로 인하여 후방 래왕이 없으니만치 이성에 대한 동경에서 야기되는 생리작용으로 인한 성격의 변화 등으로 우울증 및 기타 지장을 초래함을 예방하기 위하여 본 특수위안대를 설치하게 되었다.


육군본부, <후방전사>, 1956:148



그러니까, 군인들의 사기를 고취하고 성욕을 분출하지 못하는 데에서 야기되는 지장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설치한 것이 바로 특수위안대였다는 것. 남성의 성욕은 스스로 절제할 수 없다는 생각, 그리고 여성을 그 분출구로 보는 시선은 사실 2016년 오늘날의 일상 속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것(인지라 너무나도 놀랍지 않은 것이 더욱 놀라울 따름이다).


위안대는 소대 형식으로 편재되었다. 서울에는 중구 충무로, 중구 초동, 성동구 신당동에 총 세 개 소대가 설치되어 있었고 강릉에는 성덕군 노암리에 한 개 소대, 또한 춘천, 원주, 속초 등지에도 여러 위안대가 있었다 . 1953년에는 서울 충무로,종로 화신 백화점 앞, 종로 단성사 앞, 그리고 영등포 로터리에 4개 소대가 추가로 설치되었다. 


특수위안대 규모에 대해서는 <후방전사>의 기록이 명확하지 않다. 설명과 표에서 각기 다른 수치를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한국전쟁 당시 국군의 주요 지휘관 중 한 사람이었던 채명신 장군은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당시 우리 육군은 사기 진작을 위해 60여 명을 1개 중대로 하는 위안부대를 서너 개 운용하고 있었다.

채명신, 《사선을 넘고 넘어: 채명신 회고록》, 서울 : 매경출판주식회사, 1994, p267



이를 바탕으로 하여 계산해 보면, 국군의 특수위안대에는 대략 180~240명 정도의 위안부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53년에 신설된 4개 소대까지 합치면 300명이 넘을 것으로 짐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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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한국군 특수위안대 월별 실적 통계표
대한민국 육군본부, <후방전사(인사편)>, 1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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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한국군 특수위안대 월별 실적 통계표 (한글)
김귀옥(2014). 일본식민주의가 한국전쟁기 한국군위안부제도에 미친 영향과 과제, 사회와역사, 103, p93.


육군본부의 <후방전사>에는 1952년 특수위안대 실적통계표가 수록되어 있다. 서울의 세 개 특수위안대 소대와 강릉의 한 개 소대의 ‘실적’을 월별로 표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실적이란 ‘피위안자’의 수로 대표된다. 피위안자라 함은 위안부로부터 위로와 안녕을 구한 이들을 말한다. 즉, 위안부를 통하여 성욕을 해소한 군인들 되겠다.


처음 이 표를 보았을 때, '실적'이라는 표현이 상당히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아, 여성을 대상화하지 않았다면 특수위안대 따위 설치하지도 않았겠구나’ 하는 생각이 잇따랐다. 사실, 한국전쟁 당시 위안부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저 제5종 보급품이었다. 사람이 아니라 ‘보급품’. 



연대 1과에서 중대별 제5종 보급품 수령지시가 있어 가 보았더니 우리 중대에도 주간 8시간 제한으로 6명의 위안부가 배정되어 왔다. 


김희오, <인간의 향기: 자유민주/대공투쟁과 함께한 인생역정>, 원민, 2000, p70



다시 통계로 돌아가서. 1952년 특수위안대 실적통계표에 따르면 그 해 서울의 세 개 소대 특수위안대와 강릉의 한 개 특수위안대에 속한 위안부들이 20만 명이 넘는 군인을 상대했다. 위안부 한 명이 하루에 평균 6명 이상과 성행위를 하도록 강요받았던 것이다. 다만 여기 나타나는 ‘실적’은 4개 위안대에 직접 출입한 군인들의 통계인지, 전선 부대에 출장을 간 위안대를 이용한 군인들의 통계까지 포함하는지는 불명확하다. 따라서 하루 평균 피위안자의 수가 더 많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하겠다.


여기서 ‘출장’이란 본래 특수위안대가 있는 곳에서 군인을 받는 것이 아니라, 위안대원 몇을 전투 중에 있는 군인들을 위해 사용할 목적으로 전선으로 보내는 것을 일컫는다.



(1952년) 3월 중순의 기후는 봄을 시샘할 듯 쌀쌀했다. [...] 사단 휼병부(恤兵部)로부터 장병을 위문하러 여자 위안대가 부대 숙영지 부근에 도착하였다는 통보가 있었다. 중대 인사계 보고에 의하면 이들은 24인용 야전천막에 합판과 우의로 칸막이를 한 야전침실에 수용되었다고 하며 다른 중대병사들은 열을 서면서까지 많이 이용했다고 하였다. 


차규헌 예비역 육군 대장 회고록 <전투>(1985년) 중에서



한국전쟁 중 전선이 고착된 1951년 7월 이후부터 후방에는 사창가가 확대되었다. 법적으로는 1947년 이래 공사창제가 폐지되었으나, 소용이 없었다. 사창가가 있었어도 전투지에 주둔하는 군인들은 여자를 만날 수가 없었다. 장교들은 현지처를 두었고, 간혹 병사들이 강제로 데리고 온 여성들로부터 ‘성 상납’을 받기도 했다. 일반 병사들은 점령지 여성들을 강간하는 것으로 성욕을 해소했다.


실제로 한국군이 38도 이북 지역을 점령했을 때, 소위 인민군이나 빨갱이 가족, 여성들에 대해 거의 예외 없이 성폭력이 가해졌다고 한다. 밤마다 한국군이 젊은 여성들을 겁탈하고 돌아다닌다는 소문이 이웃 마을부터 전해왔고, 곧 그 소문은 사실로 밝혀졌다. 어떤 처녀는 세 번 이상 겁탈을 당하고는 마을을 떠나고 말았고, 어떤 이는 당하는 게 무서워 거지처럼 꾸미고 다니거나 정신병자인 척 했다고 한다. 육군본부 측에서는 전선이 고착되면서 이 카오틱한 상황을 정리하고, 또한 전투로 노고가 많은 군인들을 위로 및 포상하기 위하여 특수위안대를 조직했다. 


또한 전선에서 위안부대의 출입은 하나의 포상이었다. ‘티켓제’. 즉, 위안부와 자려면 티켓이 있어야 하는데, 아무에게나 티켓을 나누어 주는 것이 아니라 전쟁터에서 용감하게 싸워 공을 세운 순서대로 배부하는 것이다. 또한 공훈의 정도에 따라 티켓의 수도 달라졌다고.



사병들은 안을 기웃 거리며 안에다 대고 '빨리 나와! 빨리 나와!'하며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나는 그제야 그 곳이 어떤 곳인가를 알수 있었다. 천막에 들어가서 여자에게 표를 주고 10여 분 간 즐기고 나오는 그런 곳이었다. 그 순간 나는 부끄럽고 창피한 생각이 들었지만 한편으로 호기심이 일기도 했다.


한인수, 《격량의 세월과 인샬라》, 서울 : 교음사, 2003, p96



그런가 하면 육군본부의 <후방전사>에 따르면 군은 성병에 대해서 철저한 대책을 강구했다. 위안부는 일주일에 2회 군의관에 의하여 엄격한 검진을 받았고, 군인들에게는 약을 처방했다. 하지만 김귀옥 교수의 구술 연구 결과, 당시 성병은 한국 군대에서 상당히 비일비재하게 발병했던 것으로 보인다.



"‘(1950년대) 군대에 다녀온 한국 군인이라면 적어도 한 번쯤은 매독에 걸려야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2016년, 프랑스 파리7대학 김귀옥 교수 세미나 중에서



이처럼 한국군 위안부의 존재를 부정할 여지는 없다. 대한민국 육군본부에서 발간한 <후방전사>뿐 아니라 당시 군에 몸담았던 이들의 회고록 및 자서전 여기저기서 한국군 위안부의 흔적이 드러난다. 이 확실한 증거들에도 불구하고 한국군 위안부가 빠른 속도로 잊혀져 갈 수 있었는 것은 실제로 스스로가 위안부였음을 밝히는 증인의 부재 때문일 것이다.


그리하여 한국군 위안부 생활을 했던 여성들은 어떤 사람이었는가에 대한 답변은 간접적인 증언을 토대로 유추해내는 수밖에 없다. 실제로 한국군 위안부가 공개로 모집되었다는 사실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김귀옥 교수는 위안부로 추정되는 몇 사람을 만났지만 ‘울음과 침묵’으로 답할 뿐이었고, “무덤으로 가져갈란다”며 다음 날 진술을 번복하기도 했다고 전한다. 이제 소개할 세 사람의 이야기는 그래서 가해자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를 재구성한 것이다.


1951년. 문 씨도 소녀였다. 많아 봐야 열 일곱 살. 38도선 건너편에서 조선여성동맹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어느 날, 문 씨는 같은 동네에 살던 여자 친구들 네 명과 함께 한국군 첩보부대원(북파공작원)에게 납치를 당해 남쪽으로 끌려 왔다. 소녀들은 낮에는 부대에서 온갖 부역(청소, 빨래 등)을 했고, 밤에는 부대원들의 성노예가 되었다.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발효된 후에는 그냥 버려졌다. 당시의 일을 묻는 김귀옥 교수에게 문 씨가 한 말이라고는 ‘전쟁 때 아이 낳고 고생하며 산 것밖에 없다’는 것. 이윽고 더는 할 이야기가 없다고 과거의 일을 떠올리기를 단호히 거부했다.


다른 두 여성은 의과대학생이었다. 인민군에 끌려가 군의관으로 잠시 생활했다. 인민군은 낙동강으로 진군(혹은 철수)하면서 이들을 놓아주었다. 자유의 몸이 된 것도 얼마뿐. 이 둘은 곧 한국군과 마주친다. 그렇게 포로가 되어 군부대에 끌려갔다. 그곳에서 그들은 혼자가 아니었다. 이미 수많은 10대 소녀들이 교복, 혹은 한복을 입고 인민군 부역자(한국전쟁 중, 38도 이남 지역이 인민군의 세력 하에 있을 때 자의 혹은 타의로 인민군에 협력한 이들)로 감금되어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둘 중 나이가 어린 한 명은 얼마 후 장교에게 소위 ‘성 상납’ 되는 신세에 처한다. 하늘이 도왔던 것일까. 장교는 그녀에게 청혼을 한다. 장교와의 결혼으로 소녀는 인민군부역자와 군 위안부가 되는 것만큼은 면할 수 있었다. 다른 한 명은 감옥에 투옥되어 간첩혐의로 고문을 당하기까지 했다. 다행히 가족이나 지인들의 보증으로 풀려나와 군 위안부가 되는 것은 모면했다고 전해진다. 


김귀옥 교수가 첫 번째 여성, 그러니까 장교와 결혼했다고 증언한 여성에게 물었다. 


"당시 잡혀 있던 수십 명의 10대 소녀들은 어떻게 되었나요?"


그녀는 담담하게 군 위안부가 되었을 것이라 대답했다고 한다. 어떻게 알았냐는 물음에 건조한 대답이 따라 온다.
 

"뻔하지 않는가."


이들의 증언은 어떤 식으로 한국군 특수위안대가 꾸려졌는지 예상하게 해 주는 사례로 작용한다. 이 세 여성의 증언뿐 아니라 한국전쟁 당시 전선에 있었던 군인들, 즉 육군본부 식으로 말하면 ‘피위안자’였던 이들의 증언 역시 일치한다. 피위안자들은 당시 위안부 여성들을 회상하며, 화장하고 멋 부린 사창가 여성이 아니라 촌스러운 용모의 15-16세 정도의 어린 여성이라고 했다. 리영희 선생의 자서전 <역정 – 나의 청년시대> (창비, 1988)에도 한국군 위안부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한국전쟁 당시 자신의 부대에 군 위안부 몇몇이 출장 위안을 왔는데, 그 중 한 명이 자신의 부대원과 고향 친구였다는 것.


김귀옥 교수는 한국군 위안부는 강제로 끌려온 여성들, 또는 ‘빨갱이’나 ‘빨갱이 가족’으로 분류되어 군에 납치된 여성들로 이루어졌다고 본다. 실제로 김 교수가 만나 본 세 명의 여성은 모두 사회주의자였거나 혹은 자의든 타의든 인민군의 편에 섰던 이들이다. 물론 전쟁고아가 일부 있을지 모르겠으나 군 위안부 여성들은 대부분 좌익부역 혐의자들로 추정된다고 한다. 빨갱이. 고 박완서 작가의 소설들을 챙겨 봤다면 ‘빨갱이’라는 딱지가 이 땅에 허락한 야만이 어느 정도였는지 기억할 것이라 생각한다 . 소위 빨갱이 혐의를 받는 상황에 무력을 갖춘 군인들에게 위안부를 거절한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했다. 좌익을 구실로 손쉽게 끌고 올 수 있지 않았겠나 하는 것이다.



우리는 공산주의를 신봉하는 북조선과, 남한에서도 좌익 이념을 가진 사람들을 한데 싸잡아 빨갱이라고 불렀다. […] 이 땅에서는 빨갱이로 몰리는 게 가장 가혹한 따돌림이었다.


박완서,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서울 :현대문학, 2010, p167



서울을 수복한 우리 정부가 제일 먼저 공들여 한 작업이 시민증과 도민증의 발급이었다. 그전에는 평민들에게 따로 신분증이라는 게 없었다. […] 심사가 까다로워 부역자로 의심받거나 고발이라도 들어오면 시민증 받기가 어려웠다. 그 무렵 중공군의 참전으로 압록강까지 북진했던 유엔군이 작전상 후퇴라는 걸 하게 되면서, 서울 시민도 동요하기 시작했다. 권력자나 부자들이 먼저 서울을 떴다 . […] (우리는) 가장인 오빠가 6.25 때 부역한 혐의로 그때까지 시민증이 안 나와 꼼짝 못하고 있었다. 시민증이 곧 생명줄인 시대였다. 그게 없으면 빨갱이 취급을 당하고 빨갱이는 사람도 아니었으니까.


박완서,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서울 :현대문학, 2010, pp61-62



정리해 보자. 


인천상륙작전 이후 한국군과 연합군이 북진하면서 소위 빨갱이에 대한 응징도 함께 이루어졌다. 그 과정에서 여성에 대한 응징은 성폭력의 형태로 나타났다. 그런 분위기 하에서 1951년 여름, 전선이 고착되면서 ‘특수위안대’ 즉, 한국군 위안대가 설치되었던 것이다. 육군본부에서 정식으로 설치하였으나 그 동원 방식은 이전과 별 차이 없이 납치 등을 통한 강제동원이었으며, 그곳에서 위안부들은 반인권적인 노예 상황에 맞닥들이게 되었다.


그리고 2002년 한 연구자의 용기로 이루어진 발표는 결국 이른바 우리 사회의 엘리트라는 이들의 외면을 받고선 2016년 오늘에 이르도록 받아야 마땅할 조명을 받지 못하고 있다. 



 화마에 할퀸 한반도
 눌러도 눌러도 흘러나오는 소리 없는 통곡
 닦아도 닦아도 흘러내리는 식지 않는 핏물


 60년, 잊힐 만도 한데
 벙어리새는 찢기고 상처난 날개를 퍼덕이며
 벙어리새 가슴속 기억들을 노래한다.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에 잡혀가 군의관으로 있다가 다시 한국군에게 끌려가 위안부가 될 뻔했던 여성의 시다. 시 안에서 그녀는 벙어리새. 60년이 지나도록 잊히지 않는 그 때의 기억을 노래하지만 그 목소리는 몸속에 흐르는 피처럼 자신의 육체의 갇혀 있을 뿐 밖으로 나오지를 않는다. 그녀를 벙어리새로 만든 것은 도대체 누구인가.



벙어리새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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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광경을 보고서도 각기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이 인간이다
출처 - <KBS>


몇 달 전, 한 인터넷 사이트에서 갓 도축된 쇠고기가 움직이는 모습에 대해 보인 이과와 문과의 각기 다른 반응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이과로 보이는 베스트 댓글은 “근섬유가 자극을 받아 세포막을 중심으로”로 시작하여 “칼슘이 원래의 저장부위로 흡수되면 근섬유는 원래의 상태로 이완하는 것이구나!”로 끝을 맺었고, 문과의 베스트 댓글은 “분명 죽은 놈의 고기지만 뭔 재주로 꿈틀거리나 저 핏덩이도 살겠다고”라며 고기의 삶에 대한 의지에 질투를 느낀다고 고백을 했다. 이렇게 하나의 같은 주제를 던져 주어도 각자가 처한 입장과 평소의 사고방식 및 가치관, 그리고 사안에 대해 미리 알고 있는 배경지식에 따라 각기 다른 부분에 중점을 두고 논의를 진행해 나간다. 


한국군 위안부 문제를 통해 우리는 무엇을 느꼈을까? 또한 무슨 이야기를 할까? 이 문제를 처음으로 접한 사람은 아마도 적잖은 충격을 받았을 것이고 곧이어 한국군 위안부에 내포되어 있는 의미와 연결고리를 찾기 시작했을 것이다. 혹자는 여성의 문제를 생각할 것이고, 혹자는 전쟁의 잔인함을 떠올렸을지도 모르겠다. 또한 누군가는 필자는 상상도 못 할 생각을 해내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오늘 필자가 한국군 특수위안대 문제를 접하고 할 수 있는 이야기는 고작 세 가지 정도일 것 같다.


 첫째, 한국군에게 위안부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 심각한 사실을 한국군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것이 분명하다. 특수위안대의 존재가 문제가 되리라 보았다면 공식 자료인 <후방전사>에 그리도 떳떳하게 군 위안부는 전선에서 고생하는 군인들의 후생을 위한 당연한 조치라 밝히지 않았을 것이며, ‘실적’ 통계까지 세세히 담지 않았을 터.


한국전쟁 당시 위안부의 존재는 당연한 조치를 넘은 ‘필수적’인 요소로까지 인식되었다. 1952년. 당시2-300명 규모의 군위안부로는 전쟁을 통해 확대된 60만 명 군인의 수요를 충족시키기가 힘들어졌다. 게다가 1951년 7월 휴전회담을 시작한 이래 최전선에서 소강상태가 되자 군인들의 군기가 문란해지기 시작했다. 그런 배경에서 1952년 연말이 되면서 언론을 통해 위안소 시설을 확충하라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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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각지에 일선장병 휴가 귀향 시에 피로한 심신을 풀어주며 승전을 위해 생명까지도 바치는 참된 애국자들의 사기를 도웁기 위한 따뜻한 위안소를 조속히 설치할 것'


동아일보 1952년 12월 30일자, ‘휴가귀향장병에 위안음 베풀자’



특수위안대의 신설 시기는 이미 한국전쟁이 종료된 이후인 1953년 11월. 정전은 되었으나 남한과 북한은 모두 60만여 명의 대군을 유지했다. 휴전 당시 대다수 부대를 휴전선 근방에 배치하다 보니, 군인들의 제대를 늦추기 위해서는 이들을 달래 주어야 했다. 그래서 대한민국 국군은 위안부 제도를 유지하기로 한다. 1954년 3월, 특수위안대 해체 이후에는 군부대 주변의 수많은 군 기지촌 시설, 공, 사창 성매매업이 그 역할을 대행하게 되었다. 특수위안대는 그렇게 해체는 되었지만 끝내 해산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고 특수위안대도 사라지면서 위안부의 존재는 대부분의 ‘피위안자’들의 기억 속에서도 잊혀져 버린다. 김귀옥 교수가 만난 피위안자들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자 그제서야 한국군의 위안대가 떠올랐다고 한다. 특별할 것 없는 추억이 보통 바래져 가는 회색빛으로 뿌옇게 남아 있다가 갑자기 어떤 계기로 인해 원래 색을 되찾게 되는 것처럼.


한국군 위안부에 대한 국방부의 입장이 달라진 것은 2002년 한성대학교 김귀옥 교수와 한국 정신대 연구소의 강정숙 연구위원의 발표를 기점으로 한다. 이전까지는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거나 혹은 잊고 있었기에 ‘떳떳’했지만, 이후 <후방전사> 열람을 불가능하게 조치했다는 것은 적어도 2000년대 이후로부터는 한국전쟁 시기 군대가 자행한 일에 대하여 더 이상 별 것 아니라는 식의 태도를 취하기 힘들어졌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이해된다. 하지만 국가는 여전히 사과는커녕 그 어떤 조치도 취하고 있지 않다.


 둘째, 한국군 위안부는 일본군 위안부의 연장이다.


김희오는 자신의 중대에 ‘제5종 보급품’이 배정되어 왔던 이야기를 하며, “과거 일본군대 종군경험이 있는 일부 연대 간부들이 부하 사기앙양을 위한 발상으로 일부러 거금의 후생비를 들여 서울에서 조변하여 온 것”이라고 밝혔다. 실제로 해방 이후 창설된 대한민국 육군 간부의 상당수는 일본군 계통과 만주군 계통 등으로 구성되었다. 바로 피지배인이었으면서도 일본 제국주의의 대리 전쟁인을 자청했던 그들.


일본군 출신은 대개 해방 직후 대한민국 국군 고위 계급을 차지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해방 이후 미 군정 하에서 한국군은 형식적으로는 미국식으로 개편되었지만 군부는 친일파가 득세함으로써 한국군은 일제 군대 문화와 제도들을 사실상 답습하였던 것이다.


실제로 한국군 특별위안대 설치와 운영에 책임을 가진 육군본부 후생감(1951년 휼병감, 1954년 정병감으로 개칭)은 모두가 학병 혹은 일본육사 출신이었다. 그 중 특별위안대를 설치한 조직인 휼병감실의 전신 후생감실은 박경원에 의해 설립되었다. 박경원은 식민지 시기 학도병으로 참전하여 해방 직전 소위로 제대하였고, 해방 후 군사영어학교를 거쳐 중장으로 예편한 후 박정희 정권 하에서 4대에 걸쳐 내무장관을 포함하여 5번의 장관직을 역임했던 인물.


또한 한국군 특별위안대 설치 추정 시점인 1951년과 위안 실적을 통계 처리할 수 있을 정도로 운영된 시기인 1952년에 휼병감 직책을 맡았던 사람은 제3대 육군대령이었던 장석윤. 1892년생으로 일본 육군사관학교 제27기이며 1915년 일본육사를 졸업하였다. 1928년 소화일본천황 즉위기념 대례 기념장을 받은 바 있고, 1938년 만주 국경감시대에서 대위로 복무하였다. 일제가 패전할 당시에는 만주국군 중좌(중령)였다. 해방 이후 귀국하여 군대에 입대, 한국전쟁 당시 제9 예비사단장과 교육총감부 참모장을 거쳐 1953년 육군 대령으로 예편했다. 예편하기 전, 1951년 3월 1일부터 1952년 6월 19일까지 육군대령으로 육군본부 휼병감실을 맡은 인물이다.


결국 일본 제국주의의 청산되지 못한 잔재가 결국 이 사단을 냈다는 것. 


인물의 연속성 말고도 이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것들은 여러 가지가 있다. 특수위안대 설치의 목적은 성욕을 분출하지 못하는 군인들이 우울증에 걸리거나 혹은 뻘짓을 해서 전력에 손실을 내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함에 있었다. 남성을 성욕이라는 본능을 통제하지 못하는 존재로 보고, ‘전쟁에의 승리’라는 보다 큰 목적을 위해 여성을 희생시켜도 되는 대상으로 (제5종 보급품) 취급했다는 시선 역시 일본군이 위안 시설을 설치했던 때와 일치한다. 다만 일본군의 경우, 온전한 일본의 국민이 아닌 식민지 여성들을 동원했고, 한국군의 경우는 빨갱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있는, (마찬가지로) 다른 방식으로 온전한 국민이 아닌 여성들을 동원했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동원의 강제성 문제와 더불어 2주에 한 번씩 군의관의 검진이 있었다는 점 역시 일본군 위안부 제도의 연장으로 볼 수 있다. 강제 성병 검진제도는 일본의 공창제가 갖는 주요한 특징 중 하나. 즉, 한국군의 당시 수뇌부들은 일본의 시스템을 직접 겪으며 성병 등에 대처방식을 이미 학습했던 것. 일본 제국주의와 같은 방식으로 해방된 남한에서도 국가가 여성의 몸을 관리하고 통제함으로써 군인의 몸을 보호하는 신체의 정치학을 활용한 것이다. 반면 일본의 경우에는 위안부 시설을 운영하면서 콘돔을 배포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한국군에서는 피임과 관련한 기록이 없다고. 특수위안대의 명칭 역시 과거 일본군 위안대를 지칭하는 용어인 ‘특수위안소’에서 온 것으로 보인다. 



해방 이후 한국에서는 과거 식민주의가 청산되지 못한 채, 근대 국가가 수립되는 운명을 맞이했다. 쉽게 말하면 일제식민주의를 경험했던 한국군 위안부 문제는 기이한 문제가 아니라, 미 청산된 식민주의의 하나였다. 그러기에 한국군 위안부 문제는 과거사 청산 문제의 일부로 존재할 뿐 낯선 문제도 일탈적인 문제도 아닌 것이다. 물론 한국군 위안부 문제가 최근까지 침묵된 기저에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함께 한국의 가부장적 성문화를 포함한 가부장제 이데올로기가 작동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위안부제도가 한국전쟁기에 육군에 의해 시행되었던 데에는 일제 식민주의를 내재화한 만주국군이나 일본군 출신의 한국군 간부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김귀옥(2014). 일본식민주의가 한국전쟁기 한국군위안부제도에 미친 영향과 과제, 사회와역사, 103, pp111-112



셋째, 그런 한국군이 베트남 전쟁에서 성폭력의 주범이 되었던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한민족을 흰 옷을 입은 평화를 사랑하는 이들이라 철썩 믿으며 자랑스러워하던 때가 있었다. 그 때 보았던 조성모의 노래 ‘아시나요(2000)’의 뮤직비디오는 그래서 그저 비현실적이기만 했다. 노래만 따라 불렀고, 뮤직비디오는 드라마틱해서 재미있었다. 정지영 감독의 <하얀전쟁>(1992), 공수창 감독의 <알포인트>(2004), 이준익 감독의 <님은 먼곳에>(2008) 등 베트남 전쟁과 관련한 문화콘텐츠들이 계속적으로 생산되는 한편, 다큐멘터리를 통하여 베트남에 있는 전쟁희생자 추모비와 한국군에 대한 증오비에 대한 소식이 지속적으로 귓가에 들려옴에도 불구하고, 어릴 적 흡수한 프로파간다는 떠날 줄을 몰랐다. 오히려 그냥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우리나라 만세만 외치고, 그런 좋은 나라에서 사는 멋진 나로 남고 싶다는 어리석은 욕심이 프로파간다를 재생산하고 있었다. 그래서 한국사람은 나쁜 일본놈에게 당하기는 했지만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므로 다른 나라에 나쁜 짓을 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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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지금은 베트남전에 참전한 한국군의 만행이 기정사실화되었다. 민간인 학살뿐만 아니라 베트남 여성에 대한 성폭력 범죄 역시 빈번하게 일어났다. 라이따이한, 그러니까 한국 군인과 현지 베트남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2세 문제는 아직도 풀어갈 길이 멀다. 그에 대한 그 어떤 정부 차원의 보상이나 사죄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상태일 뿐 아니라 참전군인단체들의 저항은 아직도 거세다. 작년 4월, 베트남에서 한국군 민간인 학살 피해자들이 한국으로 와 집회를 하자, 참전 군인 단체들은 꽤나 조직적이고 거세게 이들을 방해했다 . 그런데 얼마 전에는 한국군이 그들과 미군의 육체적 쾌락을 위해 베트남 위안부 여성들로 매춘소를 만들었으며, 이들은 5천 명에서 3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는 주장이 나온 상태이기도 하다.


일제 군대 문화와 제도들을 사실상 답습한 한국군이 위안부 제도를 이어받아 오히려 자기 식으로 발전시켜 운영해 온 경험을 비추어 보면, 비로소 베트남전에서 한국군이 아무렇지도 않게 자행한 대규모 성폭력의 배경이 이해가 된다. 실제로 베트남전에 참전한 한국군은 또 다시 위안대를 조성하여 베트남까지 데리고 가려고 했다고 한다. 이를 미국 측에서 거절했다는 것. 거절의 요지는 한국군이 받을 월급으로 충분히 여자를 살 수 있다는 것이었다고. 


결국 우리는 일본 제국주의라는 외부로부터 온 야만을 내던지는 대신에 우리의 것으로 흡수해 버렸다. 그렇게 내재화된 야만은 우리를, 우리가 그토록 욕하던 그들과 같은 괴물로 만들어 버렸다. 이 대목에서 우리의 마음은 가벼워질까? 혹은 더 무거워질까? 한국군 위안부, 베트남 여성 성폭력의 원인을 일본 제국주의에서 찾을 수 있어서 가벼워질까? 혹은 그 일본 제국주의의 잔재를 없애고 친일파를 처단하지 못한 역사의 과오로 인하여 벌어진 참상 앞에서 마음이 보다 무거워질까?


사실, 현재 우리 한국 사회의 분위기 안에서 한국군 위안부 피해자가 스스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수면 위로 나와 정부와 군에 사과와 피해 보상을 요구하는 것을 기대하기란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러하기에 오늘 한국을 살아가는 시민들에 우리 사회의 과거의 과오를 인정하고 반성하고, 또한 그 힘으로 더욱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발판을 만들어 나가도록 해야 한다는 숙제가 있다. 그리고 그 숙제는 과거 우리 사회의 잘못을 인지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할 수 있을 터. 물론 선택은 각자의 몫이다.





편집부 주


아까이소라님은 xsfm의 팟캐스트 <그것은 알기 싫다>에 출연,

해당 주제로 방송을 하신 바 있으니


관심 있는 분들은 아래 링크를 통해 방송을 접해 보시라.


오늘까지의 한국군 위안부(1/2) (링크)

오늘까지의 한국군 위안부(2/2) (링크)






아까이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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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 딴지일보 coco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