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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전 세계가 대공황이란 거친 파도에 휘청이던 그때, 소련은 계획 경제로 위기를 극복하려고 했다. 당시 소련은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발표해 착실히 공업화로 들어서게 된다.

 

겉으로 드러나는 경제지표만 본다면, ‘소련의 기적’, ‘스탈린의 성공’이라 말해도 부족함이 없는 훌륭한 성과를 보였지만, 그 실상은 좀 복잡했다. 스탈린은 농업을 한쪽 구석으로 팽개치고, 소련을 중화학 위주의 공업 국가로 뜯어고쳤다. 그 와중에 수많은 농민들을 농토에서 끌고 와 공장으로 집어넣었다. 이런 강제적인 ‘집행’ 뒤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이 뒤따랐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소련 사회의 분위기는 어수선하게, 아니 불만이 차곡차곡 쌓여가게 된다. 이런 분위기를 감지한 스탈린이 꺼내 든 카드가 바로 ‘피의 난장이’, 니콜라이 이바노비치 예조프였다.



“(스탈린에 대한) 정치적 반대는 필연적으로 폭력과 테러로 귀착된다.”


 

그가 1935년에 발표한 논문의 가장 유명한 구절로, 스탈린에 대한 그의 충성심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런 그를 스탈린은 NKVD(인민 내무부)의 수장 자리에 앉히게 된다. 인민 내무부란 이름이 생소하다면, 이렇게 설명하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KGB의 전신”

 

1937년부터 1938년까지 50~75%의 공산당 고위 간부와 군대의 고급 장교들이 처형되거나 시베리아로 유배됐다. 일반 시민들까지 포함하면, 최소한 170만 명이 구속되고, 144만 명이 유죄 선고를 받고 형을 살았으며(시베리아행), 이 중 72만 명이 처형당했다(대숙청 당시 처형자 숫자는 NKVD가 줄여서 발표했다는 주장이 신빙성을 얻고 있다. NKVD 발표의 최소 2배 이상이란 주장이 계속해 나오고 있다).

 

트로츠키파를 제거하고, 나치 독일의 첩자를 색출한다는 명분으로 시작됐지만, 규모는 점점 커져갔다(이를 두고 스탈린을 욕할 수만은 없는 것이 동서고금을 통틀어 정권 누수 현상이나 그런 분위기를 감지한 권력자는 두 가지 카드 중 하나, 혹은 두 가지 카드를 동시에 씀으로 자신의 권력을 지키려 한다. 바로 ‘인사’와 ‘사정’이다. 스탈린의 숙청을 민주주의 정권 하에서 순화해서 사용하는 것이 바로 ‘사정정국’이다. 정권 내나 주변부의 분위기를 급랭시켜 납작 엎드리게 하는 것이다).

 

문제는 군대였다. 독재자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자신의 권력을 위협하는 ‘무력’이다. 특히나 볼셰비키 혁명을 통해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한 소련은 군대에 대해 ‘특별한 기억’을 가지고 있다. 적백내전 당시 프롤레타리아로 구성된 적군은 초기 직업군인들에게 판판이 깨졌다.

 

결국 이들은 ‘프로’ 즉, 그들이 적개시 하던 제정 러시아의 직업 군인들을 받아들여 전쟁에서 승리하게 된다. 문제는 그 다음인데, 만약 이 붉은 군대가 사회주의 체제에 반기를 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는 중대한 문제였다. 적백내전 후 붉은 군대의 사단장급 이상의 고위 장성들의 90%는 제정 러시아군 장교 출신이었다.

 

대책이 필요했다. 이미 많은 군사 엘리트들이 공산당에 가입하겠다며, 입당원서를 내미는 상황에서 이들을 어떻게 통제해야 할까?

 

이렇게 해서 나온 게 그 악명 높은 ‘정치 장교’이다. 당이 군을 장악해 반란의 싹을 미연에 자르겠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지휘관의 명령이 시행되려면, 명령권자인 지휘관과 정치 장교의 동의가 필요했다는 것이다. 소련 군대는 시작부터가 절름발이 군대를 지향했다(명령권자가 2명이라면 제대로 작전이 될까?).


이런 상황에서 대숙청이 시작됐다. 대령에서 원수까지의 지휘관 837명 중 720명을 포함해서 육해군의 고위 장교 및 정치장교의 45%가 처형되거나 면직됐었고, 소련 군부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군사위원회의 고위 장교들 85명 중 71명이 처형당했다.

 

1936년부터 1938년까지 소련군 내부적으로 총 42,218명이 숙청됐다.

 

소련은 이런 상황에서 장고봉 전투, 할힌골 전투, 나아가 제2차 세계대전을 치뤘던 것이다.

 


에스컬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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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고봉 전투는 전형적인 폭력의 에스컬레이터의 모습을 보여준다(할힌골 전투도 마찬가지다). 최초 소련군이 장고봉을 점령하자, 일본군은 대단위 부대가 움직일 수는 없을 것이란 ‘자의적 판단’을 내렸고, 그 결과 조선군 제 19사단을 투입하게 된다.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이 당시 19사단은 어떠한 중화기(화포 포함)의 지원도 없는 알보병이었다는 것이다. 이들은 말 그대로 분전(奮戰)했는데, 19사단 휘하의 75연대는 야습을 가해 소련군 제 40사단을 격퇴했고, 이후 반격해 오는 소련군을 몇 번이나 막아낸다.

 

이에 열 받은 소련군은 1개 군단, 1개 기계화 여단, 연해주 항공대까지 동원해 대반격을 해온다. 대단한 건 이 엄청난 화력을 알보병인 19사단이 맨몸으로 받아냈고, 소련군에 꽤 심각한 타격을 줬다는 것이다(우리가 기억하는 일본군의 모습은 기관총과 중화기로 방비된 참호에 창검 돌격하는 생각 없는 군대로 각인돼 있지만, 원래 일본군은 잘 훈련되고 정신적으로 강건한 소수정예의 정예강군이었다. 훗날 태평양 전쟁에서 기계화 된 미군 앞에 알보병으로 돌격하는 일본군의 모습은 일본의 공업생산력과 국가의 국력 차이에서 나온 어쩔 수 없는 선택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장고봉 전투와 그 연장선상이 할힌골 전투에서 일본 보병이 소련 기계화 부대에 ‘상당한’ 타격을 입히면서 일본에게 ‘잘못된’ 자신감을 심어 준 결과라고 볼 수도 있다).

 

결국 제 19사단은 장고봉과 사초봉을 지켜내면서 소련군의 진격을 막아냈지만, 알보병의 한계를 극복할 수는 없었다. 소련군 역시 마찬가지였다. 압도적인 병력을 동원했지만, 일본군에게 밀리는 상황에서 이들은 수습책을 찾아야 했다.

 

결국 개전 2주도 안 돼 일본군과 소련군은 각자 526명, 792명의 전사자를 남기고 정전 협정을 맺는다. 그리고 장고봉의 국경선 문제를 정리하게 된다.

 

소련군으로서는 치욕의 연속이었고, 일본군으로서는 자신의 실수를 소련군이 덮어준 경우가 됐다.

 


미쳐가는 관동군

 

두 차례의 소규모 전투, 그리고 759회에 걸친 국경선 충돌.

두 번의 전투에서 참패를 한 소련군의 절치부심,

두 번의 무모한 전투에서 승리한 관동군의 자신감.

그리고... 미친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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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지 마사노부가 또다시 등장하게 된다.



“국경선이 명확하지 않은 지역에서는, 방위사령관이 자주적으로 국경선을 인정하고 이를 제 일선부대에 명시하여, 불필요한 분쟁 야기를 방지함과 동시에 제일선의 임무달성을 용이하게 할 것.”


 

이게 무슨 소리일까? 바로 『작전의 신』 츠지 마사노부가 입안한 <만소 국경 분쟁 처리요강>의 제4항의 내용이다. 그 세부항목을 보면 더 가관이다.



“그 월경을 인정하는 때에는 일시적으로 ‘소’ 영토에 진입하거나 ‘소’ 병사를 만주 영내로 유치, 체재(滯在)시킬 수 있다. 그 때 우리 사상자 등을 ‘소’ 영내에 유치(遺留)시키는 것에 대해 만전을 기함과 동시에, 힘써서 상대 측의 사체, 포로 등을 획득할 것.” 



간단히 말해서 노몬한 지역에서 소련군과 충돌이 있을 시, 관동군 마음대로 국경선을 정하고 이 국경선 주장에 이의를 제기하는 세력(구체적으로 소련)이 발생했을 경우, 소련 영토에 진입해 점령하겠다는 작전 계획이다. 이건 아무리 긍정적으로 해석해도 ‘전쟁’이다.

 

일개 관동군 작전과의 작전참모가 전쟁을 기획했고(늘 그래 왔지만, 이번엔 그 스케일이 다르다. 무려 ‘소련’을 상대로 전쟁을 하겠다는 작전계획이다), 그걸 관동군이 인정해 버렸다.

 

이 말도 안 되는 작전을 승인한 이는 당시 관동군 사령관인 우에다 겐키치(植田謙吉) 대장이었다. 자신들이 지금 중국과 전쟁을 하고 있는 와중이고, 전황이 좋지 않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 또다시 전 세계에서 가장 큰 영토를 가지고 있는 나라와 전쟁을 하겠다는 계획을 짜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츠지 마사노부의 이 망상(?!)은 관동군 작전명령 제1488호로 발효됐고, 해당 부대에 실시명령이 하달됐다.

 

이 대목에서 중요한 것이 이 작전의 정식 발효된 날짜다. 바로 1939년 4월 25일이다. 할힌골 전투가 벌어진 게 1939년 5월 11일인 걸 생각한다면, 할힌골 전투도 그때까지 보여준 관동군의 행보처럼 관동군이 기획을 짜서 전쟁을 시작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국경에서의 우발적인 충돌이 아니란 것이다.

 

시작은 몽골군의 선공으로 시작됐다. 몽고 기병 90명이 5월 11일 만주국군 주둔지를 기습했는데(늘상 있었던 소규모 국경 충돌이었다), 이걸 빌미로 관동군이 들고 일어났다.


작전의 신이 만든 <만소 국경 분쟁 처리요강>을 금과옥조로 믿은 관동군은 만주국 기병을 포함해 2천 명의 병력을 이끌고 공격에 나섰고, 이에 질세라 소련군도 1,500명의 병력을 집결시켜 반격에 나선다.

 

병력수는 일본군이 많았지만, 화포의 숫자와 장갑차의 숫자는 소련군이 많았다. 처음엔 일본군이 수적 우위를 바탕으로 소련군 방어선을 돌파한 듯이 보였지만, 곧 화력의 우세와 기동력의 우위를 바탕으로 일본군을 우회 포위해 섬멸작전에 들어갔다.

 

이때 등장한 것이 일본 대본영이었다.

 


“중국 전선이 전개된 상황에서 소련과의 전쟁은 불가하다! 전선을 이중화했다간 향후 전쟁 수행에 치명적인 위협이 될 수 있다.”


 

지극히 상식적인 판단이었다. 결국 1939년 6월 1일이 되면 전선은 소강상태로 접어드는 것 같았다. 여기서 다시 등장한 것이 『작전의 신』이었다. 육군성 참모본부와 대본영이 수차례 연락을 해



“전선확대 불가! 소련과의 충돌을 회피하라!”


 

라고 명령을 했으나, 관동군. 아니, 츠지 마사노부는 이를 무시했다. 그는 지상전에서 밀리는 전세를 공중전으로 만회하려고 했다.

 

국경선에서의 지상전은 애써 포장하면, ‘우발적인 충돌’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전투기와 폭격기가 동원된 소련 영토에 대한 공격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전쟁’이었다.

 

츠지 마사노부는 관동군 사령관인 우에다 겐키치(植田謙吉)가 외출한 틈을 타 대규모 항공 작전(전투기 77대, 폭격기 30대 동원)을 승인한다. 물론, 사령관과 부사령관의 서명은 날조됐다. 그 결과 6월 27일 일본 전투기와 폭격기는 ‘소련 영토’인(국경선에서 100~120km 떨어진) 마두트, 탐스크 공군기지에 대한 기습 공격에 나서게 된다.

 

...이 정도면 ‘막장’이란 말이 나오는 게 정상이다.

 


소련, 일어서다.

 

6월 27일 일본의 항공작전을 목도한 소련은 그야말로 호떡 집에 불난 상황이 됐다. 그 동안의 패배에 대한 복수심,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면 목구멍에 가시처럼 박혀 있는 러-일 전쟁의 패배가 소련의 분노에 기름을 부었다. 실질적인 이유도 있었다. 만약 일본군이 계속 치고 올라오면 시베리아가 위험해 빠지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소련은 비장의 카드를 꺼내든다. 바로 게오르기 주코프(Georgy Konstantinovich Zhukov)였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을 구해낸 상승(常勝) 장군!!(늘 싸워 이긴 건 아니다. 소련이 무너진 뒤 풀린 기밀해제 문서를 보면, 주코프도 진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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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 당시에 주코프는 전투를 치러보지 못한 상황이었지만, 그 능력은 이미 인정받은 상황이었다. 전임 사령관인 니콜라이 페클렌코를 내리고 주코프 카드를 꺼내든 소련은 제대로 힘을 써보려 했다. 당초 주코프가 원했던 병력의 2배 이상의 병력을 주코프에게 안겨줬다.

 

1개 차량화 보병사단, 2개 보병사단, 1개 차량화 여단, 2개 기갑여단, 2개 기계화여단, 4개 포병연대, 2개 항공여단, 6개 항공연대... 약 57,000명의 병력으로 구성된 소련군은 일본군을 박살 내겠다고 이를 갈았다.

 

이에 반해 일본군은 1차 공격 때의 제23사단에 군 직할 2개 전차연대, 그리고 히든 카드라 불리는 제7사단을 증파했다(여담이지만, 여기에 더해 센다이 2사단과 오사카 4사단을 추가했지만, 2사단은 투입과 동시에 궤멸됐고, 4사단은 지지부진 진격 속도를 늦춰 전투가 끝난 뒤에 전선에 도착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일본군은 소련군을 상대로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상황이었다. 장비와 화력, 기동력 면에서 압도적으로 밀렸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제 23사단의 경우 병력의 대부분이 도보로 전선까지 이동해야 했는데(무려 230km) 이는 차량과 말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화포의 경우는 더 안타까운데, 사단을 통틀어 대포는 고작 76문이었고, 이중 100미리가 넘어가는 대구경 포는 불과 10문이 안 됐다. 더 놀라운 사실은 이들은 대전차포가 없었다는 것이다. 탱크 앞에 총검돌격을 하라는 소리였다.

 

이런 상황에서 관동군은 특유의 ‘뻘짓’을 하게 되는데, 공세의 주축으로 정예 제 7사단을 쓰지 않고, 제 23사단을 계속 고집했던 것이다. 신병으로 구성된 23사단은 전투력 면에서 7사단의 그것에 한참 밀렸고, 장비도 열세였다. 7사단은 차량화 연대와 공병연대도 배치 돼 나름 ‘기계화’ 흉내를 낸 상황이지만, 23사단에는 앞에서도 말했듯이 대전차포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3사단을 공세의 주축으로 고집한 것은 사령관인 우에다 겐키치(植田謙吉)의 고집 때문이었다. 1차 충돌 때 굴욕을 당한 23사단에게 설욕을 할 기회를 줘야 한다는 이유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가지만,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당시 일본군은 이 정도면 소련군을 공격하는데, 충분할 것이라는 자신감에 제7사단의 증파도 반려할 정도였다. 도대체 왜 이런 무모한(!!) 짓을 했던 걸까?

 

이유는 크게 3가지 정도로 나눌 수 있는데,

 


 첫째, 당시 일본군은 소련군 병력을 1개 보병사단, 2개 기갑여단 수준으로 파악했다.


 둘째, 공중전이 일본군에게 유리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셋째, 당시 일본군 전선과 철도간의 거리는 230km, 소련군은 철도와 전선 사이 거리가 750km라 병력 증파에서 일본군이 유리하다.


 

허나, 3가지 이유 중 단 하나도 맞는 게 없었다.

 

소련군 병력에 대한 오판, 공중전 역시 소련군이 대대적으로 공격을 하겠다고 결심한 순간부터 공군의 질이 확 달라졌다. 몽골 항공대조차 구식 복엽기 대신 I-15 같은 단엽기로 기종 전환을 한 상태였다. 철도간의 거리도 무의미했던 게 소련군은 기계화와 더불어 압도적인 보급으로 일본군을 압박했던 반면, 일본군은 고질적인(의도적인 무시지만) 보급 체계 문제 덕분에 상당한 곤란을 겪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군은 소련군에 도전장을 내밀게 된다.

 






1부 

[러일전쟁]


2부

드레드노트의 탄생

1차 세계대전, 뒤바뀐 국제정치의 주도권

일본의 데모크라시(デモクラシー)

최악의 대통령, 최고의 조약을 성사시키다

각자의 계산1

8년 의 회, 던 축 

일본은 어떻게 실패했나2

만주국, 어떻게 탄생했나



외전

군사 역사상 가장 멍청한 짓

2차대전의 불씨

그리고, 히틀러

실패한 외교, 히틀러를 완성시키다

국제정치의 본질



3부

태평양 전쟁의 씨앗1

태평양 전쟁의 씨앗2

도조 히데키, 그리고 또 하나의 괴물

일본을 늪에 빠트린 4명의 '미친놈'

대륙의 각성완료, 다급해진 일본

대동아(大東亞)의 환상에 눈 먼 일본

일본, 건드리지 말아야 할 걸 건드렸다 1





*참고자료

1. 전쟁국가 일본/ 살림출판사/ 이성환

2. 호호당 선생의 ‘프리스타일’

3. 세계전쟁사/ 육군사관학교 전사학과/ 황금알

4. 러일전쟁과 을사보호조약/ 이북스펍/ 이윤섭

5. 조선역사 바로잡기/ 가람기획/ 이상태

6. 다시 쓰는 한국근대사/ 평단문화사/ 이윤섭

7. 대본영의 참모들/ 나남/ 위텐런 지음, 박윤식 옮김

8. 나무위키

9. 쇼와 16년 여름의 패전/ 추수밭/ 이노세 나오키 지음

10. 『중일 전쟁』 용, 사무라이를 꺾다/ 미지북스/ 권성욱 지음

11. 나는 일본군, 인민군, 국군이었다 / 서해문집/ 김효순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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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더가 디비주는 전쟁으로 보는 국제정치


조약, 테이블 위의 전쟁

러시아 vs 일본 한반도에서 만나다






펜더


편집: 딴지일보 coco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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