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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6호선을 타고 가다 보면 '동묘역'이라는 곳이 있다. 벼룩시장이 잡다하게 서는, 조금은 남루한 골목을 지나다 보면 만나게 되는 '동묘'에서 모시고 있는 사람은 뜻밖에도 한국 사람이 아니다. 그 주인공은 바로 삼국지의 실질적인 주인공이라 해도 무방할 한수정후 관우 운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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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서울시


관운장이 무슨 연고로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모셔지게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설이 분분하지마는 그 시발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파병되었던 명나라 군대라고 한다. 조선을 '도우러' 왔던 명나라 군의 상징이요, 그에 대한 사례의 흔적인 셈이다.



"너희는 예의에 밝아 대국을 섬기는 데 소홀함이 없었는데, 오늘 섬나라 오랑캐의 침노를 받아 그 형편이 딱하기 그지없어."



명나라가 군대를 파견했다고 얘기는 했고 실제로 큰 도움이 됐지만 요즘이나 그때나 이익 따지는 일에서는 세계 으뜸인 중국인들이 맘이 좋아서 온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그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 참전했고 기왕 왜군과 칼을 맞댈 것이면 압록강 이남에서 맞대는 게 낫다는 계산 때문에 조선으로 온 것이었다.


왜군은 얼레빗 명군은 참빗이라는 속설처럼 심하게 당하기는 했어도 고마운 건 고마운 일이고 그렇게 고개 숙여 주면 되는데 한국인들의 '오버' DNA는 과거에도 빛을 발했다. 이 명나라 부대를 '천병'으로 받들어 모시고, 오로지 그들이 이 나라를 구했고 우리 나라는 그들에 의해 다시 만들어졌다고(再造之恩) 우기면서 '천병의 신화'를 만들어 버린 것이다. 여기에는 선조 이하 당시 조정의 펌프질이 주요하게 작용한다. 


백성이고 뭐고 다 팽개치고 북으로 북으로 도망가기만 했던 자신들의 처지로서는 의병들이며 수군들의 활약으로 나라가 바로잡혔다고 인정하는 것은 지극히 불쾌한 일일뿐더러, 차제에 자신들의 입지를 위협하는 요소였기로, 그들은 명나라군이 아니었으면 우린 다 망했어요를 합창하면서 스스로 면구스러워 "우린 한 거 없는데요?" 하는 명나라 장수들에게 "무슨 말씀을! 신장(神將)이세요!"를 복창했다.


선봉대끼리의 탐색전 정도로 끝난 직산 싸움은 조선의 조정에 의해서 "직산 대첩"으로 격상됐고 명나라 장수 양호는 천하의 용장이 됐다. 그리고 천병의 원조로 나라가 살았다는 것은 감히 시비 걸기 어려운 전후의 이데올로기로 굳어져 갔다. 그 결과 지금도 동묘의 관우 초상은 "누구든 말에서 내려라!"는 근엄한 하마비의 호위를 받으며 그의 생전에는 꿈에도 몰랐을 땅, 서울 한복판에 어정쩡하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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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마비


헌데 관우는 동묘 안에 머물지 않는다. 국왕 이하 양반님네들이 넙죽넙죽 재조지은의 은인으로 모시던 것이 백성들에게로 퍼졌고 관우는 졸지에 최영이나 임경업 등 우리 나라 무당들이 즐겨 모시는 신의 대열에 들어섰으며 20세기 초에는 아예 "관성교"라는 중국에도 없는 종교가 생겨난다.


이 종교에 따르면 관우가 인간의 선악, 사정(邪正)을 판단하는 영으로서, 정성으로 그 신명을 받들면 관운장의 신이 현몽 된다고 했다. 중국군 장수들이 개인적으로 숭배하던 관우가 한 국가가 받들어 모시는 관제(官制) 신이 되었다가 마침내 민간 종교의 영역으로까지 확대되었고, 1천 8백 년 전 강동에서 목이 잘린 중국인 장수는 그 자신도 황당할 이방의 신에 등극하게 된 것이다. 관렐루야.


우리나라 무당들이 즐겨 모시는 신은 최영, 임경업 그리고 관우 등 비운의 장수들이 많다고 한다. 그들의 맺힌 한이 원력을 크게 해주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이 '비운의 장군님'들의 목록에 끼는 이방인이 하나 더 있다. 바로 그 사람이 더글러스 맥아더다. 맥아더가 강림하사 어느 나라 말을 쓰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예상외로 맥아더를 모시는 무속인들이 꽤 된다고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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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그 중의 한 무속인이 "맥아더 '장군님'이 남북 통일을 위해 노력했으나 그 노력이 끝내 트루먼에 의해 좌절되고만" 비운의 장군이었다는 맥락의 이야기를 한 것을 기억한다. 한국을 사무치게 사랑했고 북한 공산 집단을 분쇄하기 위해 분골쇄신했으나 저 선조 같고 인조 같은 트루먼이 맥아더 장군을 잘라 버렸다는 것이다.


북진 통일을 목놓아 불렀던 전쟁 당시의 한국민들에게 "원폭 수십 개를 투하해서라도" 빨갱이들을 말살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맥아더는, 그래서 거기에 기겁을 한 미국 대통령에게 그 지위를 박탈당했던 맥아더는, '20세기의 시저'로 불리며 할 것 다 하고 누릴 것 다 누렸던 이 귀족스러운 군인은 최영 장군 수준의 비운의 군인으로 자리 잡고 맥아더와의 친분을 유난히 강조하던 이승만은 그를 더 이상 올라갈 데가 없는 자유의 수호신으로 만든다. 백척간두에 선 나라를 구하러 온 자유의 십자군, 인천상륙으로 전세를 역전시키시고 미국 대통령의 허락도 개의치 않은 채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던 맥아더 ‘원수’는 20세기판 '재조지은'의 주인공으로 등극하게 된다.


그의 신화에 대해 왈가왈부하고 싶지는 않다.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여 남한이 공산 통일되지 않도록 전황을 역전시킨 것은 참 고마운 일이다. 북한의 또라이 돼지 새끼 나타나면 질질 짜는 북한 사람들 보면 내가 저 일원이 되지 않은 게 너무 감사하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맥아더가 한국이 고와서 희생한 것도 없고 한국의 분단이 사무치게 싫어서 핵폭탄 퍼붓고 방사능 물질을 뿌려대자고 한 것도 아니었으니까.


리암 니슨이 분하는 맥아더가 잠깐 등장한 영화 <인천상륙작전>이 개봉했다고 들었는데 보고 온 친구가 “어릴 적 봤던 배달의 기수가 더 재밌다.”라고 투덜거린다. 맥아더는 어떻게 나왔더냐 하니 이상한 소리나 지껄이며 폼 잡는 기묘한 캐릭터로 나왔다고 한다. 슬몃 웃었다. 맥아더는 사실 그런 캐릭터였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부하들이 인천 상륙이 안되는 이유를 한껏 주워섬기니 “바로 그렇기 때문에 적은 인천을 생각 안 할 것이다. 인천으로 간다.”고 고집했던 캐릭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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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암 니슨은 맥아더의 이 명언(?)을 꼭 넣어 달라고 주문했다나. “세월은 피부를 주름지게 하지만, 열정을 저버리는 것은 영혼을 주름지게 한다.” 그 말뜻은 대충 알겠지만 참으로 맥아더스럽다. 이 양반 이런 식으로 말 꼬아서 뭔가 멋있는 체하는 것에는 특출했다. “패전한 군인은 용서받아도 경계에 실패한 군인은 용서할 수 없다.”는 식. 


윈스턴 처칠이 "일흔 넷 평생 이런 유혈 참극을 본 적이 없다"고 했다는 한국 전쟁의 참상으로부터 반 세기를 지났건만 아직도 배달의 기수 같은 단순한 흑과 백 구성의 영화가 등장하고 리암 니슨까지 돈 처발라 불러들이며 ‘맥아더 장군’이 묘사되는 현실이 좀 유감스럽다. 이런 영화가 50년대에 나왔으면 모르겠으되 전쟁 때 태어난 이들이 법적으로 65세 노인 이상이 된 2016년에 굳이 이런 영화를 봐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오히려 다행이다 영화가 꽝이라고 하니. 기대 이상으로 잘 나왔다면 자유공원의 맥아더 동상이 또 한 번 관왕묘가 될지도 모를 일이었으니.






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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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딴지일보 coco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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