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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산하기관에 잠시 몸 담았을 때 일이다.


아이들과 아내가 잠든 밤 11시쯤 휴대폰이 울렸다. 시급한 일이 아니고서야 야심한 시간에 전화를 하는 것은 무례라는 가정교육도 제대로 못 받은 놈이 누군가 했더니 상급기관의 사무관이었다. 보고 싶어 전화를 했다며 가까운 지방 도시에 와 있으니 같이 와서 술을 한잔 하잔다. 마침 전임자도 와 있으니 오랜만에 얼굴이나 보자는데 전화기에 함께 섞여 들어오는 잡음엔 째랑째랑한 여성들의 중국말이 귀에 거슬린다. 지방 소도시들은 술집 접대부 중에 중국 동포들이 많다 보니 어디에서 전화를 걸었는지 알 만했다.

 

제 말대로 정말 내가 보고 싶었으면 낮에 내 사무실에 들러 커피라도 한잔 했으면 될 일이었다. 내가 아무리 꽉 막힌 사람이라도 그간 찾아온 손님들에게 회 한 접시 내놓는 저녁 대접 안 한 적 없었고, 아쉬운 자리 파하기 전에 맥주 한 잔 더 사는 거 인색한 사람은 아닌데,


전화 건 꼬락서니를 보니 지들끼리 얼큰히 취해 계집 끼고 술 먹자며 되도 않는 영웅호색 사내대장부 흉내 내다가 결국 주점에 들어가 보니 제 돈 내고 비싼 양주와 화대를 내기가 아까웠으리라.

 

'그간 내가 보여준 결기가 부족하였구나'라는 생각에 울컥했다가, 한 달 후에 있을 산하기관과 기관장에 대한 재신임 인사청문회가 떠올랐다. 그러자 그까짓 술값 몇 푼이나 하겠나. 높은 분들(?) 목구멍에 기름칠 한번 해주고 곤란한 일이나 피해 볼까 하는 생각도 잠시 잠깐 들었다.


손익을 계산하자니 갑자기 혼란스럽기는 했으나 불쾌한 기분을 덮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도 육두문자를 내뱉어서는 안 될 일이기에 "다음에 봅시다. 잘 드시고 가시오"라고 건조하게 답하니 당황스러워 하면서도 '1시간도 안 걸리는 거리인데...'하며 다시 참석을 종용한다. 전화를 끊고 나서도 이런 못난 인사한테 그간 만만하게 뵐 행동을 했었나 싶어 수일간 마음이 편치 못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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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자체 공무원의 요청에 못 이겨 컨설팅을 맡은 식품 회사가 있었다. 개인 사업자로 운영되는 지방식품회사를 컨설팅하는 것은 쉽지 않다. 기업경영의 문제를 교정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가갸거겨를 가르쳐야 하는 상황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연 매출 2억 원의 작은 소기업은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판도라의 상자를 축소한 것 같았다. 판도라의 상자에서 마지막 나온 것은 희망이라 했던가. 다행히 이 기업을 컨설팅할 해법이 나왔다. 폐업 후 신규법인 설립이 제시되었고 업체의 대표도 순순히 따랐다.


이 기업은 재무제표에 표시된 매출액보다 10배는 많은 누락 매출액이 오랜 기간 숨겨져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냐고 묻자 대기업의 선물 납품과 연관이 있는데 상품권을 이용한다며 더 이상은 말을 못하겠다고 한다. 나야 컨설턴트지 세무당국은 아니잖냐며 사실을 캐물었지만 더 이상 답이 없기에 더 묻지 않고 새로운 법인에서는 다 털고 깨끗하게 가자는 약속만 한 번 더 하고 컨설팅을 끝맺었던 기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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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살던 동네의 술도가 사장님은 고이 키운 딸이 있었다. 어려서부터 똑똑하고 바른 아이라 항상 동네방네 자랑하고 다니던 금쪽같은 딸내미는 시나브로 좋은 대학과 대학원을 나와 공무원이 되었다. 요즘 세상에 장하고 대견한 일이나 어느 순간부터 사장님의 딸 자랑은 수그러들었다.


공무원이 된 딸은 올곧은 자신의 생각과는 다른 공직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다. 남들 다 잘 넘어가는 작은 부정과 부스러기만 한 부패에도 민감하게 반응했다. 결국, 병가와 휴가, 교육을 섞어가며 시간을 때웠고 아직까지 자기 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그 사장님은 술도가를 찾은 아이 엄마들을 보면 아이를 너무 바르게 키우지 말라고 당부한다고 하니 그분의 속이 얼마나 새까맣게 타들어 갔을지 가늠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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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7월 28일 헌법재판소는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김영란법)에 대한 헌법소원 사건의 4개 심판 대상 조항 모두에 대해 합헌 결정했다.


'김영란법'이라는 명칭은 국민권익위 위원장을 지냈던 김영란 씨의 제안으로 이 법이 발의되었기에 붙은 별칭으로 대중에게는 '부정청탁 및 금품수수 등 금지에 관한 법률'이란 이름보다 김영란 법이란 명칭이 더 친숙하다.

 

김영란법이 개인의 기본권을 침해한다는 우려는 헌법소원의 주체였던 대한변협과 기자협회 이외에도 법조계는 물론 전문가와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제기되었다. 이분들 중에는 김영란법의 시행에 따른 득실을 따지는 것과는 상관없이 순수하게 헌법 정신과 개인의 자유에 대한 진지한 고민으로 김영란법을 반대한 이들도 있음을 안다.

 

이분들 중 혹여 헌재의 판결에 아직도 불편함을 느끼는 분들이라면 대한민국 사회의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부정이 국민의 공복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참된 공직자들을 괴롭히고, 조세 형평을 어지럽히고 산업을 왜곡시키며, 젊은 인재들의 성장을 가로막고 있음을 상기해 보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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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여 그럼에도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법률을 용인할 수 없다면, 김영란법보다는 국가보안법이나 테러방지법 철폐에 그 의기를 나눠주시길 부탁드린다.





워크홀릭

트위터 : @CEOJeonghoonLee


편집 : 딴지일보 퍼그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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