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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05. 07. 화요일

Ath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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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유년시절을 염전이 있는 마을에서 자랐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아침저녁으론 밭과 논에서 농사를 지었고 낮에는 염전에서 소금농사를 지으며 살았습니다. 작은포구를 끼고 있던 이웃마을 사람들도 사정은 비슷했는데 남자는 배를 타고 가까운 바다에 나가 조개나 잡어를 잡아 왔고 여자들은 염전에 나와 소금농사를 지었습니다.



땅도 없고 배도 없는 사람들도 염전에 나가 일을 하면 돈을 벌 수 있었고 갯벌에 나가 조개나 게, 낙지 등을 잡아오면 꾸준한 수익을 낼 수 있었기 때문에 굳이 객지로 떠돌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을은 젊었습니다. 내 또래의 아이들을 자녀로 둔 30, 40대의 젊은 부부들이 많이 살던 마을이었습니다. 검게 그을렸고 아침부터 거나하게 마신 막걸리의 시큼한 냄새가 풍겼던, 도저히 40대로 봐줄 수 없이 겉늙었지만 젊고 순한 기운을 발산했던 그들은 이제 늙어 죽었거나 마을을 떠나 죽었습니다.



1991년. 새만금방조제 공사를 시작하겠다는 정부의 발표와 함께 마을은 술렁이기 시작했습니다. 바다와 갯벌, 염전에서 미래를 볼 수 없다고 판단한, 땅도 없고 배도 없었던 가난한 사람들이 먼저 마을을 빠져나갔습니다. 마을 입구에 살고 있던 깐난이네가 쥐도 새도 모르게 마을을 떠났고 염전근처에 살던 영복이네도 이 즈음해서 도시로 떠났습니다. 저보다 15살이 많았던 명호형도 운전을 한다며 도시로 떠나더군요.



떠나는 사람은 조용히 떠나갔고 남아있는 사람들은 보상문제로 시끄러웠습니다. 당시 염전은 한국염전과 옥구염전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한국염전은 세풍이 운영하던 염업회사였고 옥구염전은 염전을 분할해 주인이 각자인 협동조합 형태였습니다.



한국염전은 규모도 대단했고 세풍이라는 당시 잘 나가던 기업의 소유여서일까요. 보상은 속전속결로 충분하게 이루어졌습니다. 문제는 옥구염전이었습니다. 처음부터 옥구염전이 협동조합 형태의 염전은 아니었습니다. 옥구염전 사장은 정보에 조금 빨랐던가 봅니다. 새만금 개발소식이 있기 얼마 전 염전 전체를 마을사람들에게 분할 매매 했고 염전을 매입한 사람들은 속절없이 개발논리에 휘둘릴 수밖에 없게 된 것이죠.



배를 소유한 사람에게 보상을 해준다는 말에 폐선들이 해안을 잠식했습니다. 배 한 번 타본 일 없는 사람들이 이 섬 저 섬에서 폐선들을 사들여 포구에 정박해 두고 보상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일하던 사람들은 떠나고 일하지 않는 배들이 포구를 장악했습니다. 돈을 받을 수 있네 없네 말들이 분분하고 목선이라도 한 척 구해두면 곱절은 더 받는다는, 지금까지 살아왔던 방식과는 전혀 다른 돈의 움직임을 바라보면서 민심은 흉흉해져만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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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노태우는 1차 보상을 실행합니다. 묵직한 큰 돈들이 오고 갑니다. 이런 눈 먼 돈이 나돌 때 정마담도 오고 아귀도 오고 짝귀도 오고 평경장도 옵니다. 염전이나 일구며 창고에서 10원짜리나 치던 무지렁이들이 뭘 알겠습니까. 얼마나 털렸는지 통계를 내 볼 수는 없는 일이지만 이 집 저 집에서 언성이 높아지고 술에 취해 일 손을 놓는 사람들이 늘어갔죠. 그러다 또 한 집 두 집 소리 소문 없이 마을을 떠나갔습니다.



이렇게 호들갑을 떨었지만 변한 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물길이 막힌 것도 아니고 갯벌이 논으로 바뀐 것도 아니었지요. 노가다를 전전하던 깐난이네가 다시 돌아왔습니다. 여전히 마을엔 염전이라는 밥벌이가 있었습니다. 물길이 막힐 때까지는 어업이든 염전이든 할 수 있었던 것이죠. 하지만 사람들은 지쳐갔습니다.



물길이 언제 막힐지 모르니 배든 염전이든 보수작업을 하거나 새롭게 시작하려는 사람들은 선듯 나타나지 않았고 있는 것 가지고 근근히 생업을 이어나갔던 것입니다. 그러니 마을이든 염전이든, 포구든 점점 늑수구레해질 수 밖에요. 저를 포함한 아이들은 자라서 도시로 떠나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새롭게 마을에 터를 잡는 사람도 물론 없었습니다.



1998년. 새만금사업 전면 중단을 발표합니다. 중단을 발표하나 마나 좋아할 사람은 없었습니다. 한국염전은 염전부지에 F1그랑프리 경기장을 건설한다며 염전을 불도저로 밀어냈지만 갯벌 위에 다져진 염전의 지반이 튼튼할리 만무했지요. 경기장 건설 사업은 백지화 됩니다. 그 즉시 한국염전은 불모지로 변모합니다. 사업은 중단되었다지만 돌아와도 일할 염전은 이제 사라진 것이죠. 세풍그룹은 F1사업 백지화와 맞물려 부도를 맞게 됩니다.



이제 남은 건 옥구염전. 옥구염전에 남은 사람은 5,60대의 중늙은이들 뿐였습니다. 그들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던 말던 하던대로 그 일을 해 왔던 사람들이죠. 그들은 묵묵하게 2004년까지 염전을 지킵니다. 김훈 선생이 자전거를 타고 다녀갔던 때가 이때였습니다.



98년부터 2006년 대법원 확정이 있을 때까지 공사재개와 공사중단을 반복합니다. 사람들은 입을 닫았습니다.

 


“떠나면 떠나는 거고 남으면 남는 거다.”


“그동안 여기서 살다 여기서 죽었다.”


“물을 막아서 더 이상 아무것도 못하면 못하고 마는거지 더는 신경쓰고 싶지 않다.”

 


늙은이들은 2010년 4월 물막이 공사가 마무리된 이후에도 배를 몰고 바다로 나가 조개를 훑어 왔습니다. 빠르게 담수화가 진행되어가고 있었지만 갯벌에는 여전히 조개며 소라들이 가득했던 것이죠. 그것도 잠깐. 1달 정도 지났을까. 그물로 올린 조개들이 입을 벌린 채 구린내를 풀풀 풍길 때 즈음해서 배는 더 이상 바다로 나가지 않았습니다.



물막이 공사를 마치고 3년이 지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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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색으로 표시된 지역과 주변에 살던 사람들의 생활 패턴은 확연히 달라졌습니다. 우선 밥상에서 비린 것 구경하기가 어려워졌습니다. 시장에 나가지 않아도 가까운 포구에 나가거나 여차하면 뻘에 나가 철마다 다른  해산물들을 맛볼 수 있었지만 이제는 멀리 시장에 나가야 비린내를 맡을 수 있습니다.



엄마만 하더라도 이런 비린 것을 돈 주고 사먹는 게 아직도 영 내키지 않는 모양입니다. 돈 주고 사먹던 것은 고기였지 생선이 아니었던 것이죠. 시장에 나가면 고기만 사옵니다. 가끔 집에 가면 고기반찬 일색입니다. 제철이라고 쭈꾸미라도 사들고 가면 그 값을 물어보고 놀라자빠지죠.


“그런 것을 뭐 허러 비싼 돈 주고 사와!”


그렇죠. 여전히 쭈꾸미, 바지락, 모시조개, 죽합 따위는 ‘그런 것’입니다.



식습관만 바뀐 게 아닙니다. 염전을 일구던 사람들, 배를 타던 사람들은 떠나거나 주저앉았습니다. 농사일이 주업이 되었고 땅을 가진 몇 사람들만 마을에 남았습니다. 이제 마을엔 늙은 여자들뿐입니다. 남자들은 고된 노동으로 골병이 들어서일까요. 일찍들 세상을 떠났습니다. 몇 남지 않은 남자들은 하릴없이 마을 회관만 들락거립니다. 사람들 간의 정도 남아있지 않고 증오 또한 사그라진 지 오래입니다.



한국염전자리는 ‘아시아최대’라는 타이틀을 걸고 골프장으로 거듭났지만 소금이 나기에 좋은 해풍은 골프장엔 좋지 않나봅니다.



“바람이 세서 공이 나가야지 씨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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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즈음 옥구염전에서 생산한 천일염이 시골집 뒤란에 아직도 남아있습니다. 30포대정도 쌓아뒀던 걸로 기억하는데 이제는 4포대만 남았더군요. 1년에 1포 반 정도 소비하는데 이제 그것도 내후년이면 끝이 나겠죠.





이 소금.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대략적으로 디벼 드리겠습니다. 서해는 조수간만의 차가 심해서 물이 매우 탁합니다. 바닷물에 갯벌이 가득한 것이죠. 그래서 염전 옆에 큰 저수지를 만들어 둡니다. 밀물이 밀려올 때 저수지 갑문을 열어 바닷물을 받습니다. 저수지에 들어온 바닷물은 며칠 지나면 뻘이 가라앉고 깨끗한 물이 됩니다. 깨끗한 물을 염전 가장 뒤쪽으로 흘려보냅니다. 저수지에서 보낸 물이 서서히 염전 앞쪽으로 흘러옵니다. 흘러오는 과정에서 수분은 증발하고 농도 짙은 염수로 변해갑니다. 최종적으로 10단계를 거쳐 모이게 된 염수는 소금이 되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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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에서처럼 바닷물이 한 라인을 타고 서서히 내려옵니다. 1차라인 까지는 단순한 바닷물이지만 2차부터는 어느 정도 증발이 된 염수입니다. 그래서 2차부터는 염수보관창고를 라인 옆에 설치합니다. 비가 와서 빗물이 섞이면 애써 증발시킨 염수가 도루묵이 될테니 염수보관창고로 모아뒀다 비가 그치면 수차를 돌려 염전으로 올려 보내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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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도 걸어도 그 자리인 수차인생 

살다 살다 그 자리에서 그렇게 고꾸라진 인생

 

 

어르신이 수차를 돌리고 있습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지만 옥구염전이 문을 닫을 때까지도 모터펌프를 사용하지 않고 발로 디뎌 올리는 수차를 이용했습니다. 물론 80년대에도 모터펌프가 있었지만 소금물 옆에서 1년도 사용하지 못하고 고장이 났기 때문에 그딴 건 필요 없게 된 것이죠. 어르신 뒤쪽으로 낮은 지붕의 창고가 보이죠. 염수보관창고입니다. 지붕이 낮은 이유는 땅을 파서 웅덩이를 만들고 그 위에 지붕을 올렸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소금물을 넣었다 다시 올려 말렸다를 반복하면 희미하게 소금알갱이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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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아래로 희뿌옇게 소금이 와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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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즈음해서 아직 소금이 되지 못한 염수는 염수창고로 흘려보내고 

물 아래 앉은 소금을 밀대로 밀어 모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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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소복하게 하얀 소금이 나왔네요.

소금은 바다와 바람과 해가 만들어 낸다지만

염부의 피땀 어린 노력 없이는 가당치도 않은 일입니다.



기본적으로 천일염은 위와 같은 과정을 통해 만들어지기 때문에 넓고 평평한 부지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전국적으로 바다를 옆에 둔 평평한 부지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현재 충남 태안과 전북 곰소, 전남일대와 신안군에만 염전이 남아 있습니다.



시중에 유통되는 소금은 크게 천일염, 정제염, 가공염으로 나뉩니다. 천일염은 중국산과 국내산으로 크게 나뉘고

정제염은 꽃소금으로 불리지요. 가공염은 맛소금입니다. 국내산 천일염은 염도가 낮고 미네랄이 풍부하다고 하더군요.



개인적으로 가장 좋은 소금은 10월에 생산된 천일염이 가장 좋다고 생각합니다. 기본적으로 바닷물 자체의 염도도 10월이 가장 적당하고 여름을 지나며 내륙에서 흘러온 지저분한 부유물들이 빗물에 쓸려나간 이후라 바닷물 자체가 깨끗하기 때문입니다. 습도도 낮고 햇살도 강해 소금알갱이가 큼직큼직하게 잡힙니다. 이런 굵은 소금이 쓴맛도 덜하고 수분도 덜 함유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10월에 생산된 소금을 바람 잘 드는 응달진 곳에 잘 보관해서 4~5년 정도 간수를 빼내면 바슬바슬한 좋은 소금이 됩니다. 가는 소금이 필요할 때 이 소금을 절구에 빻아서 사용하세요.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인데도 귀찮아서 꽃소금을 쓰는 경우가 있습니다.



정제염이 매우 깨끗하고 좋아보이긴 합니다만 그리 좋은 건 아닙니다. 정제염은 천일염을 다시 물에 녹여 진한 염수로 만들어 불순물을 제거하고 열을 가해 수분을 증발시켜 만듭니다. 뭔 짓인가 싶죠? 애써 만든 천일염을 다시 물에 녹이고 비싼 기름 때서 다시 소금으로 만들다니? 수입소금이 들어오는 항구에 가보면 거무튀튀한 소금산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소금을 물에 녹여 정제해 꽃소금을 만드는게 일반적입니다. 깨끗이 정제 했으니 좋다 나쁘다 말할 건 못되지만 탐탁치는 않네요. 맛소금은 계란후라이 할 땐 맛있습니다. 네.



이것 말고도 죽염, 화염, 송염, 암염 등등 소금의 이름들이 다양하지만 10년 묵은 천일염에 비할 건 못됩니다. 몇해 전 KBS에서 방영한 다큐멘터리 <차마고도>에선 히말라야에서 생산되는 두 가지 소금이야기가 담겨 있더군요. 소금산에서 소금을 지고 나르는 사람들과 강가에서 염전을 일구는 여자들이 지난시절 우리 마을 사람들 같아 애처러워 보였습니다. 매우 잘 만든 다큐멘터리니 못보신 분들께 강춥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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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경강과 염전에 대한 이야기를 이렇게 대충 훑고 넘어가는 게 마음에 걸립니다. 포구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 일제 때 강제동원 돼 만경강 방파제를 쌓았던 마을 할아버지들 이야기, 거기서 생산되었던 수 많은 해산물들에 대한 이야기, 어린 시절 거대한 운동장으로 밖에 여겨지지 않았던, 아이의 눈에 보여졌던 염전의 모습들을 언젠가 이야기 하고 싶네요. 잉여력, 취재력, 문장력이 충만해질 때 이 이야기를 들고 문화불패에 나타나겠습니다.




P.S. 잉여력이 충만했다면 80년대 마을 사람들의 촌스런 사진들을 함께 올릴 작정이었지만 잉여력이 부족해 사진을 구해오지 못했네요. 이번 주말 시골집에 가면 찾아보고 추가로 올리겠습니다. 기대해도 좋습니다. 매우 재미있습니다.

 

 





Ath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