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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초 미국 작가인 워싱턴 어빙의 단편소설 중에 <립 밴 윙클>이라는 작품이 있다. 배경은 뉴욕 허드슨 강변의 네덜란드인들이 사는 마을이다. 주인공 립은 남의 일이라면 발 벗고 나서지만 자신의 일이라면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를 싫어한다. 그러니 어느 아내가 좋아할까. 그는 아내가 바가지를 긁을 때면 낚시를 하러 가거나 화승총을 매고 산으로 사냥을 하러 간다.


그러던 어느날 그는 산에서 사냥을 하다가 낯선 사람들의 마을에 들어가게 된다. 그곳에서 술을 몇 잔 마시고 잠이 들었다가 깨어나니 20년이 지났다. 그가 산으로 들어갈 때 미국은 영국 식민지였는데 잠을 깨어 마을에 내려오니 아내는 죽고 미국은 독립해 있었다. 그는 독립한 고향을 보고 처음엔 당혹감에 사로잡히지만 곧 원로대접을 받으며 여생을 편하게 보낸다.


이 작품은 미국 역사상 가장 중요한 시기를 다루면서 정작 독립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하룻밤의 잠으로 슬쩍 넘겨버린다. 립이 잠을 자는 사이 세상이 완전히 변해버렸다는 것이다. 이 소설은 립을 통해서 미국 독립이 미국인들에게 얼마나 갑작스럽고 당혹스러운 경험이었는지를 보여준다. 독립을 위해 싸운 사람들에게는 치열한 투쟁으로 얻어낸 필연적인 결과이겠지만 방관자들에게는 제대로 준비가 되지 않은 때 맞이한 사건일 것이다.


립이 사는 마을에서 립은 존재감이 없는 인물로 그려진다. 그런 면에서 그는 이중의 방관자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사회에 대해 갖는 관심이라고는 마을 여관 앞에서 원로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귀동냥하는 정도다. 식민지 시절 마을은 께느른하고(몸을 움직이고 싶지 않을 만큼 느른하다) 사람들은 의욕이 없어 보인다. 하는 일이라고는 잡담이나 철 지난 신문을 들고 논쟁하는 것이다. 독립 이전엔 그랬다.


그런데 립이 하룻밤 자고 깨어나자, 바짝 말라 있던 계곡에는 물이 콸콸 넘치고 화승총은 녹이 쓸어 쓸모없어졌다. 마을 사람들은 활기가 넘치고 선거를 앞두고 논쟁을 벌이고 있다. 모두가 독립이 가져다준 변화다. 립은 이런 세상에 당황할 수밖에 없다.
 

립이 그랬던 것처럼 많은 아메리카 식민지인들에게 독립은 당혹스러운 경험이었을 것이다. 독립 이후의 네덜란드인 마을도 꼭 긍정적이지만은 않다. 조지왕의 초상화 위에 워싱턴의 초상이 덧칠되어 있으며, 립의 아들은 그야말로 립의 젊은 시절의 판박이나 다름없다. 이는 미국 독립이 미국 사회에 본질적인 변화를 가져다주지 못했다는 작가의 인식을 반영한 것인지 모른다.


우리는 ‘미국독립’을 모든 식민지인들이 떨쳐 일어나서 쟁취한 것으로 생각하곤 하는데, 사실은 립처럼 정치에는 관심 없이 시류에 편승한 사람들이 훨씬 더 많았다. 다수에게 독립은 다소 갑작스러운 사건이었다. 실제 독립을 적극적으로 지지한 식민지인들도 생각만큼 많지 않았다. 전체 식민지인들 중 3분의 1 정도였다. 나머지 3분의 2는 독립에 무관심하거나 반대했다. 독립에 반대한 사람들 중 독립전쟁 중에 미국을 떠나 영국이나 캐나다로 피난을 간 사람들도 대략 10만 명이나 된다.


1773년에 벌어진 보스턴 차당사건 이후 미국은 독립을 향해 빠르게 움직였다. 다음 해인 1774년 9월, 조지아 식민지를 뺀 12개 식민지 대표들이 필라델피아에 모여 제1차 대륙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에서 대표들은 영국이 1763년 이후 제정한 강압적인 법률을 모두 폐지할 것, 영국 군대가 보스턴을 공격할 것을 대비해 군사적 대비를 할 것, 영국 상품에 대한 불매운동을 벌일 것을 결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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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회의의 결의에 따라 매사추세츠 주민들은 탄약을 비축하고 민병대를 조직해 군사훈련을 하면서 만약의 사태에 대비했다. 그 사이 전쟁은 다가왔다. 독립전쟁은 1775년 4월 19일 렉싱턴에서 식민지 민병대와 영국군이 충돌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영국군도 식민지 민병대도 그것이 독립전쟁의 시발이라는 사실을 아무도 몰랐다.


4월 18일, 영국군은 보스턴 근교의 콩코드 지역에 다량의 무기와 탄약이 비밀리에 저장되어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그 무기를 탈취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다. 다음 날 영국군이 몰려온다는 소식을 들은 식민지인들은 콩코드로 가는 길목인 렉싱턴에서 영국군을 맞닥뜨렸다. 어느 쪽이 먼저 방아쇠를 당겼는지는 모르지만, 그곳에서 울린 총성은 독립전쟁의 신호탄이 되었다. 그 역사적인 자리에는 작은 비석이 하나 서 있다. 비석엔 이렇게 쓰여있다.


“제자리를 지켜라. 먼저 방아쇠를 당기지는 마라. 그러나 전쟁을 해야 한다면 여기서 하라.”


그렇게 전쟁은 시작되었다.


전쟁이 나자 곧 조지아를 제외한 12개 식민지 대표들이 다시 필라델피아에 모여 제2차 대륙회의를 열었다. 대표들은 전쟁에 대한 입장을 하나로 정리하지 못했다. 회의는 독립을 원하는 쪽과 영국과 화해를 원하는 쪽과 이것도 저것도 아닌 입장을 취하는 쪽으로 나누어졌다. 결국 타협한 그들은 영국 국왕에게 자신들의 처지를 호소하는 탄원서를 작성한다. 렉싱턴 전투 후 미국 식민지는 영국군과 교전을 했지만, 여전히 그것이 독립을 위한 전쟁이라는 명확한 인식을 갖고 있지 않았다. 단지 영국 정부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는 하나의 방식 정도로 보았다.


그러나 한 번 내리막길을 향해 굴러가기 시작한 전쟁이라는 거대한 바퀴는 영국과의 화해라는 어설픈 타협으로 멈출 수 없었다. 전쟁이 진행되면서 식민지인들의 생각은 빠른 속도로 독립을 향했다. 그에 따라 대륙회의는 독립을 기정사실화하고 정당성을 선전하기 위해 독립선언문을 작성한다. 전쟁이 치열하게 전개되던 1776년 7월 4일, 13개 식민지는 공식적으로 독립을 선언한다. 아메리카합중국이라는 새로운 나라가 인류 역사에 등장한 것이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창조되었으며, 창조주로부터 몇몇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받았고, 그런 권리들 중에는 생명, 자유, 행복추구가 있다. 이런 권리를 확보하기 위해 정부가 사람들 사이에 조직되었고, 정부의 정당한 권력은 피지배자들의 동의에서 나온다. 어떤 형태의 정부가 이런 목적을 파괴할 때는 언제든지 그 정부를 바꾸거나 폐지하고 인민에게 그들의 안전과 행복을 가장 잘 확보해줄 것 같은 그런 원칙에 토대를 두고 그런 형태로 권력을 조직한 새로운 정부를 구성하는 것은 인민의 권리이다.”


유명한 <독립선언문>의 핵심 구절이다. 토머스 제퍼슨이 초안을 작성해 그를 포함한 5인의 기초 위원들이 수십 차례의 회의를 거쳐 마침내 최종 선언문으로 만들어냈다. 영국 사상가 존 로크의 사회계약설에 바탕을 두고 있다. 제퍼슨은 존 로크가 주장한 인간이 지닌 천부인권인 생명‧자유‧재산의 권리를 이어받아 생명‧자유‧행복추구를 미국 독립의 근본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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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선언문에는 명백한 한계가 있었다. 제퍼슨의 초안에 명시되어 있던 ‘흑인 노예제도 폐지’ 조항은 최종 선언문에서 삭제되었다. 인디언 역시 ‘연령, 남녀, 신분을 무시하고, 무차별로 살해하는 것을 전쟁의 규칙으로 삼는 무자비한 인디언 야만인’으로 매도되었다. 이 선언문에서 내세우는 인간은 백인만을 의미했고, 흑인과 인디언은 미국인에서 배제됐다. 미국은 노예제도를 폐지하고 모든 인간이 평등한 세상을 건설할 수 있었지만, 기득권 세력들의 이해관계에 막혀 무산되었다(이 역사적 실패는 독립 이후 미국을 분열시키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으며 끝내 남북전쟁으로 이어진다).


전쟁은 7년에 걸쳐 지루하게 진행되었다. 초기 영국군은 식민지인들과 마찬가지로 전쟁을 그저 단순한 반란진압 정도로 여겨서 미온적으로 대처했다. 1776년 여름에야 수백 척의 군함에 3만 2천 명의 병력을 동원해 식민지 민병대와 맞섰지만, 낯선 땅에서 효율적으로 작전을 수행하지 못했다. 유럽에서 프랑스와 네덜란드와 스페인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면서 식민지에서 총력전을 벌일 수도 없었다. 여러 요인이 겹치면서 1781년 9월, 영국군이 요크타운에서 항복한다. 식민지의 승리로 끝난 이 전쟁으로 식민지인들 5000여 명이 사망했다.


전쟁이 끝난 2년 후인 1783년 9월에 프랑스에서 맺어진 평화회담에서 미국은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인정받는다. 북으로는 캐나다 남쪽에서 남으로는 플로리다 북쪽까지, 서로는 미시시피 강까지 영토를 보장받았다.


미국의 독립전쟁은 식민지 민병대와 영국군의 충돌이긴 하지만 프랑스 지원병들이 대규모로 참전함으로써 국제전적인 성격을 띠었다(미국이 승리한 중요한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 프랑스는 공식적으로 미국에 군대를 파견하는 대신 지원병이라는 이름의 군사적 지원과 총 960만 달러에 달하는 경제적 지원을 했다(10여 년 후 프랑스 혁명의 한 요인이 된다). 또한 프랑스는 1778년에 세계에서 가장 먼저 미국의 독립을 인정하고 미국과 동맹조약을 맺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미국을 지원함으로써 앙숙인 영국을 견제하려 한 것이다. 미국 독립 100주년을 기념해 1876년에는 ‘자유의 여신상’으로 우의를 과시하기도 했다. 지금 뉴욕 항구에 서 있는 상이 바로 그것 말이다.


세계사는 미국독립을 영국의 명예혁명과 프랑스 대혁명과 더불어 세계 3대 혁명으로 찬양한다. 지극히 서구적인 시각이긴 하지만 일부 미국 역사가들은 그런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 하워드 진은 미국독립은 미국사적으로는 의미 있는 사건이지만 세계사적으로는 의미 없는 혁명이라고 주장한다. 미국 사회에 어떤 근본적인 변화도 일으키지 못했고, 지배계급이 영국 식민 지배자들에서 식민지의 토착세력으로 바뀌었을 뿐이라는 거다.


데글러도 <현대미국의 성립>에서 비슷한 견해를 보인다. 미국 독립은 프랑스 혁명과 달리 대대적인 사회적 변화를 낳지 못했으며 혁명을 주도했던 사람들은 대체로 식민지 시대의 지배계급 출신이었다. 혁명으로 이득을 본 사람들은 일반인들이 아니라 식민지 체제에서 비대해진 지배계급들이다. 그만큼 미국 독립은 토착 기득권 세력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공고하게 한 보수적인 혁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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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식민지 모국인 영국으로부터 독립해 새로운 ‘공화국’을 건설했다. 그것은 분명히 세계사에서 하나의 신기원을 이루는 사건이다. 바야흐로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세계가 대전환을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독립 이후의 미국 역사는 <독립선언문>이 무색할 정도로 자유와 민주주의의 역사와는 거리가 멀다. 그들이 말하는 자유는 언제나 백인들만의 자유로, 독립은 노예들에게 해방을 가져다주지 못했으며 하층계급과 여성의 삶에 의미 있는 변화를 낳지도 않았다.


대외적으로도 미국은 독립 이후 끝없는 팽창야욕에 따라 멕시코를 침략하고 인디언을 닥치는 대로 학살했으며, 필리핀을 식민지배하고, 쿠바를 준식민지로 만들고, 하와이를 강제로 합병했다. 그리고 아메리카 대륙에서 패권을 장악하고 더 나아가 제3세계의 민주주의와 자유를 향한 열망을 끝없이 분쇄했다. 선거에 의한 혁명이든 시민의 힘에 의한 무력혁명이든 간에 말이다.


미국에게 유일하게 가치 있는 세계는 ‘미국의 이익을 보장해주는 세계’다. 그러므로 미국의 이익에 반하는 정부는 그것이 아무리 합법적인 정부이더라도 칠레의 아옌데 정부처럼 무자비하게 분쇄했으며, 미국의 이익을 보장하는 정부라면 그것이 아무리 잔혹한 독재정부라도 지지하고 지원했다.


(1970년 칠레에 선거를 통해 사회주의 정부인 아옌데 정권이 들어섰다. 그러나 미국의 배후 조종을 받은 아우구스토 피노체트가 1973년에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무너뜨렸으며 아옌데 대통령은 대통령궁에서 쿠데타 군에 저항하다가 사망했다. 피노체트 정권은 그 후 1990년까지 독재정치를 하며 무수한 국민을 불법 체포‧감금‧고문해 악명을 떨쳤다. 고문을 당한 사람이 3만 8000명, 사망한 사람들이 3만 2000명에 달한다. 칠레에서는 지금도 독재정권 관련자들에 대한 조사와 처벌이 계속되고 있다)


미국독립을 배경으로 비교적 최근에 나온 영화엔 <패트리어트: 늪 속의 여우(The Patriot)>가 있다. 롤랜드 에머리히(Roland Emmerich) 감독이 2000년에 만든 영화로, 미국이 한창 보수화되고 애국주의가 충만하던 시대에 만들어진 영화답게 애국심으로 무장했다. 제목부터가 ‘애국자’이니 내용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라스트 모히칸>을 본 관객이라면 쉽게 연상할 수 있다.


배경은 독립전쟁이 한창인 1776년의 사우스캐롤라이나다. 주인공인 벤저민 마틴은 ‘프렌치-인디언 전쟁’에 참전한 전설적인 영국군 퇴역군인으로 자식을 일곱이나 둔 홀아비다. 그는 독립전쟁에 가담해달라는 권고를 받지만 어린 자식들을 이유로 거부한다. 그러나 장남인 가브리엘이 아버지의 뜻을 어기고 참전한다. 얼마 후 아들이 부상을 입은 채 집에 돌아오자 곧 영국군이 집을 포위하고선 아들을 체포한다. 이에 저항하던 둘째 아들이 냉혹한 영국군 장교 태빙턴 대령에게 사살되고 집은 불태워진다. 그러자 그는 분노에 떨며 어린 두 아들을 데리고 영국군이 지나가는 길목에 숨어 20명이나 되는 영국군을 모두 죽이고, 영국군 사이에서 ‘유령’이라는 명성을 떨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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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그는 미군에 가담해 민병대를 지휘하며 신출귀몰한 작전으로 영국군을 혼란에 빠뜨린다. 영국군은 마틴에 대한 보복으로 민병대에 가담한 사람들의 가족들을 살해하고 집을 불태우며, 어떤 마을에서는 주민들을 모두 교회에 몰아넣고 문을 잠근 채 태워 죽이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한다. 장남 가브리엘도 전투 중 태빙턴에게 살해된다.


영국군과 미군 사이에 벌어진 대회전에서 마틴 대령의 민병대가 선두에 선다. 치열한 전투 중 미군이 밀리자 그는 성조기를 흔들며 앞장서 적진을 향해 달려가며 용기를 북돋운다. 마틴 대령의 민병대는 승리를 거두고 그는 철천지원수인 태빙턴을 죽인다.


이 영화는 지나친 애국주의로 관객들에게 감동보다는 식상함을 줄 수 있다. 마지막 전투에서 마틴이 성조기를 흔들며 달려가는 장면은 누가 봐도 외젠 드라크루아의 그림 <자유의 여신>을 베낀 듯하다. 마틴은 그야말로 영국의 압제에서 벗어나 미군을 승리로 이끄는 자유와 정의의 사도로 나온다. 마틴의 고결하고 정당한 분노와 태빙턴의 피에 굶주린 듯한 잔혹한 성격의 대비는 이 영화를 멜로드라마로 만든다. 여기에 전쟁 속에서 이뤄지는 가브리엘과 앤의 사랑과 결혼 및 참혹한 죽음은 멜로드라마를 완성하는데 기여한다.


영화는 영국은 절대악이고 미국은 절대선이라는 프레임에 갇혀 있다. 그러나 사실 태빙턴은 마틴의 이면에 불과하다. 마틴은 ‘프렌치-인디언’ 전쟁에서 인디언을 잔인하게 몰살해 악명을 떨쳤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의 두 아들이 태빙턴의 손에 죽은 것은 과오에 대한 인과응보인지 모른다. 결국 미국은 영국의 압제에 맞서 싸우지만 본질적으로 영국과 미국은 크게 다를 것이 없다. 미국은 영국의 이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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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딴지일보 챙타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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