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기사 추천 기사 연재 기사 마빡 리스트








살면서 호구 아니었던 사람 있으면 한번 나와봐라.
아니, 도로 들어가세요. 별로 보기 싫으니까.


세상 살다 보면 복 받았구나,

정말 귀티 나네, 싶은 사람이 가끔은 있다.

내가 마음이 덜컥, 하고 불편해질 때는

그 사람들이 동그랗고 천진한 눈을 뜨고 불행이란 것을 믿지 않을 때.

돈 때문에 사람이 어디까지 끝없이 떨어질 수도 있고

한 때 사랑했던 사람이 어디까지 천해질 수 있으며

가장 잔혹한 폭력은 흔히 가족 사이에서 일어난다는 사실.


누구의 벽장에도 해골이 들어 있다는 사실.

내가 말하려는 것은 그 해골에 대해서다.

그나마 위로가 되는 것은 그 해골들은 풍화된 후

가끔 재미있는 표정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고통에 시간이 더해지면, 코미디가 된다.

우리 모두에게 시간의 축복이 있기를. 특별히 당신에게.

그리고 당신의 해골에게도.  

 



당신은 <들장미 소녀 캔디>를 아시는지?


perfume0218_7.jpg


개나 소나 들어 본 이름인 ‘들장미 소녀 캔디’. 한국 드라마에서 조금 형편이 어렵고, 주위에 괴롭히는 사람 두어 명 정도가 있으며, 사방에서 남자들이 구애하는 여성을 보고 망설임 없이 ‘캔디’라고 부른다. 나는 최근 이러한 명명을 매우 신중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애니메이션 주제가인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 울어~” 워낙 유명하다 보니 외로워도 슬퍼도 잘 울지 않고 버티는 여성이 있으면 아! 캔디구나!하고 아주 가볍게 즉시 명명해 버리는 경우가 많은데, 절대 이렇게 막 써도 되는 게 아니다.


누군가를 ‘캔디형’이라고 부르는 데 있어 단순히 사고무친의 신세거나, 남자한테 좀 인기가 있다거나, 생활력이 강하다거나, 주근깨가 있다거나 하는 이유 따위는 결코 충분하지 않다. ‘절대’, ‘결코’ 등 강력한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 이유는 내가 최근 약 40일간 ‘캔디적’ 생활을 했기 때문이다. 백마 탄 테리우스랑 연애질을 했다거나 머리카락을 희한하게 돌돌 만 여자애가 나를 괴롭혔다거나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것은 철저히 캔디의 직업생활에 대한 이야기다.


캔디의 첫 직업이 뭔지 아시는지? ‘간호사’라고 대답한 분이 계시다면 그건 50점. 뭐 틀린 답은 아니다. 주제가가 워낙 유명하다 보니 마치 이 아가씨의 직업이 웃으면서 푸른 들을 달려가는 것이라거나 혼자 있을 때 약간 쓸쓸하다 싶으면 거울 속의 자신과 이야기를 나누는 일인 것 같은 착각이 들 수 있지만, 캔디, 정확히 ‘캔디스 화이트 아드레이’ 양은 푸른 들을 달리거나 거울 안의 자아와 대화를 나누거나 하기에는 무척 바쁘다.


머리가 긴 한국 남자에게도 툭하면 붙여지는 별명인 ‘테리우스’가 있고 주변에서 다들 이 아가씨에게 끌리는 바람에 직업이 ‘연애’인 것도 같지만 그것도 아니다. 만화의 끝까지 캔디는 아무와도 이어지지 않는다. 두 번의 연애를 하긴 했지만 그 남자들의 운명은 실로 처참하다.


첫사랑인 안소니는 집안의 친목 행사인 여우 사냥에 참가해 통통한 여우를 발견한 후 “캔디, 저걸로 네 목도리를 만들어 줄게!”라고, PETA에서 들었다간 기겁할 말을 남긴 채 여우를 추격하다 낙마해 죽고 만다. 안소니의 낙마 사망 사고에 대한 트라우마를 잊게 하겠다며 캔디를 강제로 말에 태워 질주한 두 번째 연애 상대 테리우스는 런던의 사립학교에서 만났다. 테리우스는 영국 귀족과 미국의 여배우 사이에 태어난 혼외자식이다. 연애가 좀 잘 풀리나 했더니 가톨릭 사학의 엄한 교칙을 이용해 캔디와 테리우스 사이를 질투한 이라이저가 꾸민 계획 때문에 캔디는 퇴학 처분을 받는다.


테리우스.jpg


이에 테리우스는 캔디의 학적을 유지하는 대신 자신이 자퇴하기로 학교와 담판을 짓고, 배우가 되기 위해 브로드웨이로 떠난다. 캔디 역시 시카고의 간호학교에 입학한다. 뜨는 신인 배우와 병아리 간호사로 열심히 살면서 재회할 날을 기다리던 차, 연극 연습의 무대 조명이 추락하는 사고가 일어나고 자신을 사랑하던 동료 여배우 스잔나가 그를 밀쳐낸 대신 평생 하반신을 쓰지 못하는 몸이 된다. 연민의 감정을 못 이긴 테리우스는 캔디와 헤어지지만, 괴로움에 알콜을 벗 삼다가 일류 극단에서 쫓겨나고 만취한 채 싸구려 무대에 오르는 삼류 배우가 되고 만다. 이후 그의 행적은 알 수 없다. 이런 박복한 규수 같으니.


어릴적 동산 위에서 마주쳤던 미소년이 자신을 입양해 준 ‘아드레이 대공’이자 마음의 지주인 ‘알버트 씨’라는 걸 알면서 끝나긴 하지만, 어쨌든 캔디의 첫사랑은 죽고 두 번째 사랑은 남의 남자가 되어 버린 채 직업에 꿋꿋이 종사하는 상태로 만화는 끝난다는 거! 신분 세탁을 했으니 그거 하나는 성공이긴 하다.


그럼 캔디의 일생을 한 번 돌아보자. 고아원 <포니의 집> 문 앞에 버려진 아기였던 캔디는 마치 팔리지 않는 애견샵의 덩치 큰 강아지처럼 아무도 데려가지 않는다. 제법 큰 나이까지 잡일을 거들며 고아원에 남아 있다가 재정이 궁핍한 고아원 형편을 생각해 라건 가의 자녀들 놀이 상대로, 입양이 아니라 일종의 숙식만 제공받는 ‘알바’ 생활을 시작한다. 지금까지 친구가 한 명도 없었다는 아들 니일과 딸 이라이저가 이 집의 자식들인데, 성질이 하도 못돼 먹은 바람에 가정교사를 서른여덟 번이나 갈아치웠다(친구가 없을 만도 하다). 당연히 캔디를 놀이 상대나 말벗으로 잘 대해 줄 리가 없다. 고아라고 놀려대고 심한 장난을 치고 자신들이 한 못된 짓을 덮어씌우거나 하며 괴롭힌다. 온 가족이 크면 하녀로 부려먹을 생각까지 하고 있다. 이라이저는 아침부터 밤까지 부려먹겠다며 좋아한다.


라건 가는 ‘아드레이 가’라는 명문가의 일가로써, 역시 아드레이 가와 친척 관계인 아리스테아 콘웰, 그의 동생 아치볼드 콘웰, 장미를 좋아하는 여리여리한 미소년 안소니 브라운과도 가까이 지내고 있다. 친하게 지낸다는 뜻이 아니고 그냥 거리상 가깝게 지낸다는 뜻으로, 저마다의 매력을 지닌 세 소년들은 아무도 니일과 이라이저를 좋아하지 않는다. 반면 이라이저는 안소니에게 연모의 정을 품고 있다. 그러거나 말거나 소년들은 모조리 나무도 잘 타고 성격도 좋은 캔디에게 호감을 가진다. 당연히 이라이저의 눈 밖에 날 수밖에.


캔디는 먼지 쌓인 지붕 밑방 창고에서 마구간으로 유배된다. 마구간에 침대 놓고 살면서 말을 돌보고, 그나마 남는 시간이 있다면 요리와 청소와 정원 일을 돕도록 아주 알뜰하게 부려먹는다. 하인과 하녀들은 라건 가 사람들이 악질이라며 꽃을 선물하거나 맛있는 파이를 구워 주는 등 캔디가 안쓰러워 어쩔 줄 모른다.


내가 캔디라는 아이를 전과 전혀 다른 눈으로 보게 된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그리고 나의 지금 생활 덕분이다! 어릴 적에 캔디가 말 돌보며 마구간에서 산다는 내용을 봤을 때는 그냥 그런가 보다 했다. 말도 좋아하는 것 같고 잘됐네, 하고 생각했다가 말을 돌보는 일을 경험해 보니, 세상에. 라건 가 당신들은 아동학대로 고소감이야. 인간도 아니야. 악질들.


내가 일하고 있는 곳에는 키가 80cm를 넘지 않는 자그마한 말들이 16마리 있고, 서러브레드와 제주 토속 말을 교배한 한라마가 1마리 있다. 이곳에서의 내 주된 일이 말을 돌보는 것은 아니지만, 인원이 많지 않은 곳이다 보니 닥치면 해야 한다. 이 일을 하다가 캔디스 화이트 아드레이 양에 대한 나의 마음은 완전히 경애로 바뀌었다! 너 어떻게 버텼니, 그 와중에 벼락 맞을 남매한테 괴롭힘도 당하고 친구도 사귀고 애인도 만들고…. 난 년. 이 잘난 년. 진정 난 년 같으니.


우리는 보통 2명이 작업하고 돌볼 말이 캔디의 할당량보다야 훨씬 많지만, 12살 정도의 어린 꼬마 여자아이가 500kg 정도 나가는 서러브레드 두 마리를 돌보는 거다. 내가 아침부터 일하는 날을 예로 들어 캔디의 하루를 상상해 보자. 아침 청소를 하려면 6시까지 마사에 나가야 하는데 캔디는 마구간에 침대를 놓고 생활하고 있으므로 출퇴근 시간은 걸리지 않을 테다. 하지만 말들은 용변을 가릴 줄 모르기 때문에 말들의 침대 노릇을 하는 ‘깔짚’에다 똥과 오줌을 싼다. 똥오줌엔 파리가 엄청 들끓고, 캔디의 침대 곁에도 파리들이 엄청나게 끓을 것이니 쾌적한 잠자리는 아니겠다.


1213.jpg


먼저 말들을 마구간에서 내보낸 뒤 아침을 먹인다. 앗, 내보내기 전에 한 마리씩 마방굴레를 매어야 한다. 나는 미리 주문되어 있는 건초를 야외 운동장의 말구유에 배급만 하면 되지만 캔디는 풀도 직접 베어 올지도 모른다. 말들이 나간 마방 안에는 녀석들이 간밤에 잘 살아 있었다는 확실한 증거들이 기다린다. 마방마다 돌아다니며 비닐장갑을 낀 손으로 일단 말똥부터 주워 담는다. 초식동물이라 그런지 냄새는 그다지 심하지 않지만 양이 무척 많다. 우리가 키우는 건 조랑말보다 훨씬 작은 미니어처 호스들이기 때문에 마방 하나를 두 마리가 보통 함께 쓰는데, 둘이서 하룻밤 싼 응가가 커다란 대야 가득은 족히 나온다.


말똥을 일일이 주워낸 다음에는 오줌을 흠뻑 머금은 깔짚을 치워야 한다. 이 때 군인들이 전방에서 눈을 치우는 뉴스 장면에서 나올만한 아주 큰 삽을 쓴다. 말 오줌은 냄새가 꽤나 지독하고, 오줌을 흠뻑 먹은 깔짚은 바위처럼 묵직하다. 마방에 고르게 깔려 있는 깔짚 속에서 아이들이 오줌을 싸 놓은 자리를 찾아내서 삽을 사용해 박박박 긁어낸다. 가운데로 모아 놓은 후, 아직 활용할 수 있는 깨끗한 깔짚은 가장자리에 잘 정리해 둔다. 방마다 오줌을 흠뻑 먹은 깔짚이 가운데에 모였으면 이제 손수레를 가져 와서 삽으로 떠 담는다. 손수레가 찰 때마다 다시 비우고 수레를 끌고 온다. 이웃 농민이 가져갈 수 있도록 푸대에 비료로 쓸 말똥을 채워 놓는 것도 잊어선 안 된다. 오염된 깔짚이 깨끗한 부분과 섞이지 않도록 재빠르게 삽으로 오물을 떠내야 하는데, 쉽지 않다. 


폐기해야 할 깔짚을 다 치웠으면 어깻죽지가 얼얼하지만 바로 다음 작업에 들어가야 한다. 오줌에 젖은 바닥에 파리 등 각종 해충이 생기지 않도록 소독약을 방마다 세심하게 뿌려 준다. 소독이 끝났으면 아직 활용할 수 있는 깔짚을 방 안에 고루 펴 놓아야 한다. 이 작업은 흔히 미화원 분들이 많이 쓰는 초록색 큰 빗자루를 가져다가 하는데, 이것을 ‘베딩(beddng)'이라 부른다, 하루에 한두 개의 마방은 올 베딩울 해야 하는데, 그 방에 정말 먼지 한 톨 남지 않도록 모든 깔짚 부스러기까지 다 쓸어내고 방을 깨끗이 비운 다음 바닥과 벽까지 모두 소독을 한다. 새 깔짚을 가져오기 전에 방에 남아 있는 깔짚을 골고루 까는 간단한 베딩 작업을 하다 보면 아까 미처 눈에 띄지 않았던 말똥이 끝도 없이 굴러 나온다. 집게를 가져다가 누락된 말똥을 일일이 집어낸다. 그렇지 않으면 순식간에 파리가 신나게 끓는다.


어떻게 똥을 다 골라냈으면 오염된 깔짚을 치워버린 만큼 새 깔짚을 보충해야 한다. 웬만한 쌀포대 두 개 정도의 푸대자루에 팽팽하게 담겨 있는 깔짚자루는 빵빵하고 무겁다. 위쪽에 있는 창고까지 가서 끙끙대며 마사 쪽으로 자루를 굴린다. 계단을 어찌어찌 굴러 자루가 마사 앞에 무사히 도착했으면 자루를 보충해야 할 방으로 끌고 가는데, 절로 낑낑 소리가 난다.


이제 자루를 끌러서 적당한 양을 쏟아야 한다. 웬만한 일문형 냉장고만한 빵빵한 푸대에서 딱 적절한 만큼 깔짚을 꺼내기가 쉽지 않아서 유도의 안아치기 자세처럼 푸대를 부여안은 채 한참을 끙끙거려야 푸대가 깔짚을 토한다. 방마다 자루를 질질 끌고 다니면서 깔짚을 다 보충했으면 남은 깔짚을 여며 창고에 가져다놓고, 다시 미화원 빗자루를 가져와 새 깔짚으로 헌 깔짚 위를 매끈하고 폭신하게 덮어 준다. 그러다 보면 미처 못 본 똥이 튀어나오는데, 또다시 달려가서 집게를 가져다가 집어내야 한다.


2.jpg


바깥에서 노닐고 있는 말들도 물을 마셔야 하니 커다란 양동이로 네 통 정도의 물을 주고 나서, 말들이 저녁에 먹을 건초를 미리 세팅한다. 말들의 건강 상태, 컨디션에 따라 제각각 줘야 하는 양이 다르므로 저울을 사용해 정확히 계량하여 마방마다 가져다 놓는다. 저녁 5시쯤 말들이 도로 마방에 들어와 냠냠냠 먹을 것이다. 건초 배급까지 끝났으면 마사 복도를 깨끗이 청소한다. 그러고 나면 아침을 먹은 말들이 응가를 운동장 여기저기에 싸 두었을 것이다.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가지고 달려가 모닝 똥을 치운다. 똥은 하루 종일 정말 많이 싼다. 물론 그때마다 치운다. 요즘은 작열하는 햇볕 아래서 500평의 운동장 여기저기 말들이 해 놓은 응가를 주우러 다니다 보면 카뮈의 <이방인>이 이해된다. 그래, 오죽이나 해가 뜨거웠으면….


이렇게 글로 적어 놓으니 별 일 아닌 것 같지만, 여기까지 세 시간은 족히 걸린다. 세마나 그루밍 같은 건 다 빼고 말들의 최소한의 생존을 위해 하는 것만 기술한 게 여기까지. 어쨌거나 캔디, 난 널 다시 봤어. 이 생활을 얼마간 해 보고 나서 나는 진심으로 캔디를 존경하게 되었고, 드라마에 나오는 여주인공에게 툭하면 '캔디’라는 사람들에게 화를 잘 내게 되었다. 캔디? 캐앤디이? 캔디 같은 소리 하네. 캔디 아무나 하는 줄 알아? 마구간 가면 쟤는 하루도 못 버텨!


말똥을 치우면서 곰곰이 생각해 보다, 캔디 얘는 말띠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과 인연이 깊은 애라는 걸 알게 됐는데, 그 이야기는 다음 시간에!





지난 기사


나는 박복한 년이다




김현진입니다


편집: 딴지일보 챙타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