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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8월 17일)는 장준하 선생의 기일이었어. 그래서 이 분의 사랑 이야기를 해볼까 해.  


1953년 4월 아직 전쟁의 포화가 계속되던 즈음, 임시수도 부산에서 역사적이라 불러도 무방한 한 잡지가 탄생했어. <사상계>지. <사상계>가 어떤 잡지인지는 길게 얘기할 필요 없을 것 같아. 짧게 설명한다면 장준하 선생이 직접 관여하여 발행하던 문교부 기관지 <사상>을 인수해서 새롭게 발간한 잡지였지. 문교부 장관 백낙준의 도움 아래 발행하고 있었는데 백낙준을 자기 남편의 잠재적 라이벌로 봤던 박마리아(이기붕의 부인)가 장난을 친 결과 문교부 기관지 <사상>의 수명이 다했거든. 여기에 계(界)자를 더 붙인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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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하 선생은 이 잡지를 어떻게든 발간하기 위해 애를 썼어. 필자들도 도움을 주었고 리더스 다이제스트 한국판을 만드는 회사 사장도 지원을 약속하는 등 어찌어찌 모양을 갖춰 갔는데 문제가 하나 생기게 돼. 원고, 조판, 인쇄 모두 외상으로 하기로 했는데 사진 등의 동판대(銅版代)만은 외상이 안 된다는 거였지. 통사정하는 거야 장 선생의 장기였지만 이건 사정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어. 그때 장 선생의 머릿속에 떠오른 게 하나 있었어, 아내의 겨울 외투와 그런대로 값나가는 옷가지 몇 벌. 장준하 선생은 그걸 몽땅 팔아치워 동판대를 마련하게 돼.


그뿐이면 말도 안 해. 장 선생은 아내의 옷가지와 패물을 팔아치웠을 뿐 아니라 아내를 아주 혹독하게 부려(?) 먹어. "아내를 시켜 교정을 보게 했다. 생전 처음 하는 일이라 서툴러 빠져 일의 템포가 늦고 그나마 가르쳐 준 대로도 못 할 때면 슬며시 울화도 났지만 그렇다고 남들이 보는 남들의 사무실에서 핀잔을 주어 부부싸움을 벌일 수도 없는 일이었다." (장준하가 <브니엘>에 쓴 글) 아내에게 생판 해 보지 않은 일을 억지로 떠맡겨 놓고도 미안해하는 기색은커녕 그 서툼을 고발(?)하면서 자신의 인내력(?)을 자랑하고 있는 이 간 큰 남자.


하지만 아홉 살 아래의 아내 김희숙 여사는 별 군소리 없이 남편의 일을 도왔어. 


그건 둘의 범상치 않은 결혼 과정의 추억 때문인지도 모르겠어. 원래 둘은 사제지간이었지. 이병헌하고 전도연 나왔던 영화 <내 마음의 풍금> 기억나? 시골 초등학교에서 아기 들처업고 수업 듣던 전도연과 "~~하고 있느냐?" 하면서 위엄을 세우던 초보 선생 이병헌. 그 그림이 원래 이 부부의 원판이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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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하 선생이 일본 유학을 할 때 제자와 편지를 자주 교환하긴 했지만 친구의 증언에 따르면 그저 '사제지간의 두터운 정' 정도였다고 해. 그런데 편지 한장이 청년 장준하의 마음을 흔들어 놔.


김희숙 여사의 부친은 항일운동을 위해 망명을 떠난 사람이고 어머니가 하숙을 치면서 학비를 대 왔는데 그게 끊기면서 학업도 그만둬야 한다는 거였어. 거기다가 미혼 처녀들을 정신대로 끌고가는 일이 잦았던지라 두려움은 더욱 컸겠지. 일본군 학병 입대를 얼마 남겨 놓지 않았던 장준하는 어느 날 친구에게 이렇게 말을 했대. 


"로자(김희숙 여사의 세례명)를 안정시켜 놓고 입대해야겠네." 


즉 일본도 결혼한 유부녀만큼은 건드리지 않으니 자기가 전 제자 김희숙의 신랑이 돼 그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거였지. 거기서 친구는 "장한 일이야 장형!"했다는데 나 같으면 이랬을 거야. "아니 자네 아니어도 남자는 많을 텐데. 왜 자넨가. 이상하네."


물론 오고가는 편지 속에 남다른 정이 싹텄을 테고 그렇지 않았다면 생판 사제지간 이상이 아닌데 내가 안정을 시켜놓고 뭘 한다는 둥 하는 얘기가 나올 리도 없고 김희숙 여사가 거기에 응했을 리도 없지. 그래도 그때 나이 김희숙 여사 열일곱. 장준하 선생 스물여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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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그렇게 결혼하고 2주일 뒤 남편은 일본군에 입대했고 탈출하고 임시정부를 찾아가는 대장정을 펼쳤고 열일곱 아내는 시부모 봉양하며 고향을 지켰지. 그러다 해방이 된 후, 임정 요원들과 함께 서울에 온 남편을 찾아 "김활란의 어머니와 함께 소를 타고" 남으로 내려왔어. 이제나 남편 얼굴 보고 알콩달콩 사나 싶었겠지만 앞에서 나왔지만 장준하나 그 아내나 그럴 팔자가 못됐지. 다음의 인터뷰를 보면 불을 보듯 그 이유가 보여.


"한번은 저도 가계부라는 것을 써보고 싶다고 하니, 얼마 후 생활비라며 봉투를 줬어요. 너무 좋아서 가계부를 만들었는데 이튿날 남편이 돈을 꿔달라는 거예요. 없다고 했더니 '어제 준 것 있잖아요' 해요. 남편은 그 돈을 친구 아들의 등록금으로 줬어요. 결혼식 주례를 서고 받은 양복지도 어느 날 찾아보면 사라지고 없어요. 남편이 저 모르게 형무소에서 나온 제자나 어려운 이웃에게 준 거예요. 제가 바느질집에 가서 일하고 외상도 하면서 겨우 살림을 꾸려가고 있는 터라 서운해하면, 남편은 '내가 밥은 굶기지 않을게. 미안해요'라고 했어요."


이런 형편이었으니 장준하 선생이 뜻밖의 죽음을 당한 후 어린 자식들하고 어떻게 사냐며 우는 이태영 변호사에게 "언제 저 양반이 생활비 가져온 적 있나요?" 하는 푸념이 흘러나왔겠지. 그러나 미워할 수도 없었겠지. "미안합니다."를 입에 달고 살던, 정신대 끌려갈지 모르는 제자와 결혼하겠다고 나서던 그 옛날의 총각 선생님, 그렇게 자기 안 된 일은 생각 안 해도 남 안 된 일에는 발벗고 나서던 남자를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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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하 선생도 본인에게 무슨 일이 있을지를 예감한 것 같다고 해. 윤봉길 의사가 의거 전 맹세했던 태극기, 김구 선생에게 받은 뒤 평생 소중히 간직해 온 그 태극기를 이화여대에 기증하는 한편, 아내의 평생 숙원을 풀어 주거든. 장 선생은 평생 개신교인으로 살았고 아내는 일생을 가톨릭 신자로 보냈어. 가톨릭 신자들에게 혼배성사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는군. 이걸 올리지 않으면 가톨릭 차원에서는 결혼으로 인정되지 않는다는 거야.


그런데 장준하 선생이 죽기 직전,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혼배성사를 베풀어 준 거야. 돌아가기 열 이틀 전. 1975년 8월 5일. 결혼을 1944년에 했으니 무려 31년만의 혼배성사. 목사의 아들이요, 한국신학대학을 졸업한 골수 개신교인인 그가 신부 앞에 서서 혼배성사를 올린 거지. "평생 미안했소 이제 혼배성사를 해 드릴게요." 나이 쉰에 면사포를 쓰고 신부(神父) 앞에 선 신부(新婦)의 심경은 어땠을까. 그리고 열흘 남짓 뒤 시신으로 돌아온 신랑을 보았을 때는. 그 신랑이 그렇게 치를 떨어 했던 사람의 딸이 찾아와서 "아버지와 장 선생은 나라를 사랑하는 길이 달랐을 뿐입니다."라는 말을 '사과'라며 읊조리는 걸 들었을 때는.


김희숙 여사는 얼마 전 종양이 있다는 진단을 받았대. 대단치는 않은 것으로 아는데 의사에게 5년만 더 살게 해달라고 말씀하셨다고 해. 지난 대통령 선거를 치른 직후에. 오마이뉴스에 실린 기사에서 고상만 기자에게 김희숙 여사는 이렇게 얘기했다네.


"만약 지금 내가 죽으면 저 세상 가서 영감을 만날 거 아니요. 그때 영감이 나보고 '그래. 지금 대한민국 대통령은 누가 하고 있소?'라고 물으시면 내가 차마 말을 못할 것 같아요. 그러니 앞으로 5년만 내가 더 살아서 다시 대통령 선거해서 대통령 뽑을 때까지 살아 있으려고 해요. 그래서 좀 더 좋은 사람이 대통령되는 것 보고 죽어야 내 영감에게 당당히 말할 수 있지 않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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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현대사에서만 가능한 슬프고도 애달프고 답답하고도 암담한 사랑 이야기가 아닐까?


 



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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