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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23사단의 돌격을 소련은 압도적인 포병 화력으로 밀어냈다. 아니, 대포밥이 됐다고 해야 할까?

 

이후의 모습은 간단했다. 일본군의 보병 앞에 소련군의 압도적인 포병 화력과 기갑전력이 덮쳤고, 일본군은 총검을 착검하고 전차에 돌격했다. 물론, 일본군의 분전도 전선 여기저기서 있었지만, 대세에 영향은 끼치지 못했다.

 

주코프는 제2차 세계대전 내내 자신의 주특기로 사용했던,

 

 “굳히기 이후 크로스 카운터”

 

전법을 할힌골에서 ‘완성’하게 된다. 어떻게 보면, 관동군은 주코프의 훌륭한 교보재였는지도 모른다. 주코프는 일본군의 공격을 착실히 분쇄한 후(압도적인 화력으로) 차곡차곡 유럽에서 달려온 증원 병력을 모으며 반격작전을 준비했다. 그리고는 이후 3년 뒤 스탈린그라드에서 다시 한 번 성공하게 되는 양익포위로(물론, 병력 규모 면에서는 엄청난 차이가 나지만) 일본군을 포위하게 된다.

 

(이 대목에서 잠깐 생각해 봐야 하는 게, 주코프가 전쟁사에 처음 이름을 올린 할힌골 전투는 소련군의 승리로 끝났지만, 소련군 사상자 숫자도 만만치 않았다. 거의 일본군에 맞먹을 정도의 사상자 수가 나왔는데, 상당 부분 주코프의 책임이었다. 당시 주코프는 조급함에 증원 병력을 축자 투입하거나 전차를 보병 없이 단독 진격시키는 등의 실수를 범했고, 이 틈을 노려 일본군이 소련군을 도륙하기도 했다. 데뷔전의 옥의 티라고 해야 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코프 개인으로는 할힌골 전투가 가지는 의미는 대단하다. 할힌골의 실수로 단련된 주코프는 독일군과의 전투에서 ‘괴력’을 발휘하게 된다. 어쩌면 독일 패망의 원인은 일본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일본군은 궤멸적인 타격을 입고 처음 공격을 개시했던 국경선 쪽으로 밀려났고, 소련군도 할힌골에서 멈춰 서면서 전투는 끝나게 된다.

 


전투를 멈췄던 소련, 정신 못 차린 일본

 

주코프가 수비에서 공세로 방향을 선회한 것이 1939년 8월 20일이었다. 뭔가 생각나는 게 없는가?

 

1939년 9월 1일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은 발발한다. 그리고 9월 17일 소련도 폴란드 전역에 진출해 독일과 함께 사이좋게 폴란드를 반으로 갈라 먹게 된다. 한마디로 말해 소련은 더 이상 극동에 신경 쓸 여력이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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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역시 더 이상 소련과 싸울 수 없었던 게 전력을 모두 소진했던 것이다. 소련에게 그야말로 탈탈 털렸던 것이다. 그럼에도 정신을 못 차린 관동군은 증원 병력으로 온 제7사단, 2사단, 4사단을 가지고 『전사자 수용을 위한 한정 작전』이라는 ‘미친 짓’을 계획하고 있었다. 전사자 수용은 핑계이고, 소련이랑 계속 전쟁을 하겠다는 것이다.

 

이에 놀란 일본 본토의 대본영은 나카지마 테츠조 참모차장을 파견해 관동군 사령부를 말리려 갔는데, 이 참모차장 역시 관동군 사령부의 논리에 휘말려 작전을 지지하고 나서게 된다. 대본영은 완전 열이 받아 연락장교를 보내 작전 중지명령을 내렸고, 그제서야 관동군의 ‘미친 짓’을 멈추게 된다.

 

이후 대본영은 관동군 사령관을 비롯해 참모부, 23사단 사단장과 대본영에서 파견한 참모차장까지 줄줄이 옷을 벗기게 된다. 이제야 정신을 차리게 됐다고 봐야 할까?

 


할힌골 전투가 남긴 것 


러-일 전쟁 이후 일본 육군의 주적은 ‘러시아(소련)’이었다. 그러나 할힌골 전투 이후 일본은 30년이나 준비했던 對 소련 전략을 포기하게 된다.


 

 “소련은 너무 강하다.”


 

러-일 전쟁은 몇 개의 행운이 겹쳐지면서 얻은 기적이었다. 그러나 소련은 달랐다. 대공황 시기 급속한 공업화는 격차가 벌어져 있던 양국의 국력 차이를 몇 배나 더 벌려 놨다. 인구수, 공업 생산력, 영토, 자원 등등 모든 면에서 소련은 일본을 압도했다. 더 대단한 건 그 다음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이 소련에 원조한 전쟁 물자가 독일이 전쟁 내내 생산해 낸 전쟁 물자보다 많았단 걸 떠올려 보자.

 

단적인 예로, 미국이 소련에 제공한 트럭의 숫자가 전쟁 기간 내내 독일이 생산한 트럭의 수와 비슷하거나 조금 많았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이 태평양 전선에 투입된 전쟁 물자의 양은 대서양 전선에 투입한 양의 1/5 수준이었다(10%대라는 의견도 있다). 그런데 그 전쟁물자의 양이 일본의 그것을 압도했다면 이야기는...전쟁은 시작 전에 이미 끝났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할힌골 전투 이후 소련에 대한 두려움을 뼈 속 깊이 각인한 일본은 어처구니없게도 소련보다는 만만한(?) 미국을 치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국제정치학적으로 보자면, 당시 일본의 행보는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갔다.

 

진주만 공습으로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뒤 독일은 삼국 동맹을 이유로 미국에 선전포고한다. 그런데, 독일이 소련을 침공했을 때 일본은 소련을 공격하지 않았다. 이 덕분에 1941년 겨울 모스크바를 놓고 소련과 독일이 백척간두의 승부를 벌일 때 소련은 일본 방면에 있던 병력을 빼내 모스크바 방어전에 투입할 수 있게 된다(1941~1944년 사이 소련은 극동전선에 있었던 25만 명의 병력을 서부 전선으로 빼 독일과의 전투에 밀어 넣었다).

 

동부전선에서 히틀러가 유일하게 승기를 잡을 수 있었던 기회를 일본이 망친 것인지도 모른다(일본이 아니었어도 전략적으로 히틀러가 ‘삽질’한 것은 사실이지만, 결과적으로 일본이 독일 대신 소련을 도왔단 건 역사적 사실이다).

 

물론, 외교적으로 따져봐야 할 부분이 있다. ‘할힌골 전투’ 이후 일본은 심각하게(!!) 소련에 대한 위협을 고민하게 됐다. 그 이전에 있었던 군부의 남방공략파와 북부공략파 다툼(?!)은 옛말이 돼 버렸다.

 


 “소련과 싸우면 안 된다.”

 


사람은 자신의 경험에 근거한 학습을 맹신하게 된다. 게다가 그 ‘학습’이 피로 점철된 죽음의 교육이라면 더더욱 그러할 것이다. 이제 일본 군부 내에서도 소련과 싸우겠다는 말은 쑥 들어가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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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후 일본이 싸워야 할 장소는 북쪽이 아니고 남쪽이란 공감대가 형성됐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니 문제는 ‘소련’을 어떻게 해야 할까란 난제가 남게 됐다.

 

일본이 단독으로 소련과 맞붙어 싸워 이길 확률은 한없이 0에 수렴했다. 그렇다면, 믿을 건 동맹국뿐인데, 철석같이 믿었던 독일이 1939년 8월 23일 독일과 소련은 독소 불가침 조약을 체결했고, 그 얼마 뒤 사이좋게 폴란드를 갈라 먹었다.

 

일본으로서는 충격과 공포였다.

 

독소불가침 조약이 일본에 안겨 준 충격파는 상상 이상이었다. 만약 소련과 일대일로 맞붙는다면, 일본은 질 것이다. 지금 현재(1939년) 일본은 중국 전선에서도 허우적거리는데, 중국보다 훨씬 크고 강대한 소련과 상대를 한다? 일본 군부는 러-일 전쟁 이전의 러시아를 떠올리며 불안에 휩싸였다.

 

그렇다고, 수세적으로 버틸 수만은 없었다. 조만간 일본은 어딘가로 쳐들어가 또 전쟁을 일으켜야 한다(남방 자원지대로 지칭한 서구 열강들의 식민지). 만약 그 사이 북쪽의 소련이 치고 내려온다면, 일본은 사면초가에 몰릴 것이다.

 

1939년 이래로 일본은 줄기차게 소련에게 구애(!)를 시작했다. 독소불가침 조약에 준하는 협정을 소련과 맺겠다는 것이다. 1940년 5월과 6월 일본은 소련에게 불가침 조약을 제안했다. 당시 일본은 몸이 달아올랐었다. 프랑스가 독일에게 항복한 상황. 무주공산이 된 남방지대로 진출해(일본식 표현으로) 하루빨리 이 지역을 접수해야 했던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북쪽의 위협을 제거해야 했다.

 

결국 1940년 8월이 되면, 소련이 일본의 접촉에 응하게 된다. 협상이 시작된 것이다.

 

문제는 이때부터였다. 당시 일본은 독소불가침 조약에 준하는 불가침 조약을 원했다(실제로 일소중립조약은 독소불가침 조약을 그대로 베낀 조약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러나 소련은 신중했다.

 


“지금 독일과 불가침 조약을 맺었는데, 일본과 또다시 불가침 조약을 맺는다면 서구 열강들이 소련에 대한 의구심을 품을 것이다.”


 

소련으로서는 당연한 고민이다. 떠오르는 신성이자 국제사회의 말썽꾸러기인 독일과의 불가침 조약을 맺음으로써 히틀러는 배후의 두려움 없이 마음껏 유럽을 농락했다. 만약 일본과도 불가침 조약을 맺는다면, 일본 역시도 마음껏 동아시아 지역을 농락할 것이다. 아울러 이 양국과 불가침 조약을 맺은 북구의 패자 소련 역시도 서구 열강들을 압박할 수도 있을 것이다.

 

소련은 불가침 조약이 아니라 ‘중립협정’을 제안했다. 그러나 일본은 이런 중립협정에 만족할 수 없었다. 끈질기게 소련에 달라붙은 일본은 이 불가침 조약이 서로의 이익에 도움이 될 것이라 설파한다.

 

일본은 내몽고와 만주국을 포함해 중국 북부의 3성에 대한 전통적 이해관계를 인정받고,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와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권리(!?)를 소련으로부터 인정받고, 일본은 소련이 아프가니스탄과 페르시아(이란)으로 진출하는 걸 인정한다는 것이다.

 

양국의 이해관계는 일치하게 됐고, 1941년 4월 13일 역사적인 일소중립조약이 체결됐다. 이제 일본은 배후의 두려움 없이 남방지대로 진출할 수 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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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냉정히 말하자만, 조약이란 건 최후의 순간에는 공허한 메아리일 뿐이다. 역사 이래로 지구상에서 체결된 평화조약의 평균 유지 기간은 겨우 2년 남짓이다.

 

히틀러와 스탈린이 체결한 독소불가침 조약도 2년을 채우기 전에 파기 됐고, 일소불가침 조약도 한 번 위기가 있었다. 바로 독소불가침 조약이 파기 된 다음이었다(바르바로사 작전으로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면서). 독일이 파죽지세로 소련 영토를 치고 들어가자 ‘관동군’이 다시 들썩이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이 기회다 독일과 함께 양쪽 전선에서 소련을 치고 들어간다면 낙승이다!”


 

그러나 이런 움직임은 곧 사그라들었다. 당시 일본의 상황, 할힌골 전투의 기억이 일본의 발목을 잡았던 것이다.


 

“노몬한 전투 때 소련군의 실력을 보지 않았는가? 독일과의 전투에 밀리고 있다지만, 역시 소련은 소련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석유와 고무다. 우리가 소련의 배후를 치고 들어가 시베리아를 확보한다고 하더라도 그곳에는 석유와 고무가 나오지 않는다. 지금 일본에게 필요한 것은 전략자원인 석유와 고무를 확보할 수 있는 남방지대의 확보이다.”

 

“시베리아의 추위를 생각해 보라. 지금 진출해 그곳을 공략한다 하더라도 쉽게 점령할 수 없을 것이다.”


 

지극히 상식적인(!?) 판단이라고 해야 할까? 물론, 일본이 작정을 하고 1941년에 극동전선에서 치고 올라갔다면, 역사는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1941년 12월의 소련은 풍전등화의 위기였었다. 서구 열강들은 소련이 곧 무너질 것이란 예측을 하고 있었다. 역사에 ‘만약’이란 가정법을 넣고 싶은 순간이다.

 

어쨌든 조약체결 전후로(독소불가침 조약이 파기 된 이후에도) 스탈린은 일본과 달리 조약 준수에 대한 강렬한 의지를 불태웠다. 극동지역의 소련군 장성들에게 만주와 몽고 국경에서 일본군과의 충돌을 극력 회피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만약 일본이 선제공격을 한다면 극동의 소련 태평양 함대는 북쪽으로 후퇴한다는 계획도 짜두고 있었다.

 

왜 그랬을까?

 

당시 스탈린의 생각은 히틀러가 프랑스를 침공해 전쟁을 일으킨다면, 제1차 세계대전의 그것처럼 프랑스와 독일은 서로 지지부진하게 싸우다 둘 다 지칠 것이라 생각했다. 이때 소련이 이 둘 모두를 제압하겠다는 것이 스탈린의 복심이었다. 실제로 그 생각을 실천에 옮기기 위해 소련군은 현대화 작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그런데 프랑스가 단 6주 만에 독일에 무릎 꿇으면서 스탈린의 계획이 어그러진 것이다. 이제 유럽에서 스탈린과 소련을 지켜줄 수 있는 건 ‘독소불가침 조약’이라는 종이 한 장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과의 충돌은 최악의 선택이었다.

 

물론, 위기도 있었다. 미국의 참전 이후 루즈벨트는 소련에게 일소중립조약의 파기를 요구했다. 당시 미국은 소련의 생명줄이었다. 1941년 11월부터 미국은 무기 대여법을 통해 100억 달러 이상의 무기와 탄약, 식량, 군화, 트럭 등을 지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탈린은 좀처럼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스탈린의 줄타기 외교는 그때까지는 아직 ‘일본’이 쓸모가 있다는 쪽에 기울어 있었다. 덕분에 일본도 상당한 이득을 봤다. 태평양 전쟁 기간 내내 일본은 소련으로부터 4천만 톤의 석탄, 1억 4천만 톤의 목재, 5천만 톤의 철, 1천만 톤의 어류와 금을 공급받았다.

 

소련은 미국의 도움을 받아, 독일과의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그 사이 소련은 미국과 싸우는 일본을 도왔던 것이다.

 

이것이 국제정치의 본질이다.

 






1부 

[러일전쟁]


2부

드레드노트의 탄생

1차 세계대전, 뒤바뀐 국제정치의 주도권

일본의 데모크라시(デモクラシー)

최악의 대통령, 최고의 조약을 성사시키다

각자의 계산1

8년 의 회, 던 축 

일본은 어떻게 실패했나2

만주국, 어떻게 탄생했나



외전

군사 역사상 가장 멍청한 짓

2차대전의 불씨

그리고, 히틀러

실패한 외교, 히틀러를 완성시키다

국제정치의 본질



3부

태평양 전쟁의 씨앗1

태평양 전쟁의 씨앗2

도조 히데키, 그리고 또 하나의 괴물

일본을 늪에 빠트린 4명의 '미친놈'

대륙의 각성완료, 다급해진 일본

대동아(大東亞)의 환상에 눈 먼 일본

일본, 건드리지 말아야 할 걸 건드렸다 1

일본, 건드리지 말아야 할 걸 건드렸다 2





 *참고자료

1. 전쟁국가 일본/ 살림출판사/ 이성환

2. 호호당 선생의 ‘프리스타일’

3. 세계전쟁사/ 육군사관학교 전사학과/ 황금알

4. 러일전쟁과 을사보호조약/ 이북스펍/ 이윤섭

5. 조선역사 바로잡기/ 가람기획/ 이상태

6. 다시 쓰는 한국근대사/ 평단문화사/ 이윤섭

7. 대본영의 참모들/ 나남/ 위텐런 지음, 박윤식 옮김

8. 나모위키

9. 쇼와 16년 여름의 패전/ 추수밭/ 이노세 나오키 지음

10. 『중일 전쟁』 용, 사무라이를 꺾다/ 미지북스/ 권성욱 지음

11. 나는 일본군, 인민군, 국군이었다 / 서해문집/ 김효순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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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더가 디비주는 전쟁으로 보는 국제정치


조약, 테이블 위의 전쟁

러시아 vs 일본 한반도에서 만나다





펜더


편집: 딴지일보 coco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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