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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한 편 이야기하려 한다. 작가 장정일은 영화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을 그 영화를 얼마나 사랑하게 되었는지 고백하는 작업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 글은 사랑 고백이 아니다. 영화의 가치에 대해 말하려는 것도 아니다. 이 영화는 당신의 눈과 귀를 즐겁게 자극하지도 않는다. 화려한 영상과 이야기로 상상의 세계로 인도하기는커녕, 평범해도 너무 평범한 영화다.


얼마나 평범하느냐 하면, 당신의 일상만큼 평범하다. 아침에 일어나 학교나 직장으로 향하는 당신의 발걸음과 같다. 만원 버스나 지하철에서 흔들리는 몸의 균형 잡으려 하는 것처럼 지극히 일상적이고 지극히 평범한 이야기다. 하루하루가 당신의 인내심에 도전하는 날이 찾아듯이, 당신을 깨우고 재우는 해가 동에서 뜨고 서에서 지듯이, 낮은 곳으로 흐르는 물처럼, 바람이 구름으로부터 불어오는 것처럼, 당신이 들이쉬고 내뱉는 공기처럼, 그리고 당신의 아버지 어머니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이 글은 그 평범한 영화 한 편을 같이 보자는 글이다. 당신과 친해지고 싶어 보내는 초대장과 같다. 주인공 스피벳이 살아가는 미국 서부 몬타나의 코페탑목장의 한 헛간으로 당신을 초대할 것이다. 이 영화는 <더 영 앤드 프로디지어스, 티 에스 스피벳(THE YOUNG AND PRODIGIOUS, T.S SPIVET)>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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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충 다리를 그릴 때는 몇 개가 있는지 보지 말고 정확한 간격을 봐야 해. 그래 정확한 간격 말이야. 적당한 간격은 마음속의 균과 같아서 우린 그것과 싸워야 해”.


 

자연을 과학으로 새롭게 재구성한 공간에서 우리는 살아간다. 하지만 가족은 과학이 아니라 마음으로 구성하는 공간이다. 영화는 가족이라는 공간에서 어떻게 공간과 간격을 가져야 하는지에 대해 성찰한다.

 

형 레스터는 총 쏘는 것을 재미있어하고 주인공인 동생 스피벳은 과학적인 분석을 좋아한다. 동생은 형과 함께 즐기고 대화할 수 있는 공통 관심사를 만들기 위해 헛간에서 총기 음파 녹음을 하던 중 오발 사고로 형을 잃는다.


그 사고가 일어난 헛간이 당신을 초대하려는 장소다. 위험하고도 은밀한 이곳에서 커다란 의자에 몸을 맡기고 스피벳의 눈에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우리는 어떻게 보이는지 함께 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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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누추하지만, 어서오세요

 

대화는 시소를 타는 것처럼 한 번은 올라가고 한 번은 내려가야 하지만, 높낮이를 제대로 찾지 못하는 사람들은 서로 다투기도 한다. 올라간 만큼 내려갈 줄도 알아야 하는데 사람이 어디 그러한가? 높이다 보면 한없이 높이고 싶은 것이다. 대화가 독백이 되고 주장이 되면 다툼이 일어나고, 상처를 주고받기도 한다. 하지만 걱정 말자. 나와 당신이 상처를 받을 일은 없다. 우리는 그저 형일 잃은 상처만큼 가족과 간격이 멀어진 스피벳을 따라 여행을 하면 된다. 말을 하는 건 오로지 주인공 스피벳이다.



공간의 상실

 

전형적인 서부 사나이 아버지 테컴쉐 일라이자 스피벳, 곤충학자인 어머니 클레어, 미스 USA를 꿈꾸는 시골 소녀 누나 그레이시, 아빠를 닮은 이란성 쌍둥이 형 레이튼(총기 사고로 죽은), 엄마를 닮아 호기심 많은 주인공 스패로우 스피벳의 이야기는 여러 공간을 보여주면서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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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서부의 초원과 같은 아버지의 완고한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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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충으로 빽빽하게 들어 차 비집고 들어갈 틈 없는 어머니의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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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다스럽고 은밀한 십대 누나의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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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 레스터의 공간

 

스피벳 가족이 살고 있는 집의 방들은, 미국 서부의 초원과 같이 거칠고 완고한 아버지의 공간, 곤충으로 빽빽하게 들어 차 비집고 들어갈 틈 없는 어머니의 공간, 수다스럽고 은밀한 십대 누나의 공간, 그리고 형 레스터의 흔한 열 살짜리 꼬마의 공간, 그리고 과학에 관심이 많은 스피벳의 공간과 같이 각각 철저히 사적인 공간이다.

 

각각의 공간은 물리적 공간이지만, 그들은 자신의 공간을 심리적 공간으로 채운다. 자신의 공간이 아닌 곳은 그저 물리적 공간에 그친다. 스피벳에게 아빠와 엄마의 방은 물리적 공간이다. 스피벳 자신의 방조차 형을 잃음과 동시에 심리적 공간이 아니라 물리적 공간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감독은 어린 나이에 물리학에 관심이 많은 아이라는 설정을 했을 것이다.

 

당신의 공간은 어떤 공간인지 모르겠다. 단지 잠을 자고 밥을 먹는 물리적 공간인지, 마음의 위안을 얻을 수 있는 공간인지. 어쩌면 먹고 쉬는 만큼 위안을 얻는 공간인지도 모르겠다. 누군가와 마음을 나누며 함께 할 수 있는 공간이면 더 좋으리라. 마음을 나눌 수 있으려면 스피벳의 엄마가 말하는 정확한 간격을 알아야 한다. 다름을 인정하고 차이를 확인하면서 말이다. 물리적이거나 심리적 간격이 어느 정도인지 정확히 알아야 좁히거나 멀리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당신이 나와 함께 있는 이 허름한 헛간은 물리적 공간이면서 당신과 마음을 나누고 싶은 심리적 공간이다. 일상의 고단함을 이야기하고 변해가는 세상에 대해서도 이야기 할 수 있는 곳, 심지어 자신의 어리석은 행동이나 실수도 이야기해도 웃을 수 있는 그런 곳이다. 당신의 실수는 허물이 될 수 없다. 나 또한 당신처럼 평범하게 실수를 저지르며 살아간다. 서로의 어리석음을 웃음으로 나눌 수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 몰랐거나 무심히 지나친 우리의 모습을 스피벳의 눈을 통해서 보자는 거다.

 

지금, 당신과 내가 살아가던 공간이 어떤 공간이었는지 바라보자. 내 방은 너무 작고, 요즘엔 덥고 습도가 높아 있기 싫다. 그런 곳에 심리적 위안을 얻기 위한 것은 큰 물건보다 작은 책이 가장 효율적이다. 책들을 다 보고 나니 더 이상 채워 줄 수 없는 책 보관 창고가 됐다. 이젠 그저 보다 빠르게 피로를 풀고 밥을 먹을 수 있는 효율적인 공간이 됐다. 다른 사람들보다 빨리 피로를 풀고 에너지를 채워 생산의 수단이 되게 하는 효율적인 공간이 돼버렸다. 


스피벳의 물리적 공간이 자신의 방이라면 형과의 유대감을 형성하기 위해 함께 했던 헛간은 심리적 공간이다. 하지만 형의 죽음으로 그 공간은 폐쇄되었다. 물리적 공간이 주어졌다고 해서 자신의 방이 될 수 없었던 거다.

 

사적 공간이 허용되는 집에서 스피벳은 가족과의 간격을 알아가게 된다. 타인의 공간에 자신이 침범했을 때에는 공감이라는 것을 통해 그 사람을 이해하는 자세를 필요로 한다. 스피벳이 아버지의 방에 들어가 초원에서 말 달리는 카우보이를 상상하면서 아버지의 생각을 이해하려는 것처럼 타인의 공간을 탐험한다. 그것이 스피벳 가족이 살아가는 집의 의미다.

 


멀어진 간격

 

형의 죽음으로 스피벳은 집을 잃었다. 집은 물리적으로 재건축한다. 스피벳이 스미소니언 자연사 박물관에 출품한 자석으로 만든 영구운동장치가 그것이다. 그 장치가 베어드상을 수상하게 됐다는 연락을 받는다. 자신이 만들어낸 공간과 시간이 완성된 것이다. 이제 스피벳이 있어야 할 공간은 미국 서부의 몬타나가 아니라 워싱턴 DC의 스미소니언 자연사 박물관이다. 전화를 건 부소장의 책상에는 의수가 자연사라는 말을 비웃는 것처럼 놓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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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벳이 동쪽으로 가는 까닭은

 

몬타나에서 워싱턴으로 떠나기 망설이던 전날, 저녁 식사자리에서 엄마는 자신의 곤충 채집 여행에 함께하자고 제안하지만 스피벳이 엄마와 함께하고자 하던 공간은 집 안에서의 공간이었다. 이 집에서 자신의 공간은 상실된 것이다.



여행준비물 : 속옷 여덟 벌, 육분의 2개, 빨간 스웨터 세 벌, 온도계, 습도계, 기압계, 망원경, 헤드램프, 빨간색 노트와 보라색 노트, 줄자, 각종 필기구, 수건 12장, 건포도 한 통, 당근 스틱 11개, 호신술 교범 한 권, 참새 표본, 쌍안경, 멀티툴, 딱다구리, 테디베어.



열 살 스피벳이 준비한 것들은 흡사 사회 초년생의 준비물과 같다. 방향을 잃지 않아야 하며 자신을 지킬 줄도 알아야 한다. 먹고 살아갈 지식과 기술이 있어야 하고 사람을 보는 안목도 필요하다. 자신을 위로해 줄 친구가 필요하며 친구를 만들기 위해서는 해야 할 말이 있고 독백처럼 혼자 지껄여야 할 말이 있다. 준비를 마친 스피벳은 자신의 공간을 찾아 여행을 떠난다.

 


거꾸로 바라보는 세상 : 상세 는보라바 로꾸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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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소녀가 거꾸로 그네를 타고 있다. 스피벳은 그 소녀와 똑바로 눈을 맞추기 위해 자신도 거꾸로 매달린다. 다시 소녀가 몸을 일으킨다. 스피벳이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려는지 알 수 있는 장면이다. 그는 자신과 다른 방향으로 세상을 보고 있으면 그와 같은 방향으로 보려는 자세를 취한다.

 

어떤가 당신은. 스피벳처럼 상대방과 눈을 맞추려 자신이 다른 시각으로 보려고 하는지, 아니면 그가 나의 눈에 맞춰줘야 하는지. 거꾸로 매달려야 할 정도로 전혀 다른 시각에도 맞춰주는 어린 스피벳만큼 다른 누군가와 간격을 좁히려는 노력은 하고 있을까.

 

나도 스피벳처럼 그러려 하는 마음은 있지만 그렇게 하지는 못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어떤 때는 귀찮거나 어리석어 보이고, 차라리 내 시각을 강요하는 것이 편하기도 하다. 그럴 때 상대방이 불쾌해하면 오히려 상대방을 더 불쾌하게 하거나 상처를 주기도 한다.

 

딱히 이유를 찾자면, 내 편안함이 누군가 에게는 불편하게 한다 해도, 내가 편해서다. 불편함이 오래 지속되면 미워지기까지 하는데 이것을 혐오라고 한다면 혐오다. 그게 머리 속을 헤집고 다닌다거나 그걸 직접 경험한다 해도 하루를 기분 나쁘게 보내지는 않으니 말이다. 스피벳처럼 누군가와 눈을 맞춘다는 게 하기 싫은 것은 게으름에도 원인일 수 있다.

 


적당한 간격의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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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에 앉아 있는 두 사람

 

스피벳은 어느 역에서 투 클라우즈(Two clouds)라는 노인의 공간으로 들어간다. 노인이 살아가는 공간은 곡선이다. 그곳에서 살아가는 노인은 곡선 정도가 아니라 언제든 모양을 바꿀 수 있는 두 개의 구름이다. 왜곡과 변형. 스피벳은 이곳에서 대화가 어떻게 오해로 나아가는지 보여준다.

 

T.S SPIVET에서 가운데 이름이 Sparrow(참새)라는 이름을 붙인 이유는 스피벳이 태어날 때 부엌 창문에 참새가 부딪혀 죽었다 해서 이름 붙였다는 스피벳의 대답에 노인은 어머니가 부엌에서 출산을 한 것이 아니라면 그 이유가 거짓이라고 말해준다. 그러면서 노인은 참새가 추위를 피하기 위해 세상의 모든 나무들에게 자신이 겨우내 추위를 견딜 집을 지을 곳을 요청한다. 모두 다 거절했지만 소나무만이 자신의 솔잎을 허락했다. 신이 그 모습을 보고 소나무를 제외하고 모든 나무들은 겨울에 잎을 떨어뜨리게 했다는 우화를 스피벳에게 해준다.

 

스피벳은 노인의 우화를 과학으로 받아친다. 서로의 이야기를 사실과 과학으로 해석한다. 이렇게 대화는 말하는 사람의 의도대로 해석되지 않을 수 있다. 흔히 개그를 다큐로 받아들인다 하는 말처럼 서로의 이해보다는 자신의 이해가 더 중요하게 생각하잖은가.

 

스피벳이 경험하는 세상은 위선적이다. 몰래 탄 기차에 실린 여행용 차량 안에서 거짓 미소를 지어 경비원의 눈을 피한다. 스피벳이 처음 배우게 된 것은 거짓이다. 거짓된 행동과 말을 해야 하고 누군가 자신에게 그렇게 할지라도 받아들여야 하는 세상을 배운다.

 

톱니바퀴가 거짓으로 맞물려 있다 하더라도 돌아가기만 한다면 그 톱니 하나가 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거짓말을 배우고 서로가 거짓을 이야기하더라도 적당한 간격을 유지하게 되면 정확한 간격을 알게 해 주는 진실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누군가에게 기분 나쁜 말과 행위를 겪어도 “괜찮습니다”라는 말을 하면서 살아가기도 하고, 아주 작은 부당한 대우보다 더 큰 분노를 상대방에게 건네기도 한다. 어쩌랴 경쟁사회에서 먹고 살아야 하는 사람들은 위선을 배워야 하지 않은가. 그런 당신과 내가 얼마나 멀리 사람들과 간격을 유지하며 살아가고 있을까.

 

당신의 한 뼘 안에는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한 걸음 안에는 친구가 있고, 두 걸음 안에서는 직장 동료와 함께 일하고 있다. 언제든 멀리 떨어질 수 있는 사람들이 아주 멀게만 느껴지는 것은 아니다. 가족과 친구, 직장 동료보다 더 마음으로 가깝게 느껴지기도 한다. 어쨌거나 지금 당신과 나는 한 뼘 안에서 코페탑 목장의 허름한 헛간에서 스피벳의 여행을 같이 보고 있다.

 


적당해야만 하는 공간, 인간 세상

 

자신의 영역 깊숙이 침해해 온다 하더라도 모든 것을 포용하고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거짓을 말할 필요 없는 자연에서는 진실이냐 거짓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생각하고 바라보는가가 중요하다. 순수함을 잃어버린 곳에서는 상대방을 즐겁게만 하면 위선은 미덕이 된다. 서로의 거짓이 폭로되지 않는 간격만큼 위선은 허용된다.

 

위선의 공간인 여행용 차량에서 스피벳은 “내가 누군가였다면”이라는 가정을 배운다. 우리는 내가 그 입장이라면 그러지 않았을 거라는 간격 모를 말을 쉽게 내뱉는다. 그러나 이는 그리 간단치 않은 문제일지도 모른다. 물리적 위선은 세상에 쉽게 드러나고 판단되지만, 감정적-심리적 위선은 드러내기를 꺼려해 그 크기를 자신도 가늠할 수 없게 된다.

 

가족 내에서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구성원에 의해 결정된다. 하지만 세상에서는 새로운 직장이나 단체, 만나는 사람들에 따라 새롭게 결정되게 할 수 있다. 또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자신을 결정하는 것은 타인이 아니라 자신이다.

 

자신에게 쫓기다 갈비뼈를 다친 스피벳에게 보안 요원은 비난을 쏟아낸다. 아이의 건강보다 자신의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한 것에 대한 분노. 사실 아이를 그냥 보내줘도 아무 문제 없다. 그가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고 비난할 목격자도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스스로 결정한 것 같다. 따뜻한 마음으로 아이를 대하느냐보다는 일을 잘 해내는 것이 자신 스스로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만족감을 선택한 것이다. 그런 적 있다. 타인의 상처보다는 성취감을 위해 타인의 감정을 상하게 한 적 있기는 하다. 그래야 한다고 강요하는 사람이 없었지만 왜 그렇게 하는 것일까?

 

다른 사람의 감정을 상하게 하고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사람보다 일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인데 직장을 잃을지 모르는 두려움 때문인 것 같기도 하고 계급이나 나이 때문이기도 했다. 미숙하게 일 처리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때로 가혹하게 대했던 것은 그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랬던 것 같다.

 

미숙함은 내 호통이 아니라 시간이 해결해 주는데 말이다. 그로 인해서 무능력자라는 시선을 받고 싶지 않은 사회적인 압박감, 혹은 성과제의 압박감 때문일 것이다. 이건 순전히 자신이 자신을 능력 있는 사람으로 보여지고 싶은 욕구 때문이었다고 솔직히 고백하겠다. 서로의 삶의 간격이 멀어도 상관없다 생각했으니 말이다.

 


정확한 간격의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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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눠진 두 공간

 

크지도, 아름답지도 않은 트럭운전사 리키의 트럭 안이 정확한 간격의 공간이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트럭 운전사 리키를 통해서 타인의 공간에 어떻게 들어가고 나오는지 보여준다. 트럭 안은 함께하는 공간이지만 카메라는 운전사 리키만을 잡는다. 그가 스피벳의 공간에 조용히 들어가고 나오는 장면은 감독이 무엇을 이야기하려고 하는지 이 한 장면에서 모든 것을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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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 운전석의 리키가 스피벳의 공간으로 이동하고 다시 운전석으로 카메라는 이동한다

 

세심하게 배려하고, 아픔을 주의 깊게 바라보며, 휴식을 방해하지 않으면서 도움을 줄 때 아무도 모르게 들어갔다 나온다. 그의 행동은 침범이 아니라 참여다. 침범이 되지 않게 하는 것이 법이다. 하지만 법 이전에 침범과 참여를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트럭운전사 리키의 모자를 주의 깊게 본다면 “Fucking law”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 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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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도 법이 엿 같아!

 

자신의 영역을 쉬이 내어주고 들어오게 하고, 아주 짧은 인연이라도 사진을 찍어 소중히 기억하려는 트럭 운전사는 스피벳의 영역에 침범도 아니고 관여도 안 한다. 갈비뼈가 부러진 것을 알고 병원에 가기를 권하지만 거절하는 스피벳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원하는 대로 박물관까지 데려다준다. 정확히 알아야 어떻게 얼마만큼 다른 사람의 공간으로 어떻게 들어갈 수 있는지 알고 있는 것 같다.

 

심리적인 거리, 정확한 간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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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헌(비싼) 기하학적 건물들

 

결국 스피벳은 기하학적 효율성으로 세워진 빌딩으로 가득한 워싱턴에 도착한다. 스미소니언 박물관에서 부소장과 만나게 된 그는 고아라고 거짓말을 한다. 정신적 고아이기는 하다. 너무나도 뻔하게 박물관 부소장은 아이를 돈벌이와 유명세를 위해 이용한다.

 

토크쇼에 출연하게 된 스피벳에게 진행자는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의견이 제대로 시청자에게 전달되지 않을 정도에서도 발언을 멈추게 한다. 진행자와 시청자는 아이의 의견 따위는 처음부터 관심이 없다는 거다. 상품성을 위해서는 진실을 왜곡한다.

 

스피벳의 엄마 클레어가 토크쇼에 나타난다. 아들이 고아가 아님을 밝힌다. 그리고 토크쇼 진행자가 스피벳의 말을 자르는 것을 비난한다. 아이의 말일지라도, 정확한 표현이 아닐지라도, 원하는 만큼 말을 하게 해 준다. 가족 간의 간격은 물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다 하더라도 심리적으로 얼마나 가까웠는지 스피벳에게 알게 해주면서 영화는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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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벳 가족

 

정확한 간격, 물리적이 아니라 심리적이라서 정확한 측정이 불가능하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말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럴만한 사람이기에 그런 것은 아닐까? 처음부터 그럴 정도의 간격이었던 것은 아닐까 싶다.

 

나와 당신, 그리고 사람들은 얼마만큼의 간격이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아주 멀리 있는 은하계 생명체로 생각할 수도 있고 가족이나 친구와 같이 생각할 수도 있다. 그 간격을 좁힐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은 대화다. 무엇을 생각하고 원하는지 알기 위해서 우리는 대화를 해야 한다.

 

책을 읽는다는 것도 누군가의 말을 들어주는 것과 같다. 사후세계가 존재하는지 알 수 없지만, 책을 통해서 죽은 사람의 말도 들을 수 있다. 그럼에도 같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말은 쉬이 들으려 하지 않는다. 세상의 많은 문제들의 출발점이 여기가 아닐까. 그래서 우리는 다음 세대인 아이들에 책을 읽히면서 누군가의 말을 귀담아들을 수 있는 준비를 해주는 것은 아닌가. 그 말이 재미가 있건 없건 간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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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별로 재미없었나? 액션 영화도 아니고 지고지순한 사랑 이야기도 아니다. 재미난 판타지 영화도 아니다. 그래서 이 영화를 꼭 보아야 할 영화라고는 하지 않겠다. 하지만 대화가 없는 이 세상이 전쟁, 공포, 판타지 영화 같은 세상보다는 더 아름답지 않은가?

 

당신과 함께 한 편의 영화를 같이 본 것이 즐겁다. 스피벳을 통해서 당신에게 하고 싶은 말을 했다면 이제 나도 당신의 말을 들어 줄 차례인 것 같다. 가족이나 친구라는 것이 서로의 말을 지근 거리에서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이제 당신과 친구가 되고 싶다.






꼭그래야하나?


편집: 딴지일보 coco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