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06. 18. 화요일
정치부장 물뚝심송
열 안 받아?
잘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로 열이 받아서 식식대고 있는 사람은 나 혼자는 아닐 거잖아. 그런데 왜 이렇게 세상이 조용하지? 난 가끔 내가 머리가 이상해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야.
불과 반 년 전에 치러진 대선에서 국정원이 적극적으로, 조직적으로 선거에 개입을 했다는 것이 검찰의 수사 결과 사실로 밝혀졌어. 그런데 아무도 책임을 지려고 들지를 않아. 책임을 지기는커녕 재발을 막기 위한 어떤 조치를 하는 시늉도 안 해. 이게 정상적인 사회인가?
심지어 지난 대선에서 야당 후보였던 문재인 의원 조차도 이게 박근혜 대통령이 책임질 문제가 아니라는군. 아니 국가 최고의 권력을 가진 정보기관이 조직적으로 선거에 개입해서 선거판을 뒤집어 놨는데, 그 선거로 당선된 사람이 책임을 안 지면 누가 책임지나? 떨어진 사람이 책임인가?
민주당은 그 와중에 당사 규모를 줄이겠다는 소리나 하고 앉아서 뭉개고 있고...
정말로 이해가 안가는 세상이야. 나만 그런 거 아니지?
공무원이 정치적 중립의 의무를 위배한다는 것, 그러니까 공직선거법을 위반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죄일까? 당연히 능지처참에 처하고 가산을 몰수하고 삼족을 멸할 죄는 아니지. 하지만 그리 오래된 일도 아니야. 겨우 십 년 전에 비슷한 사례가 있었다니까.
돌아가신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3년도에 '당(자신이 속한)이 선거에 이길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돕고 싶다'라는 말 한 마디 덕분에 선거법 위반의 혐의가 있다는 명분 하에 국회에서 탄핵이 의결되어 버렸어.
누가 국회의 다수당이거나, 당시 민주당이 노무현에 대해 어떤 심정을 가지고 있었거나 그런 것들은 다 세부적인 얘기일 뿐이야. 핵심은 현직 대통령이 선거법에 위배될지도 모르는 언행을 했다는 것뿐이야. 그것 하나만으로도 대통령도 탄핵될 수 있는 거야. 억울하긴 하지만 그 말이 맞는 거라고. 절차적인 명분이 되는 거라고.
그만큼 공무원의 정치 중립 의무는 심각한 거야. 왜냐면 이 공무원들이 국가 시스템을 움직이는 사람들인데, 그들이 나서서 특정 정치 세력이 선거에서 이기도록 만든다면 공무원이 지배하는 세상이 올 거잖아. 이러면 곤란하지. 우리 사회가 그런 수준은 아닌 거잖아. 그래서 우리 사회에는 최소한도의 합의 사항으로 '공무원의 정치 중립 의무'를 각종 법에 명시해 둔 거라고. 이 모든 합의를 다 우습게 보는 거야, 지금. 우리 사회가 무슨 법도 없고 말도 안 통하는 깡패국가야?
아니잖아. 이렇게 조용히 넘어가서는 안될 일이라고.
그래, 좋아.
그저 원세훈 전 국정원장이 그냥 당시 이명박 정부에 대한 충성심이 지나치게 높아서, 박근혜 후보가 당선되지 않으면 빨갱이 세상이 올 것 같아서 자기가 알아서 부하들 시켜 박근혜 후보를 좀 도운 거라고 치자. 그러니 원세훈 하나 처벌하고 '다시는 이러지 마라~' 하는 사회적 경고를 날리면 문제가 다 해결될 수도 있겠지.
국정원이 선거에 개입했고, 그게 밝혀져서 처벌을 받았다. 이런 상황이라면 나도 뭐 할 말은 없어. 선거 결과가 뒤집힌 거 아니냐고?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겠지. 역사에 가정이라는 게 어디 있어. 맘 같아서야, 아니 내 맘만이 아니라 세상의 상식으로도 국정원이 선거에 개입한 사실 하나만 드러나면 선거 무효 되고 재선거 치르고 그래야 정상이긴 하지만, 이미 지난 일이라고 치자. 또 우리 사회가 미국이나 유럽같이 그렇게 진보한 민주국가는 아니라는 점도 고려해주자. 진짜 엄청 양보한다.
우리가 놓치고 있는 더욱 심각한 문제가 하나 있어.
국정원이 그 짓거리 하던 중에 걸린 거야. 이게 오히려 선거 다 끝나고 한참 지나서 걸렸으면 모르겠는데, 선거도 치르기 전에, 선거 운동 기간 중에 민주당에게 걸려 버렸어. 하기사 무슨 외국인들 왔을 때 호텔방에서 USB 훔치다가도 걸릴 만큼 어리버리한 놈들이니 안 걸리는 게 더 이상하겠지.
걸리니까 당장 난리가 났겠지. 내일 모레 선거인데 그 며칠을 못 견디고 걸려 버렸으니 박근혜 측이 선거에 질 판이 된 거잖아.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나선 사람이 누구야. 바로 김용판이잖아. 국정원 출신이자, 당시 서울경찰청장이던 김용판 말야. 이 김용판을 서울경찰청장이라는 막강한 보직에 꽂아 넣은 과정도 수상하더만. 원래 내정되었던 인물에게 청와대에서 축하 인사까지 해 놓고서도 막판에 김용판으로 바꿔버려서 경찰 내부에서도 난리가 났었다고 그러네.
이렇게 써먹으려고 미리 꽂아 넣은 건지, 무리하게 자신을 발탁해준 인사에 대한 보은이었던지 그건 모르겠어. 하여간 김용판은 이 사건을 자신이 완전히 덮어 버리기로 맘을 먹었던 것 같아. 그래서 사이버 수사대 분석관들이 국정원이 개입했던 흔적들을 대량으로 발견하고 환호를 지르고, 고기 사달라고 그러고 있던 것을 묵살해 버리고, '우리는 증거를 찾지 못했어요' 라고 대선 3일 전에 발표하게 된 거잖아.
그런데 이 과정이 수상해. 난 여기에 가장 중요한 핵심 포인트가 숨어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김용판이 저 어처구니 없는 수사 중간 결과를 발표하는 시점이 이상하다고. 그날 밤중에 뭐가 있었나.박근혜-문재인 간에 대선 후보자 티비 토론회가 있었잖아. 이 토론회에서 나온 얘기들 다 기억할 거야. 박근혜는 문재인을 맹렬하게 비난했어. 아무런 증거도 없이 젊은 여성을 오피스텔에 감금하고 부모도 못 만나게 하고, 인권 변호사 출신이라는 분이 왜 인권을 침해하냐고. 문재인은 그저 어물쩡하게 답을 했었다고. 현재 사법기관이 수사중이니 그 결과를 기다려 보자고.
그런데 그 결과가 바로 토론회가 끝나자 마자 나왔잖아. 엄청난 숫자의 국민들, 유권자들이 코앞으로 다가온 대선에서 누구를 찍어야 되냐고 귀 쫑긋 세우고 티비 토론을 봤는데, 국정원이 선거에 개입했네, 그게 아니라 민주당이 선거에 이기려고 죄 없는 젊은 여성을 집에 가두고 괴롭혔네, 이러고 싸우고 있는 거야. 도대체 누구 말이 맞는 거야? 하고 갸우뚱 거리고 있는데, 바로 토론 방송 끝나자 마자 경찰이 발표를 하네.
"아무 증거가 없네요. "
씨바... 이게 뭐야, 이게... 문재인은 완전히 그 몇 분 사이에 구라쟁이 개새끼 되어 버린 거고, 박근혜는 이름모를 한 젊은 여성의 인권도 소중하게 생각하는 자애로운 어머니가 된 거고, 정권 탈취에만 혈안이 되어있는 민주당을 준엄하게 꾸짖은 엄한 지도자가 되어 버린 거잖아. 이게 바로 선거 3일 앞두고 벌어진 일이라고. 엄청난 숫자의 국민들이 지켜보는 코앞에서 말이지.
이 환상적인 시나리오가 어떻게 가동된 걸까?
새누리당은 서울경찰청장 김용판이 이렇게 '증거 못 찾았어요, 증거 없어요' 라는 발표를 할 것이라는 점을 사전에 알고 있었어. 사전에 알고 있지 못했다면, 당장에 증거가 쏟아져 나오고 있는 상황에서 이런 과감한 발언을 박근혜에게 하라고 시킬 수가 있었겠어? 확실하게 알고 있었던 거야.
심지어 박근혜 캠프에서는 당일 대낮부터 경찰이 어떻게 발표할 것인지 알고 있다는 냄새를 솔솔 풍기고 있었어. 요즘 얘기 나오는 권영세 뭐 이런 사람들이 말이지. 캠프가 알면 누가 안다? 당연히 후보가 알지. 박근혜 후보는 김용판이 자기 쉴드를 쳐줄 것을 미리 알았어. 알았으니까 토론장에서 그렇게 자신있게 문재인을 몰아부친 거겠지.
이게 뭘 말하는 걸까?
검찰 조사 결과를 보면, 분명히 서울경찰청 산하 사이버 수사대 분석관들은 국정원을 잡을 정도로 엄청난 증거들을 왕창 잡았다고 환호를 했어. 이삼일 전부터 말야. 그러면 당연히 경찰은 그 증거를 발표해야 되는 거잖아. 그런데 이게 정 반대로 발표가 나도록 누군가 만들었다는 거야.
김용판이 혼자 했다고? 순번도 안된 자기를 경찰청장이라는 막중한 자리에 뽑아줘서? 그렇게 자리 좋아하는 사람이 대선 끝나자 마자 명퇴를 해? 명퇴하고 대구에 가서 금뱃지 입문자들이 하는 출판 기념회 하고 다닌다며.
뭐 혼자 했다고 치자. 아무도 안 시켰다고 치자. 그 어떤 권력자도, 다음 번 총선에 너 대구에 공천 한 자리 꽂아 줄께, 하는 약속을 안했다고 치자.
최소한 박근혜는 그날 대선 토론회에 임하기 이전에, 토론방송 나가자 마자 서울경찰청장 김용판이 증거 못 찾았다고 발표할 것을 미리 알았다는 거야. 그걸 알면 증거가 왕창 쏟아져 나왔다는 사실도 당연히 알았겠지. 김용판이 그랬을 거 아냐...
"증거가 왕창 쏟아져 나왔지만, 대선도 앞두고 있으니 그냥 제가 아무 증거도 못 찾았다고 브리핑 한번 쏘겠습니다. (그 대가로… 대구.. 그거.. 아시죠?)"
이랬을 거 아닌가 말야. 정리해 보자. 내가 주장하는 가장 큰 문제점은 바로 이거야.
국정원이 조직적으로 선거에 개입을 했어. 이게 누가 시킨 건지 MB 꼬붕 원세훈이 자발적으로 한 건지 몰라. 하긴 했어. 그러다가 민주당에 걸렸어. 그래서 경찰이 수사를 했어. 수사를 하니까 증거가 왕창 나왔어.
그런데 바로 이 부분에서 조사를 담당하지도 않았던 서울경찰청장이 수서경찰서 수사과장을 물 먹이고 증거를 숨겨. 숨긴 것 뿐 아니라, 대선 후보자 토론 방송 끝나는 타이밍을 노려 증거가 없다고 발표를 해. 이거 심각한 범죄야. 지금 김용판이 기소당한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야. 그리고...
김용판이 그런 범죄를 기획하고 있었다는 것을, 사전에 박근혜가 알고 있었다.
이게 제일 문제야. 그런 범죄를 저지르려고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 그게 자신의 당선에 도움이 될 일이라는 것을 알고, 묵인하는 정도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동조해서 자신도 토론회에 나가 이 준비된 범죄를 이용한 주장을 막 쏟아낸 거야. 그걸로 정치적인 이익을 얻었고, 그 결과 당선이 된 거야.
박근혜가 지난 선거에 대해 책임질 일이 아니라고?
왜?
자신의 당선을 위해 현직 국정원장이 수작을 부리던 것도 알고 묵인을 했고, 그게 걸려서 난리가 났는데 서울경찰청장이 자신의 직권을 남용해서 거짓말로 국민들을 속이려고 한다는 사실을 알고, 동조하고, 그걸 이용해 먹고, 그 결과 당선된 사람인데 왜 책임을 안져? 당연히 책임을 져야지!
나 지난 번에 이거 관련 글 쓰면서 '이명박 나오라 그래~'하고 소릴 질렀는데 끝내 안 나오더라고. 나오기는커녕 거제도 가서 골프치고 낚시하고 회 먹고 잘 놀러 다니더만.
원세훈이 국정원을 일개 선거운동 조직으로 활용한 거? 그거 아무리 살펴봐도 이명박 책임이지 박근혜 책임은 아니야. 그거 맞어. 그래서 이명박 나오라 그랬어.
그런데 이게 검찰 수사 결과 발표를 보니까...
원세훈은 몰라도 김용판은 박근혜 책임이야. 최소한 김용판이 구라 발표 하기 몇 시간 전에 박근혜는 이 기획된 범죄를 사전에 인지했었고, 자신의 선거에 이용해 먹은 거야.
이 정도면 국정원 시켜 선거에 개입한 이명박보다, 김용판 이용해 거짓말로 선거 자체를 이겨 먹은 박근혜 책임이 더 커.
자 이제... 김용판이 그런 짓을 할 줄은 나도 미처 몰랐다고 주장 해 보시지.
주중 대사로 도망가 있는 권영세 불러다가 '이 모든 것이 네가 김용판하고 짜고 꾸민 일이라고 발표를 해라'고 시켜 보시지. 외교에 아무런 경험도 없는 권영세를 왜 주중대사로 보냈는지도 좀 설명해 보시고.
이거 왜 이래, 선수들끼리. 원칙과 신뢰의 살아있는 현신, 박근혜는 도대체 어디로 간거야?
아니면 애당초 그런 사람은 없었던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