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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노예제도는 악명이 높다. 수많은 시대에 수많은 나라에서 노예제도를 유지했지만 미국처럼 악랄한 노예제도를 유지한 나라는 찾기 힘들다. 미국은 공식적으로 흑인을 인간이 아니라 재산(property)으로 분류했다. 노예는 그들에게는 물건이고 가축이었으므로 당연히 인권이란 존재하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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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는 재산을 소유할 수 없고, 법적인 결혼을 할 수 없고, 주인의 허락 없이 농장 밖으로 나갈 수 없고, 총기를 소지할 수 없었다. 그들은 글을 배워서도 안 되고, 법정에서 백인에게 불리한 증언을 할 수도 없었다. 짐승의 말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노예의 주인이 노예를 살해하는 경우에는 자기 재산을 파기한 것이니 죄가 성립되지 않지만, 노예가 주인의 뜻에 저항하거나 주인에게 폭행을 가하거나 주인을 살해하거나 반란을 일으키면 사형을 당했다. 반항하는 노예들의 손발을 자르거나 불에 태워 죽이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노예들은 언제든지 사고 팔렸으며, 저당을 잡히기도 하고, 빚의 변제물로 이용되었다. 노예가 결혼하고 가정을 꾸렸다 하더라도 주인의 뜻에 따라 팔리고 가정은 갈라졌다. 여자 노예는 흔히 백인 주인에게 강간을 당하고 원치 않는 임신을 하였다. 그것이 대부분 노예들의 현실이었다.


시인 휘티어(John Greenleaf Whittier)는 노예들의 이런 현실을 <작별>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갔다네, 갔다네, 팔려갔다네
축축하고 외로운 무논으로.
그곳에선 노예 채찍을 끝임 없이 휘두르고
그곳에선 해충이 물어대고
그곳에선 악마 같은 열병이
아침 이슬에 묻혀 독을 뿌려대고
그곳에선 역겨운 햇볕이
뜨겁고 안개 낀 공기 속에서 작열한다네.


갔다네, 갔다네, 팔려갔다네
버지니아의 언덕들과 강으로부터
축축하고 외로운 무논으로.
나의 빼앗긴 딸들아, 내겐 슬픔만 가득 하단다!


미국 백인들은 흑인들의 가족제도를 말살하기 위해 철저하게 분리정책을 폈다. 어떤 남자 흑인과 여자 흑인 사이에 아이가 태어나면 주인은 그 아이나 어미나 아비를 몇 십리 밖의 다른 마을에 따로따로 팔아 버리기 일쑤였다. 노예주인에게 가족이란 무서운 것이었다. 부모란 자신의 모욕을 참을 수는 있지만 자식이 능욕을 당하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존재다.


또한 노예주들은 흑인 여자노예들을 닥치는 대로 강간하고, 그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을 노예로 부리거나 팔았다. 심지어 1808년에 노예수입이 금지된 이후로는 노예사육장까지 운영했다. 신체 건장한 흑인 노예들을 닭장 같은 우리에 가두어두고 종마처럼 사육했다. 그리고 인근 농장에서 가임기의 여자 노예들을 마차에 실어오면 그 우리에 집어넣어 강제로 관계를 맺게 하고 수수료를 챙겼다. 그들은 늘 그것을 성경의 이름으로 합리화했다.


더글러스의 <인생 이야기>는 흑인 노예들이 처한 이런 상황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그의 아버지는 그의 주인이다. 백인 주인이 흑인 여자노예를 강간해서 그를 낳았다. 그가 태어나자마자 주인은 그의 어머니를 멀리 떨어진 농장에 팔아버렸다. 그의 어머니는 자식이 보고 싶어 한밤중에 몰래 빠져 나와 수십 리 길을 허우적거리며 그를 찾아와서 잠깐 얼굴을 바라보고 또 수십 리 길을 가야 했다. 그렇게 찾아온 것이 딱 두 번이었다. 그것으로 그와 어머니의 관계는 영원히 끝났으며 그는 주인집에서 노예로 성장했다. 흑인 노예들이 겪는 정체성의 혼란은 그의 말에 집약되어 있다.


‘나는 내 나이를 정확하게 알지 못하며, 그것을 적어 둔 어떤 믿을 만한 기록도 본 적이 없다. (…) 나 자신에 관한 정보의 결핍은 어린 시절부터 불행의 근원이었다. 백인 아이들은 자기 나이를 말할 수 있었다. 나는 왜 똑같은 특권을 박탈당해야 했는지 말할 수 없었다. 나는 주인에게 그것에 관해 전혀 물어볼 수 없었다. 그는 노예의 그런 질문을 모두 부적절하고 주제 넘는 것이며 마음이 들떠있는 증거로 생각했다. (…) 나의 아버지는 백인이었다. 내가 나의 혈통에 대해 들은 모든 것에 비추어 보아 그렇게 여겨졌다. 수군거리는 말로는 나의 주인이 내 아버지였다. 그러나 이런 말이 정확한지 나는 전혀 모른다. 나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흑인은 이처럼 자신의 근원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한 채 가축처럼 이리저리 팔려 다녀야 했으며, 그 가운데서 노예로서 길들여졌다. 특히 흑인 여자노예들은 백인 남성의 성적 욕구를 만족시키는 도구인 동시에 노예의 재생산을 통해 경제적 이익을 극대화하는데 이용되었다. 노예가 낳은 주인의 아이는 노예로서 노동력을 제공하거나 다른 곳에 팔려갔다. 그러다보니 자식을 노예로 만들지 않기 위해 살해하는 일까지 일어났다. 그 대표적인 예가 마가렛 가너(Margaret Garner)다.


1856년 가너라는 한 흑인 여자 노예가 오하이오 주 신시내티에서 두 살 된 딸의 목을 칼로 찔러 죽였다. 그리고 다른 아이들도 죽이고 자살하려다가 노예사냥꾼들과 보안관들에게 잡혔다. 그녀는 임신한 몸으로 가족과 다른 일행과 함께 얼어붙은 오하이오 강을 건너 남부에서 탈출했지만 불행하게도 곧 잡히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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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켄터키의 한 농장주인 존 게인즈(John Pollard Gaines)와 흑인 여자노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1849년에 같은 농장의 노예인 로버트와 결혼했으며 두 아들과 두 딸을 두었다. 그녀가 결혼한 얼마 후 그 가족은 주인의 동생인 아치볼드(Archibald)에게 농장과 함께 팔렸다. 그녀의 장남을 제외한 아이들은 모두 아치볼드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그녀는 자식들을 노예로 살게 하느니 자기 손으로 죽이는 것이 더 낫다고 주장했다.


그녀의 재판에 사람들이 장사진을 이루었다. 재판에서 변호사는 주지사의 사면을 기대해서 그녀를 살인죄로 자유주인 오하이오에서 재판받게 하려 한 반면에 검사는 그녀를 ‘도망노예송환법’에 따라 켄터키에서 재판받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그녀는 켄터키로 보내졌으며 도중에 아기가 배에서 떨어져 익사하자 오히려 기뻐했다. 노예에서 해방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그녀는 이리저리 팔려 다니다가 끝내 해방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


[노예의 탈출은 주인들에게 커다란 재산상의 손실을 초래했다. 그러므로 북부와 남부는 노예제도 문제를 두고 더 갈등이 심화되었다. 그 결과 타협안으로 찾아낸 것이 바로 1850년의 도망노예송환법(Fugitive Slave Act)이었다. 그 법은 노예가 다른 주나 준주로 도망칠 경우 주인이 그 주에까지 가서 자신의 노예를 잡아갈 권리를 인정해주었다.]


그녀의 사건은 노예제도의 야만성의 한 단면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녀가 자식을 죽이는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인간 이하의 능욕을 당하면서 살아온 자신의 삶에 따른 당연한 귀결이었다. 그녀는 살인을 통해 노예의 삶을 자식에게 대물림하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으려고 한 것이다.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짓밟히고 육체적, 정신적, 성적으로 짐승처럼 착취당하는 삶을 자식들에게 물려줄 수 없다는 그녀의 절규에 인간의 존엄성을 들먹이며 그녀의 살인을 비난한다면 오히려 민망할 따름이다.


그녀의 이야기는 토니 모리슨에 의해 <비러비드>라는 소설로 다시 태어났다. 배경은 남북전쟁이 끝난 후의 신시내티다.


“124번지는 원한을 품고 있었다. 아기의 독기로 가득 차 있었다. 그 집의 여자들은 그걸 알고 있었고 아이들도 그랬다.”


소설은 그렇게 시작된다.


세드는 가너처럼 자신과 아이들을 잡으러 온 노예사냥꾼들을 피해 죽기로 결심하고 딸을 죽이지만 체포된다. 오랜 세월이 흐른 후 죽은 딸이 비러비드라는 이름으로 환생해 그녀를 찾아온다. 비러비드는 세드에게 집요할 정도로 애착을 보이며 달라붙어 그녀로 하여금 끝없이 과거를 되새기게 한다.


어쩌면 그것은 우리가 부인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과거의 기억인지 모른다. 역사의 이면으로 묻어버리고 잊어버리고 싶은 수많은 과거의 죄악들이 거머리처럼 우리를 따라다니며 괴롭히는 것이다. 우리에게 잊지 말라고 호소하듯이 말이다. 모리슨은 그 기억을 끌어내었다. 기억이란 잊고 싶다고 잊히는 것이 아니다. 이 소설이 그것을 상기시켜준다.


남부의 많은 노예들은 인간다운 삶을 찾아 목숨을 걸고 북부로 탈출하였다. 1831년에 일어난 내트 터너의 반란 이후 북부에서 노예해방을 지지하는 단체들이 결성되고 ‘지하철도(Underground Railroad)’라는 노예의 탈출을 돕는 비밀 통로가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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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는 행상인, 국세 조사자, 지도 제작자 등으로 변장한 지하철도 요원과 접촉해 탈출할 의사가 확인되면 안내자에게 인계되었으며, 인계된 노예는 그의 도움으로 탈출했다. 주로 켄터키와 인접한 오하이오로 넘어가는 노선이 이용되었다. 지하철도의 도움을 받은 흑인 노예의 수는 1830년부터 1860년까지 연간 약 2500명 정도였다. 물론 도움 없이 혼자 힘으로 탈출하는 노예들도 있었다. 이들 지하철도 운동에 가담한 사람들 중 상당수는 북부와 남부의 자유 흑인들이었다.


미국 남부의 노예제 역사에서 노예들의 대규모 반란은 많지 않다. 그런 사실을 근거로 가끔 남부 내 옹호세력들은 남부의 노예제도가 생각만큼 잔인한 제도가 아니었으며, 자애로운 가부장적 체제로 흑인들을 교화하고 양육했다는 궤변을 늘어놓기도 한다. 그러나 남부에서 노예반란이 적었던 것은 남부의 노예체제가 얼마나 가혹했으며 흑인들을 얼마나 조직적으로 억압했는지를 반증할 뿐이다.


하워드 진은 <미국민중사>에서,


“아메리카의 흑인노예제도보다 더 나쁜 노예제도는 역사상 없었다. 이집트의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노예제도도 그 정도는 아니었다.”


라고 일갈한다. 스탠리 엘킨스(Stanley Elkins)는 미국의 노예제도에 비교할 수 있는 것은 나치의 유대인 수용소밖에 없다고 말했다. 유대인들이 아우슈비츠에서 반란이나 폭동을 일으키지 않았다고 그곳이 자비로운 곳이었다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흑인들은 가혹한 노예제도 아래서 승산 없는 폭동보다는 절도, 태업, 파업, 감독과 주인의 살해, 방화, 도주 등의 형태로 저항했다. 특히 많은 흑인들은 자유를 찾아 목숨을 걸고 북부나 멕시코로 도주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몇 차례에 걸쳐 노예반란이 모의되거나 실제로 실행되었다.


흑인들의 반란 중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사건은 1739년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스토노에서 일어난 반란이다. 20여 명의 아프리카 출신 흑인들이 일명 케이토(Cato)로 알려진 제미(Jemmy)의 주도하에 반란을 일으켜 백인들을 살해하고 화약과 총을 훔쳐 남쪽으로 도망쳤다. 그 사이 흑인들의 수는 80여 명으로 늘어났으며 그들은 자유를 외치고 깃발을 휘날리며 행진했다. 그러나 그들은 곧 민병대와 대치하게 되었으며 양쪽의 충돌로 50여 명의 흑인과 25명 가량의 백인이 사망하였다. 이 사건 이후 사우스캐롤라이나는 노예들의 집회, 교육, 이동을 제한하고, 노예에 대한 가혹한 처벌과 주인에 의한 노예의 임의 해방을 금지했으며, 일시적으로 아프리카 흑인 노예의 수입을 막았다.


1800년에는 가브리엘 프로서가, 1822년에는 덴마크 비지가 반란을 모의했지만 둘 다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하고 말았다. 버지니아 주 헨리코 카운티에서 일어난 가브리엘의 반란모의는 그 참가 인원이 1천 명에 달했다. 그들은 곤봉, 칼, 총으로 무장한 채 리치먼드로 향하던 중 뜻하지 않은 심한 폭풍우로 도로와 다리가 침수되어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었다. 더욱이 두 명의 노예의 밀고로 사전에 준비하고 있던 당국에 의해 진압되고 30여 명이 교수형을 당했다. 1822년 찰스턴 자유 흑인 덴마크는 9천 명이나 되는 추종자들을 모아 반란을 꾀했지만 역시 사전에 계획이 새나가 35명이 교수형을 당하고 말았다.


1811년 1월에는 뉴올리언스의 메이저 앤드리 농장에서 노예반란이 일어났다. 400명이 넘는 노예들이 몽둥이, 칼, 도끼로 무장하고 돌아다니며 파괴행위를 해 주인에게 부상을 입히고 그의 아들을 살해했다. 그들은 뉴올리언스로 행진했지만 소총과 대포로 무장한 연방군에 의해 진압되었으며, 66명이 현장에서 살해되고 21명이 재판을 받아 총살형을 당했다. 백인들은 사형수들을 총으로 쏘고 목을 벤 다음 미시시피 강의 여러 지점에 창으로 꽂아두어 ‘공공의 평화를 저해할 수 있는 자’들에게 무서운 경고를 보냈다.


남부 노예제도 역사상 가장 대규모의 노예반란은 1831년 8월에 버지니아 주 사우샘프턴 카운티에서 일어난 내트 터너의 반란이었다. 흑인노예들 사이에서 예언자라고 불린 터너는 노예 주인들을 죽이고 남부에서 노예제도를 폐지하려는 열망을 지니고 반란을 주도했다. 처음에는 7명이 시작했지만 참가자가 늘어나 70명에 달했다. 이들은 총과 칼과 도끼와 곤봉 등으로 무장하고 백인들의 집을 습격해 57명의 남녀노소 백인들을 살해했다. 이 반란은 민병대와 연방군에 의해 이틀 만에 진압되었으며 터너를 비롯한 주동자들 20명은 교수형을 당했다. 그리고 성난 백인들에 의해 200명에 가까운 흑인들이 채찍질과 고문을 당하고 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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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포된 후 감옥에서 그레이(Thomas R. Gray)라는 백인 변호사에게 구술한 <내트 터너의 고백>을 보면 그는 어릴 때부터 남다른 재능을 지녔다고 한다. 서너 살 때 이미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일어난 일들을 줄줄 이야기하고 책을 보자마자 읽어서 사람들을 놀라게 하며 예언자로서의 능력을 과시했다. 그는 나이가 들면서 자신이 위대한 사람이 될 운명이라는 것을 깨닫고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않고 자신을 신비스럽게 포장하는 한편 단식과 기도에 전념했다. 이따금 성령의 목소리를 들었으며 하얀 정령들과 검은 정령들이 싸우고 태양이 검어지고 하늘에 천둥이 치고 검은 피가 흐르는 환상을 보기도 했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이 사탄과 싸울 신성한 사명을 신으로부터 부여받았다고 확신했다.


그는 토요일인 1831년 8월 20일 저녁에 믿을 만한 동료들과 백인을 살해할 모의를 한다. 다음날 저녁에 그를 포함한 일곱 명이 야음을 틈타 그의 주인인 트래비스(Travis) 일가 5명을 살해, 폭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날 밤과 다음 날 낮까지 인근의 집들을 돌아다니며 백인들을 무자비하게 살해하고 예루살렘(그들이 점령하려고 한 도시의 이름이 예루살렘인 것이 기막히게 상징적이다)으로 진격하려고 했다. 그 사이 참가자는 계속 늘었다. 그러나 무장한 백인들의 공격을 받았고, 그들은 저항하였지만 결국 뿔뿔이 흩어졌다. 그는 주인 집 근처에 땅굴을 파고 6주간이나 숨어 지내다가 잡혔다. 그와 인터뷰를 한 백인 변호사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그가 자신의 최근의 행위와 의도를 이야기하는 고요하고 침착한 태도, 열광에 사로잡혔을 때의 그의 악마 같은 얼굴 표정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여전히 무력하고 순결한 피의 흔적이 있었다. 누더기를 걸치고 쇠줄에 묶인 채 그는 인간의 속성을 초월한 정신을 지니고서 감히 수갑이 채인 손을 천국을 향해 들어 올렸다. 그를 바라볼 때 내 피가 내 혈관 속에서 얼어붙었다.’


반란을 일으킨 흑인 노예들은 백인 변호사의 눈에 ‘무자비한 야만인들’, ‘악마들’로 보였다. 변호사에겐 당연할지 모르나, 그는 그들이 ‘응보의 정의의 손’에 의해 처벌받은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할 뿐, 반란의 이면에 깔린 노예제도의 진실을 통찰하진 못했다.


터너의 반란은 조기에 진압되었지만 미국 사회에 준 충격은 엄청났다. 이 반란은 남부인들을 공포로 몰아넣었고, 흑인들에 대한 감시와 통제가 더 한층 강화되었다. 백인들은 순찰대와 민병대를 강화하고 가혹한 노예법을 통과시켰을 뿐만 아니라 노예제에 대한 어떤 비판도 봉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을 계기로 노예제도 문제가 전 국민적인 이슈로 확대되었다. 1830년대에는 노예제도 문제를 두고 폐지론과 찬성론이 첨예하게 대립했다. 그런 가운데 노예제도 폐지운동은 오히려 동력을 얻어 점차 활성화되고 조직화되어갔다.


터너는 오늘날까지 미국 흑인들의 마음속에 저항의 상징으로 각인되어 있다. 또한 그는 많은 시인들과 소설가들에게 문학적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시인 로버트 헤이든은 <내트 터너의 노래(The Ballad of Nat Turner)>의 한 구절에서 터너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두려움에 떨며 외로이
나는 어둠 속에서 방황했다.
지금 제게 말씀을, 아니면 죽음을 주십시오.
죽음을, 어둠이 속삭였다.


거친 물체들이 어둠 속에서
숨을 헐떡이며 난투를 벌이고
악의 소란한 형상들이 공중에서 법석을 떨었다.
나는 두려움으로 비틀대며 기도했다.


갑작스러운 빛이 잠식해오는
어둠을 갈랐다. 빛은 황금빛 어둠.
빛은 너무나 밝아
오히려 그것은 어둠이었다.


미국의 노예제도를 다룬 또 다른 영화로는 <만딩고>가 있다. 리처드 플레이셔가 감독하고 켄 노튼이 주연을 맡은 영화다. 이 영화는 남부의 노예제도가 한 백인 가문을 파멸로 몰아넣는 과정을 여실하게 그리고 있다. 백인 주인이 아끼는 순종 노예 만딩고는 난잡한 남편의 여성 편력으로 인해 버림받은 주인 여자의 유혹으로 관계를 맺는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흑인 아이가 태어나자 아이는 비밀리에 살해되고 만딩고는 잔인하게 죽음을 당한다. 영화는 가문의 몰락이라는 비극을 향해 치닫는다.


미국 남부에서는 백인 남자들은 흑인 여자들을 아무리 강간하더라도 어떤 도덕적 문제도 되지 않았다. 그러나 백인 여자와 흑인 남자의 관계는 절대로 용납되지 않았다. 그것은 가부장제도와 그것에 바탕을 둔 노예제도를 근본에서부터 흔드는 행위였다. 사실 그런 일은 거의 일어나지도 않았다. 남성 지배사회에서 여성이 그런 일을 저지른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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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딴지일보 챙타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