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기사 추천 기사 연재 기사 마빡 리스트







전조(前兆)


헤드헌팅 업체에서 연락을 받고, 차장으로 입사한 지 두 달, 전임 팀장은 제대로 인수인계도 해주지 않고 사라진지 한 달. 재무제표(財務諸表)상으로 A업체는 동종업계의 신성(晨星)이었다. 혜성처럼 등장해 업계 판도를 뒤흔들었다. 물론 문제도 있었다. 작은 회사가 급작스럽게 부상하면 꼭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인력문제’다. 몸은 부쩍 커버렸지만, 정신이 쫓아오지 못하는 사춘기 소년의 모습이랄까?


A가 그런 회사였다. 이미 히트 상품 몇 가지로 중국 시장에서 자리를 잡았고, 홈쇼핑과 로드샵에서 착실하게 인지도를 높이고 있지만, 회사 내부 시스템은 엉망이었다. 급작스럽게 회사 규모가 커지자 마구잡이(?!)로 인력충원을 했고, 그 결과 상당수가 연줄로 회사에 들어온 낙하산이었다.


홍보, 마케팅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회사 상층부도 이해하고 있는 듯이 보였다. 당장 홍보 마케팅 예산이 그 증거다. 그러나 그 인력엔 절로 한숨이 나왔다.


tie-690084_960_720.jpg


“저 핏덩어리들 데리고 무슨 일을 하라고…”


12명의 팀원들 중 그나마 자기 몫을 하는 건 32살의 과장 1명뿐이었다. 홍보 쪽을 맡고 있는 35살의 남자 과장은 말 그대로 ‘월급 루팡’이었고, 나머지 주니어들은 외주업체와 나 사이를 연결해 주는 ‘앵무새’들이었다.


“팀장님, T에서 시안 보내왔는데요.”


딱 거기까지였다. 지금 자기가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르고, 어떻게 디렉션을 내릴 줄 모른다. 그저 대행사에서 보내온 시안을 보고 ‘전달’하는 게 일의 전부였다. 그럴 바에는 대행사를 불러서 내가 직접 디렉션을 내리는 게 더 빠를 것이다.


업무 시간 이후, 월차 낸 상황에도 이 핏덩어리들은 어버버거리며 내게 카톡을 날린다. 당장 대행사에게 어떤 지시를 내려야 할지 몰라서 계속 내게 물어보는 것이다. 이런 핏덩어리 10명이 로테이션으로 날 괴롭히고 있다.


“대행사 애들을 스카우트 해오고 싶다.”


...맞는 말이다. 대행사 애들이 일을 더 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들은 ‘갑질’에 익숙해진다. 원래 그렇다. 몇 군데 업체를 돌아 다녀봤지만 이게 수순이다. 쥐뿔 능력도 없으면서 대행사들을 쥐어짜낸다. 만약 정확히 디렉션을 내릴 수 있는 능력이나 안목이 있다면 쥐어짜도 상관없지만, 이렇게 ‘자라기만 하면’ 자기들이 하늘로부터 계시를 받은 성골인냥 거들먹거리며 인생을 낭비한다.


“씨바, 옛날처럼 밑바닥부터 기어 올라와야 하는데...”


스펙은 뛰어날지 모르지만 도무지 ‘일머리’가 없는 놈들, 게다가 배울 의지도 없는 것들을 데리고 일을 한다는 건 고역이다. 그나마 그들이 잘하는 한 가지, ‘을’ 앞에서 갑질 하는 거 하나는 기가 막히다. 몇 군데 회사를 돌아다니며 느낀 한 가지는,


“갑질은 인간 본성이다.”


라는 것이다. 똑같은 인간이지만, 원청에 보내면 갑질을 하고, 하청업체에 보내면 절로 고개를 숙이게 돼 있다. 인간은 그런 존재다.


“휴, 믿고 쓸 만한 애 딱 2명만 있으면...”


절로 한숨이 나온다. 파티션 아래에서 저것들은 뭘 하고 있을까? 대행사가 만들어 온 시안에 참조 붙여서 올리는 짓이나 하며 9시간을 때우고 있을까? 연봉은 조금 작았지만 빠릿빠릿한 애들이 있었던 전 직장이 그리웠다. 헤드헌터의 꼬드김만 없었다면 여기까지 안 왔을 터인데. 하긴 연봉이 곧 법이요 진리가 아닌가?


연봉과 복지는 꽤 좋다. 업계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갈 정도다. 졸부가 돈 쓸지 몰라 초반에 이것저것 다 사는 것과 비슷하다고 해야 할까? (그런 다음 천천히 인사관리, 재무관리 쪽에서 틀을 잡아가는 게 수순이니까. 최대한 꿀 빨 수 있을 때 꿀 빨라고, 뭐, 그렇게 사회를 배워나가는 거지)


그나마 믿을 거라면, 사장이다. 사장의 눈빛이 너무 마음에 든다. 자수성가형 사장의 특징이랄까? 야망이 있는 눈빛이다. 물론 능력도 있다. 한 달 전에 마케팅 플랜을 들고 사장 앞에서 직보를 한 적이 있다. 피티를 다 듣고 난 후, 사장은 한참을 내 피피티 자료를 더듬어 보더니, 


“OO씨 똑똑한데?”
“그러니 여기 왔겠죠?”


주변에 있었던 영업이사를 비롯한 본부장 등이 순식간에 배경이 됐다.


그리고 ‘지옥’이 펼쳐졌다. 직장생활의 금언!


“일은 하는 놈만 한다.”


팀장 직급 수당 30만 원과 300만 원짜리 법인카드 한 장을 더 받는다는 이유로 난 ‘마당쇠처럼’ 일을 했다. 마케팅 팀장이라는 직함과 달리,


“OO씨 거기 영업 쪽 한 번만 봐줘.”
“OO씨 이번에 중국 한 번 갔다 오지?”
“OO씨 상품 개발부 미팅 있는데 같이 들어오지?”


씨바, 체계가 잡혀 있지 않은 회사 안에서 만능 치트키로 쓰이기 시작했다. 점점 썩어가는 내 얼굴을 보면서 영업이사가 넌지시 충고를 한다.


“OO씨 일 좀 덜 하고 싶지? 그럼 사장 눈에 띄지 마.”


...역시 일은 하는 놈만 한다.



기습(奇襲)


“지금 그 자리에서 모두 움직이지 마세요!”


낯선 목소리! 사무실에서 들을 수 없는 높은 데시벨과 위압적인 단어. 느낌이 쎄- 하다. 여직원들은 동요하고 있고, 남자 직원들은 나름 ‘가오’잡아 보겠다고 움찔 거리며 몸을 일으키다 목소리의 주인공과 그 옆에 도열해 있는 부하들로 추정되는 이들의 눈빛에 제압당했다.


사무실 여기저기서 작은 웅성거림과 소란이 있었지만, 예의 사내들이 노려보자 금세 가라앉았다. 그들 뒤에 있는 푸른색 포장 박스가 눈에 띄었다. 둘 중 하나다.


‘검찰청? 국세청?’


천천히 명함집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목소리의 주인공에게 향했다.


“마케팅 팀장 OOO입니다. 무슨 일입니까?”
“OOO팀장이십니까? 국세청 조사 4국 XXX입니다.”


씨바. 좆됐다.


이쪽 업계에서 조사 4국은 저승사자다. 사회생활 경력이 짧거나 순진한(!?) 회사원으로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남의 나라 일이겠지만, 4국은 기업하는 입장에서는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은 존재들이다. 검찰청에 중수부가 있다면, 국세청에는 ‘조사 4국’이 있다.


ytn.jpg


4년마다 하는 정기 세무조사와 달리 조사 4국은 혐의점을 잡고 파고 들어오는 존재들이라 걸리면 십중팔구 반병신이 된다. 대한민국의 세법이란 게 기업들에게 ‘불법’을 조장하는 체계라, 털면 다 털릴 수밖에 없다(절세와 탈세의 차이를 아는가? 걸리면 탈세, 걸리지 않으면 절세라는데, 아직까지도 난 기업에서의 절세와 탈세의 차이를 모르겠다).


“돈을 벌려면, 법을 어겨야 한다.”


이게 상식인 나라가 아닌가? 얼른 인수인계를 할 때 들었던 이야기, 법무팀과의 미팅에서 들었던 이야기 몇 개가 빠르게 스쳐지나갔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걸 해야 한다.


“여러분 국세청 분들에게 최대한 협조하세요!”


최대한 우호적인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 이런 일 겪어보지 못한 저 핏덩어리들이 벌써부터 회사 망한 듯한 표정으로 울먹이는 걸 보니 한숨이 절로 나온다.


“OOO팀장님 업무자료는 어디에 있습니까?”
“PC는 저쪽에 있고, 제가 회사에 입사한 지 이제 겨우 두 달입니다. 인수인계 자료는 대부분 인사과에 있을 겁니다.”


곤혹스러운 표정이 잠깐 스쳐지나간 세무조사원은 내 PC로 가 하드를 복사하겠다고 말한다. 고개를 돌리니 이미 직원들 PC 옆에 외장 하드 하나씩이 붙어 있었다.


잠깐만, 이건 아니지. 협조는 하겠지만, 아무런 통보도 받지 못한 것 아닌가? 이때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사장이 사무실로 들어왔다.


“최대한 협조하세요.”


딱 좋은 타이밍.  법무팀, 경영지원팀, 인사팀, 재무팀 등등 회사 브레인들이 몰려있는 곳이니 11층은 탈탈 털리고 있을 것이다. 아마 사장은 11층을 정리하고, 밑으로 내려온 것일 게다. PC가 복사되고, 책상 위의 서류들이 회수될 때쯤 여기저기서 전화가 온다. 올게 왔네. 수화기를 들지 않아도 수화기 건너편의 존재가 누군지 짐작이 간다.


국세청이 훑고 지나가면, 그 다음은 기자들의 공세다.



대머리 독수리들의 습격


선배들의 소싯적 이야기를 듣다보면, 다른 건 하나도 안 부러웠지만, 딱 하나 부러운 게 있었다. 바로 ‘언론환경’이다. 1980년대만 하더라도 중앙 일간지는 겨우 25개였다. 즉, 25개만 막으면 있던 일도 없는 일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대기업이 관리하는 언론사만 5,600개이고, 언론사 등록된 애들만 2만 개다. 사람들은,


“언론사가 늘어났으니, 우리나라의 언론자유도가 더 올라갔겠지.”


라고 단순하게 생각들 하지만 그럴 리가 없다.


(국가에서 올 초 4인 이상인가? 무슨 기준으로 인터넷 언론사를 규제한다고 했던 기억이 나는데, 그때 내가 만났던 대부분의 인터넷 언론 기자들은 분노했다. 이렇게 하나둘 규제가 만들어지면 종국에 가서는 언론자유도가 떨어질 것이라는 논리였다. 그때 속으로 얼마나 비웃었는지. 기자 입장에서는 언론자유를 떠들겠지만, 그 언론자유를 먹여 살리는 게 우리 같은 ‘업체’들이 아닌가? 그 ‘업체’들이 매체 파워도 없는 군소 언론사에 왜 광고를 하고, 유가기사를 올리는 걸까? 제정신 박힌 홍보맨이라면 이런 곳에 돈 쓰지 않는다. 왜 그런 걸까? 다들 알고 있지 않을까?)


세상은 경제논리로 돌아간다. 괴짜 경제학에서 말하지 않았던가? 인간은 인센티브에 따라 움직이는 존재라고, 이미 지면광고는 갈수록 줄어드는 상황이고, TV 광고는 보합세, 유일하게 성장하고 있는 게 인터넷 광고다. 광고효과도 마찬가지다. 지면은 말할 것도 없고, TV 광고도 의문스럽다. 대부분의 언론매체들은 광고로 먹고 사는 존재들이다. 그런데, 광고 시장은 점점 더 줄어들고 있고, 광고를 원하는 언론사들은 늘어나고 있다. 이들은 어떻게 살까?


abstract-1239384_960_720.jpg


만약 포털 사이트가 없었다면 2만 개가 넘어가는 언론사 중 상당수가 정리됐을 것이다. 포털에 노출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들은 광고를 ‘뽑아낼’ 수 있게 됐다. 영향력이나 전문성 같은 건 눈꼽만큼도 없으면서 대중에게 노출된다는 이유로 광고를 뽑아낸다. 검증도 되지 않았고, 사실도 아닌 것들. ‘소설’ 한편을 쓴 다음, 그걸 가지고 협박을 한다. 그리고 광고를 가져간다. 그들은 그렇게 살아간다. 그들에게 언론자유를 말한다는 건 개발의 편자이며, 돼지 목에 진주목걸이다.


일반인들 기준으로는,


“아예 그런 협박에 넘어가지 않으면 되지 않나? 한 번 주니까 맛 들려서 그런 거 아닌가?”


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우리나라에서 가장 똑똑하고, 가장 돈 잘 버는 기업이 어딘지 아나? 삼성이다. 이 삼성의 기본적인 대외정책이 뭔지 아나?


“좋은 소리든, 나쁜 소리든 언급되지 않는 것.”


이것이 삼성의 기본적인 포지션이다. 언급 되는 것 자체가 싫은 것이다. 지금 현재 돈을 ‘잘’ 벌고 있는 회사들의 기본적인 마음가짐이 그럴 것이다. 부자 몸조심이라고 해야 할까? 잘나가는데 굳이 알려져서 적을 만들 필요도, 시샘을 받을 이유도 없다.


마케팅 홍보 쪽 대학원에선 이런 ‘사건’이 터졌을 때의 기본적인 대처를 가르쳐준다. 한국에서 이런 문제가 터졌을 경우 어떻게 해야 할까?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한국이란 나라는 너무도 버라이어티하기에 사건이 터지고 얼마 지나면 또 다른 사건이 터져, 사건으로 사건을 덮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농담 같지? 진담이다. 교과서에 그렇게 나와 있다. 나 나름 석사 타이틀 단 배운 남자다)


문제는 이런 사안이 터졌을 때의 대처인데, 실질적으로 소비자나 고객에게는 별 타격이 가지 않는데, 언론들이 들고 일어나 사건을 크게 만드는 경우다.


(법무팀이 말하는 2개의 문제는 제품 제조의 문제가 아니라 생산직 직원들과 관련된 문제고, 이미 상당부분 합의가 된 상황이었고, 세무관련 문제는 내 위치에선 자세히 알 수는 없기에 말하기가 애매하다)


산업 유통 쪽은 이런 소문이나 언론 반응에 예민할 수밖에 없다. 조사 4국에서 압수수색 들어왔다는 정보는 어지간한 이쪽 관련 업계에는 다 돌았을 터이고, 언론사들도 알고 있을 것이다. 계산기를 굴려봤다.


‘법무팀 문제는 더 확대될 상황은 아니고, 세무 쪽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른다. 회사 정책이 어떻게 되는지 확인하고 대응해야 한다.’


고개 돌려 핏덩이들을 보니 한 편으론 측은하기도, 한 편으론 부아가 치밀어 오르기도 한다. 전화기를 붙잡고 어쩔 줄 몰라 하며, 이쪽을 쳐다보는 20여 개의 눈빛들에 미간이 절로 찌푸려진다.


“이쪽도 상황파악 하는 중이라고 말해! 관계자 코멘트 딸려고 하면 1시간, 아니, 30분 뒤에 연락 달라고 말해! 그리고 대행사 몇 개지? 대행사 나한테 연락하라고 해!”


디렉션이 내려지자 그제야 환하게 웃는 월급루팡들. 말 끝남과 동시에 비서실에 연락해 사장실로 향한다.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수시로 울리는 전화, 대행사들이다.


telephone-586268_960_720.jpg


죽으란 법은 없다.


핏덩어리들은 빳빳하게 고개 쳐드는 기술 밖에 없지만, 대행사들은 나름 산전수전 공중전을 다 겪은 베테랑들이다. 이런 대행사들을 얻은 건 하늘의 덕이다. 육사를 갓 졸업한 신입 소위와 연대 행보관을 보는 느낌이랄까? 아니, 그러면 대행사들에게 너무 미안하다. 이 핏덩어리들은 육사가 아니라 3사관, 아니, 학사장교? 아니, 지금은 사라진 석사장교 같은 놈들이다. 엘리베이터 안의 쪽 유리를 바라보다 문득 30대 초반 때의 자신을 떠올려 본다.


‘그래, 나도 한 때 저랬지. 저것들이 경험이 없어서 그런 건데.’


처음 당해본 세무조사 앞에서 당황했을 그들 심정도 이해가 간다. 그래, 저것들도 2~3년 지나면 한 사람 몫을 할 거야. 그리고 지금 나한테는 꽤 괜찮은 대행사들이 붙어 있잖아?


대행사들은 이런 상황에 대한 매뉴얼이 있었다. 기자들을 어르고 달래고, 미묘하게 ‘뉘앙스’를 풍길 줄 안다.


“방침 정해질 때까지, 뭐, 방침이야 하나겠지만, 그래도 일단 확인은 해야 하니까. 그래요, 30분? 아니, 30분도 안 걸릴 거예요. 최대한 끌고요. 언론 모니터링 해주시구요. 관리하는 언론사 목록이랑 연락 온 언론사 목록 정리해서 파일 보내주세요.”


마케팅 팀장이 홍보팀 일을 한다는 것 자체가 그렇다. 대관업무야 법무팀이 맡는다 하지만, 위기관리 커뮤니케이션은 홍보 쪽 업무가 아닌가? 하긴 네 일 내 일이 어디 있나? 원래 작은 회사고 지금은 비상시국이 아닌가? 할 수 있는 걸 찾아서 해야 한다.


사장의 지시는 간단했다.


“막아.”


당연한 지시이고, 예상했던 지시다. 지금 할 수 있는 건 언론의 노출을 최대한 피하는 것이다. 아직 아무런 실체도 드러나지 않았고, 압수수색을 당한 것뿐이지 않은가? 11층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모르는 상황. 이런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막는 것뿐이다.


사장실을 나오자마자 친분이 있는 기자 서넛에게 연락을 넣었다. 이미 이쪽 상황을 알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 김기자?”
“자세한 건 더 파봐야겠는데, 들리는 소문으로는 투서가 날아갔다던데?”


이래서 부자 몸조심해야 하는 거다. 갑자기 치고 올라오니, 주변에서 시샘하는 것들이 생긴다. 11층에서 정말 과징금 두들겨 맞을만한 일이 있었는지, 회사 경영 전반에 어떤 탈법이나 불법적인 일이 있었는지는 모른다. 그냥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걸 해야 한다.


각오를 하고 사무실로 내려오는데, 연락이 왔다. 케이블 경제뉴스 채널이다. 수화기 저편의 기자는 사실을 확인하고, 자신들의 정보와 비교를 한 후 관계자 코멘트를 원했다. 사실 확인과 반론권 보장 차원의 연락이었다.


“진짜 기자네”


이쪽 업계에서 10여 년 넘게 있다 보니 목소리만 들어도 ‘감’이 온다. 상대방이 지금 진짜 ‘기사’를 쓰려고 전화를 한 건지, 아니면 기사 말고 다른 걸 원하는 지를 말이다. 어지간한 기자들은 1차 방어선인 대행사들 쪽에서 처리한다. 홍보 대행사에 다니던 시절 만난 기자들은 회사를 ‘조질’ 기세로 달려들다가도, 한 번 밥을 같이 먹고 이런저런 안면을 트면 편해진다. 기자들과 밥을 같이 먹는 행위는 정말 ‘신성한 행위’다. 홍보와 마케팅 CR(대관업무)쪽은 식사가 곧 업무인 이들이다.


말 나온 김에 김영란법 이야기를 잠깐 해야겠다. 내 오른손을 걸겠다.


6개월 안에 개정안 이야기 나온다.


기자들뿐만 아니라 강연 업체들은 어떻게 하라고? 국립대학교 교수들, 이름만 말해도 다 아는 교수들, 방송 나오는 교수들에게,


“저, 교수님 김영란법 때문에 강사료가 20만 원인데…”


라니. 강연 업체들보고 죽으란 소리다. 어지간한 교수들은 회사 내규 상 정해놓은 강연료로도 섭외가 안 돼서 ‘특별 강연료’라고 따로 책정해 모시는 게 관례다. 이런 상황에서 20만 원으로 강사를 모신다고? 유튜브에 널려있는 긍정 강사들 모아놓고 조찬 세미나 할 일 있나?


이쪽 업계, 특히나 산업 유통 쪽 기자들과의 모임은 9월 28일 이전에 다 잡아서 한 바퀴 돌리겠다고 일정 조정을 하느라 분주하다.


내게 전화를 걸어 온 기자는 나랑 아무런 인연도 없을뿐더러 뉘앙스를 보건데, 이걸 기사로 낼 생각인 것 같았다. 재빨리 계산기를 굴려봤다. 이건 100% 기사화 될 것이다. 굵직굵직한 이슈들이 넘쳐나는 마당에 연 매출 3천 억대의 작은(?!) 회사의 이야기가 얼마나 소구력이 있을까? 잘해봐야 한 꼭지, 정말 잘 되면 단신 처리다. 지금 성급하게 만나자 밥 먹자고 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누울 자리 보고 발 뻗는다.’


란 말이 있다. 언론과 친하게 지낸다는 건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밥을 먹이고, 돈을 먹일 수 있는 기자는 따로 있다. 사람들이 오해를 하는 것 중 하나가,


“돈을 주니까 받아먹는다.”


란 논리다. 아니다. 받아먹을만한 놈이 냄새를 풍기는 것이다. 기자 윤리의식으로 똘똘 뭉친 기자들에겐 역효과다.


221720_2.jpg

실제방송 장면이 아닙니다.


결국 방송은 나갔다. 관계자 입장 정리는 뒤로 미뤘다.


핏덩어리들은 다시 한 번 회사가 망한 것처럼 울먹이고 있다. 이렇게 배우며 크는 것 아니겠는가? 단신으로 나간 것이고, 뉴스 가치는 그리 크지 않았다. 경제면 한 귀퉁이에 살짝 한 발 걸친 느낌이랄까? 이럴 때는 나라에 큰일이 잔뜩 터진 게 감사하다.


“막을 수 없는 건 포기하고, 막을 수 있는 거에 집중하자!”


분위기를 다 잡는다.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어차피 결과는 아무도 모른다. 회사가 정말 크게 탈세를 한 건지, 아니면 악의적인 투서에 의해 선의의 피해를 본 건지 아무도 모른다. 그저 회사 조직에 속해 있는 사람으로서 해야 할 일을 해야 하는 상황. 무죄추정의 원칙이란 말이 괜히 나온 말이 아니지 않은가? 결과가 안 좋게 나온다면 사과하고 응분의 대가를 치르면 된다. 만약 우리가 선의의 피해를 본다면? 그건 막아야 한다.


마음은 한결 편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판단은 위에서만 하면 된다. 아래 있는 사람들은 자기 직무에 충실하면 된다. 결론이 단순하다면, 실행도 단순하다. 한 시름 덜었다고 해야 할까? 핏덩이들을 보면 못내 불안하지만, 그걸 충분히 커버해 줄 대행사들이 있다.


솔직히 말하자면, 천복(天福)이다. 대언론 담당의 대행사들이 나름 똘똘하게 사태를 처리하고 있다. 자기들이 처리하기 애매하거나 ‘비용’이 발생할 것 같은 건만 내게로 연결해줬다. 몇 군데 언론사에서 연락이 왔다. 다행히 안면을 튼 적이 있는 기자가 상당수다.


“나도 상황파악 안 된다니까. 강기자 좀 봐줘. 정말 털어서 나오면 그때 써. 나 안 말린다니까. 나도 학교 다닐 때 총학 있었잖아. 나 나름 정의감으로 뭉쳐 있었다니까.”


(씨바, 정의감은 무슨. 돈 주는 게 정의지)


“맞다. 스크린 야구장 가봤어? 정말 손맛이 다르다니까. 그래, 한 번 가자니까. 골프랑은 다르다니까.”


(강 기자가 사회인 야구 한다던 그 새끼 맞지?)


“그래 프레스 센터랑 가깝지. 여기 먹을 데 많아. 강남보다 맛집은 더 많을걸? 에이, 강남은 젊은 애들이나 왔다갔다하지. ○복? 에이, 거기까지 언제 왔다갔다 해? 여기 복집 좋은 데 있는데. 우리 나이 먹었다 그러네.”


(아, 조만간 복국에 소주 한잔 하겠구나)


“나 옮긴 지 두 달 됐잖아. 사정 한 번 봐줘. 내가 늘 말하잖아. 쓰지 말라는 게 아니라 시기랑 톤을 조절하는 거라고. 에이, 강기자 짬밥에 데스크 컨펌은 무슨...”


(그렇지 밀당이 빠지면 장사가 아니지)


“그래, 복 먹으러 와. 나도 상황파악 끝나는 대로 연락 줄게. 그래, 다음 주에 보자!”


(한 건 낙찰)


기사를 쓰지 않을 기자, 쓸 생각이 있지만 우리가 주는 광고를 받아먹는 언론사 기자들의 대부분은 거의 대행사 선에서 정리된다. 내 선에까지 연락이 온다는 건 셋 중 하나다. 기사를 쓸 의향이 있거나, 거래를 틀 의향이 있거나, 약속을 잡기 위해서다.


5시간 사이에 기사가 하나 떴고, 약속이 5개 잡혔다. 몇 개의 언론사에서 대행사의 벽을 넘어 내게로 연락이 왔지만, 대부분도 약속으로 무마됐다. 재미난 사실은 기사를 쓰겠다고 온갖 폼을 잡던 기자들도 그 마지막은 똑같은 멘트로 갈무리 된다는 것이다.


“그럼 지켜보겠습니다.”


언론계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비법의 멘트’일까? 아니면 사츠마와리 돌 때부터 전해져 내려 온 전가의 보도일까? 기사를 쓸 듯 말 듯 하면서 간을 보다가도 마지막 순간에 펜, 아니 자판을 거두는 기자들의 단골 멘트다. 아직 기사는 유효하다는 무언의 압박이기도 하면서, 자신의 자존심을 지켜주는 마법의 멘트.


‘지켜보겠습니다.’


홍보밥 12년을 먹으면서 내린 결론은,


“지켜보겠습니다. 이거 기자선배들이 후배들 모아놓고 가르친 걸 거야.”


아닌 다음에야 수 십 명의 기자들이 비슷한 억양, 비슷한 어조로 말할 리 없다. 하긴 이 상황에서 그것 말고 다른 말을 넣을 수 있을까? 생각해 보니 억울한 느낌이 살짝 든다. 지금은 압수수색을 받았을 뿐이지 아직 혐의가 나온 게 아니다. 그들도 말 그대로 ‘지켜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 말하고 나니 억울해지네.


문득 3년 차 때 사수가 해준 말이 떠오른다.


“장관은 국회의원 없으면 할 만하고, 국회의원은 기자 없으면 할 만하다. 우리는? 기자 없으면 할 만하지만, 진짜 기자가 없으면 밥숟가락 놔야지.”


이 말은 ‘말장난’이다. 사수가 말 한 ‘진짜 기자’는 입을 벌리고 돈을 쑤셔 넣어도 기사를 뱉어낼 말 그대로 ‘진짜 기자’를 의미한다. 이런 진짜 기자가 있어서 사회가 돌아간다는 의미도 되지만, 이런 진짜 기자를 상대로 클라이언트를 지켜냈다는 것 자체가 훈장이 되는 것이다. 중의적이다(다른 의미로 우리도 기자가 있기에 먹고 사는 것이다. 기자가 있기에 홍보기사도 나오고 언론매체에 광고도 하는 것이다. 공생관계다).


네거티브 한 기사, 그런데 ‘진짜’ 기사가 뜰 경우 이 기사로부터 클라이언트를 지킬 수 있는 방법은 무궁무진하게 많다.


기자가 말 그대로 ‘선비’일 경우에는 그 위를 조지면 된다. 데스크나 부장과 쇼부를 보는 거다. 몇 년 전부터는 데스크나 부장들이 알아서 이런 기사를 들고 와 쇼부를 친다. 광고주면 기사 내린다는 것이다. 아예 이빨이 안 먹히면 기사는 터치 안 할 테니 제목을 바꾸거나 사진(이미지)이라도 내려달라고 한다.


“조직을 이겨 낼 개인은 없다.”


이 말을 실감할 수 있는 곳이 이쪽 동네다. 이렇게 개별 언론사 차원에서 해결을 못 보면, 그 다음은 물타기를 하거나 밀어내기를 하면 된다. 기사가 묻히도록 다른 쪽에 유가기사나 광고집행을 하면 된다.


사수의 사수의 사수시절에는 작정하고 덤비면 기사를 막아낼 수 있다. ‘가판’이 있는 이유였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다 막아낼 수 없을 정도로 언론사가 많다. ‘기레기’가 왜 나오는지 알겠는가? 통제대신 방향을 꺾는 것이다.


기레기 말이 나와서 하는 건데, 이건 대한민국 ‘언론’의 구조적인 문제다. 내가 이쪽 바닥에서 처음 만난 사수가 신문방송학과 출신이었다. 언론고시 낭인이라고 해야 할까? 사수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대한민국 기자가 대한민국 현실의 바로미터다.”





전제


딴지에 투고하는 이 글은 순전히 ‘상상’에 의해 만들어진 이야기였음을 전제로 한다. 설마 대한민국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을 리 없으니까. 

 





다음 회에 계속...





빨간두건


편집: 딴지일보 챙타쿠

Profile
딴지일보 공식 계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