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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7. 12. 금요일

지쳐가는 카인






이제 인정할 때가 되었다. 나도 일개 사람이다. 일신에 갖출 수 있는 덕력의 종류와 수위에는 한계가 있다. 애니?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만화? 해당 분야가 지나치게 넓다. 영화? 목요일의 햄촤 님 글로 만족해라.


물론 아직 패배 인정은 하지 않았다. 이번 주에도 어김없이 원고를 쓰고 있다는 것이 그 증명이다. 어제 내 옆에 누워있었던 처자와의 알콩달콩한 빗속 데이트도, 최근 만난 경제적 대사고 때문에 초토화된 내 통장도, 모두 뒷전으로 제치고서 모니터 앞에 홀로 앉아 키보드를 빗겨 찼다. 이번 주부터의 새로운 덕질 비기닝, 시작한다.



가끔 자신이 꽤나 현실적이라서 귀신이나 유령이나 도술이나 마법 같은 단어가 나오는 글을 접하면 코웃음부터 치는 사람이 있다. 주로 나이먹은 꼰대들 중에서의 비율이 높다. 그런 분들이야 자신이 워낙에 근대화된 인간이라서 이성과 합리가 아니면 무시할 수 있겠다. 그건 개인의 자유다. 그런데 그런 사람도 꼭 [반지의 제왕]은 보러가더라.


'환상'이라는 단어에는 두 가지 뉘앙스가 있다. 환상적이어서 멋지다, 와 환상이어서 허무맹랑하다, 다. 당연히 당신이 허무맹랑 어쩌구에 가까운 사람이라면 붙잡지 않는다. 환상이 서사 장르 -소설, 만화, 영화, 게임- 의 주요한 근간 중 하나라는 걸 죽어도 이해하지 못할 테니까 말이다.


아니다. 실수다. 취소다. 사실 난 당신 같은 사람들을 위해 이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을 잠깐 잊었다. 모두 내 잘못이니 부디 그 발걸음 돌리시어 이리로 오시라. 환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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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아아, 잘못 했어요...


이번의 주제는 '환상문학'이다. 그 허무맹랑한 장르 말이다. 그리고 나는 오늘부터 3주 동안 그 '환상'이라는 것이 상당한 가치가 있으며, 가치 없음 어때 졸라 재밌다는 것을 증명하고 소개하려 한다. 참고로 여기서 문학이라는 단어는 협의 -글로 쓰여진 예술 장르- 로도 광의 -문학적 상상력이 작동하는 모든 장르- 로도 사용한다.


과거 딴지 데뷔 초창기 때, 나는 '수호전 무장 등급'이라는 졸라 덕덕스러운 글을 올린 적이 있었다. 수뇌부는 무슨 생각인지 이걸 마빡에 내걸었고, 풍겨나는 덕향(덕후 향기)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딴지로의 발길을 끊었으리라 짐작한다. 사전에서 찾아보면 수호전은 군담소설 어쩌구 하지만, 눈길이 머무르는 대목이 있다. '무협소설의 원조'라는 대목이다. 당연히 나는 무협 장르의 덕후다. 그렇다면 질문을 하겠지. 무협이 환상문학인가요?


졸라 당연한 질문은 하지 마라. 설마 무협 소설[무협지]에 등장하는, 무림인들이 장력 날려서 사람 치고 경공 펼쳐 나무 뛰어넘는 이야기가 진짜라 믿는 사람이란 말이냐. 그거 다 뻥이다. 그리고 뻥이라는 것, 허구라는 것이 바로 소설이라는 문학 장르, 그리고 소설이 낳은 영화, 만화, 게임 등의 다른 장르의 기본이다. 일단 모두 허구의 이야기, 그리고 환상문학은 그 허구의 범위를 좀 더 넓힌 것에 불과하다. 특히나 한국의 무협은 100% 환상문학이다. 왜냐고? 중국/일본과 역사적 배경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무협이라는 장르는 중국에서 태동되었고, 삼국지나 수호전과 같은 역사물에서 발원했다. 실제로 중국 역사에는 협객, 협사라 불리는 민간 무인층이 존재했고 사마천의 [사기]에도 이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챕터인 '자객열전'이 마련되어 있다. 정사의 중심에 서지 않았을 뿐 중화 사회에서 협객은 늘상 존재했다. 치안 체계가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곳에서 불의에 대적하고 나아가 국제 전투에도 참여하는 민간 무인을 가리키는 말이 협객이었다. 그리하여 하늘의 의를 대신 행한다는 '협(俠)'의 이념이 점차 생겨났다. 진시황을 암살하려던 자객 형가라던가 삼왕묘의 전설 등, 협객들의 이야기가 꽤 멋있었는지 삼국지의 명가 자손들인 조조-원소 같은 사람들도 젊어서는 협객 흉내를 내곤 했다. 삼국지의 유비는 아예 협객 출신이며 명 태조 주원장도 협객으로 시작했다. 물론 협객을 비하한다면 자경단에 조폭일 뿐이지만.


송나라쯤 되어 경제 생산 능력이 상당해지자 상업적 이권에 개입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치안이 아직 완전하지 못하니 각 지방의 협객들도 여기에 낄 수 있게 되었다. 조폭 형의 협객[유협]들은 보호료를 받거나 아예 그 업체를 소유/경영하면서 살아간다. 이권에 깊숙히 개입하는 조폭 형태의 유협들이 도시에 난립하는 한편, 협의 가치를 중시하는 협객들은 도시 외곽 산중에 모여 수양에 힘쓴다. 문파의 성립이다.


패거리가 모이면 패거리끼리 갈등하는 게 인간 역사의 법칙이다. 전자의 유협들은 사파(邪派)라고 배척받지만 도시의 상업 이권에 깊숙히 침투했다. 후자의 협객들은 정파(正派)라고 존중받으며 국가에도 봉사한다. 당연히 두 부류는 박터지게 싸운다. 그리고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자기 삶을 꾸려가는 협객들도 여전히 사회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결코 역사의 전면에 떠오르지는 않지만 면면부절 이어진다. (오늘 주제의 영향인지 자꾸 한자어를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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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문에 중국의 무협소설은 역사소설의 색채가 짙다. 일단 시대 배경 자체를, 문파가 성립한 이후 시대인 송/원/명 시대 정도로 잡는다. 여기에 복수의 서사, 성장의 서사, 음모의 서사 등을 풀어내어 이야기를 해나간다. 무협 장르를 받아들인 일본의 경우, 아주 쉽게 사무라이 문학과 결합했다. 이젠 사무라이 문학과 무협 문학을 구분할 이유가 없어졌다. 때문에 일본의 무협 역시 중국과 마찬가지로 역사소설의 하위에 위치할 때가 많다.


반면 한국은? 중국에는 협객이 있고 일본에는 사무라이가 있지만, 한국에는 그에 해당하는 무인 계층이 없었다. 한반도에 중세 국가가 들어선 이후, 체제는 꽤 안정적이었고 치안은 은근히 좋았다. 민간 무인들이 한다리 낄 자리도 없었고, 덕분에 이들은 계층이 되지 못하고 국가 시스템에 편입됐다. 국가 시스템 바깥에서 활약하는 무인이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고려 무신정권이나 백제 싸울아비 얘기할 거면 때려준다. 전자는 시스템 내의 무인 계층이고 후자는 고대 전설에 불과하다.


이 때문에 한국의 무협 소설은 필연적으로 시간/공간 배경을 다른 곳으로 잡았다. 장르의 고향, 모방해온 원조, 중국이다. 중국 무협과 똑같이 송/원/명, 그 중에서도 명나라의 시공간을 배경으로 하는 게 한국 무협의 특징이다. 이렇게 역사성이 없다 보니 순수한 환상소설로 즐기게 되어버렸다. 때문에 문학평론가 김현은 '무협은 어른을 위한 동화'[실제로는]라고 갈파했다. 역사는 거들 뿐, 거기엔 세상을 상징화하고 추상화한 표현만이 남는다.


한국 무협은 역사소설로서의 면모가 거의 없으니 이야기 그 자체에 집중할 수 있었다. 자국이 아닌 타국의 과거 공간을 사용하니 역사적 고증도 상대적으로 덜해도 되니 편하잖나. 때문에 좋은 작가가 많이 배출되었다. 그리고 좋은 문학은 언제나 작품 위주 추천보다는 작가 위주 추천이 좋은 법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국 무협 특유의 문제가 개입된다. 80년대 무협 소설의 대부흥 시기에 있었던 현상 때문이다. 대부흥이 있던 시기, 즉 중국 무협이 수입되어 대박을 치고 나서 한국 작가들의 창작 작품으로 대체되던 시기 말이다.


문제의 발단은 한국 무협소설이 소비되던 공간이 대본소였다는 점이다. 작품으로서 소비된 것이 아니라 소비재처럼 소비되었다. 출판사는 쉽게 찍고 다음 작품으로 넘어가면서 돈을 긁어모았다. 작가도 돈을 긁어모으는 건 마찬가지지만, 문제는 쉽게 소비하는 독자들이 계속해서 다음 작품을 요구했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작가들은 기네스북 수준의 다작을 해야 했다. 그리고 최고 작가들에게 일감이 몰렸고, 신인 작가들은 데뷔하기가 어려워졌다. 게다가 신인의 데뷔는 자기 이름으로 이뤄지지 않고 이미 유명해진 기성 작가들의 이름을 빌리는 '대명' 형태가 되었다.


대명이 횡행하다 보니 이게 이 사람 소설이 맞는지도 확실치 않다. 최대 피해자(혹은 수혜자)는 와룡강이다. 와룡강은 노골적인 성애 묘사를 사용하며 이름을 날렸는데, 이런 개성을 이용해 출판사에서는 글 공장에서 대강대강 카피 앤 페이스트로 찍어낸 포르노 소설을 와룡강 이름으로 유통했다. 이 때문에 와룡강의 작품 중 초기작인 [철환교], [질풍록], [금포염왕] 3종 외에는 진짜 와룡강이 쓴 게 맞냐는 논란이 따라다닌다.


이러니 80년대 전성기의 무협은 추천하고 싶어도 애매해진다. '이 사람이 80년대를 대표한다.'고 추천해도, 그의 이름만 달고 나온 작품들이 많은 판이니 말이다. 게다가 30년 전 작품들이라 복간본이 아니면 구하기도 힘들지 않나.


하지만 일단 당시 80년대의 최고 작가 넷을 꼽아보자. 혹시 헌책방이나 대여점 같은 곳에서 이 이름들이 찍힌 소설을 발견하면 뒤적뒤적거려 보라. 어쨌든 이 네 이름은 한국 무협 덕후가 되는 데 있어 기본 소양이다. 비록 그 작품을 읽어보지 못했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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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효원


졸라 천재다. 집필도 가장 빨랐고 퀄리티도 가장 높았다. 특히 비장미의 표현, 성취의 허무라는 주제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다. 아마 그가 위암과 폐결핵으로 시한부 인생을 살았다는 데에서 그 원인을 찾아볼 수 있을 거다. 게다가 대명을 거의 해주지 않아 대부분이 그의 손에서 나온 게 맞다. 독특한 문장을 사용했기에, 익숙해지면 문장만 봐도 서효원인 것을 알 수 있을 정도. 대표작 [대자객교]는 서효원 스타일의 집약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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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설록


이현세의 스토리 작가를 거쳐 현재는 환단고기 신봉자인 게임 제작자가 되었다. 화려한 문체를 선호했고 그런 문체를 통해 인물 형상화에, 특히 반항적인 인물에 능했다. 90년대에는 자기 출판사를 차려 신진작가를 육성하는 등 경영자로서의 활동을 더 많이 보였지만, 80년대의 야설록은 자기 스타일을 확고히 한 기량 절정의 작가였다. 문제는 뚜렷한 대표작을 꼽기가 애매하다. 대부분 평균 이상의 질을 보여줬지만 자신을 종합/압축할 수 있는 수준은 보여주지 못했다. 야설은 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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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


스토리를 조직해 끌고 나가는 능력이 발군이다. 특히 주인공의 시점 하나로 모든 것을 처리하는 스타일인데, 이 때문에 추리소설의 냄새가 많이 풍긴다. 그의 스타일은 데뷔작 [금검경혼]에서부터 드러나며, 이 작품은 이후 금강 스타일의 원형이 된다. 워낙 이야기를 밀도 있게 조직하는 능력이 뛰어나, 출판사에 의한 표절을 가장 적게 받았고 대명도 거의 되지 않았다. 이 사람도 야설록처럼 환단고기 신봉자인데, 그 때문에 그의 만년작 [발해의 혼]은 약간의 문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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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달


얼굴을 결코 드러내지 않은 남자, 대본소 체제의 최대 수혜자. 80년대를 대표하는 작가 4인 중에서 가장 대중적이었고 가장 말초적이다. 그만큼 사소한 설정과 스토리의 재미를 추구한 작가인데, 문장력은 약간 딸린다. 때문에 사마달은, 자기는 스토리만 짜고 문장으로 완성하는 건 다른 작가에게 맡기는 식의 분업을 자주 했다. 워낙 대명을 많이 해서 진본을 찾기도 힘들 정도다.


혹시나 그를 스타덤에 올려놓은 [절대무존]이라는 작품을 찾게 된다면, 훑어볼 만하다. 90년대 후반부터 대량생산 형태의 만화로 옮겨갔고 여전히 그런 활동을 한다. 원체 스토리만 짜는 걸 좋아했으니 스토리 작가가 어울리는 모양이다.



그런데, 생각해 봐라. 이렇게 소수의 작가들에게 작품 생산이 집중되고, 뒤이은 신진 작가들도 이들을 따라하고, 그래서 이름도 빌려주고, 그렇게 다작과 대량 생산이 이어지면, 당연히 매너리즘이 생긴다. 그것도 작가 수준의 매너리즘이 아니라 시장과 장르 전체의 매너리즘이었다. 이게 80년대 무협의 망 테크였다. 나올 건 다 나오고 이제 거기서 거기인 작품만 보이는데 어느 독자가 계속 소비해줄까.


장르 전체에 걸친 매너리즘. 점차 무협소설의 '공식'이 등장했다. 문학 용어로는 폼나게 '포뮬라'라고 써주기도 한다. 한국 무협소설의 포뮬라 중 대표적인 것이 기연(奇聯)이다. 우연히 엄청난 힘을 얻는다. 기이한 인연이라는데 그놈의 기연은 왜 작품마다 계속, 어쩔 땐 몇 번씩 얻는 건가. 절벽 동굴에서 비급을 얻거나 감옥에 오래 갇힌 옛날 고수를 만나 사사 받고 숲을 헤매다가 엄청난 힘을 주는 영약을 찾고... 기연 포뮬라뿐만 아니라 주인공의 대척점에 선 악역은 꼭 사파를 넘어서 아예 마도(魔道)의 인물이라는 선악 포뮬라나, 천하제일이 된 주인공이 손만 들면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초능력자 포뮬라나, 부귀영화를 얻은 주인공에게 삼처사첩이 붙는 난교 포뮬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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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무림제일인이 되지 않아도 난교가 가능하다는 걸 증명한 베를루스코니 이탈리아 총리.


그리하여 90년대가 되고, 한국 무협의 작가들은 80년대의 저주받을 유산인 이 포뮬라를 타파하는 것이 과제가 되었다. 때마침 김영삼 정권의 신종 업소인 도서대여점이 등장했다. 야설록은 따로 출판사를 차려 작가들을 모아, 기존의 대본소/양판소를 극복하고 일반 도서 시장으로 진입하고자 시도했다. 그 징검다리가 도서대여점 시장이었고 초중반에는 작품의 질을 꽤 끌어올리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도서대여점은 대본소의 업그레이드 판에 불과하다는 한계 때문에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괜찮은 작가들이 등장했다. 선배들이 삽질해놓은 포뮬라를 어느 정도나마 갈아엎고 무협소설을 '무협지' 수준이 되지 않게 애를 쓴 사람들이 있다. 이제서야 진짜 열분덜이 쉽게 찾아서 읽을 수 있는 작품을 쓴 사람들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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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기다리셨다. 두둥~


80년대의 1세대를 이어, 90년대의 2세대를 이끈 최초의 인물은 용대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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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대운

추천작 : [태극문], [독보건곤], [군림천하]


용대운의 특징은 이전 세대의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는 점이다. 80년대의 1세대가 해놓은 소설적인 공과 과를 전부 흡수해 재조립하여 90년대에 풀어놓아, 2세대 작가들이 등장하도록 했다. 80년대의 용대운은 신인으로서 야설록의 이름을 쓰며 몇 개의 작품을 내기는 했지만, 워낙 당대의 기준과 궤를 달리하는 탓에 큰 재미를 못 봤다. 이후 절필했다가 [태극문]으로 돌아오면서 90년대가 열렸다.


90년대의 특징은, 이전 세대의 포뮬라를 거의 부정하는 데에서 출발했다. 금강은 2세대에 대해 "'무엇을 쓰지 않을지'를 전제하고 쓰여지는 작품"이라서 한계가 있으며, 질적 수준을 높이다 보니 작품 편수가 적어져 시장의 몰락을 가져왔다고 서술했다. 몰락은 둘째 치고, 금강이 평한 '전 세대를 부정하고 극복하려는 시도'는 2세대에 대한 정확한 평이다. 그런데 용대운은 약간 다르다. 기존의 포뮬라를 그대로 사용하지만, 사용법을 달리 한다. 그래서 그는 두 세대의 가교 역할을 한다. 이런 마에스트로의 성격 덕에 그의 별칭은 '용노사'(老師)다.


그의 전성기를 열었던 [태극문]은, 현재 철저히 절판되어 구할 수 있다면 복권을 사도 된다. 만약 구한다면 꼭 소장하라. 후일 프리미엄이 붙을 것도 예상되지만, [태극문]에는 이후 등장할 무협소설의 단초들이 숨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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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용대운이 현재 북큐브에서 e북으로 연재중인 [군림천하]는 용대운 스타일의 집대성이다. 현재 27권을 넘어가는 양 덕분에라도 용대운의 모든 것이 담기고 있다. 게다가 용대운이 1세대의 결정판인 덕에 [군림천하]는 문체-인물-스토리-전개-설정 모든 면에서 80년대의 자취가 담겨 있다. 그래서 용대운은 2010년대가 된 지금, '살아있는 화석'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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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90년대를 관통하는 화석으로서의 [군림천하]


그리고 용대운의 계보에서 등장하는 좌백은 '신무협'이라고 일컬어지는 90년대를 대표하는 작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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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백

추천작 : [대도오], [생사박], [야광충], [혈기린외전]


숭실대 철학과 수석졸업생에게는 전설이 있다고 한다고 한다. 취업을 못한다는 것. 그래서 좌백은 취업에 실패하고 대학원 학비를 벌기 위해 글을 썼고, 데뷔작 [대도오]는 극찬을 받았다.


서울대의 전형준 교수는 "'대도오'에는 미리 주어진 삶의 의미없이 그에 대해 질의와 탐색, 추구가 이뤄지는데," "'대도오'의 실존주의는 하층, 소외된 자, 주변, 소수자, 즉 하위 주체의 데카당스"라고 평했다. 쉽게 말하면 '잉여의 미학'이 된다. 사생아에다가 결코 절정고수가 되지 못하는 [대도오]의 주인공 대도오라거나, 소림사 파계승으로 손발의 힘줄이 끊어진 채 강호에 내던져진 [생사박]의 흑저라거나 자신이 강호인이라는 자각조차 없는 [혈기린외전]의 농부 출신 무사 왕일과 같이 좌백이 만드는 인물의 대부분은 결코 거창하지 않다.[예외]


매력적인 인물로 기존 독자들에게 완전히 새로운 전개의 이야기를 풀어가면서 좌백은 90년대를 주도했다. 앞서 금강의 평대로 2세대 무협은 스스로 가한 제약으로 인해 조금씩 몰락해갔지만, 좌백은 계속해서 최고의 위치에 있었다. 2000년대 들어 한국의 무협소설이 환상소설임을 자각하게 되면서, 다른 환상소설 장르인 판타지와의 이종교배 실험이 있었는데, 이 역시 좌백이 선두에 있었다. 물론 이 실험은 결과적으로는 실패했고, 좌백은 실패 이전에 이미 방향을 다시 틀어 무협으로 돌아왔지만 그의 장르 견인 능력은 상당하다.


90년대의 무협소설은 야설록의 사업 주도를 통해 기존의 대본소/양판소 체제에서 도서대여점 체제로 변화해갔다. 문민정부의 산물인 도서대여점을 발판 삼아 일반 도서 시장으로 진출하려는 계획이었지만, 도서대여점이 대본소의 업그레이드에 불과하다는 한계 때문에 결국 실패했다. 도서대여점과 적은 편수로 인해 장르가 시장의 측면에서는 몰락해갔지만, 야설록의 사업 시도는 다수의 좋은 작가들을 발굴해냈고 그 필두는 좌백이다.


어쩌면 2000년대 판타지와의 이종교배 실패 후 한국 무협의 침체 역시 좌백이 보여줬을지도 모른다. 시장이 침체되자 좌백은 게임 제작에 손을 댔다가, 전공을 살려 철학 소설을 냈다가 하는 시도를 한다. 그리고 나서 그는 연달아 세 작품을 쓰다 말고 연재중단을 해버렸다.


판타지와의 크로스오버를 시도한 [천마군림], 연재중단.

데뷔작 [대도오]의 후속작인 [흑풍도하], 연재중단.

교보문고 북로그에서 한국 역사를 배경으로 연재한 [대동이의 칼], 연재중단.

심지어는 자신의 블로그도 2010년 10월 이후 장기간 관리 중단.


그나마 현재는 [소림쌍괴]를 북큐브에서, [천마군림]을 이젠북에서 연재하면서 오랜 방황을 끝낸 것 같다. 어쨌든 그는 장르를 이끌고 다니는 견인차였고, 지금도 그런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기 때문에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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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산

추천작 : [대사형], [사천당문], [정과 검], [칼은 더 이상 날지 않는다.]


남탕 투성이인 무협판에서 거의 유일한 여성 작가인 진산은 좌백의 아내다. 그리고 무협만 아니라 다른 장르에서도 활동중인 잡식 작가다. 판타지 또한 쓰며, 민해연이라는 필명은 로맨스 소설을 쓸 때 사용한다.[로맨스]


진산은 인물간 관계를 서술하는 데에 엄청난 능력을 보인다. 관계성은 로맨스로도 원한으로도 발전 가능하기에, 진산 작품은 대부분 낭만적인 색채를 띄고 있다. 용대운이 남성의 로망을 소재로 자주 사용하는 것, 좌백이 잉여의 비참한 비장함을 잘 사용하는 것과는 또한 궤를 달리 한다. 둘째로서 천재인 대사형에게 눌려 스스로의 가능성을 포기해버리고 잉여로 살았지만 대사형 사후 자신을 은근히 무시하는 사형제들을 이끄는 위치가 된 [대사형]의 주인공 고검호나, 가주인 아버지를 포함해 가문의 적통 남자들이 사고로 몰살한 후 유복녀이지만 인정받지 못하는 후계자인 [사천당문]의 주인공 당군명과 같이 관계 속에서 입체적인 인물의 다양한 감정선은 진산의 특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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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산 무협소설 전집?


용대운이 '어른을 위한 동화'로서 진취적인 로망을 주로 다루었고, 좌백이 '하위 주체의 데카당스'로서 소외된 자들의 비장함을 주로 그렸다면, 진산은 관계 속에서 서정성을 발굴해낸다. 또한 진산의 특이점은 단편에 능하다는 것이다. <고기만두>로부터 시작한 일련의 단편 연작은 서정성에서 큰 평가를 받았고, 또한 '2인칭 주인공 시점'이라는 말도 안 되는 서술법을 시험한 측면에서는 실험적이기도 하다. 이 단편들은 단편집 [칼은 더 이상 날지 않는다]에서 찾아볼 수 있다.


현재는 판타지에 주력해, [가스라기]의 후속작 [수니]를 북큐브에서, 게임을 소재로 한 [하분 - 용의 나라]를 이젠북에서 연재중이다. 오늘의 주제를 고려한다면 무협을 안 쓰고 있는 게 아쉽지만, 워낙 잡식성의 작가이기에 뭘 써내도 잘 쓰면 감사히 읽으면 되겠다.



위의 세 작가, 용대운-좌백-진산은 최초 80년대에 등장한 1세대의 유산을 이어 90년대의 2세대 무협을 이끌었을 뿐 아니라, 그 이후에도 주욱 활동하며 시장을 움직이고 있다. 무협이 워낙 시장친화적인 장르다 보니 시장에서 성공한 작품이 곧 재미있고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는 법이다. 시장에서의 성적만 따라가다 보면 정말 좋은 작품 몇은 놓칠 수도 있다.


현재의 시장 제패는 용대운의 [군림천하]지만, 연재를 재개한 좌백의 [천마군림]이 일단 기대작이고, 진산의 노트 속에 숨어 있을 차기작 또한 아직 멀었지만 기대해볼 만하다. 무엇보다 단순히 치고박고 복수하고 수련하는 식의 이야기를 벗어나, 인간사 일반에 대한 이야기로서의 무협은 충분히 가치가 있다.


여담이지만 교육적 효과도 있다. 나는 중고등학생 시절, 8~90년대의 무협들을 탐독한 끝에 6년 내내 한자 과목 성적을 만점 가까이 받았다. 한자가 오죽 많이 등장해야지. 엄청 많이 읽다 보면 기초 한자 공부는 알아서 된다.


그러니 학부모들이여, 아이들에게 무협소설을 읽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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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아아, 잘못 했어요...






절정고수가 되고 싶은 카인

@Kain_Suln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