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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최후의 외교수단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종전은 어떤 의미일까? 전쟁이 최후의 외교수단이기에 종전 역시 외교적인 노력의 결실일 것이다.


일본 군부는 태평양 전쟁을 시작하면서 이 전쟁의 끝을 어떤 식으로 정리할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생각이 없었다. 영화 <연합함대 사령장관 야마모토 이소로쿠>에서 야마모토가 태평양 전쟁의 끝을 '강화'로 끝내겠다는 장면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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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을 상대로 이길 순 없으니, 최대한 많은 피해를 입혀 종전협상에 들어가자는 것이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영화상의 이야기다. 그렇다면, 일본 전쟁 지도부의 생각은 어떠했을까? 태평양 전쟁 개전 직후 대본영이 정리한 전쟁 종결방안을 보면,


"미국을 굴복시키는 건 어렵다. 대신 영국을 굴복시킨다. 영국을 굴복시키면 미국의 전쟁수행의지는 꺾일 것이다."


상당히 낙관적이며, 자기 본위적인 생각이다. 대본영의 다음 종결방안도 충격적(!?)이다.


"독일이 영국을 굴복시킨다면, 이에 따라 유리한 조건으로 강화를 맺는다."


역시나 낙관적이다. 독일이 영국을 굴복시킨다는 전제 하에서 강화 조약으로 전쟁을 종결시킨다는 것이다. 이 당시 일본 군부의 독일에 대한 맹신은 상식을 뛰어 넘는 수준이었다.


(이 대목에서 제2차 세계대전 추축국들의 종전에 대한 생각을 살펴봐야 하는데, 당시 독일의 히틀러도 소련과의 전쟁을 어떻게 끝내야 할지 구체적인 안이 없었다. 그저 소련인들을 우랄 산맥 저편으로 밀어낸다는 두루뭉술한 생각밖에 없었다. 전쟁은 시작하는 것 보다 끝내는 게 어렵다. 그런 의미에서 독일과 일본은 둘 다 생각없이 전쟁을 일으켰다 할 수 있겠다)




일본 군부의 착각


태평양 전쟁의 전황이 일본에게 불리한 상황으로 전개되던 시기에 일본 군부는 또다시 황당한 '외교 정책'을 수립하게 된다.


"독소(獨蘇)화해를 주선한다."


당시 기준으로 봐도 황당하기 그지없는 망상이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의 총 사망자 수를 5,300만명 정도로 계산한다면, 그 중 43%인 2,300만명의 죽음은 바로 소련 인들의 죽음이었다. 이 중 소련군의 죽음은 760만 명 정도로 추정되는데, 이는 미군 전사자 수의 26배, 영국군 전사자 수의 19배에 달한다. 이 외에도 1,500만 명이 전쟁 불구자로 여생을 보내야 했다. 소련은 1941년부터 1945년까지 하루 평균 7,950명의 병사를 독일군에게 제물로 바쳐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독일과 소련의 화해를 주선한다?




당시 일본 군부가 파악한 외교정세는 이렇다.


"세계 대전의 승패의 열쇠는 소련이 쥐고 있다. 그 소련과 중립조약을 맺고 있는 일본이 교전중인 독일과 소련을 화해시켜 소련을 추축국으로 끌어들인다."


이른바 '독소화해의 중재'라는 구상인데, 일본 군부는 이걸 문서로 만들어 외교성에 전달했다. 이 정도면 망상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당시 이 구상안은 주 소련 대사였던 사토 나오타케(佐藤 尚武)에게까지 전달됐다. 그는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독소 화해는커녕 일소 중립조약의 유지마저도 곤란한 상황이다!"


이미 독일은 소련에게 밀리고 있는 상황. 아니, 밀리는 것이 아니라 조만간 독일이 무너질 상황인데, 소련과 독일을 중재해 화해를 시킨다고?


이런 상황에서 일본에게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현실화 됐다.


1945년 4월 5일 소련의 외무상 몰로토프가 사토 대사를 불러 일소중립조약의 폐기를 통보했다. 즉, 1년 남은 중립조약을 연장하지 않을 것임을 통보한 것이다. 여기서 일본은 다시 한 번 코미디를 연출하게 된다.


"일소중립조약은 5년 기한을 둔 조약이다. 앞으로 1년이 남았다는 건, 1년 동안은 아직 유효하다는 의미다."


소련이 얄타 회담의 밀약을 배경으로 대일전 참전을 준비하던 그때, 일본은 아직 일소중립조약이 1년이나 남았다며 애써 희망을 찾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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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과 일본 외무장관 마쓰오카>

일소중립조약 체결 당시




독일 무너지다


이렇게 마지막 희망을 붙잡고 있던 일본에게 날벼락 같은 소식이 전해진다. 독일의 패망이다. 국제연맹 탈퇴 후 독일 일변도의 국가전략과 외교정책을 펼쳤던 일본에게는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형국이 됐다.


1945년 5월 11일 일본의 전쟁지도부 6인이 모여 독일 패망 이후의 전략을 수립하기 위해 모였다. 사흘간 이어진 이 회의의 참석자는 수상, 외무상, 육해군의 수뇌 6명이었다. 이때 일본 군부의 발언을 확인해 보면, 당시 군부의 상황인식 수준을 확인할 수 있다.


"독일 항복 후 극동 소련군이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 지금은 적극적인 외교수단을 통해 소련의 대일전 참전을 저지하는 게 급선무다."

                                         - 육군참모총장 우메즈 요시지로(梅津 美治郎)



"해군으로선 소련의 참전 저지뿐만 아니라, 가능하다면 소련의 호의적 태도를 이끌어내어 군사물자, 특히 석유 등을 들여올 수 있기를 바라오."

                                         - 해군대신 요나이 미쓰마사(米内 光政)


황당하기 그지없다. 이미 소련은 일소중립조약의 연장을 거부한 상태에서 대일전 참전을 준비하고 있는 상황인데, 소련에게 석유를 들여올 수 없는지를 묻다니, 그나마 다행인 건 당시 외무대신이었던 도고 시게노리(東郷 茂徳)는 정확한 상황 판단 능력을 보여줬다.


"소련을 군사적, 경제적으로 이용할 여지가 있을 리가 없소. 세상물정 모르는 것도 정도가 있지. 사태는 이미 손 쓸 방도가 없고, 현재 일본의 상황으로선 종전만을 위한 수단을 신중히 검토해야 하오."

 

결국 이 회의에서 전쟁 막바지 對 소련 정책의 기본 방침이 결정된다.


첫째, 소련의 대일전 참전을 저지한다.

둘째, 유리한 종전 중개를 의뢰한다.


이때까지도 일본은 제대로 된 상황판단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도 여기까지 진행된 건 일본으로서는 '기적'에 가까운 성취였다. 그러나 그 기적도 얼마 안가 부서지게 된다. 바로 육군대신 아나미 고레치카(阿南惟幾)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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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회의에 참석했던 아나미 고레치카는,


"일본은 적에게 빼앗긴 영토보다 훨씬 광대한 영토를 점령하고 있소. 일본은 아직 전쟁에서 진게 아니오! 패전을 전제로 한 화해의견은 있을 수 없소!"


외무대신 도고 시게노리는 점령지의 반환을 포함해 추후 국제정세를 파악해 유연하게 대응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그의 의견은 묵살됐다. 결국 소련 중재의 종전협상 뒷전으로 밀려나게 된다.


그렇게 아까운 시간을 흘려보내는 와중에 일본은 주일 소련 대사인 마리크를 대상으로 소련의 종전 중개를 물 밑에서 교섭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헛발질'이었다. 마리크는 냉정하게 일본의 상황을 분석하고 있었고, 일본의 상황을 본국에 보고할 뿐이었다.


당시 일본의 상황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은 주 소련 일본대사였던 사토 나오타케(佐藤 尚武)였다. 그는 모스크바에서 보고 느낀 국제정세를 본국에 타전했다.

 

"오키나와전도 머지않아 단념하지 않으면 안 될 날이 올 것임. 저항수단도 없이 계속 교전을 속행하는 것은 근대전에선 생각할 수 없는 것임."


그는 가능성 없는 교섭에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즉시 종전결의를 하고 협상에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일본 육군의 장성들은 본토결전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1945년 6월 6일 일본 전쟁지도부들은 다시 한 번 본토결전을 위한 회의를 개최했다. 이때 내각 총리대신이었던 스즈키 간타로(鈴木貫太郎内閣)가 보고서 하나를 제출하게 된다. 당시 일본의 객관적인 상황을 정리한 보고서였는데, 그 내용이 충격적이었다.


"국민생활은 궁핍하고, 국지적으로 기아사태의 위험성이 있음 (중략) 쌀과 식염 배급도 바닥났고, 가을에는 최대의 위기가 닥칠 것임 (중략) 공업생산은 공습과 석탄부족으로 인해 상당부분 운전중지 상태임 (중략) 수송력도 연료고갈과 적의 공격으로 인해 증기선은 올해 안으로 전부 운행중단, 철도 수송은 반감함."


이 보고서에 대한 육군대신 아나미 고레치카(阿南惟幾)를 비롯한 육군 관계자들은, 보고서의 수정을 요구했다. 결국 보고서는 수정되는데,


"최대 문제는 생산의욕과 감투정신의 부족에 있다."


군부는 정신력만 있다면, 본토결전도 가능하다고 주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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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신력 타령’은 21세기 한국군에게까지 그대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당시 일본군 수뇌부들은 패전이 곧 일본민족의 멸망으로 이어질 것을 걱정했다. 일본 육군은 1944년 가을 비밀리에 연구팀을 조직해 패전을 상정한 최악의 사태를 예측했다. 이 보고에 따르면, 천황제의 폐지와 야마토 민족의 멸망, 나아가 일본 남성들의 경우 노예와 같은 강제 해외이주를 걱정하고 있었다. 이들의 망상은 정확히 자신들의 ‘사고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다보니 이들은 결사적으로 종전을 반대했고, 1억 총 옥쇄라는 광기어린 주장을 내뱉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와중에도 전황은 시시각각 악화됐고, 일본군과 국민들은 초 단위로 죽어나가기 시작했다. 결국 이렇게 되자 종전에 대한 분위기가 형성이 됐지만, 종전에 대한 구체적인 안은 나오지 않았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소련의 참전 분위기가 형성됐고(포츠담 회담에서 8월 소련이 대일본 전 참전이 결정됐다), 일본은 전전긍긍 앞으로의 방향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결국 쇼와 천황의 친서를 받아 든 고노에 후미마로 前 총리가 특사로 소련에 파견된다.


일본은 최후의 평화협상을 제안했던 것이다. 당시 소련의 외상이었던 몰로토프는 포츠담 회담을 위해 자리를 비운 상태였고, 닷새 후에 외무성 차관이었던 로조프스키가,


"고노에 특사의 사명은 잘 알고 있지만, 받아들일지는 대답할 수 없음."


이라는 사실상의 거절의사를 전한다. 이때 일본 외교사에 길이 남을 명문(名文)이 등장하게 된다. 당시 일본의 상황을 누구보다도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있었던 사토 대사는, 일본이 전쟁 종결방침에 관해선 애매하게 놔둔 채 교섭을 하려는 것을 보며 통탄했다. 그리곤 일본 본국의 외상에게 장문의 보고서(보고서라고 쓰고, 항의문이라고 읽어야 한다).


"(상략) 점점 항전할 힘을 잃어가는 장병 및 국민들이 전부 전사한다고 해도, 정부는 그들을 구할 생각조차 없구나. 7천만의 백성들이 죽어 가는데, 높으신 분 한 명의 안전만을 도모할 것인가. 나는 강화제창의 결의를 다잡을 수밖에 없다는 방향으로 귀착했다. 만주사변 이래, 너무나도 외교를 등한시하여, 국제 감각에 무신경해 진 것이, 바로 지금의 재앙을 낳은 원인이다. 본인은 더 이상 목적달성의 바람은 없다. 과거의 타성에 젖어 저항을 계속하는 현 상태에 종지부를 찍고, 국가가 멸망하기 전에 그런 상황을 방지하여 7천만 동포들을 도탄의 구렁텅이에서 구해 민족의 생존을 지켜내는 것만을 염원한다."



만주사변으로 시작 된 일본 외교의 고립과 독일 일변도의 외교정책을 꼬집었던 것이다. 아울러 자신만의 안전을 위해 국민들의 희생을 외면하는 전쟁 지도부와 천황에 대한 일침도 잊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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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토의 의견서는 일본이 왜 이 지경에 이르게 됐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줬다. 그러나 상황을 돌리기엔 너무 늦었다. 만주사변 이후로 전쟁으로 점철 된 일본의 역사는 이제 그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일본의 마지막 숨통은 그 동안 마지막 희망으로 부여잡고 있던 소련의 참전으로 박살나게 된다.


개인적으로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떨어진 핵폭탄 보다, 소련의 일본전 참전이 일본 전쟁 지도부의 전쟁의지를 꺾었다고 생각한다. 1944년 가을부터 1945년 8월까지 일본 전쟁지도부는 '소련'이라는 헛된 희망을 부여잡고, 전쟁에 대한 의지를 불태웠다.


처음엔 소련과 독일을 화해시킨다는 망상에서 시작해, 소련의 지원을 얻을 수 있는지, 그 후에는 일소중립조약의 연장을 희망했고, 전쟁 막바지에 이르러선 소련을 통한 중재나 종전 협상, 마지막에는 소련 참전을 막기 위해 발버둥 쳤다.


그러나 일본에게는 어떠한 외교적 수단도, 의지도 없었다. 사토 대사의 말처럼 일본은 만주사변 이후로 국제적으로 고립됐고, 국제 감각도 뒤떨어졌다. 전쟁이 최후의 외교수단이란 말을 잊고, 외교적 수단을 버리고 언제나 전쟁을 내세웠던 일본의 패착이었다.


외교적 무지가 가져온 일본의 패망이었다.



첨언. 일소중립조약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 종전 이야기까지 흘러왔다. 할힌골 전투에서 시작된 일본과 소련의 외교관계 형성은 태평양 전쟁에 있어서 일본의 주요 쟁점 중 하나이며, 아울러 외교를 공부하는 이들에게 국제정치의 냉혹한 현실을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교재이다. 소련과 일본의 관계는 종전 협상과 전후 일본의 부흥을 말할 때 다시 정리해 말하겠다. 다음회에는 본격적인 태평양 전쟁의 시작. 미국과 일본의 충돌에 관해 쓰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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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러일전쟁]


2부

드레드노트의 탄생

1차 세계대전, 뒤바뀐 국제정치의 주도권

일본의 데모크라시(デモクラシー)

최악의 대통령, 최고의 조약을 성사시키다

각자의 계산1

8년 의 회, 던 축 

일본은 어떻게 실패했나2

만주국, 어떻게 탄생했나



외전

군사 역사상 가장 멍청한 짓

2차대전의 불씨

그리고, 히틀러

실패한 외교, 히틀러를 완성시키다

국제정치의 본질



3부

태평양 전쟁의 씨앗1

태평양 전쟁의 씨앗2

도조 히데키, 그리고 또 하나의 괴물

일본을 늪에 빠트린 4명의 '미친놈'

대륙의 각성완료, 다급해진 일본

대동아(大東亞)의 환상에 눈 먼 일본

일본, 건드리지 말아야 할 걸 건드렸다 1

일본, 건드리지 말아야 할 걸 건드렸다 2

일본의 패배

일소중립조약이 파기되던 순간 1





 *참고자료

1. 전쟁국가 일본/ 살림출판사/ 이성환

2. 호호당 선생의 ‘프리스타일’

3. 세계전쟁사/ 육군사관학교 전사학과/ 황금알

4. 러일전쟁과 을사보호조약/ 이북스펍/ 이윤섭

5. 조선역사 바로잡기/ 가람기획/ 이상태

6. 다시 쓰는 한국근대사/ 평단문화사/ 이윤섭

7. 대본영의 참모들/ 나남/ 위텐런 지음, 박윤식 옮김

8. 나모위키

9. 쇼와 16년 여름의 패전/ 추수밭/ 이노세 나오키 지음

10. 『중일 전쟁』 용, 사무라이를 꺾다/ 미지북스/ 권성욱 지음

11. 나는 일본군, 인민군, 국군이었다 / 서해문집/ 김효순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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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더가 디비주는 전쟁으로 보는 국제정치


조약, 테이블 위의 전쟁

러시아 vs 일본 한반도에서 만나다






펜더


편집: 딴지일보 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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