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일 전쟁 직후부터 미국과 일본은 갈등관계로 돌아섰다. 러일 전쟁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미국과 일본의 관계는 혈맹의 관계라 말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미국은 영국과 손을 잡고 아낌없이 일본을 지원했고, 이런 기대에 부응해 일본은 러시아를 격파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고 나서 일본과 미국은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에 온도차를 느낀다.
러일 전쟁 이후 태평양 전쟁까지 미국과 일본의 관계는 악화일로라 표현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리고 이 불협화음이 본격화 된 것은 만주사변 직후부터였다.
15년 간의 전쟁. 만주사변이 일어나고, 태평양 전쟁이 끝나는 1945년까지의 기록은 어쩌면 일본과 미국의 외교관계 단절의 역사일지도 모른다.
미국과 일본의 치킨게임
1937년 7월 7일 노구교사건으로 시작된 일본의 중국 침략. 이 사건을 계기로 일본과 미국은 회복할 수 없는 관계로 빠져든다.
고립주의 정책으로 일관했던 미국의 움직인 것이다.
1938년 미국은 일본에 대한 최초의 제재를 한다.
‘항공자재의 대일본 수출금지 조치’
일본에게는 이빨도 들어가지 않을 조치였지만, 그동안 인내로 점철했던 미국이 최초의 반응을 보인 것이다.
1939년 미국은 ‘미일 통상 항해 조약’을 파기한다. 민간의 자율적인 수출입을 이제는 미국 정부 통제 하에 두겠다는 의미다. 다시 말해 미국 정부가 정책적인 결정에 따라 일본을 고사시킬 수도 있다는 거다. 이는 빈말이 아니었는데, 1940년 일본 기획원의 조사에 따르면 일본의 연간 총 수입액 21억 엔 중 19억 엔을 미국에 의존하는 상황이었다. 만약 미국과의 관계가 틀어진다면 수출로 먹고 사는 일본은 나라의 존립자체를 걱정해야 상황이었다. 그러나 일본은 미국과의 협상보다는 새로운 ‘동맹’을 찾는 걸로 응답했다.
1940년 9월 역사적인 삼국동맹이 체결됐다. 이제 일본과 미국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일본은 삼국동맹이란 균형추를 손에 넣으면 미국의 압박에 대응할 수 있다고 믿었다.
“삼국동맹이 제대로 작동한다면, 미국도 우리를 함부로 대할 수 없을 것이다.”
당시 일본 외교는 낙제점을 주어도 부족할 정도였다. 특히나 정세분석과 정책결정에 있어서는 최악이었다. 1940년, ‘일본의 운명을 결정한 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닌 그 엄혹했던 시기에 일본 외상의 자리에 앉아 있었던 건 마쓰오카 요스케(松岡 洋右)였다. 그는 미국에 대한 피해의식으로 똘똘 뭉쳐 있었다.
“미국이 전쟁을 일으키려고 우리(일본)를 압박하는 것이다!”
삼국동맹의 열렬한 맹신자였던 마쓰오카 요스케는 미국이 일본을 압박해 전쟁을 일으키려 한다며, 미국에 대한 분노를 터트렸다. 이런 상황에서 대미협상이 제대로 이뤄졌을까?
다시 말하지만, 일본의 운명은 1940년에 결정됐다. 만약 이때 일본이 좀 더 현명하게 대처했다면, 아니, ‘상식적인 수준’의 판단만 했어도 태평양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1940년의 일본에게 상식을 주문하는 것은 너무 무리한 요구였다. 삼국동맹의 체결 전후로 미국과 일본은 치킨게임을 벌인다.
<1940년 이후 일본에 대한 경제 제재와 일본 정부의 반응>
1940년 7월 5일: 각종 전략물자 및 전쟁 물자에 대한 대일본수출 금지 조치 발령
1940년 7월 26일: 항공기 연료 및 각종 항공엔진 부품에 대한 대일본 수출 금수 조치 및, 특정 종류의 스트랩에 대한 대일본 금수 조치
전쟁 물자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석유와 철이다. 일본은 미국의 고철을 수입해 이를 활용했는데, 그 획득처를 막아버린 것이다.
항공기 부품이나 각종 공업용구의 수출제한에 대해서는 당장에는 그 효과가 나타나지 않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일본에 상당한 압박으로 작용한다. 대표적인 예가 ‘제로센’ 전투기다. 태평양 전쟁 기간 중 일본 전투기의 대명사로 불리게 된 제로센은 일본 스스로가 ‘동양의 신비’라며 자화자찬한 전투기다. 그러나 이 전투기가 1942년도 중반을 넘어서면서 부터는 성능을 제대로 발휘하기 힘들었는데, 대표적으로 제로센에 장착된 무전기 문제가 있었다.
태평양 전쟁 이전에는 미국에서 수입한 무전기를 장착했으나, 태평양 전쟁 개전 이후 미국 수입루트가 끊기자 자국산 무전기를 단다. 그러나 이 무전기는 성능이 미달돼 없느니만 못했다. 결국 일부 베테랑 파일럿들은 차라리 무전기를 떼 내 비행기 중량이라도 줄이자며 무전기를 떼고 비행을 했다. 전투기에 무전기를 달지 않는 게 무슨 대수냐 말할 수 있겠지만, 2차 대전 시절에는 공군 편대전술이 상식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 전투기 조종사들은 1차 세계대전의 그것처럼 수신호로 의사전달을 하는 촌극을 연출한다.
1940년 8월 3일: 일본 정부가 처음으로 미국에 대해서 반응을 보임.
“미국의 경제 제재 조치를 반대한다.”
1940~1945년까지의 일본 외교 정책을 살펴보면, 퇴로가 없는 극단적인 수를 두거나, 자신들의 의사를 통일시키지 못해 ‘방침 없는 협상’으로 시간을 허비하거나, 상대방 입장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본위의 ‘해석’으로 협상카드를 만들어 상대방을 ‘열 받게’ 만드는 뻘짓의 연속이었다. 이런 실수의 이유는 크게 2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군부가 일본 외교에 개입하면서 의견 통일이 안 되거나 극단적인 정책을 밀어붙임
둘째, 국제정세의 판세를 잘못 읽거나 국제 감각이 뒤떨어져 자기 기준으로만 생각함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 그 사공이 ‘바보들’이라면? 배는 박살날 수밖에 없다.
1940년 9월 26일: 미국 정부 전면적으로 철강, 스크랩 금수 조치 단행.
일본은 가장 중요한 철강 획득처를 잃어버린다. 일본에게는 치명타였다.
1940년 10월 4일: 고철 수입이 막히자 일본 정부도 긴장. 당시 일본 수상이었던 고노에 수상은 최초로 “전쟁”을 언급한다.
“최악의 경우 미국과의 전쟁도 불사하겠다!!”
외교적 해결을 말해야 하는 상황에서 일본은 ‘전쟁카드’를 꺼내들었다.
1940년 12월~이듬해 1월: 미국은 지금까지 빠져있던 모든 정제품과 광석을 전부 금수 품목에 올림
고노에의 발언에 대한 무언의 대답이었다.
이때부터 일본은
“너무 멀리 왔다”
란 생각을 한다. 그제야 일본은 이 상태로 미국과 계속 대결구도로 가다간 끝장나겠단 생각을 했다.
일본수상이었던 고노에는 대미외교가 더 이상 극단으로 치달아서는 안 된다는 판단을 하고, 대미 외교의 선봉에 서 있던 구루스 사부로(来栖三郎) 하나만으론 어렵겠단 판단에, 1941년 2월 노무라 기치사부로(野村吉三郞)를 보낸다. 대미 외교 교섭 창구가 된 둘은 미국과의 협상에 임한다. 구루스 사부로는 노무라가 활동하기 편하도록 일부러 미국 여성과 결혼을 할 정도로 이 대미 협상에 결사적으로 매달렸는데, 상황은 갈수록 어렵게 꼬여만 갔다.
구루스 사부로와 노무라 기치사부로
당시 미국 측이 일본에게 요구한 두 가지 조건, 삼국 동맹의 탈퇴와 중국에서의 전면 철수는 일본으로선 들어줄 수 없는 사항이었다. 이 요구조건을 수락한다는 것이 지난 반세기 일본이 가열 차게 추진해 오던 국가의 기본전략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었기에. 이때부터 일본은 ‘만약의 사태’에 대해 생각한다.
그럼 ‘만약의 사태’에 벌어진다면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할 게 무엇일까? 두말할 것도 없이 석유였다. 일본의 경우 석유 수입량의 80%를 미국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만약 미국으로부터의 석유수입이 끊긴다면 일본은 모든 ‘행보’를 그 자리에 멈춰야 했다.
일본은 이런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미친 듯이 석유를 비축했다. 이런 전차로 1941년 8월 1일 기준으로 일본은 자그마치 950만 킬로리터의 석유를 비축한다. 당시 일본의 월평균 석유 소비량이 45만에서 48만 킬로리터였으니, 미국이 석유를 끊으면 짧게는 18개월, 길게는 2년 안에 일본은 전투기 한 대 띄울 기름도 없어지는 것이었다. 이런 절박한 상황(?)에 기초한 것이 ‘남방작전(南方作戦)’이었다.
첨언
이번 편, 조금 짧다. 숨고르기를 위해서다. 다음 회와 그 다음 회에 2차 세계대전과 ‘석유’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그리고 이어서 1940~1941년 일본의 숨 가쁜 행보에 관해 알아보겠다.
참고자료
1. 전쟁국가 일본/ 살림출판사/ 이성환
2. 호호당 선생의 ‘프리스타일’
3. 세계전쟁사/ 육군사관학교 전사학과/ 황금알
4. 러일전쟁과 을사보호조약/ 이북스펍/ 이윤섭
5. 조선역사 바로잡기/ 가람기획/ 이상태
6. 다시 쓰는 한국근대사/ 평단문화사/ 이윤섭
7. 대본영의 참모들/ 나남/ 위텐런 지음, 박윤식 옮김
8. 나모위키
9. 쇼와 16년 여름의 패전/ 추수밭/ 이노세 나오키 지음
10. 『중일 전쟁』 용, 사무라이를 꺾다/ 미지북스/ 권성욱 지음
11. 나는 일본군, 인민군, 국군이었다 / 서해문집/ 김효순 지음
1부 2부
외전 3부 |
펜더가 디비주는 전쟁으로 보는 국제정치
펜더
편집: 딴지일보 챙타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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