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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전쟁은 왜 일어났을까? 바로 한 권의 책 때문이다. 책 때문이라니 전혀 엉뚱한 소리 같지만 스토(Harriet Beecher Stowe) 부인이 쓴 <톰 아저씨의 오두막>(Uncle Tom's Cabin)이 바로 그 책이다. 1863년에 링컨 대통령은 스토 부인을 만났을 때 그녀에게 “당신이 바로 대전쟁을 일으킨 책을 쓴 작은 여인이군요”하고 말했다. 그 말에는 나름대로의 진실이 있다. 그 책은 북부인들의 반노예제도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결집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그 책은 남북전쟁 이전까지 수십만 권이 팔려나가서 남부의 노예제도에 대해 무지하거나 무관심했던 북부인들의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그 책은 반노예제도를 선전하는 책자로서 아주 성공적이었다.


엘리자라는 노예여자가 팔려갈 위기에 몰린 아들을 구하기 위해 오하이오 강을 목숨을 걸고 건너는 것이나 톰이 이리저리 팔려 다니면서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도 끝내 인간과 신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고 살다가 의연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충분했다. 이 소설은 인간이 지닌 자유에 대한 열망과 그것을 억압하는 남부의 비정한 노예제도에 대한 북부인들의 각성을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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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전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영화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아닐까? 빅터 플레밍 감독이 마가렛 미첼의 소설을 영화화한 것으로 원작 이상으로 성공을 거두었다. 남북전쟁을 전후한 시기의 조지아를 배경으로 남부인들이 겪은 전쟁의 참상과 강인한 생명력을 그리고 있다. 낭만적일 정도로 아름다운 남부의 한 농장 타라를 배경으로 시작되는 이 영화는 철저하게 남부 백인의 시선으로 전개된다.


비비안 리가 역을 맡은 주인공 스칼렛 오하라는 타라 농장의 맏딸로 빼어난 미모와 도도한 성격으로 청년들의 선망을 한 몸에 받는다. 그녀는 애슐리 윌크스를 사랑하지만 그는 그녀의 사촌인 맬라니를 사랑한다. 그녀는 애슐리의 집에서 열린 파티에서 그에게 사랑을 고백했다가 거절당하고 홧김에 맬라니의 동생인 찰스 해밀턴의 청혼을 받아들인다. 한편 그녀는 그 파티에서 평판이 좋지 않고 무례한 레트 버틀러를 만난다. 파티 도중에 남북전쟁이 터졌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애슐리와 맬라니, 스칼렛과 찰스는 서둘러 결혼하고 애슐리와 찰스는 곧 출전한다.


그러나 찰스는 출전하자마자 전사하고 스칼렛은 애틀랜타에서 맬라니와 함께 지낸다. 북군이 그곳까지 진격해오자 그녀는 간호사로 일하다가 염증을 느끼고 뛰쳐나와 맬라니 모자와 함께 타라로 돌아온다. 그러나 그곳 역시 폐허가 되어 있다. 어머니는 죽었고 아버지는 충격으로 정신이 온전하지 않으며, 노예들은 모두 도망치거나 입대했고, 북군들이 농장을 약탈해서 먹을 것조차 없다. 그 현실을 목격한 그녀는 강인한 정신력으로 집안을 꾸려나간다.


그 사이 전쟁이 끝나고 아버지는 말 사고로 죽으며, 애슐리가 돌아와 그 농장에서 함께 지내게 된다. 스칼렛은 여동생의 약혼자인 성공한 사업가 프랭크 케네디를 가로채 결혼해 목제소를 차려 돈을 번다. 그러나 남편은 어느 날 그녀를 겁탈하려 한 사람들에게 보복하러 갔다가 총에 맞아 죽는다. 그 얼마 후 레트가 나타나 청혼하자 받아들인다. 곧 딸 보니를 낳고 잠시 행복한 시간을 보내지만 그녀가 여전히 애슐리를 사랑한다는 것을 안 레트는 질투심에 불타 딸을 데리고 영국으로 간다. 그가 영국에서 돌아온 후 스칼렛은 유산을 하고 곧이어 보니도 말 사고로 죽고, 맬라니까지 죽으면서 그녀는 비로소 오랜 환상에서 깨어나 애슐리가 정말 사랑한 사람은 맬라니이며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레트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러나 그녀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레트는 떠난다. 그녀는 고향 타라로 돌아갈 결심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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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에서 타라는 남부인들의 정신적 안식처 같은 이상 세계로 그려져 있다. 그곳에서 백인 농장주의 가족들은 우아하고 품위 있는 삶을 살아간다. 그곳의 파괴는 바로 남부의 고결한 이상과 정신이 북부의 사악한 장사치들에게 파괴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그들의 그런 삶 이면에는 가혹한 흑인노예제도가 있지만 이 영화는 그것을 감춰버린다. 이 영화에 드러나는 흑인들은 주인에게 충실하고 백인 농장주들은 그들에게 관대하다. 흑인들은 전쟁이 나자 농장주들을 따라 전쟁에 뛰어든다. 이 영화에는 전쟁의 참상과 고통이 있지만 그 전쟁의 원인이 무엇인지는 전혀 나타나 있지 않다. 남부인들은 잔인하고 탐욕스러운 침략자인 북부인들의 희생자로만 그려진다. 북부는 남부의 평화로운 이상 사회를 파괴한 사악한 집단인 반면 남부인들은 명예를 존중하며 그런 적에 대한 정당한 분노를 지니고 있다.


남북전쟁은 미국 역사상 가장 참혹한 전쟁으로 인구 3100만 명 중 약 62만 명이 사망하고 40만 명 이상이 부상했다. 이 숫자는 미국이 이후 치른 모든 전쟁에서의 사망자를 합친 숫자보다 더 많다. 1차 세계대전 사망자가 11만 5000 명, 2차 세계대전 사망자가 31만 8000 명이었던 것에 비교해보면 이 전쟁이 지닌 파괴력을 짐작할 수 있다. 인구 10만 명 당 1차 대전 때는 109명, 2차 대전 때는 241명이 사망한 데 비해 이 전쟁에서는 2000 명이 사망했다. 남북전쟁은 오늘날까지 역사학자들과 일반인들 사이에 격렬한 논쟁을 유발하고 있으며, 그 전쟁에 관련된 책 만도 5만 종 이상이 출판되었다.


'남북전쟁' 하면 우리는 가장 먼저 노예해방을 떠올린다. 링컨은 노예해방의 위대한 지도자로서 남부의 사악한 노예제도를 전쟁으로 종식시키고 노예들을 해방시켰다. 이 전쟁으로 미국은 분열을 극복하고 진정한 통합을 이루었다. 그러나 그것은 진실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다른 한편 남부의 노예제도는 인종적으로 열등한 흑인들을 계몽하는 선한 제도였으며, 노예에 대한 처벌은 그렇게 심하지 않았고, 주인과 노예는 서로 보완적인 관계에서 상호 도움을 주었으므로 노예제도는 백인의 경제적 이기심 때문이 아니라 인종적인 이유 때문에 시행되었고 굳이 전쟁이 아니었더라도 자연스럽게 사라졌을 것이라는 주장이 널리 받아들여진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견해 역시 진실을 명백히 왜곡하고 있다.


오늘날 대부분의 미국 역사학자들은 남북전쟁이 노예해방 전쟁이었다는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 전쟁 전의 미국은 노예제도 문제로 남북이 사사건건 충돌했지만 그것은 ‘인간으로서의 노예’에 대한 관심 때문이 아니라 노예제도가 유발하는 사회적 경제적 이해관계의 대립 때문이었다. 또한 링컨 대통령은 노예해방론자가 결코 아니었다. 그는 노예들의 처지를 동정했지만 그에게는 노예제도 문제는 부차적이었다. 그의 주된 관심은 분열위기에 처한 합중국을 지키는 것이었으며 필요하다면 남부의 노예제도를 용인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는 대통령 취임연설(1863. 3. 4.)에서


“본인은 노예제도가 존재하는 주들 내에서의 노예제도에 대해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간섭할 의도가 전혀 없습니다. 본인은 그렇게 할 수 있는 법적 권한을 갖고 있지 않다고 믿으며 또한 그렇게 할 의사도 전혀 없습니다”


라고 천명했다. 남부는 남부대로 19세기에 들어서면서 면화 생산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그에 따라 노예 수요가 급증하면서 노예제도가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1850년 무렵 남부의 각 주에서 노예가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히 높았다. 버지니아는 33%, 미시시피는 51%, 사우스캐롤라이나는 58%였다. 그러므로 노예제도가 사양길에 접어들고 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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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전쟁의 주요한 원인으로는 먼저 남부와 북부의 경제제도의 차이를 들 수 있다. 북부의 공업사회와 남부의 농업사회는 이해관계가 사사건건 충돌하였으며 그 접점을 찾지 못하고 일어난 것이 전쟁이다. 다른 원인으로 북부와 남부의 상이한 문화적인 차이를 들 수 있다. 의사봉건제적인 남부 문화와 자본주의적인 시스템을 지닌 북부 문화는 서로 간에 화해하기 힘들었다. 또한 에릭 포너는 북부의 ‘자유노동 이념’이 남부의 노예제도와 충돌했다고 본다. 북부인들은 그들의 사회가 남부사회보다 더 우월하며 노예제도의 확산이 자유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의 권리인 경제적 독립을 성취할 노동자들의 가능성을 침해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막기 위해 전쟁이 일어났다는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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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1860년에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되면서부터 이미 시작되었다. 그가 당선되자 12월 20일에 사우스캐롤라이나 주가 가장 먼저 연방에서 탈퇴했으며 뒤이어 미시시피, 플로리다, 앨라배마, 조지아, 루이지애나, 텍사스가 대통령 취임식전에 탈퇴했다. 그리고 1861년 2월에 연방을 탈퇴한 7개 주들이 앨라배마의 몽고매리에 모여 남부연맹(Confederate States of America)을 결성했다. 이들 주들은 탈퇴하자마자 재빨리 요새와 무기고와 정부기관을 장악했지만 사우스캐롤라이나 항구의 섬터 요새와 플로리다의 피킨스 요새를 장악하는 데는 실패했다.


1861년 4월에 북부의 보급품을 실은 배가 섬터 요새에 다가오자 남부군이 그 요새를 공격하면서 전쟁이 시작되었다. 전쟁이 발발하자마자 버지니아, 아칸소, 테네시, 노스캐롤라이나가 연방을 탈퇴해서 남부연합은 11개 주로 늘어났다. 메릴랜드, 델라웨어, 켄터키, 미주리는 노예소유 주였지만 연방에 남았다.


전쟁이 일어나자 북부와 남부는 모두 동원체제로 전환되어 소득세를 부과하고 강제 징집을 실시했다. 북부에서는 1863년에 국가 징집법을 공표했으나 징집 거부 사태가 속출했다. 그 법이 본인 대신 군에 갈 사람을 고용하거나 300달러를 국가에 헌납하면 징집을 면제해주었기 때문이다. 결국 힘 있고 돈 있는 사람들은 모두 군에 가지 않고 힘없는 사람들만 전쟁에 끌려가는 셈이 되어 분노를 샀다. 그런 가운데 7월에 뉴욕에서 징집거부 폭동이 일어나 4일간 100명 이상이 사망했으며, 연방군이 동원되어 진압했다. 이 폭동으로 흑인들이 주로 피해를 입었는데, 그건 사람들이 전쟁의 원인이 흑인이라면서 엉뚱하게 그들에게 폭력을 행사했기 때문이었다.


남부 역시 1862년에 징집법을 통과시켜 18세부터 35세까지의 모든 백인 남성에게 3년간의 의무복무를 부과했다. 그러나 역시 본인 대신 군에 갈 사람을 구하거나 대규모 노예를 소유한 농장의 경우 노예 20명당 1명의 백인에게 군 복무를 면제해주었다. 이 때문에 가난한 백인들이 반발하였으며 징집 기피자들이 속출했다. 결국 남부와 북부 모두에게 전쟁은 기득권 세력의 이해를 위해 하층계급의 희생을 강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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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나자 흑인들은 링컨이 곧바로 노예해방 선언을 할 것으로 기대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그는 애초에 노예해방 선언을 할 마음이 없었다. 링컨에게는 연방을 회복하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에 노예해방 선언을 하면 반란주들(당시에 북부에서는 남부연맹 주들을 그렇게 불렀다)이 연방으로 복귀할 명분을 박탈하게 된다고 생각했다. 그 결과 전쟁 초기에 남부 흑인들은 주인 편을 들어 싸우게 되었다. 결국 전쟁이 교착상태에 빠지자 1863년 1월 1일을 기해 노예해방 선언을 했다. 그런데 그 선언의 내용이 수상쩍다. 그 선언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현재 미국에 대하여 반란상태에 있는 주 또는 주의 일부의 노예들은 1863년 1월 1일 이후부터 영원히 자유의 몸이 될 것이다. 육해군 당국을 포함하여 미국의 행정부는 그들의 자유를 인정하고 지켜줄 것이며, 그들이 진정한 자유를 얻고자 노력하는 데 어떠한 제약도 가하지 않을 것이다.

 

위의 구절에서 보듯이 이 선언의 효력은 ‘반란상태에 있는 주’에만 적용되었다. 노예소유 주이면서 합중국에 가담하고 있는 주들은 노예제도를 폐지할 필요가 없었다. 반면에 현재 남부연맹에 가담한 주들은 독립했으므로 이 선언이 적용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이 노예제도 폐지 선언으로 실제 해방된 노예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다만 이 선언은 그동안 망설이거나 남부에 협력했던 많은 흑인들이 북부로 탈출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렇게 탈출한 노예들이 30만 명 가까이 되었으며 그들의 탈출로 인해 남부의 농업은 거의 마비되고 전쟁수행에도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그때 도망친 노예들은 북부의 공장에서 일하거나 북부군에 가담해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전쟁이 끝날 무렵에 약 18만 명의 흑인이 북군에 입대하고 있었다.


전쟁이 나자 흑인들은 참전할 수 있기를 바랐다. 전쟁에 기여함으로써 노예제도 폐지의 정당성을 확인하고 전후 흑인의 지위를 향상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링컨 정부는 그들의 참전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이 전쟁을 노예해방전쟁으로 만들고 싶어 하지 않았다. 흑인들은 독립전쟁에서 영국군과 식민지군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지만 독립한 이후 미국은 흑인들의 군 입대를 막았다. 군에는 오로지 백인 남자들만 들어갈 수 있었다. 흑인들의 입대를 허용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벤자민 콸스는 <미국흑인사>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흑인 군인에 대한 반대는 그들이 전투원으로서 자질이 부족하고, 그들을 무장시키는 것은 백인군인이 업무수행에 충분히 용감하지 않았음을 인정하는 것이며, 그들의 수중에 총을 주는 것은 노예반란을 야기할지도 모른다는, 그래서 비록 말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흑인의 군복무를 허용하면 미국 생활에서 흑인의 지위에 변화가 올 것이라는 두려움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이런 인종적인 편견으로 인해 흑인들은 초기에 전쟁에서 배제되었다. 그러나 1862년에 마침내 흑인 징병이 허용되었으며 흑인들로만 구성된 매사추세츠 54보병연대가 결성되었다. 그 사령관으로 25세의 젊은 대령 로버트 쇼(Robert Gould Shaw)가 임명되었다. 그의 지휘 아래 600여 명의 병사들은 1863년 7월에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와그너 요새 탈환 작전에서 용감하게 싸웠으며 쇼 대령을 비롯한 많은 병사들이 전사했다. 비록 그들은 요새를 탈환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불굴의 용기를 보여줌으로써 흑인 부대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깨는데 크게 기여했다. 흑인들은 참전이 허용된 이후 수많은 전투 임무를 수행했으며 3만 7000여 명이 전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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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그너 요새 전투는 1989년에 에드워드 즈윅 감독에 의해 <영광의 깃발>(Glory)이라는 영화로 만들어졌다. 이 영화는 매사추세츠 54보병연대의 창설 배경과 오합지졸의 흑인들이 군인으로서 변해 가는 과정 및 전쟁에 헌신하려는 그들의 용기, 쇼 대령이 애송이 군인에서 용감한 지휘관으로 성장해가는 과정을 감동적으로 묘사한다. 지휘관으로서의 쇼의 성장 과정은 그대로 흑인 부대원들이 군인으로서 성장해가는 과정과 맞물려 있다. 흑인들이 이 전쟁에 지원한 것은 차별 없는 세상에서 자긍심과 명예심을 지니고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였으며 그들의 그런 갈망을 이 영화는 보여준다.


쇼는 젊은 나이에 54연대 연대장 지위에 오르면서 대위에서 일약 대령으로 진급한다. 그는 흑인 부대에 대해 처음에는 회의적인 시각을 지니고 있었지만 시간이 가면서 그들이 처한 열악한 상황과 차별에 눈을 뜨고 그들의 용기와 열정을 이해하고 공감하며 마침내 그들과 혼연일체가 된다. 흑인 군인들은 흑인으로서 지닌 사회적 멸시와 편견, 또한 자신들의 내부에 도사린 열등감과 싸워야 한다. 상부에서 그 부대에 기대하는 것은 흑인들이 전투병으로 적과 용감하게 싸우는 것이 아니라 백인 군인들의 뒤치다꺼리를 하는 것이었으며 그것이 흑인 병사들에게 좌절감을 안겨준다.


애초에 상부의 지휘관들은 흑인들이 참전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으며 군인으로서의 그들의 능력을 믿지도 않았다. 쇼는 흑인 부대에 대한 상부의 이런 편견과 무시와 조롱 그리고 흑인들의 냉소와 불만에 대항해 싸운다. 그리고 마침내 와그너 요새 전투에서 그 부대는 쇼의 지휘 아래 모든 부대의 선두에 서서 적진을 향해 용감하게 돌진하며 600여 명의 부대원 중 절반가량이 전사하거나 부상을 입거나 실종된다. 이 영화에서 우리는 흑인들의 자유를 향한 갈망과 인간다운 삶에 대한 소망을 충분히 읽을 수 있다. 그런 열망이 그들로 하여금 죽음도 기꺼이 받아들이게 했다.

 

남부는 전쟁초반부터 자신의 땅을 지키고 북부가 남부의 전략 요충지들을 점령하는 것을 막는데 주력한 반면에 북부의 목표는 남부를 점령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북부는 해상을 봉쇄해서 남부의 면화를 유럽에 팔고 유럽에서 무기를 들여오는 것을 막으며, 미시시피 강의 지배권을 장악해 남부를 동서로 분열시켜 남부 내부의 물자 이동을 막고, 테네시 주로 진격해 내부분열을 일으키려고 했다. 또한 남부에서 초토화 작전을 벌여 남부의 모든 생산 기반을 철저하게 파괴하고 남부에 가능한 참혹하고 값비싼 대가를 치르게 하려고 했다. 그들은 남부 연합군의 진영에서 전쟁물자와 철도를 빼앗고 마을과 농장을 불태워 남부인들에게 공포심을 조장하고 전의를 상실하게 했다. 특히 북부군의 셔먼 장군은 병사들이 남부를 약탈하도록 격려해서 남부인들의 증오심을 불러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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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결국 1865년 4월 9일 남부군의 리 장군이 북부군의 그랜트 장군에게 항복하면서 끝났다. 애국심에 불타는 월트 휘트먼은 1861년에 쓴 시 <울려라 울려라 북이여!>(부분)에서 이렇게 열렬히 전쟁을 찬양했다.

 

울려라, 울려라, 북이여! — 불어라, 나팔이여, 불어라!

창문 사이로, 문 사이로 무자비한 힘처럼

엄숙한 교회로, 학자가 공부하는 학교로 밀려들어

군중을 흩어버려라

신랑을 조용히 버려두지 마라, 그는 지금 신부와 어떤 행복도 누리지 못하리라.

평화로운 농부에게 밭을 갈고 곡식을 거두는 어떤 평화도 주지마라

더없이 사납게 움직이며 두드려라 북이여, 더없이 날카롭게 불어라 나팔이여.

(…)

울려라, 울려라, 북이여! — 불어라, 나팔이여, 불어라!

협상은 거두고 훈계는 그만두어라

소심한 사람들을 신경 쓰지 말고 눈물을 흘리고 기도하는 자들을 신경 쓰지 마라

늙은이가 젊은이에게 하는 애원에 신경 쓰지 마라

어린 아이의 목소리에도 어머니의 간청에도 귀를 막아라

영구대 위에 누워 영구마차를 기다리는 죽은 자들마저 흔들어라

더없이 세게 울려라 오 무서운 북이여! 더없이 요란하게 울려라 너 나팔이여.


어린아이들의 눈물과 어머니의 간청까지 외면하고 일으킨 전쟁은 무엇을 남겼을까? 전쟁으로 남은 것은 남북 모두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 뿐이었다. 전쟁은 남북 모두에 심각한 경제적 타격을 가져다주었다. 양쪽 모두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소득세를 부과했지만 조세저항이 심해 기대한 만큼의 효과를 거둘 수 없었다. 그러므로 화폐를 발행하고 공채를 발행해서 부족한 전비를 조달했다. 그 결과 북부는 전쟁이 끝났을 때 80%의 인플레이션을 겪게 되었으며, 남부는 9000%라는 살인적인 물가상승을 겪었다. 또한 남부는 패전하면서 남부 정부가 발행한 국채가 휴지조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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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남북 사이에 오랫동안 누적된 문제들을 해결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방식으로 전개되는 계기가 되었을 뿐이었다. 이 전쟁과 그 후의 재건시기에 미국은 남북을 완전히 통합하는데 실패했으며,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지 못했고 서로 간에 적개심만 깊어졌다. 노예제도는 폐지되었지만 해방된 노예들은 남부 주들이 전후 공공연히 부활시킨 인종차별 정책으로 인해 노예제 시절이나 다름없는 비참한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400만이나 되는 남부의 흑인들은 전후 잠깐의 해방감을 맛본 후 다시 남부 사회의 공포분위기 속에서 버림을 받았다. 남부는 전쟁이후 아무런 반성 없이 빠르게 옛 체제로 복귀했으며 북부에 대한 증오심을 바탕으로 서로 단결했다. 전후 낭인들(carpetbaggers)로 불린, 남부 사회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부동산 투기를 하고 장사를 한 많은 북부인들은 북부에 대한 남부의 증오심에 한 몫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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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딴지일보 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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