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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금으로선 상상도 할 수 없지만 고3 땐 책을 많이 읽었다. 역시 지금으로선 상상도 할 수 없는 두께의 책이었다. 당연히 공부가 하기 싫어서 그랬다(그런 주제에 내 꿈은 ‘인텔리겐치아’였다. 약간 빨갱이 사상에 젖어있었다).


특히 근대사 관련한 책(‘근대사’라고 하지만 거의 다 독립운동에 대한 책이었다. 독립운동, 독립운동사, 독립운동가 같은 거)을 읽으며 생각했다. 내가 이 시대에 살았으면 당연히 친일하는 소시민이었을 거라고. 장담컨대 절대로 난 체제에 순응하며 침묵하는, 잠재적인 친일파로 살았을 것이다. 겨우 열아홉이었지만 알 수 있었다. 나이가 몇이든 닥치지 않을 일에 대해선 자기객관화가 잘 되는 법이다. 



2.
근현대사를 나누는 기준은 해방이다. 보통 구한말(혹은 조선 후기)에서 해방 전까지를 근대사로 보고, 해방 후부터 현재까지를 현대사로 본다.


함세웅 신부는 근대인 1942년에 태어났다. 근대에 태어나 ‘정의 사제’로 현대를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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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함세웅 신부에게 ‘민주화운동의 산증인’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길 주저하지 않는다. 그가 ‘종북’으로 알려진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을 결성하고, 중앙정보부에 종교과까지 신설하게 만들고, 감옥도 갔다 오고, 12시에 전짓불로 눈을 비춰 잠을 깨우는 교도관에게 “어떤 새끼야!”하면서 소리를 지르는 싸움꾼인데도, 그를 그렇게 부른다. 왜일까? 단순히 불의를 보고 “불의하다.”고 말해서는 아닐 것이다.



3.
프란치스코 교황이 사람들로 하여금 울림을 주는 이유는 교황이 지극히 낮은 곳으로 임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함세웅 신부에게서 받은 느낌도 그러했다. 함 신부와 프란치스코 교황을 동일시한다는 게 아니다. 함 신부 또한 그 당시 가장 낮은 곳을 향했다는 것이다.


함세웅 신부는 정치적 술수에 의해 잘못하지 않은 것을 잘못하길 강요받았던 이들을 위해 권력에 이의를 제기했다. ‘이래선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행동하는 ‘종북’ 신부의 시작이었다.



4.
한 마디로 입 열기 힘들던, 그 유명한 긴급조치 9호 이후에도 함 신부는 가만 있지 않았다.


(긴급조치 9호는 유신헌법 철폐와 정권퇴진을 요구하는 민주화운동이 거세게 일어나자 이를 탄압하기 위해 1975년 5월 13일 선포되었다. 유언비어의 날조·유포 및 사실의 왜곡·전파행위 금지 / 집회·시위 또는 신문·방송 기타 통신에 의해 헌법을 부정하거나 폐지를 청원·선포하는 행위 금지 / 수업·연구 또는 사전에 허가받은 것을 제외한 일체의 집회·시위·정치 관여행위 금지 / 이 조치에 대한 비방행위 금지 등을 골자로 했으며, 명령이나 조치는 사법적 심사의 대상이 되지 않으며 위반자는 영장 없이 체포할 수 있었다 -한국근현대사사전)


그렇게 일어난 게 ‘3.1민주구국선언사건’이다. 1976년 3월 1일, 문익환 목사를 중심으로, 함세웅 신부, 김승훈 신부, 문동환 목사 등이 모여 명동성당에서 3·1절 기념미사를 했고, 이걸 빌미로 박정희 정부는 정부전복선동 혐의로 재야인사들을 구속한다.


함세웅 신부는 말한다.


“3.1민주구국선언(사건)은 미사 봉헌한 걸로 끝나는 거였어요. 그런데 이 사람(박정희)이 제 정신이 아니다 보니 이걸 국제적인 사건으로 키워버린 거죠. 이 사건으로 김대중 윤보선 같은 정치인에다 변호사, 교수, 목사, 저희 같은 사제, 그리고 여성들까지 줄줄이 입건이 됐어요. 한국 사회를 상징적으로 압축해 보여주는 거울이 돼버린 겁니다.”



5.
감옥에 다녀왔다. 폭력이 수반된 고문은 받지 않았지만, 잠 안 재우기, 욕설 같은 고문을 받았다. 종교인이라는 이유로 남들보단 덜했지만, ‘덜’했을 뿐 좋은 기억일 리 없다.


감옥 생활은 이게 끝이 아니었다.


1977년 출소한 그는 2년 뒤인 1979년, 또 감옥신세를 진다. 오원춘 사건(1979년 5월 안동카톨릭농민회 오원춘을 중앙정보부가 납치, 폭행하였다는 주장을 두고 벌어진 사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이다. 당시 구속집행정지 상태였던 함 신부는 영장도 없이 바로 구속되어 감옥에 갔다. 박정희 대통령의 사망소식을 들은 것도 감옥에서였다.


이후 5.18 사건을 전후해 합동수사본부에 끌려가 한참(5월 17일에 끌려가 두어 달 정도)을 조사 받기도 했다. 밀폐된 공간, 강한 냉방, 함세웅 신부는 그 뒤로 추위를 많이 탄다.



6.
무섭지 않았을까. 무서웠을 것이다. 실제로도 ‘무서웠다’고 구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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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진우: 맨 처음 끌려가 조사받을 때 심정은 어땠나요? 무섭지 않았나요?


함세웅: 무서웠죠. 무서운데 저희는 어려서부터 무서울 때 화살기도를 바치라고 배웠거든요.


그는 (손으로 아래에서 위로 화살표를 그리며 하는) 화살기도를 드리며 무서움을 떨쳐냈다. 기도 내용은 이랬다.


“하느님, 저 사람들(중정 요원) 머리를 좀 나쁘게 해주십시오. 그래서 수사를 좀 마비시켜주십시오.”


유머가 공포를 이기고,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기는 법이다. 종북 신부는 부드러우면서도 강했다.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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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 기자 정의 사제>는 함세웅 신부의 일대기다. ‘역사’ ‘정치’, ‘민주’, ‘통일’, ‘신념’을 주제로, 여러 지역을 다니며 강연한 것을 책으로 엮었다. 악마 기자가 물으면 정의 사제가 대답한다.


대충 봐도 성역은 없다. 무수한 특종 보도와 의혹 제기로 인해 100여 차례 고소, 고발을 당했다면서도(모두 무죄라고 해도) 할 말은 하는 악마 기자와 진실의 무게를 두 차례의 옥고로 느낀 정의 사제도 그렇다. 그들은 할 말을 하고 해야할 말을 한다.


이 책은 그 둘이 풀어내는 현대사를 담고 있다.



8.
함세웅 신부를 알고, 함세웅 신부의 이야기를 알지만, 나는 여전히 소시민이고, 계속해서 소시민으로 살 것이다. 함세웅 신부처럼 ‘자기가 믿는 신념, 신앙, 믿음을 실천’하면서 살아가지 못할 것이다. 아니, 의지부터 크지 않으니 안 하는 게 맞다. 


그래서 난 ‘함세웅 신부의 삶을 본받자!’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럴 자격도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이 책의 서평을 쓰며 함세웅 신부를 말하는 건, ‘알 필요는 있다’고 말하기 위해서다. 이렇게 본분을 다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잘못된 건 잘못됐다 말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가만히 있으면 안 되죠. 깨어 있어야 합니다.”


알고 나선 깨는 거다. 서서히든 한순간이든 상관없다. ‘대단히 암울하고 부끄럽고 아픈 모순의 현실’이지만, 깨면 된다.



참고
한국근현대사사전, 한국사사전편찬회, 가람기획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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