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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 저녁이었다.


나는 늘 그렇듯 ebs 라디오 <북카페>에서 과학책을 소개하기 위해 스튜디오의 컨트롤 룸에 앉아 있었다. 내가 들고 있던 대본에는 비어있는 괄호가 많았다. 잠시 후 노벨 문학상 수상자가 결정되어 방송에서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는데 아직 몇 분을 남겨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괄호 속에 누가 들어갈지 갑론을박이 이어지던 며칠이었다. 나는 은근히 무라카미 하루키의 수상을 바라고 있었는데, 다른 이유가 아니라 소위 후보자들 중 내가 책을 읽어 본 유일한 작가가 그 양반이었기 때문이다.


발표 예정 시간은 한국시간으로 저녁 8시. 생방송 개시 시간은 8시 5분. 한국 뉴스는 조금 느릴 거라 생각해서 영문 구글 검색을 계속 반복하고 앉아 있었다. 8시를 살짝 넘어서까지 아무 정보도 들어오지 않는다. 그러다가 서현진 아나운서가 기다리는 스튜디오에 들어가기 직전, 단 한 곳에서 드디어 아무 디테일도 없는 한 줄짜리 속보가 떴다 영국의 가디언이었다. 내용인즉슨,


‘밥 딜런 노벨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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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응구기 와 시옹오도 아니고, 필립 로스도 조이스 캐럴 오츠도 아닌, 물론 무라카미 하루키도 아닌 ‘밥 딜런’이라고?


국내는 물론 아직 다른 어느 국외 뉴스도 수상자를 전하고 있지 않았다. 오직 가디언 하나뿐이었다. 혹시 잘못된 것은 아닐까, 나름 흥분 속에서 PD와 작가에게 소식을 전하면서도 조심스러웠다 다시 한 번 체크했다. 아, 그새 뉴스가 퍼지기 시작한다. 확실하다. 노벨문학상 밥 딜런.


이렇게 나는 (거의) 우리나라 최초로 밥 딜런의 노벨문학상 수상 사실을 알게 되었고 (아마도 거의) 최초로 서현진 아나운서 함께 그 사실을 공중파로 알린 사람이 되었다. 뭐 별 것 아닌 일이지만 내게는 꽤나 영광스러우신 순간이기도 했다. 아니, 자랑스러웠다고 할까.


일단 모든 사람들의 예상을 깨고 대중음악인이 자그마치 노벨문학상을 받은 점, 대중음악을 바탕으로 갖고 아직도 아마추어 연주자인 내게 그 의미가 각별할 수밖에 없는 건 당연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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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요로코롬 살고 있으니


그리고 아무리 50년 간의 음악활동 기간 중 가사의 질과 영향력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아티스트 밥 딜런이지만, 노래 가사만으로, 또 한 두 대표적인 작품이 아닌 평생에 걸친 위대한 가사들을 인정받아 노벨문학상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정말 새롭고 경이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소식을 전하는 우원조차도 밥 딜런이 그 밥 딜런이 맞는지, 맞다면 최근에 새로 어떤 책을 써서 그걸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것은 아닌지 의심하기도 했다.


이런 결정을 내린 노벨상위원회의 대중문화에 대한 개방적인 태도는 애호가 입장에서 참으로 귀감이 된다 아니할 수 없다. 사실 밥 딜런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전 세계 음악계에서 수십 년간 반복되어 온 농담거리였다. 그러면서도 그가 정말로 상을 받게 되리라고 여긴 사람은 없었을 거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안 될게 또 뭐가 있나? 그 정도의 양으로 그 정도의 퀄리티로 그렇게 오랫동안 사회와 문화에 영향을 끼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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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사람들은 밥 딜런에 대해 잘 모른다. 물론 누구나 이름 정도는 알고 있다. 미국의 포크 가수라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문화의 차이와 언어적 한계 때문에 그가 팝계에서 왜 그리도 위대한 아티스트로 칭송되는지는 피부에 와 닿지 않는다.


흑인민권운동의 정점이자 미국 역사의 터닝포인트였던 마틴 루터 킹 목사의 “I have a dream.” 연설이 등장했던 1963년의 워싱턴 대행진에서 그의 자리에 대해 우리는 알지 못한다. 1965년 베트남전이 시작된 후 7월의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에서 그와 당시 연인이었던 존 바에즈, 선배 피트 시거가 함께 노래하며 반전의 상징으로 떠올랐던 사실도 알지 못한다. 그때 우리나라는 박정희 치하에서 혈맹 미국을 도와 참전을 준비하고 있었을 뿐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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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 대행진 당시 ‘Only a Pawn in Their Game’ 을 노래 중인 밥 딜런.
이 노래 직후 오른쪽 뒤에 대기 중인 마틴 루터 킹이 단상에 올라

그 유명한 ‘나는 꿈이 있습니다’ 연설을 한다.


또, 우리는 그가 어느 날 전기 기타를 들고 나와 ‘Like a Rolling Stone’을 부르며 폐쇄적인 포크 덕후들에게서 ‘유다’라는 욕을 듣고 쓰레기를 맞을 만큼 혁명적인 뮤지션이었다는 점도 알지 못한다. 더욱이 그가 사실은 로버트 앨런 짐머맨이란 이름의 유태인이며, 초기에 사랑 노래만 쓰던 비틀즈에게 사회적, 정치적, 철학적인 가사로도 음악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알려 준 장본인이라는 사실도 알지 못한다. 나아가 가창력이 부족해 노래하기를 주저하던 지미 헨드릭스에게 중얼거리듯 노래해도 괜찮다는 자신감을 불어 넣어준 인물이라는 것도 모른다.


결과적으로 그가 아니었다면 비틀즈는 아이돌 밴드로 해산하고 헨드릭스는 세션맨으로 늙어 갔을지도 모를 일이니, 이것만 봐도 밥 딜런이라는 이름이 현대 대중음악과 문화에 끼친 무게를 여실히 느낄 수 있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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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람들이 순서대로 무대에 서고 막 그러던 시절 이야기다.


이렇게 우리는 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지만, 한편으로는 부지불식간에 꽤나 익숙하기도 하다. 40대 이상이라면 지금까지 여러 가수에 의해 불려온 ‘소낙비’와 ‘두 바퀴로 가는 자동차’ 같은 노래를 알 거다. 이 곡들은 70년대 당시 해외 저작권 개념이 전혀 없던 시대 밥 딜런의 노래를 개사해 양병집이 처음 발표한 것이라는 사실.



요 버전으로 많이 들어 보셨을 거다.


또 시위 현장에서 민중가요로 자주 불렸고 안치환이 리메이크하기도 한 ‘흔들리지 않게’는 밥 딜런과 존 바에즈가 마틴 루터 킹 앞에서 불러 유명해진 피트 시거 원작 ‘We Shall Not be Moved’의 번안곡이다. 건즈 앤 로지즈의 버전으로 잘 알려진 ‘Knocking on Heaven’s Door’ 역시 원래는 밥 딜런의 대표곡 중 하나다. 올드 록 좋아하는 분들에게는 익숙할 지미 핸드릭스의 ‘All Along the Watch Tower’도 원래는 밥 딜런의 곡이다. 이런 예는 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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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사실 우원은 지금 노벨문학상 이야기를 하는 것도, 밥 딜런 이야기를 하는 것도 아니다. 문학도 잘 모르고 좀 익숙한 무라카미 하루키가 상을 받았으면 좋겠다 정도 생각을 하는 내가 노벨문학상에 대해 깊이 있는 이야기를 할 수 있을 리 없다. 우원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문화의 힘이다. 축적된 문화와 지성의 힘이 장르의 벽에 갇히지 않은 채 영향을 주고받는 21세기 현재의 열린 세상에 대해 말하고 싶은 거다. 거기에 더해 다른 부분을 포함한 노벨상이란 것 전반에 대해서 좀 논의해보고 싶고.


우리나라에서 노벨상은 과녁이자 표적이다. 온 나라가 힘을 모아 도달해야 될 지적 명예의 정점이다. 우원이 요즘 관여하고 있는 과학 분야도 마찬가지다. 수시로 목표가 설정되고 계획이 세워지고 예산이 정해지며 집행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껏 우리나라가 받은 노벨상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평화상 하나뿐이다. 물론 노벨평화상이 김대중의 목표였을 리 없다. 평생토록 민주화 투쟁을 벌인 자연스러운 결과로 주어진 거다. (지금과는 달리) 당시 우리나라의 민주적 역량이 그만큼 축적되었다고 여겼기 때문에 그 역경을 딛고 대통령이 된 김대중에게 노벨평화상이 수여됐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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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도 노벨상 수상자가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자꾸 잊는 것 같다.
하긴 이제 종북좌파의 수괴가 되어 노무현 전 대통령과 함께 수시로 부관참시 당하고 있으니.


그렇다면 나머지 분야에서 우리나라가 노벨상을 받을 가능성은 과연 얼마나 될까. 무엇이 얼마나 축적되어 있을까? 문학상 쪽에서 나름 후보라고 – 노벨 문학상에 공식 후보는 없다. 관련 단체나 미디어의 전망일 뿐 - 일컬어지는 이도 사실상 고은 선생 하나뿐이다. 다른 분야에서는 아직 현실적인 전망이 거의 보이지 않는 듯하다.


이유는 방금 이야기한 그대로다. 축적되는 것 없이 목표만을 뚫어져라 보고 있기 때문이다. 활시위를 당겨 화살을 날려 과녁을 맞추려면 일단 활을 당길 만한 근육의 힘부터 시작해서 활쏘기에 올바른 자세와 기술을 습득해야 한다. 그러면 이제 겨우 화살을 과녁 근처로 날릴 수 있다. 그러나 중간 10점짜리는, 수많은 궁수들을 양성해야 그 중에 그 한 가운데를 뚫을 수 있는 몇 명이 나오는 거다. 세상에는 오직 이런 식으로만 가능한 일들이 있다.


계획을 세우고 돈을 뿌리면 스마트폰을 만들어 파는 것 같은 일은 할 수 있다. 이미 누군가가 만든 기계를 모방해 다른 누군가가 만든 프로그램을 깔아 그럴듯하게 포장하면 된다. 하지만 그마저도 어느 순간 결함이 발생하면 진정 자신이 창조한 것이 아니기에 문제를 잘 이해하지도 못한 채 이곳저곳에서 불이나 내는 비참한 결과를 낳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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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Fast Follower는 왜 문제가 일어나는지 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정치 사회 등 모든 면에서 창피한 퇴행을 겪고 있는 이 나라, 음악 분야도 예외가 아니다. 기술 자체는 대단히 발전했다. 해외의 히트팝과 비교해서 작곡 수준이나 사운드가 뒤지지 않는 작품들이 나온다. 하지만 이번 밥 딜런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통해 우리는 대중음악의 역할이 단지 춤과 노래, 유흥 그리고 개발도상국으로의 문화상품 수출에만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대중음악이야말로 영화와 함께 대중문화 그 자체다. 그런데 그들이 저런 가사를 쓰고 노벨문학상까지 거머쥐는 동안 우리에게는 문화라고 자랑스럽게 말할만한 음악씬조차 형성되지 못했다.


훌륭한 가사를 쓰면 음악인도 노벨문학상을 받을 수 있다는 발상은 당장 과녁에 화살을 쑤셔 박으려고만 하는 자들의 머릿속에서는 결코 나올 수 없다. 세상은 변하고 있는데 우리는 헛 다리만 짚고 있는 중이다. 허나, 노벨상을 받을 만 한지는 잘 몰라도 한때 우리에게도 훌륭한 가사의 노래들이 있었다. 만약 잊었다면 김민기, 한대수, 들국화 동물원 어떤 날 같은 아티스트들의 곡들을 기억해 보자. 그 전통은 지금 어디에 처박혀 있나? 활시위를 당기는 체력과 정신력이 되기는커녕 지나간 시절의 그림자로 문화사의 기억 한 구석에만 방치되어 있을 뿐이다.


2016년, 이제 노벨문학상이 대중음악가에게 돌아가는 시대다. 우리는 반세기 전인 1976년으로 돌아가고 있다. 정치, 사회, 종교, 문화 모든 면에서 그렇다. 밥 딜런의 수상이 반가우면서도 우리의 현실이 너무 서글픈 지금 이 순간이다. 머 이 꼴에 노벨상은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우리가 쌓아 왔던 것들을 조금씩 더 발전시켜만 나가도 지금 우리에게는 감지덕지다.


그것만 하게 내버려 둬도 언젠가는 이런저런 노벨상 다 받는단 말이다. 내버려만 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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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문화를 찾아 행복으로 나누고 싶다.
진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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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딴지일보 챙타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