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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06. 15. 월요일

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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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성종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능력있는 선비를 아끼는 군주로 유명했다. 성호 이익이 하급 신료들의 의견을 정책에 반영한 군주의 예로 성종을 들었을 정도다. 성종은 회의에서 나온 의견 가운데 번득이는 것이 있으면 이 의견이 어디에서 나왔는지를 캐묻고 그것이 하급 관료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그 사람을 불러 직접 확인한 후 눈이 튀어나오는 승진을 시키는 일이 잦았다고 한다. 차천로의 오산설림이라는 책에 보면 그를 짐작케 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어느 고을 수령이 백성을 잘 돌본다는 소문을 들은 성종은 그를 서울로 불러들여 사헌부 집의를 맡겼다. 사헌부 집의는 종3품이니 현령이나 군수 정도였다면 대단한 승진이었다. 당연히 말 많고 탈 많은 삼사 관원들이 눈에 불을 켜고 입에 팽이를 달았다. 아니되옵니다. 국법이 엄연하옵니다. 부당하시옵니다. 한동안 아우성을 치던 그들에게 임금의 비답이 내렸다. 당연히 “벼슬을 거두노라.”는 항복 선언일 줄 알았던 그들은 입을 딱 벌리고 만다. 임금의 답은 “이조참의를 제수하노라.”였다. 이조참의는 정3품 당상관이었다.


말 않고 뒤에 물러서 있던 이들까지 팔뚝을 걷어부쳤다. 이것은 아니될 일입니다. 전하께서 더위 먹으신 게야. 뭣들 하고 있소 다들 엎드립시다. 새까만 고을 수령이 하루아침에 당상관이라니.


더 많은 관원들이 엎드려서 합창했다. 아니되옵니다 전하. 경국대전이고 대명률이고 이런 법은 없사옵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어떤 사람은 제 감정에 겨워 울먹이기도 했다. "아..니 되... 옵 허윽 허윽." 이만하면 임금도 기가 질리리라. 내관이 허둥지둥 달려왔다. 그래 전하도 놀라셨겠지. 이제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하고 물러서면 서로 아름다운 그림일 게야 하고 짐작하며 허리를 펴는데 갑자기 내관이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어명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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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개를 이조참판에 제수하노라.”



뭣이 참판? 참판은 종2품, 현대 정부 기관으로 치면 차관급이다. 울먹이던 사람은 울다가 멍해지고 목이 쉬던 사람은 뭐라고 소리치다가 말문이 막혔다. 이건 전하가 더위 먹은 게 아닌 거 같은데. 고을 수령을 하룻밤 사이에 이조 참판에 앉히시겠다? 우리가 이렇게 반대하는데? 불길한 예감이 좌중을 싸고 돌았다. 이게 무슨 일이지?


성미 급한 축들은 이번엔 이마에 피가 나도록 머리를 짓찧으면서 불가하옵니다 외치자고 팔뚝질을 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이러다가 이조판서도 내리시겠어요. 말도 안됩니다. 자 다시 엎드립시다. 이마에 피 안나는 사람들은 나중에 좋지 않을 거요. 자 엎드려요!” 하지만 누군가 한 말에 팔뚝질은 쑥 들어가고 말았다.


“저기요. 진짜 이조판서 시키시면 어떡하죠?”


순간 공포가 싸고돌았다. 외진 고을 사또를 사헌부 집의에 올린 것도 파격이었는데 반대를 했더니 이조참의를 내렸다. 이건 파천황(破天荒)이었다. 그런데 기를 쓰고 막아섰더니 이제는 이조참판이다. 이게 무슨 뜻인가. 너희가 이기든 내가 이기든 내 뜻을 결코 파토내지는 않겠다는 전하의 견결한 의지였다.


정말 우리 이마에 피가 나도록 머리 땅에 찧으면서 울부짖다가는 시골 사또가 이조판서로 들어앉는 일이 일어나지 마라는 법이 없다 싶은 불안감이 무럭무럭 일었고 이러다가는 더 큰 일 납니다 하는 수군거림이 삼사 관원들 사이를 삽시간에 휩쓸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은 물러서고 말았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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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일 새누리당 단독으로 황교안 총리에 대한 인사청문 심사보고서를 채택해 본회의로 넘겼다고 밝혔다. 어차피 국회에서 새누리당이 다수를 점하고 있는 이상, 또 한 번 단독 통과를 거쳐 황교안 전 법무부 장관은 국무총리 자리에 앉을 것이 확실시된다. 이에 대해 비난의 목소리 드높지만 나로서는 새누리당 의원들의 충정이 이해되는 구석이 있다. 이들은 분명 이 성종의 고사를 떠올린 것이다. 양상은 다르지만 임명권자의 고집만큼은 비슷한.


새누리당 의원들이라고 해서 어찌 국법보다 하나님의 법이 우선한다고 우기는 종교인이 종교의 자유가 규정된 헌법을 지닌 나라의 총리가 되는 것이 우습지 않을 것이며, 전관예우 등으로 인해 변호사협회에서 고발당하는 사람이 일인지하 만인지상 자리를 차고 앉음이 후세에 부끄러움임을 어찌 모르겠는가. 그들 역시 아니되옵니다 부르짖었을지도 모른다. 울먹였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누가 한 마디를 했을 것이다. “황교안이 안 되면 대체 다음은 누구겠소.”


대저 박근혜 대통령의 총리 인선을 수사학적으로 표현하자면 점강법(漸降法)이다. 정홍원 총리가 사퇴를 표명한 이래 들어선 안대희 후보는 그 뒤에 등장한 문창극 후보에 비하면 보름달과 반딧불이요, 문창극 후보는 그 뒤의 이완구 후보에 비긴다면 백로와 까마귀이며, 황교안 후보에 비하면 이완구 후보는 진돗개와 황구의 차이가 드러나지 않는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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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새누리당 의원들의 등줄기에는 식은 땀이 흘렀으리라. 그럼 다음은 누구겠소. 한 의원이 중얼거리고 답이 나왔겠지. “황교안보다 더 꼴통 기독교인.... 설마 그 빤스 목사?” 말도 안됩니다 소리 드높았겠지만 어딘가 힘이 빠졌을 터. “아니면 그.... 성추행 목사?” 다들 소름이 끼치는 판에 누군가 결정타를 날렸을 것이다.


“아닙니다. 어쩌면 각하는 부산대학교에서 애들한테 노무현 당선 부정 증거를 찾아오라던 그 교수! 최우원을 생각하고 계실지도 모릅니다!!!!”


“최....최... 최우원????”


“황교안에서 막아야 합니다. 자칫하면 우리 다 죽습니다.”


이조판서 소리에 말문이 틀어막혔던 삼사 관원들처럼 대통령의 총리 인선의 하한선을 짐작할 수 없었던 새누리 의원들은 그렇게 눈물을 머금고 황교안 국무총리 심사 보고서를 단독으로 채택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얼마나 속이 쓰리고 답답하랴. 야당 의원들에게 상의도 못하고 벙어리 냉가슴을 앓으면서 황교안 총리에 낙점을 무를 수 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성종은 변방 고을 수령을 이조판서로 올릴만한 임금이었다면 박근혜 대통령은 북한 땅굴이 서울을 관통하고 있다고 우기는 최우원 교수를 총리로 임명하고도 남을 사람이라는 사실을 그들 역시 뼈저리게 깨닫고 있었으리라. 윤창중이라는 걸출한 성추행범을 대변인으로 굳이 앉히던 그 안목을 어찌 잊는단 말인가.


그런 뜻에서 나는 새누리당 의원들의 충정에 지지를 보낸다. 그래 황교안에서 멈추자. 황교안 다음이 두렵다. 메르스다 뭐다 난리굿판인데 황교안마저 낙마된다면 저 유체이탈 화법으로 또 누구를 지목하실지 어느 귀신이 안단 말인가. 황교안 총리 그냥 하라고 하자. 장담하는데 다음 사람보다는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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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총리 후보가 될 지 모를 최우원 교수.

그냥 황교안에서 멈추자는 생각이 물씬 들지 않는가?









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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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 딴지일보 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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