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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06. 15. 월요일

펜더














수행기사 시리즈를 썼던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1년 전 일이다. 이번에는 조금 색다른 ‘의전’에 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이야기의 시작은 전라북도의 한 공공기관 연수원의 강연의뢰부터였다.


“강사님, 저희가 지방에 있고... 아시겠지만 공공기관은 강연료도 짜지만, 꼭 강사님을 모시고 싶습니다.”


수화기 건너편의 담당관은 지방이라는 지리상의 난점과 상대적으로 적은 강연료에 대해 송구스러워 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공공기관의 강연료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상식이 있는 편이다. 몇 군데 도서관 강연이나 몇몇 지자체나 공공기관의 연단에 서 본 이후 일반 사기업의 강연료와는 단위가 다르단 사실을 확인한 후였다.


문제는 강연료가 아니라 지방까지 가는 교통편이다. 지금 섬에 있는 상황이기에 어딘가로 이동하는 것이 나에게는 꽤 고역이기 때문이다. 수화기 저편의 담당관은 전주까지만 내려오면 그 다음은 배차를 해주겠다며, 달콤한(!?) 제안을 건넸다. 결국 전주 내려간 김에 친구 얼굴이나 보고 오자는 가벼운 마음으로 강연을 수락했다.


그리고 강연 전날 난 전주로 내려갔다


그곳에서 난 난생 처음 ‘수행택시기사’와 마주해야 했다. 택시업체와 계약을 맺고, 지방으로 내려오는 강사들의 교통편의를 봐주고 있었다.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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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 (웃음) 전주까지 내려오는 게 힘들지는 않으셨어요?


나 : 뭐 버스타면 금방인데요...죄송합니다. 제가 터미널을 헷갈려서.


(전주 시외버스 터미널과 고속버스 터미널을 헷갈려서 기사님을 기다리게 만들었다. 초행길도 아닌데, 이렇게 멍 때린 이유는 내 여동생 때문이다. 집에 알리지도 않고, 잘 다니던 외국계 회사를 때려 치고 개인 사업을 시작한 것이다. 부모님은 전화를 받지 않는 동생 대신에 내게로 계속해 전화를 걸고 있었던 상황이다)


기사 : 뭘요. 그나저나 집안에 무슨 일 있나 봅니다?


나 : 그게... 동생이 회사를 때려 쳐서요.


기사 : 왜요? 회사가 안 좋았나 봐요?


나 : 나름 외국계 회사에, 복지도 좋고... 연봉도 쎘는데.


기사 : 그럼 그만두고 뭐 한답니까?


나 : 지금 사업한다고 덤벼든 거 같아요.


기사 : 요즘 같은 시절에 사업하기 힘들텐데... (사이) 뭐, 어련히 생각 있어서 한 거겠지만, 가족들이 보기 힘들겠어요.


나 : (쓴웃음) 뭐 자기 인생이니 자기가 책임지겠죠.



얼마간 마가 떴다. 적막 속의 택시 안. 터널 안으로 들어가면서 택시 안은 어둠이 내렸다. 택시 안의 무거운 공기가 내 어깨를 내리누르던 그때. 슬그머니 말문을 여는 택시기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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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 제 친구가 말입니다.


나 : 예? 예...


기사 : 제 친구가 전주에서 돼지를 쳤어요.


나 : 예...


기사 : 꽤 크게 쳤어요. 종업원도 열댓 명 두고, 재산도 80억이 넘었어요. 빌딩도 한 채 있고, 집도 몇 채씩이나 있고, 돈사랑 가게까지 합치면 80억 넘을지도 몰라요.


나 : 아, 성공하셨네요.


기사 : 그렇죠. 저희들은 그 녀석 성공했다고 했어요. 돼지 치느라 바쁘긴 했지만, 이제 늘그막에(기사님 연세는 60대 중반정도였다) 취미나 찾으면서 놀러 다녀도 되겠다고...


나 : 그런데요?


기사 : 며칠 전에 자살했어요.



...반전이었다. 기사님은 덤덤하게 말문을 이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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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 왜 죽었는지를 모르겠어요. 제가 그래도 나름 친한 놈인데, 그 녀석 속내를 모르겠어요. 구제역 때도 꿋꿋이 버틴 놈이었고, 돈이 좀 막혔다는 소리는 했지만, 그래도 가진 게 있으니 더하고 빼고 해도 죽을 날까지 돈 걱정 안 해도 될 정도였는데...


나 : 사정이 있었겠죠.


기사 : (고개 끄덕이며) 사정이야 있었겠죠. 그런데... 남은 사람들은 당황스럽죠.


나 : 그러시겠죠.


기사 : (긴 한숨) 제가 핸들밥 먹어가며, 느낀 건데... 이게 다 ‘욕심’이구나란 생각을 해봐요. 친구 놈 죽고 나서 확실해졌어요.


나 : 욕심이요?


기사 : (핸들 두들기며) 저 같이 겨우 입에 풀칠하고 사는 사람들은 밥만 먹여줘도 고맙다고 하지만, 뭘 좀 가지면 더 가지고 싶어 하죠. 그게 사람이죠. 10개 가진 사람은 10개만큼의 욕심이, 100개 가진 사람은 100개만큼의 욕심이 생기죠.


나 : 그렇죠.


기사 : 사람이 높이 올라갈수록 더 많은 걸 보게 되고, 견물생심이라고, 보는 만큼 욕심이 생기는 거... 이해는 하는데, 그게 과연 옳은 건가란 생각이 들어요.



뭔가 미묘한 느낌이 들었다. 택시 안에서 법정스님을 보는 느낌이랄까?



기사 : 전주란 동네가... 그래요. 이 동네가 도시도 아니고, 시골도 아니에요. 중심으로 가 보면, 도시에 있을 건 다 있는데, 외곽으로 빠지면 시골이죠. 젊은 사람들은 일자리가 없어서 다 빠져나가지만, 저 같은 뒷방 늙은이는 여기가 좋아요. 저도 외지생활 하다 돌아왔는데. 여기가 푸근해요.


나 : (웃으며) 저도 전주 좋아합니다. 친구 놈 덕분에 자주 와요.


기사 : (웃으며) 저도 욕심이 많았죠. 친구 놈... 돼지 치는 놈도 있고, 사업 하는 놈도 있고, 정치하겠다고 쫓아다니는 놈도 있는데, 이 녀석들 보다보면 핸들밥 먹고 사는 내가 쪽 팔릴 때가 많았어요. 그러다 보니 일부러 모임 안 나가고...


나 : 저도 그래요. 제가 스스로 움츠러들어서...


기사 : 나중에 알게 됐어요. 아... 이게 다 욕심이구나. 사람이란 게 다 태어날 때 깜냥이 있는 거 같아요. 그릇이 정해져 있다는 거죠. 누구는 사발만하고, 누군 간장 종지만하고.


나 : 그릇을 키울수도 있지 않을까요?


기사 : 노력하면 키울 수도 있겠죠. 그런데, 사람들이 자기 그릇은 키우지 않고, 욕심만 그 안에 채우기만 하죠. 그리고... 제가 이 나이까지 살아보니, 그릇은 타고난 거 같아요. 가끔 그릇을 키우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런 사람은 거의 없고, 대부분은 태어날 때 그릇이 다 정해진 거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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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 (웃음) 운명론이네요.


기사 : (웃음) 운명이죠. 그런데, 간장종지라고 인생이 불행한 걸까요?


나 : 뭐, 그건 아니겠죠? 나름 세상에 나온 이유가 있겠죠.


기사 : 그거도 아닌 거 같아요.


나 : 예?


기사 : 세상에 태어난 이유는... 없는 거 같아요.



아... 택시기사님은 철학자셨다. 무학의 통찰이란 게 이런 걸까?



기사 : 그냥 우연히 이 세상에 내던져진 거 같아요. 그 안에서 자기는 특별하다고 서로 치고받고 싸우는 거죠. 자기 신세 자기가 볶는 거죠. 전 그렇게 생각해요.



세상에... 사르트르와 메를리 퐁티의 현신인가? 실존주의 철학을 택시 안에서 들을 줄은 몰랐다.



기사 : 죽은 친구 보면서 생각해봤어요. 사는 게 도대체 뭘까 라고... 전 보다시피 간장 종지만한 사이즈의 인생이잖아요. 그런데 친구 놈은 막사발만한 크기였어요.


나 : 결국은 그릇의 차이인가요?


기사 : 그릇의 크기도 중요하지만, 그거보다 더 중요한 게 그 안에 뭐가 들어갔냐는 거죠.


나 : 아...


기사 : 간장 종지만한 사이즈에 뭘 넣을 수 있을까요? 넣을 수 있는 게 별로 없어요. 기껏해야. 먹고 살 걱정? 그런데 사람들은 거기에다가 욕심을 넣기 시작해요. 이것저것 막 넣죠. 누군 외제차 끌고 다니고, 누군 50평대 아파트 살고, 그 욕심들을 채워 넣기 시작하니 그릇이 베겨나요? 그 친구도 그런 거 같아요. 그릇 크기는 저보다 크지만, 거기에 저보다 더 큰 욕심을 집어넣었던 거 같아요. 그 친구 속에 들어가 본 게 아니니 뭐라 말할 순 없지만, 그런거 같아요.


나 : 결국은 자기 그릇에 맞게 살아야 한다는 말씀이시네요?


기사 : 그릇에 맞게 사는 거 보다는 그릇에 들어갈 내용물을 잘 선택해야 하는 거죠.


나 : 아...


기사 : 자기가 그릇 안에 뭘 넣을까라는 생각해야죠. 넣을 게... 당장 이렇게 보면, 없어 보여요. 그런데 잘 찾아보면, 넣을 게 얼마나 많은데요. 요즘 사람들은 거기다가 다 욕심을 채워 넣죠. 그러니 그릇이 깨지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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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다.



나 : 그럼 그 그릇에 뭘 넣어야 하죠? 아, 우선은 자기 그릇 크기를 알고, 그 적성에 맞게 살면 되겠네요? 간장 종지면, 간장을 넣으면 되는 거고...


기사 : (너털웃음) 그게 가능하겠어요?


나 : 예?


기사 : 그 천직이란 거 있죠?


나 : 예.


기사 : 그 천직이란 걸 발견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요?


나 : 아...


기사 : 이 나이 먹도록 이 나라에서 살았는데, 천직이란 거 찾는 사람 몇 보지 못했어요. 물론, 딱 들어맞는 안성맞춤으로 자기 업을 찾는 경우가 있죠. 그런데, 그 업이란 게 자기 성격이나 취향이랑 100% 맞는 경우... 거의 없죠. 다 자기가 거기 맞춰 사는 거죠. 생각이란 세상살이랑 같을 수가 없잖아요? 방송이나 그런데서 꿈, 꿈 그러는데... 꿈은 한 순간이고, 생활은 평생이잖아요. 그러니까 꿈을 이룬 사람이라고 방송에 나오는 거잖아요. 개나 소나 다 꿈을 이룬다면, 그게 방송에 나오겠어요?


나 : 그렇죠. 꿈꾸는 대로 세상이 돌아가면, 그걸 방송에 내보낼 이유는 없겠죠.


기사 : 그렇죠. 전 그래요. 꿈꾸는 거 좋다. 자기 목표대로 사는 거 멋있다. 다 말하죠. 그런데, 그게 어렵죠. 거기에 인생을 걸어서 성공하는 것 보다 실패하는 경우가 더 많잖아요? 물론, 각오에 따라 다를 수 있겠지만 그것도 결국엔 운이잖아요. 그 다음에 남는 건 인생이잖아요. 그 인생을 살아가는 건 결국 그 사람 몫이고.


나 : 결국 생활이 우선이다?


기사 : 그렇게 말하면, 제가 나쁜놈이구요. 젊은 사람들에게 꿈꾸지 말라면, 그게 잘못된 거죠. 다만, 말하고 싶은 건 꿈을 꾸되 속으로 꾸라는 겁니다.


나 : 속으로 꾸는 건 어떤 건가요?


기사 : 내실을 다지라는 겁니다. 나 뭘 할 거야라고 말하는데, 어딘지 겉멋에 든 거 같아요. 빈 수레가 요란하다고 해야 하나? 하긴, 요즘은 그렇게 말하는 젊은이들도 없어요. 죄 취직하기 바쁘니... 빈 수레라도 끌었으면, 좋겠는데...


나 : 하긴 그렇죠. 요즘은 전부 다 공무원 한다고 난리니...


기사 : 업이 우선이죠. 먹고 사는 게 얼마나 중요해요?



기사님의 ‘업’의 개념은 단순호쾌했다. 내 입에 먹을 게 들어가게 만드는 행위 모두가 ‘업’이라는 것이다. 거지도 훌륭한 직업이라 설파했었다.



나 : 그럼, 자기 그릇 사이즈를 알고, 그 안이 넘치지 않게 내용물을 담는 인생이 좋은 인생이란 건가요?


기사 : 어려운 말은 모르겠고, 최소한 ‘욕심’만 버리면 세상살이가 그렇게 빡빡하지는 않을 거라는 거죠. 견물생심이 맞아요. TV나 인터넷에서 보여주는 것 때문에 사람들 눈높이만 올라갔어요. 욕심이 나쁘다는 건 아니에요. 그릇 크기는 10인데, 욕심이 100이면 그릇이 깨지죠. 그 그릇에 넣을 다른 것들도 있을 텐데, 그거 다 버리는 거죠. 그럼 인생 파탄나는 겁니다. 자기 그릇을 보고, 그 안에다가 뭘 넣을지를 생각해야죠. 그래야 인생이 안 깨집니다. 전 그렇게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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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로의 택시기사님은 그렇게 자신만의 인생철학을 설파하셨다. 자기 그릇의 크기를 알고, 그 안에다가 뭘 넣을지를 고민하는 삶. 그게 인생의 시작이라는 말이 울림으로 다가왔다.

 

 

운명론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지만, 태어날 때(환경이) 이미 사람의 그릇이 정해진다는 건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다.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릇은 정해졌다지만, 그 안에 뭘 담을까로 인생은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해 보게 됐다. 강연하러 갔다가, 거꾸로 강연을 들은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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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 딴지일보 홀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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