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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08. 09. 금요일

kuru






1. 60년대 유행가 


내가 살던 서울 변두리 서민 동네에 TV를 가진 집은 없었다. 저녁밥을 먹은 동네 조무래기들은 골목에 모여서 놀았고  여자아이들은 주로 고무줄을 했다. 그때  부르던 노래 중에...

 

"♬♪ 무찌르자 오랑캐 ♬♪ 몇천만이냐? ♬♪ 대한남아 가는데 ♬♪ 적이로구나" 


"♬♪ 무찌르고 말테야 ♬♪ 중공 오랑캐 ♬♪"

 

그랬던 중국이... 서울의 중심 명동 한복판에 반공맹방이라던 자유 중국은 국호마저 대만으로 격하되는 수모끝에 국기인 청천백일기를 내리며 피눈물을 흘리며 철수했고 그 자리를 중공오랑캐 중국이 오성홍기를 휘날리며 차지했다. 그리고 어느 정신나간 종편 앵커가 비행기 사고를 보도하면서 '한국인이 아닌 중국인이 죽어 다행'이라는 발언을 했다가 대통령까지 나서서 수습 해야하는 세상이 되었다

 

저 당시 사내아이들이 부르던 노래 중에 이런 곡이 있었다

 

"♬♪ 도끼로 마빡 찍는 고재봉...♬♪ 돼지 같은 주둥이의 동백아가씨 ♬♪ 이미자가 최고야. 러브포션 넘버 나인"

 

또는 공군의 활약상을 다룬 영화 <성난 독수리>의 주제가를 개사해서

 

"♬♪ 도끼를 마음대로 ♬♪ 휘두르는 사나이 ♬♪ 그 이름은 고재봉 ♬♪ 성난 고재봉"

 

이 글을 쓰기 위해 저 '러브 포션 넘버 나인' 원곡을 찾아 듣는 순간까지 나는 저들이 '비틀즈'라고 생각했다. Searchers라는 밴드로 비틀즈보다 데뷰가 몇년 빨랐고, 60년대 초중반 엄청난 인기를 누렸던 그들이지만 비틀즈의 데뷰로 잊혀졌단다.

 

I took my troubles down to Madame Rue

You Know that gypsy with the gold-capped tooth

She's got a pad down on Thirty-Fourth and Vine

Sellin' little bottles of Love Potion No.9

 

이 영어 가사 부분에 저 '도끼로 마빡 찍는 고재봉'을 넣으면 정확하게  맞는다

 




2. 도끼로 마빡 찍는 고재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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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판받는 고재봉

 

고재봉. 1963년 강원도 인제의 군부대에서 상병으로 복무중, 대대장 박병희 중령에 대한 원한을 품고 일가족 6명을 도끼로 살해한 죄로 군법회의에서 총살당한 사람이다


대대장 당번병으로 사택의 장작을 패고 물을 긷고 청소하는 등 잡일을 했던 그는 어느 날 물을 마시러 사택 안으로 들어갔다가 작은 물건 하나 (군화라는 설이 있다)를 들고 나왔고, 이를 식모(지금의 가정부로 저 당시에는 주로 십대 후반의 소녀 가정부를 식모라고 불렀다)에게 들키고 만다.  


식모는 그 동안의 도난사건이 모두 그의 짓이라고 단정하고 대대장에게 말하겠다며 팔팔 뛰었다. 화가 난 고재봉은 들고 있던 도끼로 죽여버린다고 협박했고, 그 결과 살해협박죄까지 뒤집어 쓰고 육군형무소에서 7개월을 복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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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고메리 크리프트와 프랭크 시나트라가 열연했던 영화 <지상에서 영원으로>



<지상에서 영원으로>라는 영화가 있다. 프랭크 시나트라가 보초근무중 무단이탈한 죄로 영창을 간다. 영창의 담당 헌병하사관은 얼마 전 그와 술집에서 싸운 뒤 앙심을 품고 있어 모진 가혹행위를 했고, 그걸 견디다 못한 그는 탈옥, 몽고메리 크리프트의 품에서 숨을 거두면서 이런 유언을 남긴다.


"절대로 헌병대하고 시비 붙지마... 정말  무서운 놈들이야."


부대 나팔수였던 프랭크 시나트라는 한밤중 그를 위한 진혼곡을 연주해 전 부대원을 잠못들게하고, 그 헌병하사관을 찾아가 친구의 복수를 하고 죽는다. 이 영화는 대힛트도 했지만 당시 미군영 내의 비리와 모순, 특히 군 영창제도에 대한 자성으로 이어져 대대적인 개선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60년대 초, 우리군의 육군형무소 복역은 얼마나 혹독했을까. 작은 실수로 끔찍한 고통을 겪어야했던 고재봉은 복역내내 복수의 이를 갈았고 출소 후 새벽, 박중령의 사택으로 찾아가 박중령과 부인, 어린 아들과 딸, 가정부까지 모두 무참히 살해했다.


어이 없게도 그가 교도소 복역중, 박중령은 다른 부대로 전속 가고 그 사택에는 이득주 중령 가족이 살고 있다가 도끼에 난도질 당했다.

 



3. 이득주 중령은 누구


6.25 개전 이후 우리 국군은 패전과 후퇴를 거듭했다. 충북 증원군 동락국민학교에 근무하던 젊은 처녀 여교사 김재옥은 갑자기 들이닥친 인민군 48연대에게 국군은 이미 철수했다고 말하며 안심시키고, 병력과 무기 경계배치상황을 파악해서 인근 산으로 후퇴 중이던 국군을 찾아가 제보한다.


국군은 이 귀중한 정보를 가지고 기습공격해 인민군 2186명을 사살하고 132명을 포로로 잡는 개전 이후 최대의 승리를 거두고 이승만에 의해 7연대 부대원은 전원 일계급 특진한다.


그 부대의 젊은 소대장 이득주 소위는 김재옥 여교사와 결혼했고, 그의 전과는 국민학교 교과서에 반공무용담으로 실렸으며 기념탑이 세워졌다. 동락국민학교에는 김재옥 기념관이 건립되었고 임문택 감독에 의해 <전장과 여교사>라는 영화까지 만들어진다.

 

이 이야기는 7, 80년대에 해마다 6월 25일 즈음해서 방송에서 드라마로 제작되었고 나는 라디오로 들었던 기억이 있다. 김재옥 여교사가 후퇴만 하는 국군을 깊은 산속까지 찾아가서 이렇게 분노의 일갈을 한다.


"전쟁나면 아침은 서울에서,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게 먹겠다라고 큰소리 치던 국군이 왜 이렇게 후퇴만 하느냐?"


그러자 고개 숙이고 듣기만 하던 국군이 심기일전 기습공격을 감행해서 대승했다는 스토리였다. 



전장과여교사.jpg

<전쟁과 여교사> 



그러나 이 동락전투와 여교사 반공신화가 창조경제 창작소설수준이라는 의혹이 훗날 같이 근무했던 동료교사들에 의해 제기된다. 김교사와 충주사범학교 동창이자 동락국민학교에 같이 근무했던 이용제 교사는 "인민군이 동락학교에 오기 전인 7월 6일, 김교사와 함께 학교를 빠져나와 동료 엄익진 교사의 집에 피신해서 같이 있다가 9일, 학교에 가보니 인민군 시체가 즐비했고 이 기간중에도 김교사와 계속 같이 있었다" 라고 주장한다. 

(1993년 6월 26일 한겨레 13면)




4. 70년대 말, 한국군대


봄, 여름, 가을에는 두 시간이던 보초근무 시간이 혹한기에는 병사를 동상으로부터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1시간 반으로 줄어든다. 30분 전에 일어나 방한복을 잔뜩 껴입고 힘들게 걸어가 교대하면, 교대한 인원이 돌아오는 시간도 30분 이상 걸린다. 한정된 병력으로 근무 시간을 저렇게 시행하면 하룻밤에 한 번만 경계근무를 하면 되던 것이 혹한기에는 두 번하게 된다. 게다가 '경계취약시간은 고참병 배정'이라는 이유로 고참들은 취침 시간에 한 번만 보초근무를 서고, 신병이나 졸병은 취침 시간대에 두 번, 심지어 세 번의 보초근무를 서게 되면서 하루 두세 시간 이상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방한복을 잔뜩 끼어 입고 단독군장에 철모를 쓰고 낮은 야산 몇개를 끼고 형성된 외곽 철조망까지 걸어가면 그 한겨울에도 땀이 날만큼 힘들다. 이렇게 야간 밤샘행군을 하다시피하고 잠을 제대로 못잔 병사들, 특히 신병이나 졸병은 지칠대로 지쳐 버린다.


부대장은 그 사병들에게 한겨울 캄캄한 새벽 6시, 아침 점호 때마다 애국가를 4절까지 부르게 했다. 그것도 모자라 자신이 직접 1호차에 선탑해서 Km 숫자를 측정한 구보 코스로 장거리 구보를 시켰고, 매일 제대로 구보하는지 감시할 수 없으니 자신이 잠자고 있는 1호 관사 옆을 지나가도록 구보 코스를 지정하고 그곳을 지날 때는 큰소리로 군가를 부르게 했다. 그 당시에도 보초 경계근무에는 절대 열외병력이 없도록 하라는 지시가 있었다.


비슷한 시기에 입대했던 동기병 L이 있었다. 부대 전입 더블백 동기도 아니고 내무반도 달라 지금은 그의 이름도 기억 못하지만, 당시 우리나라에서 알아주는 큰 규모의 유명한 한정식 식당과 관련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1호 관사 당번병으로 모든 것에서 열외였다. 점호, 훈련, 사역, 집합, 보초근무도... 그는 관사에서 추리닝 바람으로 지냈고 가끔 공용외출증을 끊어 찬합들고 그 식당에 가서 부식을 얻어 오는 게 일이라면 일이었다.


우리 군의 사기를 꺾고 허탈하게 만드는 건 고된 훈련이나 근무가 아니라 바로 저런 것이었다. 우리 부대의 부대장 계급은 대령이었다. 대령이 이럴진대 만약 장군이라면...? 가늠조차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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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여성이 군복무를 했더라면 


서울중앙지법 민사 48부(재판장 여미숙)는 자신을 머슴처럼 부리는 상관의 횡포에 못견뎌 군 복무중 스스로 목숨을 끊은 모 씨의 유족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 '국가는 7700만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2001년 육군에 입대한 모 씨는 부대참모장의 운전병이었다. 참모장은 규정을 위반해 출퇴근 만이 아니라 외부약속이 있을 때나 주말에 집에 갈 때에도 관용차를 이용했다. 참모장은 그 외에 관사청소나 빨래 잔심부름을 시켰고 자신의 강아지를 돌보게 했다.


결국 모 운전병은 보고 없이 잦은 외출을 한다고 간부들의 질책을 받고, 휴가 때 인수인계를 잘못했다고 폭언과 심한 질책을 받자 2002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헌병대는 '휴가중 인터넷 게임을 하다 게임 아이템을 훔쳤고 이때문에 형사처벌을 받을 것을 우려해 자살했다'라는 엉터리 수사결과를 내놨다. 수사 보고서에 적힌 부대원과 지인들의 진술도 모두 조작됐다.

(2013년 7월 24일 한겨레 신문 펌)

 

이나마도 유족들이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 조사를 요청해서 7년 만에 드러난 진실이었다.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 때 출범했다.


1963년 고재봉의 도끼만행사건 이후 2013년에 이르도록 우리 군의 저런 모습은 그다지 달라진 게 없다. 군대는 국민의 것이며 국민은 나라를 위해 군대에서 신성한 병역의무를 하는 것이지, 부대장의 사택에서 부대장의 아들 딸 학습 전담 도우미를 하고, 머슴살이를 하러 가는 게 아니다. 우리나라가 이스라엘처럼 여성도 군 복무를 했다면, 아들은 부대장 사택에서 머슴질 할 때 딸은 식모살이와 계집종 노릇을 했을 거다.




6. 행불상수


군 본연의 임무에 충실한 참군인은 오히려 진급에서 제외되고 저런 물 좋은 병사 잘 골라내서 적재적소에 배치나 잘하는 정치군인은 유능한 장교 하사관으로 인정 받아 진급한다. 터무니 없는 과장이라고? 여기, 그 증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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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행불보온병자연산 상수는 억울하다. 모친이 일자무식이라 영장이 뭔지 몰라(변소에서 쓰라고 국가에서 준 휴지인 줄 알고 써버렸을지도 모른다) 군대를 못간 상수가 폭탄과 보온병을 어떻게 구별하겠는가? 바로 옆에서 대한민국 자타가 공인하는 포병전문가라는 황진하 의원이 이렇게 알려주니 추호도 의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작은 건 76.1mm 같고, 큰 것은 122mm 방사포탄으로 보인다."


저 코메디는 전세계 해외토픽이 되어 대한민국 군의 얼굴에 먹칠을 했다. 우리 국민은 부모님이 갑자기 돌아가셔서 27세에 소녀가장이 된 사람이 6억 원(당시 은마 아파트 30채 값)이라는 거금을 부당하게 받았어도 다 이해하고 지지하는 인간미가 넘치는 민족인데 저런 가슴 아픈 가족사를 공개한 상수를 이해 못할 리 없다. 상수야, 돌아와라...(아부지 양복 줄여 놨다)




7. 황진하와 꼿꼿장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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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하


69년 육군 사관학교 졸업(25기). 포병 소위로 임관. 5군단 포병여단장 역임.

보국훈장(국선장, 천수장, 삼일장)

유엔근무공로훈장

미국공군수훈훈장

미국공로훈장

02년 사이프러스 UN 평화유지군 사령관(한국인 최초)


포병 소위로 군 생활을 시작해서 포병 여단장을 거쳐 별 3개 중장으로 예편한 대한민국 누구나 공인하는 포병전문가로 17대 국회의원선거 당시 한나라당이 외교안보분야 전문가라며 영입하였으나 정작 보온병과 폭탄을 구별못하는 인재다.


그런 인재가 이번에는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열람위원단장'이란다 그래서 이런 주장을 했다.

 

1. 새누리당에는 즉각 수사의뢰할 것을,

2. 민주당에는 회담록을 찾을 수 있도록 수사에 적극 협조할 것을,

3. 문재인 의원에게는 회담록 존재 여부 또는 행방관련 진실을 국민 앞에 명명백백히 밝힐 것을 촉구한다.

 

행여 대화록 열람하다가 볼펜이나 만년필이라도 나오면 이번에는 M2중기관총(캘리버 50) 실탄이라고 하지 않을까 심히 걱정된다.

 

맨 왼쪽이 M2중기관총 탄환,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M16 또는 K2소총탄환



전 세계에 유래가 없는, 국가 정보원이 국가 기밀을 함부로 공개하는 전직 장군 출신의 국정원장. 전임 대통령의 정상회담 대화록을 멋대로 해석하고, 게다가 발췌본을 작성하면서 노무현 대통령이 김정일 위원장과의 대화에서 '나' 라고 한 것을 '저'라고 낮추고 위원장 호칭 뒤에 '님'을 붙이지 않았는데 머리 조아리며 극존칭을 쓴 것처럼 악의적으로 왜곡 조작하고, 'NLL 이걸 바꾼다 어쩐다가 아니고 옛날 기본합의서의 연장선에서 협의해 나가기로 하고...'는 아예 삭제해서 보수를 자칭하는 언론들이 이걸 1면 대서 특필하게 만들었다. 


그러다 뉴스타파에 의해 사실이 드러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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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오타일뿐이다."


이게 말이냐, 막걸리냐? 노통의 2007년 대화록이 NLL포기라면, 1991년 12월 13일 노태우 정부의 남북기본합의서 10조 '남과 북의 해상불가침 경계선은 앞으로 계속 협의한다'는 조항은 해상 한계선에 대한 개념이 분명하지 않다는 걸 우리 스스로 인정하고 시비의 빌미를 준 것 아닌가?  

 

1996년 7월 16일 국회본회의장에서 이양호 국방장관은 "서해에서 북괴 함정이 내려오는 것은 정전협정위반이 아니다. 정전협정과 관계 없이 우리가 설정한 선이라 넘어와도 괜찮다. 엄밀하게 따지면 공해상에 우리가 일방적으로 그은 선이다  넘어와도 상관없다."고 말했다. 


당시 조선일보는 이에 대해 '바다의 경우는 남북간의 의견이 엇갈려 지금까지 정해진 경계선이 없다. 바닥에 말뚝을 박을 수도 없고... 이 점에서 이양호 장관의 답변은 맞는 것이다.'라고 보도했다.


노무현 대통령의 발언이 영토선 포기라면 'DMZ를 평화공원으로 만들겠다'는 휴전선 포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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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남북정상회담 당시 유일하게 김정일 위원장에게 허리를 굽히지 않고 악수했다는 이유로 우리 언론에 의해 하루 아침에 스타가 된 '꼿꼿장수'. 정상회담 당시 노통을 수행했던 국방장관으로 그후 남북국방장관회담에도 참석했고 당시 '소신껏 일하고 오라'고 말한 대통령의 전권을 위임 받았다고 큰소리쳤던 당신은 누구 보다도 그 당시 진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다.


영토선을 팔아먹은 매국노라며 노무현 전 대통령이 공격을 당하고 있는 지금, 그런 당신의 엉거주춤한 침묵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노통이 당신에게 부여했다는 전권이 '영토선 팔아먹고 오라'는 비밀지령이었는가?


그렇다면 정상회담이후 'NLL을 지킨 것이 성과'라고 말한 건 무엇인가. 국방장관회담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는 NLL을 팔아먹지 않은 명령불복종으로 중징계 당했어야 하지 않는가?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던 시대도 아니고 장군 출신이 정치하는 걸 비난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대한민국의 군을 대표하던 장군이 정치를 할 때는 그 당의 정강 정책이 맞는지 살펴도 보고, 자신과 정견을 같이 하는 사람들의 정당을 찾아 입당하거나 창당하는 게 바른 길이다.


당당하고 소신 있는 군인의 상징 '꼿꼿장수'라고 보수 언론이 띄워주는 그의 진면목은 당시 민주당 손학규 대표를 만나 "나는 참여정부 사람이다. 60만 군인의 명예를 위해서 비례대표 2번을 달라"고 했던 것에서 드러났다. 


손대표는 심지어 저 요구를 수락했다. 그러나 그 후 한나라당에서 비례대표 1번을 주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민주당과의 약속은 헌신짝처럼 던져버리고 한나라당에 입당하는 모습에서 그는 더 이상 '꼿꼿장수'가 아니라 전형적인 기회주의자이자 양다리 장수가 되었다.

 



8. 꼿꼿장수, 함부로 쓰지마라


임진왜란 당시 땅 위에는 명나라 장군 이여송이 있었고 바다에는 수군 도독 진린 장군이 있었다. 훗날 임진왜란으로 국력을 다한 명은 청에게 멸망 당하고 진린 장군의 후손들은 '원수와 하늘을 같이 할 수 없다'며 선조인 진린 장군이 출정했던 조선으로 귀화, 광동 진씨의 시조가 되었다.


진린 장군은 처음에는 조선과 조선의 수군을 함부로 무시하고  자신의 뜻대로 조선 수군까지 지휘하려 했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의 인품과 능력을 겪어보고는 그후 충무공을 부를 때 반드시 '이야(李爺)'라는 존칭을 쓰며 충무공을 존중했고, 명나라 조정에 충무공의 전공을 보고하여 만력제가 충무공에게 8가지 선물을 보내게 한다.


한마디로 나라는 엉망진창이었어도 그 당시 충무공은 바다에서 전시작전권을 지켜냈다. 진린장군은 충무공에게 감탄하고 이런 제의를 한다.


"이야(李爺)!  이야는 조선 같은 작은 나라에 있을 사람이 아니오... 나와 같이 중국으로 가십시다. 가서 천자를 뵙시다. 이야는 중국처럼 큰 나라에서 천하를 상대로 큰 일을 할 인물이오. 반드시 천자께서는 중책을 주실거요."

 

충무공... 그는 이 땅에서 태어난 또 한 사람의 바보였다. 중국에서 저런 제의가 오면 응당 이렇게 하는 게 권력과 부귀영화를 움켜 잡는 거다.


"나는 조선 수군을 대표하는 사람이오. 조선 수군의 명예를 위해서 비례대표 2번을 준다면 중국으로 가겠소."


왜적과 목숨 걸고 싸우는 장군을 돕지는 못할망정 온나라가 시기 질투 모함으로 몰아세워 뒤에서 죽이려 드는 조선 땅에 무슨 미련이 남아 겨우 목숨을 구해 백의종군하는 수모를 당하고, 그와중에 가장 사랑하던 아들 면이 왜적에게 처참하게 죽고  모친의 부음을 듣고도 백의종군중이라 장례조차 치르지 못하는 고통을 난중일기에 '가슴을 치고 뛰며 슬퍼하니 하늘의 해조차 캄캄하다'라고 쓰면서도 진린 장군의 제의를 거절한 바보다.


결국 충무공은 목숨까지 바쳤지만 사후 수백 년간 우리 역사에서 그저 그런 장수로 대접 받았다. 민족의 성웅으로 떠받들기 시작한 건 1960년대 후반 국민총화의 구심점을 찾으며 현충사를 크게 중건하면서부터다. 


'꼿꼿장수'라는 명칭, 함부로 쓰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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