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지들 특히나 TOP 5에 들어간(여기에 중앙 경제지도 포함시켜야 할 것이다) 이들은 다른 기자들과 다르다. 19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TV 기자들은 ‘병신’들이나 가는 곳이었다. 경향신문사의 경우,
“신문에 남을래 MBC 갈래?”
라고 기자에게 선택권을 주면, 10명이면 10명 다 신문사에 남겠다고 했단다. 지금으로선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종편 기자들을 포함해 케이블 TV, 지상파 방송사 기자들의 부심은 하늘을 찌른다. 같은 의미로 중앙일간지의 경우에도 그 부심은 하늘을 찌른다. 그러나 거기에는 어떤 ‘그늘’같은 게 느껴진다. 묘한 열등감? 분노?
“내가 저것들 보다 더 잘났는데...”
라는 그런 느낌? 서울대 법대 간 놈이 연세대 의대 간놈을 보며,
“저 백정새끼”
라고 욕하는 느낌이랄까? 내 개인적 느낌이지만, TV기자보다는 신문기자가 ‘더’ 기자답다. 매체 파워는 TV가 월등히 앞서지만, 기사로 조질 때 보면 활자를 매만지는 그들은 문장 하나하나, 단어 사이사이마다 빼곡히 적의를 담아낼 수 있는 ‘능력자’들이다.
좋은 기사 따위는 필요 없다. 좋은 글은 광고나 유가기사를 사면 된다. 기자들의 ‘힘’은 역시나 ‘까는 글’에서 나온다. 그 전투력에 있어서만은 TV기자들보다 신문기자들이다. 능력은 되는데, 주변 환경이 받쳐 주지 못하는 이들의 한풀이라고 해야 할까? 몇 년 전 중앙일간지의 편집장과 술자리를 하게 됐는데, 대뜸 내게 푸념을 했던 기억이 난다.
“돈 벌고 싶으면 기자하면 안 되지.”
요즘 어린 기자들은 자기 친구들 직장과 언론사를 비교한다는 것이다. T의 경우는 그래도 업계 TOP 5 안에 들어가는 연봉을 지급하는 곳인데, 신입 기자들은 자꾸 대기업에 입사한 친구들이나 지상파 방송사에 입사한 이들과 연봉을 비교한다는 것이다. 그 연봉의 차이만큼 그들의 분노와 울분은 차곡차곡 쌓이게 된다는 것이다.
편집장은 언제나 말한다.
“돈 벌고 싶으면 하루라도 빨리 나가라고”
문제는 그 울분과 분노를 고스란히 받아내야 하는 건 나와 같은 ‘을’들이란 점이다. 분명 말하지만, 중앙일간지와 경제지 기자들은 나에게 있어서 갑중의 갑이다.
인터넷 찌라시의 기레기들은 목에 핏대를 올리며 자기들도 ‘기자’라고 떠벌리고 다니지만, 이것들은 기자가 아니라 각다귀들일 뿐이다. 기자라면 최소한 맞춤법은 떼고 글을 써야 하는 게 아닐까? 아니, 맞춤법은 실수라 넘어갈 수 있겠지만... 그래, 광고영업을 하면 안 된다. 광고영업을 하는 순간 그들은 야인시대의 종로 패거리로 전락한다. 즉, 깡패란 소리다.
D의 등장
이 회사에 입사하고 나서 제일 공을 들였던 이가 바로 D이다. 중앙 경제지. 거기다가 경제부 산업유통 차장이 바로 D였다. 우리에게 있어선 VVIP같은 존재이다(중앙경제지 편집장 ‘님’들은 우리에겐 신과 같은 존재이다!). 그 정도 연차에 있는 인물이라면, 오다가다 한 두 번쯤 이름을 들어봤거나 술 한 잔 받아봤어야 하는 게 정상인데, 난 안면이 없었다.
대행사와 안면 있는 기자, 동기들에게 연락을 넣었다.
“D? 걔가 산업 유통 쪽에 있어?”
그들도 놀라는 기색이 역력했다. 알고 보니 D는 문화부 출신이었다고 한다. 드라마와 영화 PPL을 진행하던 K는 D에 대한 기억이 가장 많았다.
“아, 간다간다 하더니 갔네?”
“어떤 애야?”
“배운년이고...”
“배운년이니 거기 들어갔겠지.”
“글 잘 쓰고...”
“문화부에서 굴렀으니 글이야 잘 쓰겠지.”
“프라이드 강하고...”
“야, 프라이드 없는 기자 있디? 어촌일보 발행하는 이장님도 연필 쥐어주면 콧대가 승천해!”
“아니아니, 진짜 프라이드 강해. 어지간한 애들은 사람 새끼도 아냐. 중전마마가 무수리 대하듯 하지. 걔가 연예인... 뭐 한류스타나 뭐 그런 애들 전담으로 인터뷰 따고 그랬어. 패션지에서 리쿠르트 제안도 여럿 받았고, 아마 책도 한 권 냈을 걸?”
“그럼 방송이나 나갈 것이지 생뚱맞게 산업유통으로 들어 온 거야?”
“...승진?”
잠정적으로 D는 ‘야망 있는 년’으로 분류됐다. 가장 골치 아픈 케이스가 이런 경우다. 여자가 야망을 품으면, 주변이 괴로워진다. 특히나 그 직업이 ‘기자’라면, 주변 사람 여럿이 피 본다.
(요즘 유행하는 ‘여성혐오’와는 연관이 없다. 어디까지나 이 바닥에서 내가 겪은 경험칙을 근거한 것일뿐이다)
D에 대한 정보를 취합하면 할수록 D의 상황이 구체적으로 그려지기 시작했다. 마케팅 팀에서 드라마 PPL을 담당했던 박대리를 불러다가 D에 관한 정보를 다 끌어 모았고, 대행사 쪽에 연락을 넣어 D가 근무하는 B 경제지 내부사정을 알아보도록 지시를 내렸다. 첫 인상이 중요하다. 이미 마음속에서 대충 결론은 내린 상황이었다.
“달라는 건 다 주자.”
은혜를 베푼다고 해야 할까? 아니, 몸을 사리는 것이다. 중앙지의 경우 평기자들은 광고영업을 하지 않는다. 중앙지나 메이저 언론사들을 어떤 식으로 분류하는지 모르겠지만, 내 기준은 오로지 하나다.
“평기자가 광고 영업을 하지 않으면, 그게 중앙지다.”
단순하고 명쾌하지 않은가? 오컴의 면도날을 떠올리면 된다. 하나의 사실을 증명하는 두 개의 문장이 있다면, 단순한 걸 선택하라고 하지 않는가?
그러나 아무리 중앙지라도 간부가 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실적’
특히나 차장 단위가 되면 그 ‘은근한’ 프레스가 장난이 아니라고 들었다. 위로 올라가려면, 회사의 경영실적 개선을 위한 ‘성과’를 보여줘야 한다. 우리들은 그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부장이 되고, 데스크에 앉으려면 이제 글만 잘 써선 안 된다. 그에 버금갈만한 ‘영업실적’이 필요하다. 난 그녀에게 베팅을 하기로 결심했다.
“어지간하면 다 들어주자.”
문화부에서 건너 온 생판 초짜의 산업유통 차장. 분명 실적에 대한 압박을 받고 있는 게 분명하다. 지금 좋은 분위기 만들어 놓으면, 여러모로 편해질 것이란 결론을 내렸던 것이다.
준비
예상대로 D는 우리에게 연락을 했다. 조금 빠른 템포에 무신경한 목소리, 말 속에 토씨가 하나씩 박혀있는 어투. 전형적인 직장상사? 야망 있는 여기자의 모습이었다.
개념 없는 신입 소위가 연대 행보관 앞에서,
“자네 왜 경례 안하는가?”
그런 분위기로 읽힐 수도 있지만, 그녀는 신입 소위가 아니다. 그녀는 군대로 치면 대대장 짬밥을 먹었다고 볼 수 있다(물론 그녀가 주로 후방 보급부대에서 일했고, 여기는 최전선이라는 문제지만 말이다). 그녀와의 첫 통화 뒤 난 내 전결 홍보비 집행 금액을 최대한 아끼기로 결심했다.
“언제 어떤 일이 터질지 모른다.”
그녀가 무리하고 급박한 요구를 해오면, 내 선에서 최대한 받아야 한다. 그렇다면, 실탄이 필요하다란 결론이었다. 일단 내 전결 안에서는 최대한 그녀의 요구를 맞춰주자고 결론을 내렸고, 혹시나 모를 상황을 상정해 본부장실을 찾아갔다.
“이번에 B의 산업유통 차장이 바뀌었습니다.”
“어, 그래? 누구? 홍XX?"
“아뇨, D라고 문화부 쪽에서 날아왔습니다.”
“문화부?”
뜨악한 표정의 본부장에게 저간의 사정과 D의 느낌을 말했다.
“그래서?”
“어지간한 건 제 선에서 다 받아줄까 합니다. B랑은 틀어져서 좋은 거 하나 없고, 또 업계 안에서도 젠틀한 편에 속하니까요.”
“그렇지...”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는 건데, 제 수비범위 밖에 빠져나가는 건 본부장님이 커버해주셨으면 합니다.”
간단히 말해서 B와 D가 연관된 품의서가 올라오면, 바로 결제해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다. 눈치 빠른 본부장은 중역의자에 깊게 몸을 파묻더니,
“얼마?”
“혹시 몰라서 그런데, 전면광고 한 번 쳐달라 그러면 그 정도는 한 번 쳐 줄려구요.”
“본판?”
“본판이든 섹션이든 한 번 정도는 쳐줘야 할 거 같아서요.”
“B 본판 1면이 얼마지?”
“지들 말로는 6천정도 하는 걸로 아는데,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그리고 본판 1면은 생각 안하고 있습니다. 무리하면, 증권면이나 사회면... 제 예상은 섹션 쪽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섹션이 얼마지?”
“2천 내외인데, 저희 쪽이 먼저 나설 필요는 없고요. 그쪽에서 빵꾸 날 일이 분명 한 번 이상 있을 겁니다. 그때 못 이기는 척 한 번 쳐 주려고 합니다.”
본부장이 마케팅이나 홍보쪽 감은 없지만, 눈치 하나는 백단이다.
일반 신문 독자가 보기엔 신문은 아무 문제없이 1년 365일 잘 찍혀 나오는 것 같지만, 그 와중에 기사가 빵꾸나는 일, 광고가 빵꾸나는 일이 부지기수다. 기사야 기자들 조지면 나오는 것이지만(언제나 기사 거리는 넘쳐난다), 광고는 상황이 다르다. 당장 오늘 신문이 나가야 하는데, 광고를 채우지 못하면 편집도 편집이지만, 그만큼 돈이 날아가는 것이다. 호텔과 같은 것이다. 방은 있는데, 손님이 없으면 빈방만큼 손해를 보는 것이다. 이런 경우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반값에 방을 넘겨야 하는 것이다. 오후에 나갈 광고를 오전에 영업 돌려서 채우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리고 누울 자리 보고 다리 뻗는다고, 우리 회사 규모에 어거지로 본판 때려 넣자는 말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조만간 한 번은 ‘어딘가에서’ 빵꾸가 날 것이고, 차장 단위 급에 오더가 떨어질 것이다. 그 오더를 우리 쪽으로 넘길 때가 분명 올 것이다.
거길 파고들려고 하는 것이다.
본부장은 뭔가 생각하는 듯 폼을 잡더니, 호쾌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오케이 O팀장 생각대로 진행해 봐. B는 나도 염두에 두고 있을 테니까 광고 의뢰 들어오면 선집행하고 나중에 보고해도 돼.”
“감사합니다.”
본부장은 이 회사에서 사장 다음으로 말이 통하는 임원이다. 업무적인 이해력은 딸리지만, 이런 식으로 개괄적이고 포괄적인 이야기라면, 나름 이해하는 편이다. 그 역시도 그 짬밥 먹을 때까지의 사회경험이 쌓여있는 것이다.
B, 이쪽에서 꼭 잡아야 할 손이다. 지금 그 손 중에 하나가 바뀌었다.
사업을 하다 보면, 어디서 어떤 일이 터질지 모른다. 길을 닦아 놓을 수 있을 때 미리 닦아 놓으면 나중에 일이 터졌을 때 수월하게 넘어갈 수 있다.
D의 ‘당연한’ 요구
내 예상은 들어맞았다.
D는 간간히, 아니 때 되면 연락을 해 왔다.
CEO들을 대상으로 한 조찬 세미나나 교육 프로그램이 만들어졌다. 당연히 주최는 B였다. 회비도 나름 저렴했다. 250만원? 그 정도라면 무난하게 받아줘야 한다. 바로 11층 비서실로 연락해 사장님 일정을 확인하고, 사장님에게 보고를 했다.
“업계 분들이랑 교류의 폭도 넓히고, 우의를 다지기에는 그만입니다.”
“나 아침잠 많은데...”
(못내 빼는 척을 한다. 젊은 나이에 자수성가한 타입이기에 조찬 세미나 같은 자리가 거북살스럽게 다가오겠지만, 어쩌겠는가? 세상은 이렇게 돌아가는데)
“이거랑 다음 한 번 더 받고, B에서 사장님 인터뷰 하나 추진해 보려고 합니다.”
“인터뷰?”
“이 정도까지 회사를 키우셨는데, 한 번 중앙지에 나가셔야죠?”
사장의 묘한 웃음. 성공했으면, 그걸 자랑하고 싶은 게 사람의 인지상정이 아닌가?
“뭐, O팀장이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나가봐야겠지?”
“잘 생각하셨습니다.”
“그런데 다음 한 번 더 받는 게 뭐야?”
“뭐, 광고가 됐든 행사가 됐든 조만간 연락이 올 거 같습니다.”
“(쓴웃음) 공짜가 없네, 공짜가 없어.”
“(웃음) 그걸 살수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입니까?”
사장은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딴은 그러네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대로 사장은 조찬 세미나에 만족했다. 그 뒤에 있었던 교육 프로그램도 나름 재미있었다며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이제 슬슬 연락이 와야 하는데라고 생각하던 시점에서 D에게서 연락이 왔다.
“아, D차장님 안녕하십니까?”
“예. O차장님도 안녕하시죠?”
“저야 덕분에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광고 하나 하시죠.”
대뜸 본론부터 치고 들어온다.
‘빵꾸’ 다.
“섹션면에 하나가 펑크가 났는데...”
“오늘입니까?”
“예. (힐끔 시계를 본 듯 잠시 마가 뜨더니) 원래 지급(至急)은 1천 정도에서 단가 맞추는데, O차장님하고 A社는 그 동안의 인연도 있으니 7백 정도로 책정하려고 하는데... 어떠세요?”
7백이라... 애매한 액수다.
아니, 그 이전에 광고를 받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살짝’ 갈등했다.
원칙적으로 광고를 할 만반의 준비는 돼 있었다. 그런데, 그녀의 말투가 약간 거슬렸다. 지난 3번의 통화와 만남 속에서 그녀는 갑의 위치에서 도무지 내려오지 않고 있었다.
물론, 그녀가 갑인 건 맞다. 그러나 관계를 오래 유지하려면 갑이면서도 갑이 아니어야 한다. 비슷한 규모의 다른 신문사, 비슷한 직급의 기자들은 거의 대부분 ‘젠틀’하다. 그들도 알고 있다. 언제까지 뜯어먹을 순 없다는 걸. 우리의 관계가 주고받는 관계란 걸 알고 있기에 지켜야 할 예의란 게 존재한다는 걸 그들은 경험칙으로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D는 그런 이해가 부족한 것 같았다. 물론 여기에는 계속 선선히 들어줬다가는 만만하게 보일지도 모른단 걱정도 어느 정도 섞여 들어가 있다. 만약 지난 3번의 통화와 만남에서 그녀가 적정수준의 예의를 보여줬다면, 난 선뜻 7백을 받았을 것이다. 아니, 고마워하며 받았을 것이다. 내 마지노선은 2천까지도 수비범위 안이었다.
이건 평범한 유격수 앞 땅볼이었다. 재수 없는 루키 에이스를 엿 먹이는 가장 확실한 방법. 평범한 땅볼을 뒤로 빠뜨리는 것이다. 이쯤에서 한 번 눌러줘야 한다. 계속 받아줬다간 상투를 잡아당길지도 모른다. 본능이 움직였다.
“아, 그게... 일단 저도 결제를 받아야 하는 상황이라서...”
말끝을 흐리자, 그쪽에서 바로 말끝을 물었다.
“그럼 한 10분 있다 다시 연락드려도 될까요?”
어라? 급하다. 저쪽 사정은 모르겠지만, 급한 건 사실이다.
“아, 예... 우선 저희 본부장님께 구두상으로 보고하고...”
“기다리겠습니다.”
이건 확실히 급한 일이다. 짱구를 굴려봤다. 이런 경우 보통 광고단가는 더 떨어진다. 선심 쓰듯 7백을 말했지만, 저쪽의 마지노선은 더 뒤다. 우선 우리가 노출시킬 광고가 뭔지부터 확인해야 한다.
“박대리, 신문 지면광고용 파일 가지고 있지?”
“광고입니까? 아니면 유가기사...”
“두 개다 파일 준비해.”
“김과장!”
“예!”
“10월에 프로모션 돌리기로 한 게 뭐였지?”
“예, XXXX입니다. 프로모션용 파일 준비할까요?”
“그거, 지면광고용으로 컨버팅 가능할까?”
“오늘 중으로는 좀 빡셀 거 같습니다.”
“그렇겠지? 오케이 유가기사로 가자. 박대리 XXXX에 관한 유가기사 준비해.”
“언제까지 준비하면 됩니까?”
힐끔 벽시계를 본다. 저쪽 마감시한 고려하면... 넉넉잡고 3시로 할까? 손가락 3개를 폈다. 박대리의 타이핑이 시작됐다.
이때 슬그머니 김과장이 다가온다.
“B에 광고하시게요?”
“돌발적이긴 하지? B에 광고 안 한지 얼마나 됐지?”
“전임 팀장님이 프로모션 한다고 서너개 때렸던 적이 있습니다.”
“통광고가 아니라 이벤트 성격이었지?”
“예”
“달래기 위한 거래도 아니었고?”
“예, 대신 산업계 동향에서 저희 한 번 크게 때려줬어요.”
“그때 얼마였어? 어디 루트였고?”
“잠시만요... 홍OO씨! 광고 집행 건 파일 어디 있죠?”
미스 홍이 황급히 파일 하나를 들고 내 앞으로 다가왔다. 파일은 김과장 손을 거쳐 내게로 왔다. 작년 하반기부터 올 상반기까지 3개의 광고가 B에서 집행됐다. 하나는 광고영업부 쪽 루트였고, 두 개는 경제부장 이름이었다.
“전임 팀장님이랑 그쪽 차장이랑 아는 사이였답니다.”
안 봐도 비디오다. 차장이랑 전임팀장이 아삼륙이었고, 차장은 자기 라인의 윗선인 부장에게 실적을 토스한 것이다. 안타까운 사실은 이쪽 팀장은 잘려나갔고, 그쪽 차장은 지금 어디 있는지 모르게 됐다는 것이다.
'공 좀 치다가 광고 던졌겠네?'
김과장에게 베시시 웃음을 지었다. 귀여운 자식. 비고항목에 “산업계 동향”과 “XXX의 신흥 강호”란 기사 제목이 박혀있다. 애매하다. 둘 다 단가가 2천이 좀 넘는다. 돈 낼 거 다 내고 때린 것이다. 하긴 줄 땐 확실히 줘야 하는 거 아닌가? 괜히 어설프게 주는 척 시늉만 하면 아니한 만 못한 꼴이 된다. 딱히 전임팀장이 잘못한 건 아니다. 대신 기사가 크게 났다.
'자, 이제 어쩐다?'
파일을 보니 생각이 더 복잡해진다. 전임은 2천을 때렸다. 비슷한 크기의 광고를 더 싸게 때린다면 나야 실적이 되겠지만, D의 체면을 생각 안할 수가 없다. 물론, 급행료를 감안해야 한다. 전임팀장은 절차를 밟은 거고, 기사 제목을 보아하니 우리 회사가 한참 발버둥 칠 때 한 방 때려준 시기적절한 기사다. 그때는 우리가 급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돈을 쓰는 데에는 타이밍이란 게 있다. 시기도 다르고, 여자(?)도 다르다. 딱히 이 여자가 마음에 드는 건 아니다.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다. 게다가 내가 고치겠다고 덤벼들 레벨의 여자도 아니다. 그녀는 구름 위의 존재이다. 감히 ‘을’ 주제에 갑의 성격을 고치겠다고? 대신에 한 방 눌러 줄 수는 있을 것이다.
'광고 가자.'
최종결론을 내렸다. 다만, 액수는 조정해야 한다. 7백에 맞춰 주고 싶지 않다. 마지노선은 5백 정도면 될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을 정리 할 때쯤 핸드폰에서 불이 깜박인다. 호랑이도 제말 하면 온다더니...
“예, OOO팀장입니다.”
“D차장입니다. 생각은 해 보셨어요?”
“아, 그게... 저희 쪽 이번 달 광고비가 거의 다 집행되는 바람에... 본부장님도 마침 외부미팅 중이라 연락이 닿지 않네요.”
짜증 섞인 한숨이 수화기 저편에서 뿜어져 나온다. 뒤이은 체념과 결의의 한 마디.
“5백. 이 정도면 팀장님 전결로 가능하지 않아요?”
이 여자 협상에 약하다. 아니, 협상을 해 본 적 없다! 문화부에서 광고 영업 같은 걸 돌 일은 없었을 테고, 협상 이래봐야 기껏 연봉협상 정도한 게 고작이겠지? 무슨 사정인지 모르지만, 쫄리긴 한 거 같군. 슬슬 콜을 받을까 했는데...
“3백이요! 그 이상은 안 돼요!”
(아놔! 이거 완전 또라이잖아? 아니, 순백의 바보 아냐? 협상의 ‘ㅎ’자도 모르는 거 아냐? 도대체 문화부에서 뭘 배우고 나온 거야? 이봐요 아가씨! 여긴 정글이에요 정글! 그렇게 영업했다간 일주일이면 영혼까지 탈탈 털려요!)
고민이다. 3백을 받았다간 어떤 뒤 끝이 작렬할지... 아니, 좋게 좋게 5백에서 손잡았으면 좋잖아? 왜 이런 고민을 하게 만드냐고? 이거 받으면 내 모양새도 빠지는데... 불과 1년 전에 2천 받은 광고를 지금 3백에 받는다? 나중의 관계를 고려했을 땐 모양새 좋게 내 전결로 5백으로 광고 치는 게 좋다. 아니, 적정단가 이하로 잘못 받았다가 나중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죄, 죄송합니다. 저희 쪽 광고는 본부장님 재가가 있어야 움직이는 거라...”
“팀장님 권한이 그 정도도 안 돼요?”
잠시 억눌렀던 본능이 터져 나온다. 씨바... 그러나 참아야 한다.
“저희가 신생기업이라 돌발 상황에 약해서요. 이해 부탁드립니다. 나중에 단계 밟아 올라갈 기회 있으면 제대로 광고 하겠습니다.”
“끊어요.”
매몰차게 전화를 끊는 그녀. 후... 한숨이 절로 튀어나온다.
팀원들이 내 얼굴을 바라본다.
“B... 광고 캔슬이다.”
“왜요. 그 정도면 받아도 되지 않아요?”
“삼백에?”
김과장 눈빛이 묘하게 흔들렸다.
“싸면 좋은 거 아니에요?”
“홍OO씨 싸다고 다 좋은 거 아니에요. 5백선에서 딜 쳤으면, 서로 좋게좋게 도와주는 걸로 끝나겠는데, 3백이면 이거 나중에 분명 말 나와요. 괜히 밑... 아, 그게 그러니까... 저쪽에서 근거 남거든요? 서로가 양해하는 상식선에서 결론이 나야 하는데, 그 이하에서 거래가 이어지면 분명 말이 나와요. D차장이 어떤 사정인지 모르지만, 그쪽 안에서 이야기 나올테고 그러면 우리 쪽에 안 좋은 억하심정 가질 수도 있어요. 그럴 바에는 한 번 욕먹고 D차장 선에서 끝내는 게 나아요.”
순간 밑 대주고 뺨 맞는다는 말이 나올 뻔 했다. 성희롱 예방 교육 때 얼핏 들은 기억이 나온다. 요즘은 여자 직원들 앞에서 괜히 속담 같은 것 잘못 썼다가 조리돌림 당할 수 있다. 아니, 그 이전에 이런 기본상식을 왜 모르는 거야? 아무리 펑크난 광고라지만, 3백? 괜한 구설에 오르는 건 피하고 싶다. 이 폭탄을 누군가는 터트리겠지? 우리는 이번에 못 터트린 거까지 모아서 나중에 제대로 안겨주면 된다.
그러나... D는 내 예상을 뛰어넘는 ‘폭탄’이었다.
다음에 계속
추신
이 시리즈를 투고하는데 많은 고민을 했다.내부자의 안전과 비밀보장을 최우선시 한다는 딴지일보를 믿으나
이 연재가 중단되면 나에게 클레임이 들어왔거나 딴지 편집부가 쫄았거나 둘 중 하나로 생각하시라.
아참, 이거 대한민국에서 일어날리 없는 소설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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