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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가 펑크 난 섹션 기사를 들고 날 찾았을 때 난 거절했다. 그때 내 머릿속에 잔상으로 남은 건 ‘3백’이란 숫자이다. 이 숫자가 돌발적인 숫자이고, 이례적인 숫자란 건 맞다. 그렇다고 아예 지금까지 없었던 숫자는 아니었다.


그래도 3백이란 숫자를 지울 수가 없었다.


‘D의 돌발적인 발언일까?’

‘아니면, B社가 몰린 걸까?’


광고시장이 몰린 건 사실이다. 아니, 대한민국 전체가 저성장의 늪에 빠진 상황이다. 산업유통쪽은 중국 없었으면 벌써 자빠져도 자빠졌을 것이다. 촉이 움직였다. 확인해야겠다.


D와 통화가 끝난 뒤 난 대행사 시절 우의를 다졌던 몇몇 홍보맨들에게 연락을 돌렸다. 중앙일간지와 경제지 상황을 들어보기 위해서이다. D에 대한 평가도 궁금했지만, 더 궁금한 건 B를 포함한 중앙지의 광고단가이다.


다들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입을 뗐지만, 결론은 단가가 많이 떨어졌다였다.


“B가 전면광고가 6천이라 하는데, 그거 다 낸 업체가 몇이나 될까?”


“ZR 건설 있지? 그쪽에서 지지난달에 5천으로 두 번 때렸다고 하던데?”


“확실해? 무슨 광고였는데?”


“이번에 DT시 있잖아? 분양광고, 대행사 애가 메기라고... 그 왜 입 찢어진 녀석 있지? 그 녀석이야.”


“그 녀석이 광고 집행했어?”


“씨팔씨팔 하더라고...”


“거래 튼 거야? 아님 약점 잡혔어?”


“에이, 그래도 B가 이쪽에선 젠틀한 편이잖아? 그쪽 전무인가가 공 한 번 치고 와서는 광고 쐈다는데? 하긴, 아파트 분양 광고는 아직까진 먹히니까.”


“소비재는 이제 더 이상 메리트 없지 않나?”


“지면은 이제 포기해야지. 솔직히 기사 없으면, 광고할 이유도 없어.”


“확실히 광고 단가는 떨어지는 추세이고...”


“경기도 경기이고...”


“너희도 마케팅 예산 까였냐?”


“말도 마 전년도 대비 40%야.”


“우리는 반토막 났어.”


저마다 앓는 소리다. 그래도 여기까지 버틴 놈들이 아닌가? 은근슬쩍 D에 대해서 물었다.


“D 어때? 기사는 괜찮은가?”


“나름 깔끔하게 잘 써. 팩트에 충실한데, 안에서 변주를 잘하지. 글빨은 기본적으로 있고...”


“사람은 어떤지 모르지만, 기자로서 균형점은 잘 찾는 거 같아.”


“여기자가 오히려 편할 수도 있어. 주변에 휘둘리는 것도 적고...”

 

의외로 호평이 나왔다.


“인터뷰 기사 보면 더 보태고 말고가 없어. 깔끔해. 다만... 현장에서는 좀 빡빡하지.”


지난달 자기네 R&D 센터 센터장과 인터뷰를 엮은 동기 놈이 말문을 열었다.


“원래 이과생들이 말주변이 없는 것도 사실인데, D가 몰아붙인 것도 좀 있었지. 사전에 질문지 받는 걸로 했는데, 돌발 질문 몇 개 던지니 센터장이 멘붕이 와서...”


“기사 나름 잘 나왔던 거 같은데?”


“마사지 들어갔지.”


“그쪽에서 자발적으로?”


“센터장이 안절부절 못해서 우리 쪽에서 몇 번이나 전화 걸었지.”


“그래도 의외로 잘 들어줬다?”


“말도 마 얼마나 까칠한데... 연예인들 심층 인터뷰 하던 버릇이 남아 있는지 파워인터뷰 느낌으로 인터뷰를 진행하고 기사를 쓰려고 해.”


...당분간 사장 인터뷰는 보류해야 할 거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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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


업계 지인들과의 모임 이후 D에 대한 수습책(?)을 고민하게 됐다. 그녀가 뒤끝이 있는지 없는진 아직 모르겠지만, 최소한 ‘진상’은 아니란 판단이 섰다. 그렇다면, 지난 번 펑크 광고 건을 정리해야 한다.


생각난 건 본부장이었다. 이럴 땐 누가 나서서 날 ‘까줘야’ 한다.


직급상으로 보자면, 본부장급이 차장에게 전화를 거는 건 격이 안 맞는다.  


여러모로 머리를 굴려봤지만, 이 아이디어는 내 뇌 속에 조용히 집어 넣는 게 맞았다.


결국 없었던 일인 척 조용히 넘기는 게 맞을 것이다. 어차피 업계 사정은 뻔하고, 빵꾸 난 광고는 언제 어느 때고 터져 나올 것이다. 대신, 그때를 대비해 스토리를 하나 짜 둬야 한다.


‘D차장님 전화 받고 나서 본부장님께 보고했다. 내가 많이 까였다. 본부장님이 최대한 편의 봐드려야 한다고 하셔서...’


의례적인 수사로 가득 찬 모범답안이 만들어졌다.


참... 먹고 살기 힘들다.


그리고 기회는 다시 왔다. 이번에도 펑크가 난 것이다. D차장은 늘 그랬다는 듯 본론부터 치고 나온다(의외로 내 타입이다. 빙빙 돌리지 않고, 바로 직구 승부하는 모습... 좋다).


“섹션면 다시 펑크가 나서요. 유가기사로 대체 가능할 거 같네요.”


“예, 단가가 얼맙니까?”


잠시 머뭇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도 그럴것이 지난 번 사건의 잔상이 남아있지 않겠는가? 심호흡 소리가 들렸던 건 나만의 환청일까?


“7백에 섹션 1면 전면입니다.”


며칠 전의 데자뷔일까? 슬라이딩 도어즈일까? 이번에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만약 7백을 받는다면, 며칠 전의 이야기는 뭐가 되는 걸까? 이런저런 생각들이 빠르게 교차했다. 이번에는 D도 입을 꼭 다물고 있었다(조금은 성장한 건가?). 둘의 속내는 다르지만, 한 가지 합의된(물론, 서로 의견교환은 하지 않았지만) 의견은 있다.


'A社가 파는 물건을 B의 지면에 광고한다고, 물건이 더 팔리지는 않는다.'


우리 회사 매출의 상당수는 중국에서 얻어내는 것이다. 국내 내수를 고려해 광고를 한다고 해도 B는 아니다. 소비재, 그것도 연령대가 다르다. 우리가 자동차나 집을 판다면 B가 효과적일지도 모르지만(역시나 효과는 의문이지만), 우리 물건을 사는 소비자는 20대, 많이 잡아봐야 30대 중반 여성들이다. 그들은 경제지를 안 본다.


그 돈이면 차라리 바이럴 마케팅 플랜을 하나 더 돌리는 게 맞다.


그러나 이건 둘 다 입 밖에 내놓지 않는다. 진실은 대부분 관계를 위태롭게 만든다.


“저번에 D 차장님 제안 거절했다가 우리 본부장님한테 한소리 들었습니다. B社면 그래도 우리랑 좋은 인연 나눴던 곳인데, 제가 너무 고지식하게 일처리 했다고... 다음에 비슷한 제안 들어오면 저희 예비비에서 최대한 맞춰드리란 말씀 들었습니다. 그때는 제가 너무 경직된 모습 보여드렸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잠시만요... 김과장! 우리 예비비 얼마나 남았어?”


김과장이 눈이 동그래 진 채 입을 뻥긋거린다. 무슨 뜻이냐는 것이다. 난 손바닥 하나를 쫙 폈다. 5백이다. 그리고 손바닥을 돌려 목젖에 갖다 대고 볼륨 업 포즈를 취했다. 큰소리로 ‘5백’을 외치란 것이다.


눈치 빠른 김과장은 몸을 일으키더니 큰 소리로,


“아, 예... 예비비요? 아 홍XX씨 우리 얼마 남았지? 아... 3백 20? 어... 이거저거 끌어오면 5백 정도는 맞출 수 있을 거 같은데요!"


엄지손가락 하나를 척 올려서 김과장에게 향했다. 돌발적인 상황에 애드립까지 더했다. 혼신의 힘을 다한 메소드 연기였다. 김과장 연기 배웠니?


“아, 죄송합니다. 저희가 지금 5백 정도는 바로 맞춰드릴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조금 더 시간 주신다면 최대한 맞춰서...”


“아뇨, 5백에 유가기사 나가죠.”


“아, 감사합니다.”


“기사는 3시 전까지 보내주세요.”


“예.”


“그럼 수고하세요.”


쌀쌀한 공기가 이쪽까지 넘어왔다. 김과장을 보며 OK사인을 보냈다.


“3시까지 XXXX프로모션 유가기사 준비해서 날려. 아... 그리고 김과장.”


“예?”


“재능을 썩히는 거 같아. 대학로나 충무로 한 번 찾아가 봐.”


“(베시시) 아, 예.”

 

우리 회사 홍보 마케팅 팀에 예비비가 있던가?(팀장인 나도 모르겠다) 백오피스 팀들에게는 혹시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 쪽에 예비비는 없다. 소액은 내 전결, 비용이 좀 무거운 건 보고하면 된다. 기자들 만날 때 ‘대리비’나 기타 등등의 테이블 언더 머니는 본부장과 이야길 하면 된다. 하긴, 테이블 언더 머니란 걸 이 회사 와서 날린 적은 없다. 대리비 같은 경우도 어찌어찌 영수처리해서 넘긴다. 결국 D 앞에서 앓는 연기를 한판 멋들어지게 보여준 것이다.


거기서 다 끝난 줄 알았다.


그러나 D는 유가기사를 두고 소소한 ‘딴지’를 걸었다. 포맷이 안 맞았다느니, 이미지가 깨진다느니, 문장이 비문이라느니 하면서 시비를 걸었다. 5백이 너무 적었던 걸까? 아니면, 연기가 티나 났나? 이도저도 아니면 며칠 전의 뒤끝이 여기서 터져 나온 걸까? 그러나 딱 거기까지였다. 신문이 넘어가고 나서 그쪽에서 가판이 나올 때쯤 D로부터 연락이 왔다.


“S 대표님 인터뷰 한 번 하고 싶은데, 약속 한 번 잡아주시죠.”

 

D는 거래를 할 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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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오너리스크(Owner Risk)란 말이 있다. 한국인이라면, 한번쯤 들어봤을 이야기일 것이다. 때 되면 잡혀 들어가는 재벌총수, 그리고 때 되면 사면되는 재벌총수. 한국인들에게 오너리스크는 일상이다. 이러다보니 오너리스크를 관리하는 회사도 존재한다. 뭐, 일종의 온라인 마케팅 팀이라 말할 수 있는데 내가 사용해 본 적은 없다.


‘아, 이런 회사가 있구나.’


정도에서 소감을 마쳤지, 특별한 감흥이 있었던 건 아니다(오너리스크는 그들의 서비스 중 일부분이다. 당시에 난 이런 회사를 이용할 일이 없었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내가 관리하면 되는 거 아냐?).


D와 사장의 인터뷰를 바라보면서, 내 머릿속에는 ‘오너리스크’라는 단어가 비수처럼 박혔다.


“씨바... 뒤끝작렬이군. 함정을 파놨네.”


사장을 탓할 수만은 없다. 인터뷰를 당하는 입장에서 대부분 자기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그게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서 의미파악을 하는 경우는 드물다. 전문적으로 인터뷰어를 상대하는 인터뷰이. 즉, 정치인들이나 연예인들이 두루뭉술하게 좋은 말만 하고, 질문을 회피하는 스킬을 찍은 이유가 그것이다. 판단이 서지 않는 질문은 피하는 게 상책이다. 이걸 깨기 위해 인터뷰이들은 질문 속에 함정을 만들어 놓거나, 스치듯 지나가듯 질문을 던진다. 별로 중요한 게 아닌 듯 툭툭 던져 물고기를 낚는 것이다.


사장의 경영능력에 대해서는 난 인정한다. 인간적인 매력이나 품성에 대해서도 불만은 없다. 있는 집에서 태어나 배울 만큼 배웠고, 누릴 만큼 누려왔기에 기본적으로 둥글둥글한 품성이다. 가끔씩 보이는 인간적인 흠결은 애교수준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는 욕망의 이상발현이라고 해야 할까? 전체적으로 보자면, 평균 이상의 인간이다.


사장과 D차장의 인터뷰는 누가 봐도 평균 이상의 ‘꽤’ 괜찮은 인터뷰였다. 슬쩍슬쩍 자신의 흠결을 내비치며, 인터뷰의 인간미도 살렸고, 회사의 핵심가치를 그럴듯하게 포장도 했으며, 성공요인 분석은 꽤 이성적으로 보였다.


문제는 D차장이 파놓은 함정이었다. 이걸 밝히면, 대번에 우리 회사가 어딘지 뽀록날 거 같아서 말은 못하겠지만, 모종의 문제로 우리 회사 라인업 중에서 하나를 폐기처분했다. 소비자 피해상황이 발생한 것도 아니고, 언론에 공개될 정도의 ‘사건’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러나 어쨌든 중국 쪽에서 문제가 발생했고, 덩달아 한국 쪽에서도 문제가 발생할 여지가 있었기에 바로 라인업에서 뺐다. 자동차로 비유하자면, 자발적 리콜이라고 해야 할까?


이거 밝혔다가 인터넷 찌라시들에게 물어뜯길까 못내 걱정이다.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건 우리 쪽 R&D쪽에서 이 문제를 확인했을 때 우리는 생산 중단 시키고, 우리 쪽 연구팀과 외부 대학 연구팀에 용역의뢰를 보내고, 그 결과를 받아들고는 그대로 라인업에서 빼고, 생산중단 결정을 내렸다. 우리나라 기준으로 아슬아슬하게 법적 허용범위 안쪽이라 문제는 없지만,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에 주목했던 것이다. 이 자리에서 회사 자랑을 하는 건 아니다. 다만 확실한 건 신생기업이기에 이미지 관리 잘못하면 한방에 훅 날아갈 수도 있다는 불안감도 작용했기에 전량 폐기 결정을 내렸다. 문제는 사장이 이 라인업에 꽤 큰 애착을 가지고 있었고, 회사도 이걸로 덕을 본 케이스라 조심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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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장은 미끼를 덥석 물었다.


거의 10여분간 그 제품에 대해 변명하기 시작했다. 아니, 변명이 아닌 신념의 토로였다. 그때 언뜻 비친 D차장의 눈빛이란...


'아싸! 낚았다!'


당장 사장 앞에 놓여있는 보이스 레코드를 낚아채 두동강 내고 싶었다. 인터뷰는 끝이 났다. D차장을 배웅하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저, 기사 나가기 전에 잠깐 저희 의견을 보탤 수 있으면...”


조심스레 입을 뗐지만, D 차장은 냉정했다.


“기자는 보고 들은 걸 쓰는 사람입니다.”


“아... 예... 제가 기사에 참견하는 게 아니라 오해의 여지가 있을 만한 표현은...”


“오해는 지금 O팀장님이 하고 계시는 거 같은데요? 저 아직 기사 쓰지도 않았습니다.”


“아, 제가 너무 오버했네요. 사과드립니다.”


어색한 침묵. 그리고 짧은 목례.


씨바... 김영란법이 이럴 땐 내 발목을 잡는다.


사장은 영민한 사람이다. 인터뷰가 끝나기 전에, 끝난 직후에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그 말이 어떤 영향을 끼칠지 곰곰이 복기했던 거 같다. 아니, 복기했다.


“O팀장, 나 하나 걸리는 게 있는데... O팀장이 책임지고 처리해줘.”


“...예”


오너리스크란 말이 머리를 스쳐지나갔다. 아니, 이 정도면 리스크까지는 아니다. 내 선에서 어쨌든 처리할 수 있다. 지난달에 R&D 센터장 인터뷰를 주선했던 동기에게 연락을 했다. 사정을 말하자 돌아오는 건 비웃음 뿐이었다.


“너도 똥줄 한번 타야지.”


“야, 넌 어떻게 해결했냐?”


“해결이라고 해야 할 게 있나? 내가 보기엔 그 사람 나름의 기자 곤조가 있는 거 같아.”


“...건들지 말라고?”


“글치 건들면 상처가 더 덧나. 국으로 가만히 있는 게 남는 장사일걸?”


“그거 분명 함정 파놓고 던진 거라니까.”


“함정 판 거면 거래 제안 들어오겠지. 아니, 그 이전에 너 광고 하나 샀잖아? 에이, 설마 뒤통수 때리겠어?”


설마가 사람 잡을 거 같아서 그러지 자식아... 별 일 없을 거라며 가볍게 받아넘기는 동기 놈의 장난끼 가득한 말을 들으며, 지난 번 첫 번째 펑크 광고를 7백에 받을 걸 하는 후회가 밀려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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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촉(督促)


사장은 선천적으로 위험감지능력이 발달된 인간이다. 뭔가 자기에게 불리하거나 좋지 않은 영향을 줄 거 같은 일이 앞에 놓여 있으면 무슨 수를 써서든 이를 제거하려고 한다. 아니면, 피해 가기 위한 방도를 찾는다. 지금 사장의 심기를 건드리는 건 인터뷰 기사였다.


주말 판에 올라갈 기사를 벌써부터 걱정하고 있다.


촉 하나로 사업을 일으켰고, 촉 하나로 지금껏 회사를 꾸려온 사장의 촉은 예리하고, 꽤 신뢰성이 높았다. 비서실로부터 몇 번의 연락이 왔고, 2번은 사장 앞에 달려가 대면보고를 해야했다. 그때마다 내 결론은,


“건드려서 좋을 건 없습니다. 기다리면 알아서 좋은 기사 나올 겁니다.”


였다. 동기 놈의 말도 그렇고, 지금까지의 D차장의 행동을 봤을 때 괜히 건드려봤자 좋은 꼴은 못 볼 거 같았다. 그러나 사장의 생각은 달랐다.


“그래도 O차장이 나서서 한 번 연락 넣어봐.”

“O차장 다른 일은 똘똘하게 처리하면서, 이건 왜 이리 희미해? 사장이 죽으면, 회사는 무너져.”

 

재촉하는 사장에게 어떤 ‘확신’. 그것도 근거에 기반 한 확신을 건네줘야 했다.


김영란법...


이렇게 되니 김영란법이 거꾸로 내 발목을 잡아챘다.


‘영란 언니가 없었으면, 인터뷰 끝나고 상품권 50~60만원어치 안겼을텐데...’

‘지금이라도 뭐하나 보내볼까?’


사장의 푸시에 내 판단력마저 흐려졌다. 생각이 자꾸 좋지 않은 쪽으로 향했다. 결국 난 D차장에게 전화를 넣었다.


“무슨 일이시죠?”


예상대로 날선 반응이었다.

“아... 인터뷰 기사 어떻게 진행되는지 궁금해서요. 저희 사장님이 관심이 많으셔서...”


“지금 제 기사에 참견하시겠다는 겁니까?”


“아, 아닙니다.”


이빨도 먹히지 않는다. 문득문득 대화의 파편들을 맞춰봤다. D차장도 몸을 사리는 느낌이 들었다. 언뜻언뜻 말을 하려다 삼켰고, 침묵 뒤에는 짜증이, 짜증 뒤에는 분노가 잡힐 듯 생생하게 전달됐다.


이해가 됐다... 영란언니 덕분에 약속도 함부로 잡지 못하고, 뭔가 취재처에 요구할 ‘방도’도 없다. 보통 우리와 같은 소비재 기업들은 취재기자들에게 우리 상품들을 한아름 안겨 보내는 것이 기본이다. 굳이 상품권을 쥐고 흔들지 않더라도 어느 정도 성의표시는 하는 것 아닌가? 기자들도 너무도 당연하게 ‘협찬’을 말해왔다.


대리 시절까지만 해도 나는 짜증을 내면서 이 ‘협찬품’들을 챙겨야 했다. 과장 시절에는 너무도 당연하게 밑에 부하들에게 기자들 협찬품을 따로 챙기라 명했고, 차장 시절에는 협찬품 위에 대리비와 상품권을 얹었다.


그 모든 것들은 내 마음을 안정시켰고, 두려움과 공포에서 날 해방시켰다.


그런데, 이 모든 게 일순간 사라졌다.


D차장과 나는 이 기묘한 공백 속에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D차장은 주말 섹션 기사에서 우리 사장을 신세대 성공 기업인으로 포장했다. 나흘간의 불안감이 사라진 순간이었고, 김영란 법이 기자들뿐만 아니라 내 발목도 잡고 있다는 걸 깨달은 나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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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신 

이 시리즈를 투고하는데 많은 고민을 했다. 

내부자의 안전과 비밀보장을 최우선시 한다는 딴지일보를 믿으나 
이 연재가 중단되면 나에게 클레임이 들어왔거나 딴지 편집부가 쫄았거나 둘 중 하나로 생각하시라.
아참, 이거 대한민국에서 일어날리 없는 소설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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