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뱅뱅이론은 글로벌 이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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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뱅뱅의 최근 광고)


뱅뱅이론에 대한 글을 처음 쓴 지도 4년 반의 시간이 흘렀다. (승리의 필수교양 - 뱅뱅이론 링크) 그땐 몰랐다. 이게 2016년 미국 대선에도 적용될 줄은.


사실은, 나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가슴을 짓이겼던 세월호 사건 이후, 뱅뱅이론에 대한 더 깊은 얘기를 천천히 써보려는 시도를 시작했었다. 십 수장 정도의 도입부를 쓰는데 수 개월 이상이 걸렸다. 그 이후 몇몇 개인적인 사정도 있었고, 무엇보다도 어느 시점부터는 나도 뭐가 뭔지 모르겠어져서 한동안 포기하고 있었다.


미국 대선 당일날, 개표 결과 트럼프가 우세해지면서 몇몇 지인들의 우스갯소리 메시지가 왔다. 뱅뱅이론 영어로 번역해야 되는 거 아니냐고. 쓴 웃음을 나누는 대화가 오가고 어느 시점부터는 웃을 수 조차 없었다. 그렇게 트럼프의 당선은 확정됐다. 수많은 미국 언론들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고, 심지어 트럼프 본인조차 예상하지 못한 것으로 보이는 그 일이 벌어졌다.


이전 글에서 뱅뱅이론을 이렇게 정리한 바 있다.


남들보다 더 넓은 세계를 보고 있다고 생각하는 부류가, 실질적으로 훨씬 더 넓은 세계를 보고 있는 다른 부류의 존재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사태. 이 사태를 기반으로 하는 일종의 사회관계론.


한국의 19대 총선과 18대 대선, 영국의 브렉시트, 미국의 45대 대선, 이 외에도 수많은 국제적 사건에서, 뱅뱅이론스러운 일들이 벌어졌다. 단지 한 나라에서의 선거에만 적용해봤던 가설이, 더 다양한 사건에 적용되면서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더욱 더 명확해졌다.그 내용을 한번 살펴보자.




1. 지지자들의 공통점, 반 기득권, 반 엘리트


한국의 19대 총선과 18대 대선만 해도, 뱅뱅이론적 현상의 구도는 좀 더 단순해보였다. 상대방 부류의 존재와 그 양적 규모를 알아채지 못한 부류에 대해, '진보', '야권 지지자', 또는 '민주주의 수호자' 정도로 정리할 수 있었다. 한국은 정치역사적으로 그 대립구도가 비교적 명확하기 때문에, 뱅뱅이론이라 함은 (내 의도와는 달리) 더 일반적인 표현으로 ‘야권 지지자들이 SNS 상에서 벌인 찻잔 속 태풍’이라 정리되기도 했다.


하지만 영국의 브렉시트 사태나 이번 미국의 대선까지 모두 아울러 보면, 조금 다른 방향의 공통점들이 발견된다. 가장 먼저 객관적으로 비교해 볼 수 있는 건 각 사건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승리한 유권자’들의 인류통계학적 특성이다. 그 중에도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건 바로 ‘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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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18대 대선 출구조사 연령별 분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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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렉시트 연령별 분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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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대 미국대선 출구조사 연령별 분포)


일반적으로, 이 부조리한 결과를 지지한 유권자들은 고연령대에 더 많았다. 그래서 투표 연령 제한의 방향이, 어린 쪽 뿐 아니라 많은 쪽에도 있어야 한다는 청년층의 비판이 공통적으로 일어나는 중이다. 하지만, 단순히 나이로'만' 나누지 않은 자료들에서는 또 다른 것들이 발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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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대 미국대선 출구조사 연령별-인종별 분포)


미국 대선에 대한 이 자료는, 사실상 미국 대선 결과 해석에 있어 '나이'만을 적용해선 안된다는 결론에 이르게 한다. 나이와 관계없이, 백인들에겐 트럼프가, 유색인종들에겐 클린턴이 과반을 차지한다. 물론 백인 유권자층 내에서 연령에 따른 차이가 있기도 하다. 즉, 유색인종 유권자들의 경우 인종만으로 대부분 설명이 되고, 백인 유권자들에 대해서는 나이를 복합적으로 고려해야 하는 셈이다. 성별에 따른 지지율만 보는 것보다는, 인종과 성별과 연령대를 모두 고려한 분석 결과에서 더 정확한 실체가 파악되는 양상이다.


그러므로 최대한 다양한 요소의 다차원적인 분석이 진행된다. 한국은 아직까지 정치성향에 관련된 여론조사나 큰 선거의 출구조사에서 다양한 프로파일링을 하는 것이 보편화 되지 않았지만, 미국 및 유럽에서는 교육수준, 임금수준, 도시/교외 등의 주거지역 등등 다양한 기준을 구성한다. 이를 통해 얻어진 다양한 프로파일에서 브렉시트와 트럼프 간의 상당한 공통점이 발견된다. 낮은 교육수준, 낮은 경제력, 교외 주거 등. 그리고 이 공통점은 직관적 키워드로 정리된다. 그건 바로 '반기득권' 또는 '반엘리트' 정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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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렉시트와 트럼프 당선 모두 ‘반엘리트(Anti-Elite)’키워드로 해석된다)


여기서의 '기득권'이라는 말은 매우 다양한 논쟁을 야기하는 용어다. 트럼프가 왜 기득권이 아니냐부터, 중장년부터 노년층에게 '반기득권'이란 단어가 어울리냐, 백인이 반기득권을 지지한 게 말이 되냐 등등. 그런 면에서 '반엘리트'가 좀 더 정확한 용어라고 볼 수 있겠다. 트럼프는 부자일지언정 '엘리트'와는 거리가 멀고, 엘리트라는 건 나이와 무관하니까.


그렇다면 이 용어를 한국사회에도 적용할 수 있는가. 19대 총선과 18대 대선의 뱅뱅이론적 결과는 '반엘리트'적인 정서로 대변될 수 있는 지지층이 야기한 현상일까. 개인적인 견해는 '상당부분 타당'하다는 것이다. 그 상징적 근거로 아래 짤을 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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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고전이 된 짤, 이분은 어찌 사시려나)


내가 먹을 거, 입을 거 아껴서 대학 보내놓은 아들들에게 '뭔가를 보여주자'며 찍은 게 박근혜. 이 아이러니한 논리는, 워싱톤 정계에 뭔가 보여주기 위해 트럼프를 뽑는 미시건의 백인 노동자나, 영국의 위대함을 되찾자며 브렉시트에 찬성한 중장년 노동자계층과 상당한 유사성을 지닌다. 이들은 스스로의 모순적인 결정에 대해 확고한 소신을 갖고 있으며, 그 소신이 비합리적이라고 지적하는 자들에 대한 일종의 분노를 지닌다. 그렇기 때문에 브렉시트나 트럼프 당선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revolt나 whitelash 같은, 다소 감정적인 단어가 출현한다.


논리가 아니다. 정서다. 반 엘리트 정서.




2. 엘리트, 먹물들을 위한 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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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장 브레송이 촬영한, 지식인의 영원한 멘토, 장 폴 사르트르의 인생사진)


그렇다면 두 가지 질문이 이어진다. 여기서의 엘리트는 누구인가. 그리고 그들은 죄가 있는가.


엘리트라는 말은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므로 이 맥락에서의 정의가 먼저 필요하다. 트럼프는 전형적 금수저라는 점, 미국이나 영국 교외지역이라고 무조건 못사는 건 아니라는 점 등에서, 여기서의 엘리트는 '있는 집 아들딸'이라는 의미는 아니라고 봐야겠다. 이재용은 해당하지 않고, 손석희는 해당되는 무언가. 이는 트럼프와 교외 노동계층이 공통적인 공백이 발견되는 속성이어야 한다. 여기서 트럼프의 '무식한(ignorant)'이미지와, 앞서 언급한 인구통계학적으로 비교적 낮은 교육수준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쉬운 한국말로 하면, '먹물'로 치환되는 바로 그것이, 반 엘리트적 정서를 상징하는 이들에게 공통적으로 결여돼 있다.


이번 미국 대선에서 열쇠를 쥐고 있던 소위 '러스트 벨트(Rust belt, 미국 북동부, 중서부 일부의 쇠락한 구 공업지역)은 이전 대선에서 오바마를 지지했지만, 그건 민주당을 지지해서가 아니라 롬니의 먹물스러움을 더 싫어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한국 노년층의 '니들이 뭘 알아'에서 '니들'은 단순히 청년층을 일컫는 게 아니라 박정희를 부정하는 사람들을 향한다는 점에서, 자신의 삶에서 비롯된 소신을 무시하는 먹물들을 향한 분노라 보는 것이 더 정확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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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지지율의 지역별 표기, 동북부의 러스트벨트에 집중된 양상을 볼 수 있다)


이 '먹물'이라는 말은 엄밀하게 정의내리기 어렵지만, 어느정도 직관적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 말은 객관적인 학위나 능력으로 설명되는 것이 아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소크라테스, 공자와 같은 현자부터 철학자들, 사회학자, 과학자, 작가 및 일부 예술가들을 포함한다. 이러한 면에서, '지식인'이라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그들은 봉건사회의 비합리적 권력, 종교 권력의 부패와 암흑시기, 제국주의와 독재, 냉전과 핵무기, 혐오와 차별에 꾸준히 비판을 제기하며 보다 합리적인 사회를 만들어가는데 기여했다.


그 결과, 이 지식인들이 구체화 해 온 가치들은, 이에 동의하는 대중들을 낳으며 그 힘으로 사회를 변화시킨다. 결국 지금 이 시대의 '엘리트' 또는 '먹물'에는 이 대중들이 포함된다. 그런 의미에서 이 글을 볼 여러분들은 거의 모두 이 '먹물'이자 그들이 분노하는 대상이다. 즉, 여기서의 '엘리트' 또는 ‘먹물’은, 과거의 ‘지식인’이라는 말보다 훨씬 더 넓은 외연을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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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은 더이상, 이런 소수 귀족의 잉여로운 문화가 아니다)


또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다. 고대 그리스부터, 장 폴 사르트르가 '지식인을 위한 변명'을 써야했던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지식인 계층은 매우 적은 숫자의 특권계층에 해당하게 된다. 하지만 그 이후 수십년간 고등교육이나 기본적인 인문학적 소양, 법과 경제 등에 대한 상식은 빠른 속도로 보편화 된다. 그 결과, 20세기 이전까지 지성-특권-계몽의 연결고리는 21세기에 들어 ‘대중’의 절반가량을 차지할 정도로 확산된 것이다.


여기서, '대중' 가운데 이 먹물의 영향을 받은 반절과, 그에 대해 거리감을 지니는 반절, 이 두 무리가 전체 '대중'을 구성하는 양상이 발생한다. 지식인들의 수천년에 걸친 노력은, 종교나 예언이 아닌 '합리적 가치'를 구성하고 이에 반하는 것을 부조리, 비합리, 비이성으로 규정하며 극복의 대상으로 삼는다. 그리고 그 극복의 과정은 수없이 다양한 논리와 이론을 바탕으로 숭고하게 여겨진다. '엘리트는 죄가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여기에서 시작된다. 그 극복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은, 그 숭고함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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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트르의 ‘지식인을 위한 변명’)


이미 1960년대에 사르트르가 말한 ‘지식인에 대한 분노’는, 그 극복의 대상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지식인에 어떤 감정을 지니는지를 여실히 드러낸다. 그리고 그 분노는, 한 때 일부 특권계층에 대한 혐오의 표출이었다면, 이제는 대중의 나머지 절반을 차지하는 먹물들과 벌이는 ‘집단적 갈등’의 양상을 빚게 된다. 다시말해, 20세기까지의 지식인에 대한 분노는 ‘불편하지만 무시할 수 없는 소수’를 향한 것이었다면, 21세기에 들어서는 양적으로 크게 불어난 먹물들 사이에서 느끼는 소외감이 추가되는 것이다. 그 소외감은, 아직 같은 편에 서 있는 다른 이들을 만날 때, 더 큰 집단적 분노를 형성하면서 결국 집단과 집단 사이의 갈등이 되는 셈이다.


결국, 엘리트는, 먹물들은 죄가 없다. 합리성의 역사가 진행되면서 먹물들이 증가하는 것은 더 합리적인 사회로의 발전 과정의 필연적인 결과일 뿐이다. 다만, 그 숫자가 나머지 극복 대상과 비슷해지면서, 그 극복 대상인 대중들 입장에서 지금까지는 '불편'했던 것이, 이제는 '위협'적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그 위협에 대한 적대감을 조직적으로 드러낸 결과가, 바로 이 일련의 세계적 사건의 배경을 이룬다.




3. 먹물과 뱅뱅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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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는 공포를, 공포는 혐오를, 혐오는 폭력을 낳는다

지금 이 시대의 일면 또한 그렇다


이 먹물의 역사성과 뱅뱅이론은 이렇게 만난다. 먹물들은, 그러니까 순수하게 이 세상을 보다 합리적이고 살만한 세상으로 만들기 위해 긴 시간의 노력을 쌓아오며 비합리적인 권력과 맞서온 절반의 대중들은, 나머지 절반의 존재, 그리고 그들이 자신들에게 느끼는 '위협'과 '분노'라는 정서를 정확히 인지하지 못한 것이다. 그런 게 있다는 건 알고 있지만, 그런 정서를 지니는 사람들의 양이 얼마나 되는지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다는 점, 그리고 그 정서의 정도가 얼마나 깊은 것인지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다는 점에서, 뱅뱅이론적인 사태가 발생한다. 우리는 그들의 존재조차 제대로 몰랐지만, 그들은 우리의 존재와 특성을 정확히 알고 있는, 바로 그 사태.


이렇게, 먹물들이 나머지 절반을 인지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브렉시트와 미국 대선에 대한 분석 과정에서 다양한 단서를 얻을 수 있다. 영국에서 EU잔류를 당연시 여겼던 편의 대중들에겐, EU 탈퇴가 갖는 경제사회학적 의미나 외교정치적 영향을 생각하는 것이 지극하게 당연한 사고 흐름이다. 그러므로 EU잔류는 너무도 당연한 결론이 된다. 그 결론이 당연할수록, 1+1=2라는 사실을 너무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에겐, 1+1이라는 문제를 앞에두고 손가락을 꼽으며 고민하는 어른이 존재할거라는 생각을 하기 어려운 것과 크게 다르지 않게 된다.


트럼프가 여성혐오, 성소수자혐오, 이민자혐오, 장애인비하 등등 비상식적인 행동을 해왔음이 명백히 드러날 수록, 설마 이런 인간을 대통령으로 뽑을 사람이 그렇게 많겠냐는 안도를 하게 된다. TV 토론에서 무지함을 드러내는 박근혜를 보고도 대통령감이라고 생각할 사람이 있겠냐는 생각 처럼 말이다.


우리는 그렇게, 우리와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을 비합리, 비논리, 무지라는 말로 설명했다. 그런 사람들이 절반이나 될 만큼 많다는 가정은 하기 힘들었다. 그런 가정은, 일단 불편하고, 설명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로 그런 사람들은 절반 이상이거나 절반에 가까웠다. 그리고 그 절반은, 우리가 그들에게 붙인 비합리, 비논리, 무지라는 이름표에 짜증과 위협과 분노를 키워왔다. 그렇게 그 절반은 투표소에 향했고, 우리는 그 결과를 예상하지 못한 채 확인하게 됐다. 그 먹물들의 가치는, 실제로도 인류의 발전방향을 이끌어왔기에, 합리적인 언론사들의 기본적인 태도를 구성했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합리적 언론사들 역시 이러한 결과를 예상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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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열에 가까운 눈물을 흘리는 힐러리 클린턴 지지자)


물론, 뱅뱅의 사례를 구성하는 사고기저는 이러한 정당성이나 필연성을 지니지 않는다. 말하자면 나는 그저, 뱅뱅이 촌스러운 브랜드라고 생각했을 뿐이고, 그 생각은 역사적 정당성이나 합리성을 지니지는 않는다. 다만, 그 생각에 대해 나는 의심할 수 없었던 것이다. 내가 보기엔 뱅뱅보다 스트리트 브랜드가, 자라가, 유니클로가 더 세련된 브랜드라는 것이 너무 당연했을 뿐이다.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할 수록 나는 뱅뱅이라는 브랜드가 갖는 양적 실체를 예상할 수 없게 되고, 그 소비자층의 존재를 전혀 모르고 사는 결과로 이어진다.


다만, 이 세계적인 뱅뱅이론적 사태는, 실제로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만큼 더더욱 나머지 절반의 존재를 객관적으로 인지하지 못한 결과를 낳은 것이다. 




4. 세계속의 뱅뱅이론, 다시 한국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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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리오의 완성을 알리는 우병우, 아니 우갑우의 싹퉁머리)


그러면 이제, 사실은 남의 나라 신경 쓸 겨를이 없는 우리네 사회로 돌아오자. 일전의 마빡기사를 통해 언급했듯, 최순실이 검찰에 출두하면서 이미 게임은 끝났다는 게 나의 예상이었다. 이미 그들은 나름의 시나리오를 완성했고, 우병우, 아니 우갑우의 황제조사, 최순실과는 비교되는 차은택의 입국 즉시 검거, 장시호 등 주변인물에 대한 묵과를 통해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에 대해 개인적인 견해를 사족으로 좀 붙이자. 박근혜라는 사람의 역사를 간단히 조명해보면, 두개의 빨대가 꽂힌 꼭두각시라고 볼 수 있겠다. 친일파-군부독재로 이어진 정치세력의 빨대 하나, 그리고 최태민 일가의 빨대 하나. 앞쪽 빨대의 대가로써 대권주자의 정치적 지위를, 뒤쪽 빨대의 대가로 정서적 충족을 얻었다. 그리고 그 두 빨대는, 두 세력의 잇속을 채워오는 데 사용됐다.


박근혜가 대통령으로 당선되기 전까지는, 정치인으로서의 박근혜의 외연에 더 큰 영향을 끼친 건 당연히 앞쪽 빨대의 정치세력일 게다. 하지만 동시에, 박근혜의 내면은 뒤쪽 빨대인 최태민 일가에 훨씬 큰 영향을 받았을 것이고, 그들로부터 실제로 정서적 위안을 얻었을 거다. 그러므로 이미 대통령이 되어버린 이후에는, 최태민 일가의 입김이 더 커지고, 새누리당의 영향력은 줄어들었을 거다. 왜냐하면, 최씨 일가가 이 박 넝쿨을 나눠주고 싶지 않았을 것이므로. 그 과정에서 비박, 반박은 당연하고, 친박들마저도 하나둘씩 내쳐졌을 게다. 프로페셔널인 새누리당쪽 세력에 비해, 최씨일가는 허술했고, 그렇게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지는 수순에 이르렀을 거다.


하지만 최순실이 도피하고 구속되는 과정에서, 최씨일가는 박근혜 대통령으로부터 물리적으로 차단된다. 결국 프로페셔널들의 영향력이 다시 수면위로 드러난다. 박근혜 대통령의 그네체 말투는, 어느덧 지극히 정치적인 수사로 가득한 사과문과, 과감한 전략적 행보로 이어진다. 그 과정에서 야권은 우왕좌왕한다. 그들의 상대가, 최씨 일가라는 아마추어 집단에서, 여권의 핵심 정치세력으로 되바뀌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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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림을 본 기존 콘크리트 지지층의 기분을 생각해보자)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는 최근까지, 대통령으로서, 아니 인간으로서의 가장 기본적인 상식을 뒤흔드는 파괴력으로, 5%라는 역사적인 현직 대통령 지지율을 기록하게 했었다. 하지만 아마추어를 격리한 프로들이 자리잡은 이후부터, 이 사건은 미묘하게 다시금 절반의 먹물대중과 나머지 절반의 반엘리트 대중의 대립 형태를 되찾으려 한다. 2선 후퇴-하야-탄핵의 말장난스러운 논리싸움, 거국중립내각과 책임총리라는 정치적 용어의 쟁점화, 수사대상에 대한 적용 법률의 논쟁에서 오고가는 법률용어들. 그 사이 대통령은 국회를 불쑥 찾아가고, 트럼프 당선인에게 전화를 한 후, 한미 동맹은 굳건함을 널리 알린다. 이 와중에 야권은, 수많은 실책을 연발한다. 야권은 여권 핵심 세력의 전략에 이미 휘말렸고, 설상가상으로 미국 대선 결과의 충격은 언론의 초점을 희석하며 야권의 추가적인 실책을 야기한다. 이렇게, 아마도 대통령 지지율은 스멀스멀 두 자리수를 되찾을 거다.


이대로라면, 희망은 점차 줄어든다.


뱅뱅이론적 구도와는 무관했어야 할 이 사건이, 점차 그 구도로 변질되기 시작했다. 자칫하면 우리는 또다시, 합리성에 위협을 느끼며 비합리성을 지키려는 대중의 절반이 얼마나 많았는지 확인해야 할지 모른다. 우리가 맞서온 그들은, 결국 비열하게도 대중을 절반으로 갈라놓는 갈등 구도를 재현하려 한다.




5. 앞으로 유구할 역사의 한 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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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무어의 트윗.

‘어젯밤 역사적 아이러니의 마지막 장은,

바로 말콤X가 최후의 밤을 보낸 그 호텔에서

도널드 트럼프가 자축 파티를 열었다는 것이다.’


미국 트럼프 당선인은, 모 호텔에서 당선 축하 파티를 열었다. 파티를 연 그 호텔은, 다름아닌 말콤X가 최후의 밤을 보냈던 그 호텔이었다. 합리성의 역사를 이룩해온 지식인과 먹물대중들의 피땀어린 노력이 유린되고 해체되는 건 이토록 한 순간이다. 대선 이후 하루가 지난 사이, SNS에는 장애인과 유색인종과 여성에 대한 혐오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모습에 대한 목격담이 즐비하다.


하지만, 우리가 미처 저들이 절반인 것을 몰랐다면, 마찬가지로 우리도 절반에 가깝다. 합리성의 역사는 순간적으로 퇴보했지만, 실제 과거로 회귀한 것은 아니다. 노무현이, 오바마가 임기중에 부딪혀야 했던 그 벽은, 이명박근혜가, 트럼프가 집권했을 때 우리가 만들어낼 수 있는 벽이다. 이명박근혜가 나라를 사단내긴 했지만 박정희 전두환 시절과 똑같은 수준까진 아니었듯이, 트럼프가 당선됐다고 해서 각종 혐오를 실제로 공식화 할 수는 없을 게다.


단지 소수의 특권계층의 전유물이었던 합리성은, 결국 인류의 절반가까이 자라왔고, 이 충격적인 사건들은 그 과정에서의 현상이라고, 그렇게 믿을 가치가 있다. 왜냐하면 그 '합리성'이란 건, 특정 세력이 이권을 위해 조작한 논리도 아니고, 부패한 권력이 만들어낸 구호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 가치는, 길고 긴 시간동안 끝없는 토론과 집단지성을 바탕으로, 피와 목숨을 바쳐가며 켜켜이 쌓아낸 결론으로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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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영국, 미국 뿐만 아니라 더 많은 사회에서, 인류는 비합리와 부조리의 반란을 목격하고 있다. 그들은 외친다. 니들이 무시해왔지만, 우리는 아직 여기 건재하다. 그렇게 이슬람 과격파, 네오나치와 백인우월주의, 독재정치권력 옹호와 같은 파시즘이 사회전반을 위협한다. 이것이 현시점에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앞으로 순탄할 줄만 알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은, 역사의 한 장이다.


그렇다면 다음장은 이렇게 쓰여져야 할 것이라고 주장해본다. 우리가 다시 외칠 차례다. 우리는 이렇게, 절반이나 될 정도로 성장했다고. 결국 우리가 믿는 이 가치는 더욱 더 견고해져서, 인류의 대다수가 동의하는 가치를 완성할 것이라고. 그리고 이 가치는, 결국 당신들을 포함한 대중 전체가 궁극에 함께 추구할 바로 그 가치임이 확실하다고.


그런의미에서 11월 12일은,


단지 한반도의 작은 나라에서 벌어진 정치 스캔들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는 날만이 아니다.


그날은, 현 시점의 역사적 위기를 극복해낸 것으로 기록될 합리성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는 날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해 본다.


동의하신다면


광장에서 만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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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심애비

트위터: @miiruu


편집: 딴지일보 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