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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미국 소설가 허먼 멜빌의 작품 중 <필경사 바틀비>라는 단편소설이 있다. 1853년에 발표되었다. 그 작품은 월스트리트를 배경으로 산업사회로 막 진입하고 있던 미국의 모습을 그린다. 화자인 “나”는 세 명의 직원을 데리고 변호사 일을 하고 있다. 주로 부자들의 주식과 채권 따위를 관리해주며 안락한 삶을 누린다. 그런 화자에게 일이 늘어나면서 필경사를 새로 고용하게 되는데 그가 바로 문제의 바틀비이다. 바틀비는 거의 먹지도 않고 사무실에서 잠을 자며 놀라울 정도로 열심히 일을 해치운다. 그러던 그가 어느 날 갑자기 일을 거부한다. 아무리 달래고 설득해도 소용이 없자 결국 해고하지만 그는 사무실을 떠나려 하지 않는다. 견디다 못한 화자가 오히려 사무실을 옮겨도 바틀비는 그곳에서 버티다가 결국 경찰에 넘겨져서 감옥에 가게 된다. 감옥에서 그는 음식을 거절하고 굶어 죽고 만다.


줄거리만 두고 보면 상당히 생뚱맞고 당혹스럽다. 그러나 그 당혹스러움의 이면에서 우리는 자본주의 체제에서의 노동의 실상을 살펴볼 수 있다. 화자는 변호사로서 그 체제의 변두리에서 그것에 편승해 안락한 삶을 산다. 그는 만족한 중산층으로서 나름대로 관용과 도덕성과 합리성을 지니고 있다고 자부한다. 그러나 그의 그런 자아인식은 바틀비가 등장하는 순간 무너진다. 그가 지닌 도덕성과 합리성이라는 것은 실상 타성적인 의식에 불과하며, 그가 직원들에게 보이는 관용 역시 고용주로서의 계산된 행동이다. 그는 관용의 이면에서 직원들을 효율적으로 통제한다. 그러나 그 통제가 바틀비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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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스트리트(Wall Street)는 그 이름이 암시하듯이 인간관계의 단절, 소외된 노동을 상징한다. 그 월스트리트에 화자의 사무실이 있다. 그 사무실 벽은 옆 건물의 벽과 맞붙어서 빛조차 들어오지 않는다. 그곳에서 직원들은 사장과 칸막이로 차단된 채 필경이라는 단순 반복적이고 기계적인 노동을 수행한다. 바틀비를 제외한 세 명의 직원은 이름도 없이 별명으로만 불린다. 그들은 익명의 소외된 노동을 하고 있다. 바틀비는 바로 그 소외된 노동을 거부한다.


바틀비는 누구보다도 산업사회가 원하는 유능한 노동자인 동시에 그 체제를 위협하는 인물이다. 그는 일면 기계적인 노동을 헌신적으로 수행하는 존재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의지로 노동을 하거나 거부하는 인물이다. 그는 자유의지를 포기하지 않는다. 그가 어느 날 이유도 없이 일을 거부한 것 같지만 실은 사장이 그의 서랍을 뒤져본 후부터 일을 그만두었다. 자신의 사적자유가 최후로 침해당했다고 인식한 순간 일을 거부한 것이다. 그는 끝내 자아존재를 포기하지 않으며 그것이 침묵으로 표현된다. 그것은 무언의 저항이다. 그가 한때 배달불능 우편물을 취급했으며 구조조정으로 느닷없이 해고당했다는 사실은 그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인간 사이의 단절과 소외된 노동을 이미 충분히 인식하고 있다는 뜻이다. 노동자는 자본가의 뜻에 따라 언제든지 해고될 수 있다. 그런 사실에 저항하기 위해 그는 사장이 자신의 서랍을 뒤지자 스스로 일을 거부했다.


바틀비는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궁극적으로 제거되어야 할 인물이다. 그가 이름을 지니고 있으며 더 이상 소외된 노동을 거부한다는 것은 위험하다. 그런 뜻에서 그를 감옥에 가두는 것은 상징적이다. 산업사회에서 노동자가 노동을 거부하는 행위는 살인이나 도둑질과 같은 범죄행위이다. 그 체제에 편입되기를 거부한 바틀비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두꺼운 벽으로 차단된 감옥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뿐이다. 배달불능 편지가 불태워지듯이 말이다. 그는 또 한 통의 배달불능 편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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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말하는 근대화나 산업화라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노동 통제와 투쟁의 역사라고 해도 별로 틀린 말이 아니다. 18세기 중엽에 영국에서 처음 산업혁명이 시작된 이래 전통적인 농노들이나 수많은 농민들이 ‘노동자’라는 새로운 계급으로 재조직되었다. 산업혁명의 결과 부르주아 계급이 귀족계급과의 오랜 헤게모니 투쟁에서 마침내 승리해 사회의 주도권을 장악했고, 그들은 새로운 지배계급으로 등장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을 위해 땀 흘려 봉사할 새로운 계급이 필요했다. 그것이 노동자라는 이름의 프롤레타리아 계급이다.


노동자는 근대화의 산물이다. 근대사회에 오면서 노비나 노예 같은 세습적인 종속 계급은 거의 사라졌다. 왜일까? 많은 이유를 댈 수 있다. 그러나 그 가장 큰 이유가 그들이 산업사회에서는 비효율적이라는 것이다. 산업사회는 필요에 따라 언제든 고용하고 해고할 수 있는 ‘유연한’ 노동력을 원한다. 죽을 때까지 주인이 생계를 책임져주어야 할 노비나 노예들은 자본가들에게는 부담일 뿐이다. 그러므로 전통적인 계급제도에 바탕을 둔 신분제도는 그들의 혐오의 대상이었다.


노동자들은 자유민이지만 가진 것이라고는 제 몸밖에 없으므로 자신의 노동을 시장에 내다팔아 생계를 연명해야 한다. 그러므로 유럽의 산업화 초기에는 그들은 허울 좋은 자유라는 이름 아래 중세의 농노 이상으로 착취를 당해야 했다. 19세기 중엽까지 영국에서는 노동자들을 보호하는 어떤 법적 장치도 없었다. 노동자들의 무수한 투쟁과 희생의 결과 19세기 중엽에 와서야 겨우 영국을 비롯한 유럽 자본주의 국가들이 노동자들을 보호하는 조처들을 취하기 시작했다. 그나마 너무나 느리고 형식적이었다.


산업혁명 초기의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에게 임금을 많이 주면 게을러지고 일을 하지 않으므로 굶어 죽지 않을 만큼 주어야 죽지 않기 위해 죽어라고 일한다고 믿었다. 쉽게 말해 산업 자본가들은 노동을 순수하게 착취의 대상으로만 보았다. 노동력은 무한하다. 그러므로 노동자들을 쥐어짤 수 있는 한 최대한으로 쥐어짜고 폐기처분해버려라. 그게 그들의 목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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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가지 설명을 더해보자. 19세기 중엽까지 영국의 노동자들은 터무니없는 저임금과 불결한 작업환경과 엄격한 통제 속에서 보통 1일 16시간의 노동에 시달렸다. 심지어 노동자의 자식들은 다섯 살만 되어도 광산에서 일을 하거나 굴뚝소재부로 일해야 했다. 물론 아동 노동이나 여성 노동에 대한 어떤 보호도 없었다. 그러다 보니 19세기 초 영국 노동자들의 평균 연령은 서른 살을 넘기지 못했다. 그 당시 전 인구의 평균 연령이 40대 후반인 것에 비하면 그들이 얼마나 가혹한 노동과 열악한 생활환경에서 살아야 했는지 짐작이 간다. 인간다운 삶은 꿈꾸기도 힘들었다.


"여러 종류의 하인, 노동자, 직공은 어떤 커다란 정치 사회에서도 압도적인 다수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이 대부분의 생활 조건을 개선하는 것이 전체에 있어서 불리하다고 여겨져서는 절대로 안 된다. 구성원의 압도적인 대다수가 가난하고 비참한 사회가 번영하고 행복한 일은 결코 있을 수 없다. 더욱이 국민 모두에게 의식주를 제공하는 사람들이, 그들 자신의 노동 생산물 중에서 그들 자신에게 충분한 의식주를 제공할 수 있는 몫을 가지는 것은 어디까지나 공평한 일일 뿐이다."


누가 한 말일까? 자본주의의 대부라고 다들 일컫는 애덤 스미스가 한 말이다. 우리는 스미스 하면 늘 ‘보이지 않는 손’을 떠올린다. 모든 것은 시장이 알아서 한다. 그러니 시장에 대한 간섭이 적으면 적을수록 좋다. 그러나 그것은 스미스의 생각을 편리한 대로 해석한 것이다. 그는 초기 자본주의 사회의 노동착취를 예리하게 인식하고 비판했다. 그래서 그는 위대한 경제학자이다.


산업혁명은 18세기 중엽에 일어났지만 그 먼 기원은 흑사병(Black Death)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흑사병은 중세 말기 유럽에 파멸적인 재앙을 가져다주었지만 길게 본다면 역설적으로 유럽이 근대의 문을 열게 될 열쇠였다. 그것은 유럽에게는 재앙인 동시에 축복이었다. 흑사병은 1347년경에 이탈리아에서 시작해 1348년에는 프랑스 전체를 휩쓸었고 같은 해 가을에 영국으로 옮겨가서 1349년에는 영국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이 흑사병과 그 이후에 발생한 크고 작은 전염병으로 1400년경의 유럽 인구는 흑사병 발생 이전에 비하여 3분의 1 내지 2분의 1이나 감소했다. 그 인구는 17세기에 와서야 겨우 예전 수준으로 회복되었다. 이탈리아의 작가 보카치오는 흑사병의 공포를 이렇게 묘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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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염병에는 어느 의사의 진단도 어떤 약도 소용이 없었고 효력이 없었습니다. (…) 그 결과 낫는 자는 극히 드물고, 아니 오히려 거의 전부가 앞에서 말씀드린 반점이 나타나고부터 다소 늦고 빠른 차이는 있더라도 사흘 이내에 열도 없고 다른 발작도 없이 죽어 간 것입니다. 이렇게 흑사병은 무서운 기세로 퍼져나갔습니다. 환자를 잠시 찾아보기만 해도 마치 불을 옆에 갖다 댄 바짝 마른 것이나 기름 묻은 것에 확 옮겨 붙듯 건강한 자에게 옮겨 갔습니다. 아니, 더 지독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환자와 말을 주고받거나 환자와 사귀는 것만으로 전염되거나 죽음의 원인이 되었을 뿐 아니라, 심할 때는 환자가 우리를 만지거나 우리 쪽에서 환자가 입은 옷, 그 밖의 물건을 만지기만 해도 이 병에 감염될 정도였으니까요."


흑사병이 초래한 가장 큰 타격은 노동력의 급격한 감소였다. 하층계급의 사람들은 힘든 노동에 시달리고 영양이 부실하고 불결한 환경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귀족들보다 훨씬 더 많이 희생 되었으며 그것이 노동력 부족을 가중시켰다. 더욱이 잦은 질병과 전쟁으로 인해 인구가 쉽게 늘어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유럽인들은 그때부터 살아남기 위해 기술개발에 광적으로 매달리지 않을 수 없었으며 그 결과 유럽의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수백 년에 걸쳐 축적된 이런 기술이 과학을 낳았고 산업혁명의 토대가 되었다.


산업혁명은 1765년에 와트(James Watt)가 증기기관을 발명하면서 폭발적으로 가속화되었다. 이후 수십 년간 갖가지 제조업에서 증기력이 주동력원으로 등장했으며 이 여파로 가내수공업과 농업이 몰락하고 노동력이 공장지대로 이동했다. 가내수공업자들은 자영업자들로서 필요에 따라 자신의 노동을 자유롭게 조절할 수 있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가내수공업자들과는 달리 자신의 노동을 스스로 조절할 권리를 박탈당한 채 점차 공장의 일개 부품으로 전락했다. 노동자의 노동시간이나 휴식이나 작업 강도는 기계를 작동할 권리를 지닌 자본가의 결정에 달려 있었다. 또한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 산물에서 철저하게 소외되고 그 과실은 탐욕스러운 자본가의 소유가 되었다.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스>에는 자본의 이런 노동통제가 실감나게 그려져 있다. 이 영화는 채플린이 각본을 쓰고 감독을 하고 주연까지 한 영화이다. 이야기는 시작 부분부터 재미있다. 우리로 몰려드는 양떼와 출근을 하기 위해 지하철에서 쏟아져 나오는 노동자들이 묘하게 병치된다. 근대 산업혁명의 상징이 양모 산업이었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그 발상에 웃음이 난다. 끝없이 양털을 생산해내야 하는 양들과 끝없이 물건을 생산해내야 하는 노동자들은 산업사회에서 같은 신세이다. 사장은 사무실에 앉아 모니터를 보며 노동자들의 노동 강도를 계속 높인다. 그러는 사이 노동자들은 나사를 조이는 자동기계 같은 존재가 되며 그 체제에서 이탈하는 순간 정신병원이나 감옥으로 끌려간다. 효용가치가 사라진 양이 도살장으로 끌려가듯이 말이다. 감시 카메라는 모든 곳에서 작동해서 화장실에서 잠시만 게으름을 피워도 당장 사장의 불호령이 떨어진다. 또한 노동자들의 노동을 착취하기 위한 온갖 기발한 기계까지 발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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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영국시인 윌리엄 블레이크는 <런던>이라는 시에서 지배계급과 자본의 탐욕에 짓밟힌 런던을 이렇게 노래한다.


특허 받은 템스 강이 흐르는 강변의

특허 받은 거리를 걸으며

내가 만나는 모든 얼굴에서

나약함의 흔적을, 비애의 흔적을 나는 본다.

 

모든 사람의 모든 고함소리에서,

모든 아기의 두려움에 찬 울부짖음에서,

모든 목소리에서, 모든 저주에서,

마음이 만든 수갑소리를 나는 듣는다.

 

어떻게 굴뚝소재부의 외치는 소리가

모든 검어지는 교회를 소름끼치게 하고,

불운한 병사의 한숨이

궁궐의 벽을 따라 피처럼 흐르는가를.

 

그러나 무엇보다도 한밤중의 거리에서 나는 듣는다

어떻게 젊은 창녀의 저주가

갓 태어난 아기의 눈물을 마르게 하고,

결혼-영구차를 역병으로 시들게 하는지를.


런던은 왕과 자본과 교회로 대변되는 기득권 세력에게는 낙원이지만 노동자들과 그 자식들과 여성들에게는 지옥이었다. 고통을 받는 가난한 노동자들을 위로해야 할 교회는 이미 오래전에 그들의 피를 빨아먹는 기관으로 전락했으며, 결혼은 여자에겐 바로 영구차를 타는 일이었다. 블레이크는 템스 강변을 걸으면서 독자들에게 그들의 그런 고통에 찬 소리를 들으라고 외친다. 19세기 말의 미국은 블레이크 시대의 영국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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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산업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된 시기는 남북전쟁이 일어난 1860년대 초부터 19세기 말까지의 약 반세기이다. 북부는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남부를 내부 식민지화하고 남부라는 풍부한 원료기지와 생산품 판매시장을 확보할 수 있었다. 미국의 산업화에 기여한 다른 중요한 요인들 중 하나가 이민의 물결이다. 1820년에서 1920년 사이의 100년 동안에 미국에는 자그마치 3800만 명의 이민이 세계 각지에서 몰려들었다. 산업화가 본격적인 궤도에 오른 1880년대와 90년대에는 이민자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19세기 말의 이민자들은 대부분 동유럽이나 남유럽 같은 유럽의 후진국 출신이거나 유대인들과 아일랜드인들 그리고 아시아인들이었다. 그들은 거의 모두 본국에서 먹고 살길이 막연한 하층계급으로 미국에 와서 민족 집단별로 대도시 변두리나 공장지대에 정착하면서 슬럼가를 형성했다. 그리고 그들이 미국 노동시장의 주류를 형성했다. 그들은 서로 언어가 잘 통하지 않았고 영어에 미숙했으므로 질이 좋지 않은 노동시장에밖에 진출할 수 없었다. 또한 그들은 이질적인 문화적 속성으로 인해 단결하기 힘들었으므로 자본가들에게는 다루기에 수월한 존재들이었다. 그들에게는 계급의식보다 민족의식이 더 강했다. 미국 노동자들의 이런 특징이 미국 노동 역사를 규정하는 중요한 요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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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말에 미국 노동자들은 가혹한 노동과 저임금에 시달렸다. 공장노동자들은 하루 10시간, 1주일에 6일 노동하였다. 철강노동자들은 하루에 12시간 일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끔찍할 정도로 위험하고 불결한 공장에서 일해야 했으며, 산업재해가 빈발했다. 또한 여성노동자들은 남성노동자들보다 훨씬 적은 저임금으로 노동을 강요당했다. 1900년경에는 전체 제조업 노동자들 중 20%가 여성이었으며 아동 노동 역시 심각한 문제였다. 최소한 170만 명의 16세 이하의 어린이들이 공장에서 노동했고 10-15세 여자아이들 중 10%, 남자아이들 중 20%가 일에 종사했다.


피복, 제화, 가구 등 노동집약적 산업에서는 노동자들이 고한제도(sweating system)라는 일종의 다단계 하청제도 속에서 일했다. 하청업자들은 낮은 생산단가로 인해 노동자들의 땀을 쥐어짜는 것 외에는 달리 수지를 맞출 방법이 없었다. 그들은 주로 이민자들이 몰려 사는 불결한 지역의 다락이나 지하실, 심지어 헛간이나 마구간을 세내어 작업장으로 쓰며 갓 이민을 온 노동자들의 값싼 노동력을 착취했다.


이런 노동 착취에 대한 반발로 1880년대와 90년대에 미국 노동운동이 불을 뿜었다. 1881년부터 1885년까지 연평균 약 500회의 파업이 일어났고, 매년 약 15만 명의 노동자들이 파업에 참가했다. 특히, 1886년에는 1400회의 파업에 50만 명의 노동자들이 참여했다. 이런 가운데서 세계 노동운동의 역사에 기록되게 될 사건인 헤이마켓 사건이 일어났다.


1886년 봄에 미국 노동총연맹을 중심으로 8시간 노동 쟁취를 위한 투쟁이 전개되어 5월 1일을 기해 전국에서 총파업이 벌어졌다. 이 투쟁에는 전국의 1만 곳이 넘는 사업장에서 35만 명의 노동자들이 참가했다. 그런 가운데 시카고에서 5월 3일 경찰이 발포하여 노동자 6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러자 다음날인 5월 4일에 이 사건을 규탄하기 위해 3,000여 명의 노동자들이 필라델피아의 헤이마켓 광장에 모여 평화적인 시위를 했다. 그러나 시위대가 해산할 무렵 갑자기 경찰들이 서 있던 곳에서 폭발물이 터져 경찰 60여 명이 부상하고 그 중 7명은 끝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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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을 빌미로 경찰은 8명의 무정부주의자들을 폭동죄로 체포했다. 그들 중 단 한 명만 시위 현장에 있었으며 나머지는 그곳에 있지도 않았지만 그 사건을 모의하고 지휘했다는 혐의였다. 그들은 결국 재판에 회부되어 5명이 사형선고를 받았으며 그들 중 한 명은 옥중에서 자살했고 4명은 사형을 당했다. 물론 그들이 그 사건을 저질렀다는 명확한 증거는 없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나중에 루돌프 쉬나우벨트라는 사람이 자신이 경찰의 지시로 폭발물을 터뜨리는 데 관여했다고 증언했다. 쉽게 말해 경찰의 자작극이었다는 것이다. 진실은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명백한 증거도 없는 재판과 사형집행은 수많은 노동자들의 분노를 일으켰으며, 그들의 장례식에는 2만 5000명의 노동자들이 참여했다.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의 많은 나라들에서 항의집회가 열렸다. 그리고 마침내 1889년 7월 파리에서 개최된 제2 인터내셔널 창립대회에서 이 사건을 기려 1890년 5월 1일을 ‘노동자 단결의 날’로 선포하면서 메이데이가 태어났다. 오늘날 세계의 거의 모든 나라에서는 이 날을 노동자의 날로 기린다.


미국은? 물론 아니다. 자기 나라에서 일어난 수치스러운 노동탄압을 추모한 날이니, 더욱이 사회주의 계열의 국제단체에서 정한 날이니 곱게 볼 리 없었다. 미국은 9월 첫 번째 월요일을 노동자의 날로 기념한다. 그러면 우리나라는 어떨까? 당연히 ‘노동’하면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독재자들이 그런 날을 좋아할 리 없었다. 우리나라는 1958년 이후 대한노총 창립일인 3월 10일을 노동절로 기렸다. 군사정권 시절에는 ‘근로자의 날’로 이름이 바뀌었다. 노동은 무슨 ‘노동’ 그저 열심히 일하라고 ‘근로’이다. 근로는 일제가 만든 용어이다. 이름 하여 ‘근로보국’이다. 열심히 일해서 나라의 은혜에 보답해라. 그 뜻이다. 글쎄 식민지 백성들에게 나라의 은혜가 뭐였을까? 김영삼 정권이 들어서면서 우리는 비로소 5월 1일을 노동자들의 기념일로 되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이름은 아직도 ‘노동자의 날’이나 ‘노동절’이 아니라 ‘근로자의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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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 딴지일보 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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