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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08. 22. 목요일

알려지지 않은 주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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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들어가며

 

 

오래간만에 뵙습니다. 알려지지 않은 주시자입니다. 필력이 딸려오는 걸 느끼면 절필하는 희한한 습성이 있는지라 이번에도 몇 년 만에 다시 글을 쓰게 됐습니다. 이번 글은 비정기 연재 입니다. 몇 회로 끝날지, 다음에 언제 업데이트 할지는 말 그대로 미정이고 저도 모릅니다. 


전 언제나 ‘글 읽은 시간이 아깝지는 않은’ 정도의 글을 목표로 삼고 있는데, 이번에는 어디까지 그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꼭 하고 싶은 말이 몇 마디 있어서 이렇게 키보드를 두드립니다.


이번 연재에서 제가 주장할 내용은 <딴지일보> 편집부의 의견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이건 그냥 상투적인 말이 아니라 진심입니다. 저는 이번 연재에서 사형제 존속론을 주장할 거고, 더 나아가 엄격하게 제한된 상황에서 사형 집행을 다시 시작할 필요성도 주장할 생각입니다. 하지만 제가 아는 분만 해도 딴지일보엔 사형제를 강력히 반대하시는 필진들이 계십니다. 얼마전에 트위터를 시작했는데 제 과거 트위터를 보시면 사형제 폐지론자 분들께 신나게 논파 당하는 저의 초라한 모습을 감상하실 수 있을 겁니다.


성범죄에 대한 대한민국 법원의 판단이 지나치게 약하고 온정적이라는 비판도 할 생각입니다. 미성년자라고 해서 처벌이 무조건 가벼워져야 하는지도 의문이라는 주장도 제기할 겁니다. 이런 주장에 반대하시는 분들도, 큰 틀에서 저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계셔도 세부적인 주장은 다른 분들도 많으실 겁니다. 그러니 이번 연재는 정말 딴지의 지면을 빌릴 뿐 제 개인적인 의견으로 생각해 주시길 바랍니다.


서론이 길었네요. 사실 오늘 이야기가 거의 다 서론에 가깝습니다만.


1. 흑역사


인류 형사재판의 역사는 최근의 아주 짧은 시기를 제외하면 거의 고문의 역사이자 인권 탄압의 역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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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를 저지른 것으로 의심되는 사람을 권력기관이 발견하면 죄가 있는지 여부를 판단해서 죄가 있을 경우 그에 합당한 벌을 준다. 이 간단한 구조는 인류 역사와 거의 함께 시작됐다. 중고생 독자제위도 한 학기 만에 세계사 다 훑어보면서 함무라비 법전 정도는 들어보셨을 거다. 그리고 그때부터 형사재판(앞으로 이 연재에선 그냥 재판이라고 하자. 민사재판은 여기선 상관 없으니)은 죄가 있는 사람의 눈을 뽑고 손을 자르고 산 채로 태우는 방향으로 전개돼 왔다.


이게 죄가 있는 사람에게 엄한 벌을 주는 경우에는(그래도 비인간적인 형벌은 용서 받을 수 없지만) 이해가 되는 측면도 있는데, 문제는 '죄가 있는 것으로 의심되는 사람에게 죄가 있는지 물어보는' 상황에서 더 크게 발생한다. 현대식으로 말하면 수사와 공판 과정에 해당한다. 그러니까 ‘유죄인지 무죄인지 아직은 모르는 상황’에서도 그 사람에게 끔찍한 고통을 안겨주는 것이 오랜 세월동안 허용됐다는 거다. 흔히 고문이라고 말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중고생 독자제위를 위해 알기 쉽게 설명하면 이렇다. 죄가 있는지 의심이 되어서 그걸 확인하기 위해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이 고문이고, 죄가 있다고 확정되어서 그에 맞는 벌을 주는 건 형벌이다. 전자는 어떤 상황에서도 절대로 허용되어선 안 된다. 후자는 아직 인류에겐 필요하긴 하지만 상대가 ‘인간’인 이상 인간이 가져야 할 존엄을 해치지 않는 방향으로 이뤄져야 한다.


그리고 인류는 아주 최근까지 전자(고문)도 허용하고 후자(형벌)도 비인간적으로 집행해 왔다.


그냥 계산하기 쉽게 서기로 따져도 인류는 2013년 정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인류가 자동차를 타기 시작한 게 대충 1900년 쯤 부터이고 미국에서 모든 시민은 범죄의 경중과 상관 없이 형사재판을 받을 때 변호사의 변호를 받을 권리가 있다고 인정된 게(여러 해석이 있을 수 있지만) 기드온 판결을 기준으로 하면 1963년부터다. 한국에서 경찰에 의한 고문이 완전히 없어진 것이 언제인지는 구글링 하지 말고 주변 어른들께 여쭤봐라. 40대 이상 어른들께 '언제부터 경찰이 사람을 안 때리게 됐어요?'라고 물어보면 된다.


지구의 표면을 2족 보행하는 이 생명체들은 이렇게 오랜 기간을 야만과 잔혹함 속에서 살아왔다. 비위도 좋고 끔찍한 글을 읽어도 상처를 좀 덜받는 정신구조를 가진 분들은 중세시대 유럽의 고문과 형벌에 대해 대충 정도만 조사해 봐도 많은 발견이 있으실 거다. 서양문물에 대한 맹목적인 동경을 싫어하시는 분들은 고대, 그리고 중세 중국 황조의 여러가지 고문과 형벌에 대한 기록들로 대체하시면 되겠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인류 역사의 카테고리로 따지면 독자제위가 거주하는 지역의 지방법원이 하고 있는 일과 같은 부류에 속한다는 사실을 한 번 상기해 주시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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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보다 끔찍하지?


2. 반성


인류는 이 흑역사를 통렬히 반성한다.


인간이 언제부터 ‘이성’이라는 것을 이렇게 중시하게 됐는지는 나 말고 다른 전문가들에게 여쭤보시길 바란다(난 아직도 포스트 모더니즘이 뭔지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다고 자신있게 이야기할 수 있다. 자랑은 아니지만). 하지만 중요한 건 인류가 저런 흑역사를 적어도 19세기와 20세기 즈음부터는 정말 진지하게 반성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공로의 아주 많은 부분은 철학자와 역사학자에게 돌아가야 한다.


잠시 옆길로 새겠다.


흔히 ‘인문학의 위기’ 혹은 ‘인문학 연구자가 줄어들고 있다. 학문의 저변이 좁아지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같은 말을 들으면 이게 무슨 건전가요 가사나 공익광고 쯤 되는 줄 알고 그냥 그러려니 넘기는 경향들이 있다. 아무리 늦게 잡아도 21세기에 들어선 이후 한국의 최고가치는 돈이고 ‘돈이 되지 않는’ 인문학이 천대를 받는 것은 어느 정도 당연하다는 인식도 팽배하다. 심지어 드러내놓고 이런 류의 학문을 조롱하는 자들도 있다. 언필칭 대학이 ‘취업률이 낮다’는 이유로 철학과를 폐지하는 꼴은 이제 별로 드문 광경도 아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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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짓이다. 더 정확히 이야기 하면 인류가 살아남을 것인가 자살할 것인가를 두고 논쟁을 할 때 한국은 자살하는 쪽에 한 표를 던진 셈이라고 해야 할까.


독자제위가 현재 발을 디디고 있는 바로 그 한반도에서 불과 300년 전에 누가 죄를 지은 것 같으면 형틀에 묶어 정강이뼈를 으스러뜨리다가 고통에 못 이겨 ‘실토’라는 걸 하면 매로 때려 죽이거나 칼로 목을 자르는 일이 '합법적으로' 이뤄졌다. 지금은 적어도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건 어느날 우연히 하늘에서 떨어진 권리도 아니오 굉장한 우연의 산물들이 우리에게 안겨준 축복도 아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삶이란 무엇인가', '인간이 인식하는 세계는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연구한 사람들, 굉장히 넓은 의미의 사상가, 철학자들이


“이것은 바르지 않다”


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증명하고 평생을 바쳐 이론적인 보강을 하고 다시 목숨을 걸고 주장해서 얻어낸 변화들이다. 불과 100여년 전에 지구상의 대부분의 인류가 ‘이것은 바르다’고 생각했던 것을 현재는 ‘이것은 바르지 않다’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개인적으로 이것은 인류의 우주개발에 맞먹는 위대한 성과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변화를 이끌어낸 사람들은 아까부터 강조했지만 판검사나 변호사가 아니다. 바로 21세기 한국에서 ‘돈 안되는 학문’ 소리를 듣는 철학과 역사를 공부하는 학자들이었다.


한국에서 독일 형법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비트켄슈타인(누구인지 궁금하면 구글에서 ‘진중권 고양이’로 검색해 봐라) 정도는 읽어줘야 한다는 말은 괜한 말이 아니다. 예나 지금이나 ‘법관’은 정해진 규칙을 충실히 이행하는 사람이고 또 그래야 한다. 그들은 한두 사건에서 온정이 넘치는 명판결을 내릴 수는 있어도 정작 그 규칙, 인류의 사고 자체를 변화시키는데는 한계가 있다. 인문학은 바로 그것이 가능한 거의 유일한 분야이고 결코 화려하지도 눈에 띄지도 않는 방식으로 인류를 조금씩 발전시켜온 힘이자 밑거름이다. 인문학 연구를 포기한다는 것은 인간이 ‘좀 더 인간답게’ 되는 길과 열쇠를 찾는 일을 포기한다는 말과 같고 그건 말 그대로 인류의 발전을 이쯤에서 끝내겠다는 소리와 동일하다. 아까 ‘인류의 자살’이란 표현을 쓴 이유를 조금은 짐작하실 수 있을 거다.


조금 난폭하게 직설적으로 이야기 하면 여러분이 지금 경찰서에 끌려가더라도 정강이뼈가 으스러지지 않고 잘 훈련된 변호사의 도움을 받아 이성적인 재판을 받을 권리를 손에 쥐게 된 건 사실 판검사, 변호사가 아니라 철학자들의 도움이 더 컸다는 거다. 주변에 인문학 하는 친구들 있으면 내일 밥이라도 한 끼 사 줘라.


본론으로 돌아가자.


인류의 이성이 괄목할 성장을 거두면서 재판에도 큰 변화가 찾아왔다. 일단 형벌은 몰라도 고문은 배제해야 한다는 주장이 상당한 설득력을 얻기 시작했다. 이것이 많은 나라에서 제대로 실현되기까지는 물론 험난한 여정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2천 년 넘게 이어져온 고문이라는 행위 자체를 ‘죄악’으로 보게 된 것만 해도 상당한 발전이었다. 그리고 끔찍한 형벌들도 점차 사라져갔다.


그리고 인류의 이성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한 단계 더 발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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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의심스러운 것은 피고인에게 유리하게


재판의 역사가 고문의 역사일 수 있었던 것은 오랜 기간동안 인류가 범죄자를 악마로 취급했기 때문이다. 종교적인 의미에서도 그렇고 종교적인 의미를 배제하고서도 그렇다. 범죄자는 추악한 자, 정상인과 다른 존재, 사회에서 배제해야 할 질병 정도로 생각했던 것이다.


가장 오래된 죄악인 살인을 예로 들어보자. 사람을 죽이는 사람은 종교를 중시하는 사회일 경우 그 종교가 규정하는 악마에 해당할 가능성이 매우 높았고 그렇지 않은 사회에서도 인간이 인간으로서 가져야 할 가장 기본적인 도덕률을 어긴 자로 취급 받았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그런 ‘추악하고 정상인(그러니까 ‘우리’)과 다른 저 범죄자’는 시급히 이 사회에서 배제해야 한다는 인식도 함께 있었다는 거다. 그러니 그런 추악한 자를 가려내기 위해 고문 정도는 해도 되는 거고 고문에 지쳐서든 실제로 범죄를 저질러서든 ‘실토’를 하면 끔찍하게 살해해도 괜찮았던 거다. 범죄자는 악마니까.


당연한 이야기지만 근대 이후의 형법은 범죄자를 악마로 보지 않는다. 그저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본다.


…반복하지만 이런 인식의 전환을 위해 ‘돈 안 되는 학문’인 인문학에 평생을 바친 사람들의 노고를 한국은 좀 더 제대로 평가하고 감사해야 할 필요가 있다. 평생 아무도 안 읽는 논문 쪼가리나 쓰고 있다고 소개팅에서 차별 받고 미팅에서 서러운 꼴을 당하고 결혼정보회사에는 회원가입도 안 되는 그 친구들이 이뤄낸 위대한 성과 때문에 인류가 그나마 여기까지 온 거란 말이다. 알겠습니까? 지지난해 제 석사과정 후배 거하게 차버린 여성분!!


여튼, 현대 형법은 범죄자를 악마로 보지 않는다. 그저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볼 뿐이다. ‘그들은 우리와 다르지 않다’는 것이 현대적인 형법의 대전제다. 인류는 더 이상 인간의 골격이나 생김새, 심한 경우 피부색으로 범죄를 저지를 확률을 가늠하지 않는다(사마의가 반역을 할 상이라는 말을 들었다는 고대 중국의 이야기로 치부하지 마시라. 아주 최근까지도 유럽에서는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들의 신체적 공통점을 규명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이게 DNA로 넘어가면서 헐리우드 영화가 몇 편 나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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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우리와 다르지 않는 범죄자’를 어떻게 대해야 할까. 더 나아가서 범죄자들이 우리와 다르지 않다면 우리 모두 범죄자가 될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 된다. 그럼 그렇게 ‘정상인을 범죄자로 만드는’ 원인은 무엇인가. 범죄라는게 과연 온전히 개인 만의 잘못일까.


지금 인류가 대부분 공유하고 있는 대답은 '범죄는 범죄자 개인 만의 잘못은 아니다'라는 거다. 범죄자는 물론 비난 받아야 한다. 그러나 불우한 환경 속에 자라서 선악의 구별을 제대로 익히지 못한 자들, 범죄 이외의 방법으로는 살 길을 찾기 힘들었던 자들을 '모두 너의 잘못이다'라고 비난하는 것은 옳지 않다.


방향을 바꿔 이렇게도 생각해 보자.


형벌이 범죄자 개인에 대한 비난이라면, 그 개인은 ‘비난 받을 만한 일’을 했을 때에만 형벌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 범죄자라고 비난을 받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이건 나쁜 일이지만 난 이 일을 해버리겠다'라는 이성적인 선택이 있어야 한다. 그런 이성적인 선택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벌어진 일이라면 그 개인을 비난할 수 없고, 따라서 형벌도 내려서는 안 된다.


바로 이 고민의 흔적이 현대 형법 곳곳에 베어있다. 인간은 자신이 스스로 판단해서 범죄를 저지르겠다는 선택을 했을 때에만 처벌을 받아야 한다. 그렇다면 ‘스스로 판단할 만한 정신상태가 아니었다면’ 처벌을 해서는 안 된다는 말도 된다.


인터넷에서 정말 가루가 되도록 까이고 욕을 먹는 ‘술에 취해 한 일이니 감형’이라는 매커니즘은 사실 이런 식의 오랜 고민이 가져온 산물이다. 나는 이런 사고방식이 이런 식의 판결로 이어지는 것에 반대하지만(이 글을 쓴 이유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적어도 이런 식의 고민을 인류가 해 왔다는 것은 높이 평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고민들을 통해 인간이 인간다워진 거니까.

 

그리고 이런 고민들은 정말 여러가지 각도로 현대의 형사재판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의심스러우면 피고인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려야 한다. 검사가 항소하지 않으면 고등법원은 지방법원보다 더 무거운 형벌을 내릴 수 없다. 사람을 한 명 죽여서는 절대로 사형을 받지 않는다.


그렇게 ‘범죄자’의 인권을 위한 인류의 오랜 노력은 조금씩 결실을 맺고 있고, 나는 이 흐름 자체는 정말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몇 가지 예외를 빼고.


그리고 그 몇 가지 예외를 꼭 이야기하고 싶었다.


10대 소녀를 성폭행한 다음 부둥켜 안고 울고 따뜻한 물로 씻어주니 집행유예를 받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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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articl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ctg=12&total_id=10120950


여성을 폭행하고 납치해서 감금해도 ‘혹시 취직이 힘들어질까봐’ 벌금형을 선고받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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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i.co.kr/arti/society/women/559375.html


이런 판결들에 대해서 말이다.


내가 묻고 싶은 건 한가지다.


이것이 과연 정의로운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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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려지지 않은 주시자

트위터: @unknownbehold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