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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09. 04. 수요일

이작가










4. 신입사원 모집 공고


아침 10시, 오늘 입금을 약속한 채무자의 명단과 입금 예정액을 과장에게 보고해야 하는 시간이 왔다. 철수는 한 시간 동안 단 한 명의 약속자도 확보하지 못했다. 아침 일찍 이미 이달 약속한 금액을 입금해준 할머니가 있었으나 이후에 입금을 약속한 사람이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약속자가 없다고 보고하는 시간은 철수에게 가장 힘든 순간이었다. 아침부터 자신의 무능함을 실토하고 상사의 질책을 듣는 일은 누구에게나 고통스러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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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채권추심은 추심원이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채무자의 형편이 되지 않는다면 원하는 대로 할 수 없는 일이고 대부분은 그날의 운에 달려있었다. 물론 운에 좌지우지되지 않고 채무자를 좌지우지하는 특별한 추심원도 있었다. 추심왕 장재완은 제일 먼저 과장에게 약속자를 보고하고 초본열람 업무를 위해 외근을 나갔다. 다음은 철수 차례였다.


“약속자가 없습니다.”


“아아, 이 새끼… 얼른 우체국이나 갔다 와.”


박치훈 과장은 거칠게 말했지만 길게 화를 내지는 않았다. 월초이기 때문에 실적의 압박이 덜하기도 했고, 앞서 보고한 장재완의 실적이 화려하기도 했다. 그리고 철수에게 주어진 아침의 외부 업무가 있었다. 철수가 우체국에 가져갈 서류를 챙기는 동안 과장은 오진성을 신랄하게 갈궜다.


“오진성, 오늘 약속자 얼마나 있냐?”


“없습니다.”


“얌마, 약속자도 하나 없는 새끼가 뭐한다고 돈 나올 구석도 없는 거랑 싸우고 지랄이야? 이 정신 나간 새끼가 지난달에도 금감원에서 컴플레인 들어온 거 몰라? 여기가 니 회사야?! 니 맘대로 지랄하고 싶으면 지랄하고 성질나면 성질내고 그러냐?


“죄송합니다.”


"개새끼야 승진하기 싫으면 싫다고 말을 해. 월급 받기 싫으면 싫다고 말을 하라고…”


과장이 오진성을 상대하느라 철수에게 별 말을 하지 않은 덕분에 철수는 무사히 약속자 보고를 피해갈 수 있었다.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리고 동료의 실책을 위안으로 삼는 자기의 상황이 답답해 한숨이 나왔다. 철수는 자리를 피하려고 서둘러 서류 상자를 손수레로 옮겼다.


와이캐피탈에서 발송하는 우편물은 독촉장과 채권양도통지서가 대부분이었다. 보통 하루에 2만 장 정도를 보냈는데 스테이플러로 철해놓은 문서를 A4용지 상자에 꾹꾹 눌러 담으면 10상자 정도 분량이 되었다. 이 상자를 손수레에 차곡차곡 싣고는 끈으로 묶어 우체국으로 가져가는 일은 막내의 업무였다. 매일 반복되는 귀찮은 일이었지만 철수는 이 시간이 좋았다. 밖으로 나가 바람을 쐬면 집중 독촉 시간의 압박감을 떨쳐낼 수 있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철수는 기분 좋게 우체국으로 향했다.


덜컹대는 손수레를 끌고 철수가 사무실 밖으로 나가자 개인회생과장 조황진이 따라왔다. 그는 앞장 서 나가 엘레베이터 버튼을 눌러주었다. 다른 손에는 출력한 A4용지와 투명테이프를 들고 있었다. 엘레베이터 안에서 조황진이 말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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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수야. 너 일한 지 얼마나 됐지?”


“일 년 삼 개월 됐습니다.”


“벌써 그렇게 됐나? 짬이 차도 너 밑으로 아무도 없어서 좀 그랬겠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사장님이 알바 말고 직원 좀 뽑아 쓰자더라. 인터넷에도 올리긴 할 건데 너도 주변에 일할 만한 애 있는지 찾아 봐.”


“예. 알겠습니다.”


“딴 거 필요 없고 그냥 말 잘 듣는 애 골라. 너가 쓸 쪼시니까. 근데 너 쪼시란 말 아냐?”


“모릅니다.”


“땅깨들은 쪼시를 부사수라 하지? 뭐 여튼 너도 이제 사수된다고.”


조황진은 씩 웃으면서 철수의 어깨를 툭툭 쳤다. 특전사 출신인 조황진은 부대에서 쓰던 은어를 회사에서도 즐겨 썼다. 육군으로 전역한 사장 앞에서는 절대 ‘땅깨’ 같은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지만, 부하직원들 앞에서는 일반 보병을 무시하는 표현으로 기를 죽이곤 했다. 철수는 군대용어를 들을 때면 저도 모르게 몸이 움츠러들었다. ‘사수-부사수’ 같이 사회에서 자주 쓰이는 말도 불편했다. 군역을 마치지 않았기 때문에 육·해·공군과 특수부대에서 쓰는 용어의 차이도 구분하기 어려웠다. 조황진의 말을 들으면서 철수는 애매하게 웃음을 지었다. 조황진은 기가 죽어 있는 철수의 표정을 확인하고 만족했다.


조황진이 회사 정문 앞의 게시판에 신입사원 채용공고를 붙이는 동안 철수는 옆에 서서 그를 기다렸다. 조황진은 일을 마치고 담배를 꺼냈다. 한 개비를 입에 물고 철수에게도 하나를 건네주었다. 철수는 담배를 받아들고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찾았으나 아무 것도 없었다. 서둘러 나오느라 담배와 라이터를 모두 사무실에 두고 나왔다. 철수가 허둥대는 동안 조황진이 기분 좋은 얼굴로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이고 철수에게 라이터를 건네주었다. 철수는 가끔 담배를 피웠지만 상사와의 맞담배가 편하지 않았다. 조심해서 고개를 돌리고 담배에 불을 붙인 뒤 옆으로 담배연기를 내뿜었다.


두 사람은 별 말 없이 담배를 피웠다. 흡연금지구역으로 지정된 강남대로에서 한 블록 안쪽에 있는 건물 근처에는 담배를 피우는 직장인이 여럿 보였다. 조황진은 담배꽁초를 툭 튕겨서 하수구에 버리고 사무실로 돌아갔다. 철수는 회사 앞에 붙어있는 채용공고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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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권관리 업무 신입사원 모집’



한 글자 한 글자를 또박또박 소리 내어 읽었다. 같은 문구를 처음 보았던 날이 기억났다. 그리고 눈물을 뚝뚝 흘리던 수아의 얼굴이 떠올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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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아는 도서관 구석자리에 앉아 있던 여자애였다. 철수는 맞은 편 대각선 자리에 앉아 있었다. 철수의 책상 위에 있던 책과 수아가 보던 책은 대입 수학능력시험 기출문제집이었다. 둘은 재수생이었고 서로의 상황을 금방 알아보았다. 철수는 공부를 하다가 가끔씩 고개를 들고 수아의 흐트러진 앞머리 사이로 드러난 이마를 물끄러미 바라보곤 했다. 수아도 종종 철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때로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그럴 때 철수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지만 수아는 미소를 지어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둘은 함께 도시락을 먹기 시작했다. 철수는 수아가 먼저 ‘점심 같이 먹을래?’라며 말을 걸었다고 기억하고 있지만 수아는 철수가 먼저 ‘너도 도시락 싸왔어?’라고 물어 보았다고 기억했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되도록 철수와 수아는 영등포 도서관 자율학습실에서 만났다. 매일 아침 아홉 시부터 저녁 일곱 시까지, 주말에도 쉬지 않았다. 자습서를 빌려보기도 했고 시간을 정해서 같은 문제집을 풀기도 했다. 포스트잇을 나눠 쓰기도 했고 서로의 연습장에 메모를 남겨 놓기도 했다. 추위가 한풀 꺾인 어느 저녁에 철수는 수아를 집까지 데려다 주겠다고 했다. 철수네 집과 수아네 집은 반대 방향이었지만 이후로 철수는 매일 같이 계속 수아를 집 앞까지 바래다주고 자기 집으로 돌아왔다.


함께 길을 걷는 삼십 분 정도는 하루 중 가장 즐거운 시간이었다. 수능시험의 출제 경향과 새로 나온 교재에 대해서도 이야기했고, 고등학교 때의 일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좋아하는 가수나 배우에 대해서도 이야기했고 음식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도서관에서 코를 골며 자는 공인중개사 시험 준비생에 대해 뒷말을 하기도 했다. 온갖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삼십 분이 금방 지나갔다.


“철수야, 너는 무슨 과 가고 싶어?”


“사회복지학과.”


“왜?”


“우리 엄마가 천주교 신자거든.”


“넌 아니고?”


“나는 세례 안 받았어. 울 엄마도 세례 받은 지 얼마 안 됐어.”


“그렇구나.”


“고삼 때 봉사활동 하러 엄마랑 엄마 대모님이랑 같이 살레시오 복지관이란 델 갔었거든. 거기에는 불쌍한… 몸이 불편한 사람들이 있어.”


“장애인 복지관?”


“응. 장애인 어른도 있고 애들도 있고 수녀님이랑 자원봉사자랑… 그중에 나랑 제일 친했던 애가, 동호라고 우리보다 세 살 어린 앤데 걔는 혼자서 밥을 못 먹어. 손이 이렇게 돌아가서 옆에서 밥을 떠 먹여줘야 돼. 그런데 자원봉사자가 늘 있는 게 아니니까, 더 불편한 친구들도 많아서 수녀님들 바쁘시고… 그래서 도와주는 사람이 없으면 혼자서 밥을 먹어야 하는데 식판에 이렇게 입 대고 먹거든… 사회복지사가 되면 매일 도와줄 수 있으니까, 그리고 꼭 거기 아니더라도 누구에게라도 도움이 되는 일을 하면 좋겠어.”


“어울린다. 너는 착하니까 잘 할 것 같아.”


“정말?”


“응. 완전 딱이야. 전에 내가 신문에서 봤는데 사회복지사가 요즘 뜨는 유망직업이래. 취업도 잘 될 거야.”


“이번 주 토요일에 복지관 같이 갈래?”


“그럴까? 멀어?”


“아니. 버스로 여섯 정거장.”


그런 이야기를 하며 수아의 집 앞에 도착했을 때 철수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수아의 아버지를 만났다. 수아의 아버지는 다세대주택의 계단참에 걸터앉아 있었다. 그의 축 늘어진 손끝이 바닥에 뒹굴고 있는 빈 소주병을 가리키고 있었다. 딸의 목소리를 들은 아버지는 고개를 들었다. 술에 취해 붉게 달아오른 얼굴이 이쪽을 향하자 철수는 상대를 경계하며 수아의 손을 잡아 자기 쪽으로 끌어 당겼다. 수아는 화들짝 놀라며 손을 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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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여기서 뭐해?”


수아의 아버지는 대답하지 않고 충혈된 눈으로 철수를 노려보다 불쑥 물었다.


“넌 뭐하는 놈이냐?”


철수는 자기가 무엇을 하는지 설명하기가 어려웠다. 괜히 죄를 지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고개를 숙이고 발끝을 바라보았다. 양 발이 시옷 모양을 그렸다. 곤란할 때의 버릇이었다. 수아가 아버지에게 다가가며 대신 답했다.


“도서관에서 같이 공부하는 친구야.”


“망할 년,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그때 철수를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보던 아버지는 이미 빚더미에 깔려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수아는 대입을 포기하고 카페의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했다. 수아가 더 이상 도서관에 오지 않자 이제는 철수가 수아를 찾아갔다. 카페의 마감 시간은 열두 시가 넘었다. 철수는 열한시까지 도서관에 있다가 카페로 갔고 수아를 집까지 데려다 주고 집으로 돌아오는 일과를 반복했다. 늦게까지 공부를 한 덕분인지 철수의 수능성적은 이전 해에 비해 훨씬 나아졌다. 경기도 남부에 있는 4년제 대학의 사회복지학과에 합격했다는 통지를 받은 뒤 철수는 수아와 함께 정동진으로 여행을 갔다. 둘은 함께 밤을 보내고 해돋이를 보았다.


철수가 군에 입대하던 추운 날에도 수아는 함께 했다. 철수의 부모님도 같이 갔다. 훈련소 앞에서 수아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몇 번이고 말했다. ‘군대에서 잘 해야 돼.’ 그러나 철수는 수아의 바람대로 군생활을 잘 해나가지 못했다. 키가 작고 비쩍 마른 외모로는 이미 남성호르몬이 넘쳐나는 수컷들의 세계에서 낙오한 셈이었다. 군대에 적응하기 위해 아무리 노력해도 헛수고였다. 묵묵히 시키는 일을 해나가도 한 번 찍힌 몸은 환영받지 못했다. 


그 사건이 일어난 날도 철수는 선임병이 시키는 대로 열심히 앞으로 뒤로 구르고 있었다. 정신없이 구르던 차에 고참의 군화가 철수의 왼쪽 눈을 향해 다가왔다. 그 군화가 일부러 철수의 얼굴을 걷어찼던 것인지 우연히 철수의 얼굴이 있던 곳에서 헛발질을 하고 있던 것인지 철수는 알 수 없었다. 격한 통증을 참고 계속해서 앞으로 뒤로 몸을 굴렸다. 눈앞에 먼지가 낀 것 같이 시야가 흐려지고 작은 불빛이 번쩍거렸다. 그 상태로 한 달이 지나도록 의무실에 가지 못했다. 꾀병을 부린다고 더 얻어맞을까 두려워 눈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말도 하지 못했다. 자대배치를 받고 육 개월 만에 휴가를 나와서 안과 병원에 가니 외상성 망막박리 진단이 나왔다. 의병전역이 결정되었을 때 고참은 철수에게 말했다.


“먼저 제대해서 좋겠다. 나가서 찾아갈게.”


망막수술을 받고 또 재수술을 받고 나서도 시력은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철수의 왼쪽 눈은 거의 아무 것도 보지 못했지만 계속해서 고참의 군화가 보였다. 귓가에서는 제대하고 찾아오겠다고 말하는 목소리가 수시로 들렸다. 철수는 자기 방에 처박혀 컴퓨터 앞에 앉아 혼자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일 년이 지났다. 철수가 답장하지 않아도 수아는 꾸준히 이메일을 보내 소식을 전했다. 가끔은 집으로 찾아와 방문을 두드리기도 했다. 철수는 결코 방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병신이 된 채 수아를 만나고 싶지 않았다. 독방에 스스로를 가둔 채 철수는 욕망과 공포를 일궈냈다. 살고 싶다는 욕망과 죽음에 대한 공포였을까? 아니면 반대로 죽음에 대한 욕망과 앞으로의 삶에 대한 공포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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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 찬란한 여름날이었다. 철수는 갑자기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한강 둔치에 나가 한참을 앉아 있었다. 세상은 낯설었다. 한강 너머로 여의도가 보였다. 고층빌딩이 늘어선 서울의 중심, 그 화려한 섬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미치도록 수아가 그리웠다. 철수를 방에서 끌어낸 사람은 철수 자신이었다. 정확히는 자기 내면의 욕망과 공포였다. 가치 있는 인간이 되고 싶다는 욕망과 아무 쓸모없이 사라져버릴 지 모른다는 공포. 욕망과 공포는 사람을 움직이게 만드는 가장 강력한 감정이기에 철수는 그것을 직시하지 못했다. 대신 수아가 자신을 방에서 꺼내 주었다고 믿었다.


철수는 무엇이든 할 일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인터넷으로 채용공고를 뒤지며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 일용직 일자리라도 구하려고 인력시장에 나갔다. 불황기에 일자리를 얻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철수의 부모는 하나 뿐인 아들이 대학에 복학하기를 바랐지만 철수는 당장이라도 돈을 벌고 싶었다. 돈을 벌어서 자신이 세상에 필요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었다. 컴퓨터 앞에서 홀로 보냈던 시간이 전혀 쓸모없지는 않았다. 철수는 용산전자상가의 조립피씨 전문점에서 컴퓨터 부품을 조립하는 일을 배웠다. 동료들이 있었지만 거의 혼자서 일을 했고 자기 일만 제대로 해내면 누구도 철수를 괴롭히지 않았다. 급여는 최저임금에 식대를 더한 수준이었지만 철수는 만족했다.


철수가 꾸준히 직장에 나가기 시작하고 반년이 지나자 그의 부모는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부모는 영등포의 집을 팔아서 은퇴 후의 자금을 만들었고 철수를 위해서 원룸 전세를 얻어 주었다. 그들은 철부지 같은 아들이 미덥지 않았지만 수아를 믿었다. 철수가 함께 살자고 제안하자 수아는 기꺼이 자기 집을 떠나 철수의 집으로 옮겨왔다. 수아의 아버지가 잠적한 뒤로 어머니와 남동생 세 식구가 단칸방에서 살기 시작한 지 오래였다.


둘만의 생활은 정다웠다. 밤에는 같이 잠을 자고 아침에는 같이 밥을 먹었다. 낮에는 각자의 일터로 갔지만 함께하지 않는 시간이 괴롭지도 않았다. 철수는 컴퓨터 부품을 조립하다 말고 혼자 실실 웃었다. 주문서의 제품모델명에서 S라는 알파벳을 발견하면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매일 아침 면도를 하기 시작하면서 보송보송했던 철수의 수염이 빳빳해졌다. 수아는 점점 더 예뻐졌다. 이마에 조금 남아 있던 여드름이 사라졌고 피부에 윤기가 흘렀다. 카페에서 일하며 바리스타 자격증을 따기 위해 틈틈이 공부를 했다. 둘은 돈을 모아서 작은 카페를 차리는 꿈을 꾸었다. 학교 앞에 분식집을 해볼까 하는 궁리도 했다. 영등포 일대의 상가 권리금과 보증금이 얼마나 되는지 알아보고 난 뒤에 잠시 보류하기로 했지만, 스물네 살은 미래를 꿈꾸기에 늦은 나이가 아니라고 서로를 응원했다.


철수는 돈을 벌었고 돈을 썼다. 철수가 돈을 가지고 할 줄 아는 두 가지 일이었다. 수아의 사정은 조금 더 복잡했다. 수아는 돈을 벌었고 아버지를 위해 돈을 갚았고 어머니와 남동생을 위해 돈을 보냈으며 자기 자신과 철수를 위해 아주 조금을 남겼다. 수아는 철수와의 생활에 돈을 거의 보태지 못하는 상황을 안타까워했다. 철수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돈을 쓰는 것이 아깝지 않다는 것은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는 가장 확고한 증거였다. 철수는 돈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지만 이것만은 분명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돌려받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돌려주지 못하는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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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수야. 나 교통카드가 안 돼.”


어느 날 아침 수아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철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철수는 황급히 버스에서 내려 한 정거장 거리를 내달렸다. 교통카드가 작동하지 않는다고 슬퍼하다니 수아는 그렇게 나약한 아이가 아니었다. 대체 무슨 일인가 싶었다. 찬바람이 몰아치는 버스정류장에 수아가 우두커니 서있었다. 멀리서 뛰어오는 철수를 보고서도 수아는 한참을 그대로 서 있었다. 철수가 가까이 다가가 수아의 어깨를 끌어안자 무너지듯 매달렸다. 입술을 깨물고 망설이다 힘겹게 말을 꺼냈다.


“통장이 압류됐어. 체크카드도 안 되고 교통카드도 안 돼. 출근 어떻게 하지? 나 앞으로 어떡하지?”


수아는 출근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한동안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사람을 만나고 싶지 않은 기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철수는 아무 말 않고 내버려두었다. 수아는 전화기를 꺼놓고 방 안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잘 먹지도 않았고 쉽게 잠들지도 못했다. 그렇게 몇 주가 지나자 철수는 수아를 두고 출근하기가 불안해졌다. 자기가 없는 동안 최악의 선택을 해버리면 어쩌나 싶어 두려웠다.


아침에 면도를 하면서 철수는 마음을 다잡았다. 회사에 출근하지 못한다고 문자메시지를 보낸 뒤 수아를 붙잡고 아버지의 빚이 얼마나 되는지 캐물었다. 수아는 처음으로 자기의 부채에 대해 털어 놓았다. 아버지가 많은 빚을 지고 잠적해 연락이 끊겼다는 사정을 대충 설명했던 적이 있었지만 딸의 이름으로 여기저기서 대출을 받고 신용카드를 만들어 돈을 끌어다 썼다는 사실은 말하지 않았었다. 수아가 전화기를 자주 꺼놓았던 이유와 자기 집에 갔다 오면 악몽을 꾸었던 이유가 밝혀졌다. 그동안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철수는 폐가 쪼그라드는 것 같은 고통을 느꼈다. 딱 한 번 마주친 그 사내의 얼굴을 떠올리기 위해 애썼다. 그를 찾아내 멱살을 잡고 화를 내고 싶었다. 당신 딸에게, 내 여자에게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고 소리치고 싶었다. 철수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내가 해결해 줄게.”


그 말을 듣고 수아는 웃었다. 깔깔 소리를 내며 크게 웃었다. 철수의 호의를 비웃지 않으려고 가장 좋았던 기억들만 떠올리며 웃었다. 숨이 차서 헉헉댈 정도로 웃어댄 뒤에 수아는 기운이 빠져 그 자리에 쓰러지듯 누웠다. 아주 오랜만에 잠이 들었다.


철수는 수아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잠든 것을 확인한 뒤 수아의 핸드폰을 꺼냈다. 비밀번호는 어렵지 않았다. 네 자리 숫자는 철수의 생일이었다. 핸드폰에는 빚 독촉 메시지가 가득했다. 철수는 채권추심업체 이름과 전화번호를 옮겨 적었다. 수아가 잠에서 깰까 봐 집 밖으로 나가서 전화를 걸었다. 화난 목소리로 윽박지르고 싶었지만 턱이 덜덜 떨렸다.


“민수아, 수아가 진 빚이 대체 얼마나 되나요?”


“본인이십니까?”


“남자… 남편입니다.”


“삼자고지는 불가합니다. 본인에게 확인하십시오.”


전화가 끊어졌다. 철수는 업체의 주소를 검색했다. 지하철을 타고 강남으로 갔다. 인파를 헤치고 뛰듯이 빠른 걸음으로 추심업체로 향했다. 정문에 도착했을 때야 자기가 어디에 와 있는지 깨달았다. 이제 어떻게 하지? 그때 게시판에 붙어 있는 채용공고가 눈에 들어왔다.






‘채권관리 업무 신입사원 모집’









이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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