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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 식당에서 점심시간에 티비를 틀어준다. 가끔 안전교육 영상을 틀어주고 출입구에서 서명을 받는걸로 안전교육을 대체한다. 느긋하게 점심을 먹는 사람은 없다. 길어도 십분 안에는 식사를 마친다.


뉴스에서 백남기님의 사망소식을 들었다. 밥 먹는 속도를 늦추는 사람은 없었다. 며칠 간격을 두고 부검을 하겠다는 경찰과 병사로 처리한 의사의 뉴스가 나왔다. 경찰의 영장집행에 저항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나와도 다들 묵묵히 밥을 먹었다.


물대포를 맞으면 아퍼. 사람이 날아가. 노인네들은 죽을 수도 있어. 고개 숙이고 무표정하던 조씨 형님이 소근거렸다. 왈칵 반가웠다. 맞아보지 않고는 나올 수가 없는 말이다. 형님 언제 맞아봤어요? 승림카본이라는 회사가 있었어. 거기 노조가 있었어. 혹시 알어?


십년쯤 전 승림카본에서 설립된 노동조합은 초반부터 경찰과 용역에게 두들겨 맞았다. 피를 본 사람도 다수였다. 승림카본의 노무당당직원이 노동부 직원에게 돈을 건네준 증거를 포착하고 ,경찰과 용역의 합동작전으로 노조를 무너뜨리려는 시나리오가 적힌 문서를 발견해 언론에 제보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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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참세상(링크)


신문에 보도됐지만 시나리오대로 진행 되었고 노동조합은 박살이 났다. 그 과정에서 사람들도 박살이 났다. 제법 긴 시간이고 처절했지만 여느 때처럼 법과 공무원조직은 상대적 약자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승림카본의 다른 사람들을 잘 알지는 못했지만 분회장과 사무장은 여러 번 보았다. 신문에 났던 노동부 공무원은 징계 없이 타 지역으로 발령을 받았다. 조씨 형님도 그 기간에 경찰서에 불려 다니고 벌금형을 맞았다.


조씨 형님은 평소엔 말이 적고 주말엔 매주 등산을 간다. 아내와 장성한 자식들이 있다. 술을 좋아하고 어울리는 여자 친구들 이야기를 조금 들었을 뿐이다. 나쁜 사람은 아니지만 개인적인 기질이 강하다. 혈기가 덜 식었던 40대 중반엔 신규로 설립되는 노동조합의 편에 섰던 적이 있었다. 평소 모습으로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고통과 두려움에 대한 내성이 강하고, 책임감, 오기, 자존감 따위가 강해서 손익계산에 따른 합리적인 판단을 무시하는 사람만이 마지막 잎사귀처럼 끈질기게 버티다가 퇴색한다. 오래 버티지 못했다고 해서 그 순간의 의기가 폄훼 되어서는 안 된다. 미안하다며 그 순간은 진심이었다던 사람들이 돌아서고 떠나던 모습들이 다시 연상된다.


그러다 보니 사느라 잊고 있던 사람이 문득 생각이 났다. 사람이 그리워지고 마음이 아려온다. 잘 지낼 것 같지 않지만 더 아프지도 말고 많이 울지 말고 조금은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전화번호는 아직 남아 있지만 막상 할 말이 없다. 고통과 두려움에 대한 내성이 강하다는 것이 고통과 두려움을 적게 느낀다는 것은 아니다. 더 많은 고통을 참고 두려움속에서 번민했다는 말이다.


그날 이후로는 조씨 형님에게서 다른 사회적인 문제들에 대한 발언들을 들어보지 못했다. 승림카본의 옛 인연들과는 연이 끊어졌다고 했다. 쉬는 시간엔 국화축제와 단풍구경이 주제인 카톡을 여자 친구들과 주고받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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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문에서 피흘리는 동료를 보고 분노에 떨던 중국의 대학생이 의사가 되어 체제에 적응하고 인터뷰한 기사를 읽은 기억이 났다. 젊은 날의 분노와 의기는 서서히 퇴색되고 어느 순간 그는 살구 먹는 재미를 즐기는 사람으로 변했다. 살구는 남편이 있는 여자를 뜻하는 그들의 은어였다.


벌꿀 오소리의 습격에 맹렬히 저항하다 포기하고 빼앗기기 전에 공동체의 자산인 꿀을 먹어 날지 못할 정도로 배를 불리던 꿀벌의 모습이 닮았다.


공동체의 이익과 사회적 정의감을 위해 싸웠던 사람들의 꺾어진 상처는 방관자들의 냉소와 외면으로 어긋난 채로 아문다. 패배감과 무력감을 떠오르게 하는 사람들과 거리를 둔다. 스스로를 이기적으로 만들고, 쾌락주의자로 변하게 하는 것 같다. 쓸데없는 곳에서 패턴을 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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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씨 아저씨는 작년에 교통사고로 갈비뼈가 일곱 개 부러졌다. 뼈는 아물었다는데 아프다며 일하기 전에 허리에 복대를 찬다. 칠십이 안 되었어도 주름의 골이 깊다. 처진 어깨, 살짝 굽은 등, 투박한 손 마디는 그가 살아온 삶을 짐작하게 한다. 조금만 기질이 강해 보이는 이에게는 저자세를 취하고 허리를 숙인다.


어린백성이 이르고자 할 말이 있어도 하지 못한다던 세종임금의 마음은 곱지만 말은 서열이고 권력이기도 하다. 말할 기회를 자주 갖지 못하는 이들은 자신의 말을 들어주는 이를 만나면 별다른 변화가 없어도 조금은 더 행복하게 보인다. 언제 집근처에 놀러오면 근처 다방에서 쌍화탕정도는 사주겠단다.


술 담배도 안하고 한달에 세 네번 아니 두 세번 다방에 가서 가슴을 슬쩍 만지고 오는 게 삶의 유일한 낙이란다. 손에 남은 젖가슴의 감촉을 이야기하며 성추행사건으로 국정교과서 집필진에서 낙마한 최몽룡 교수처럼 순박한 웃음을 짓는다. 생식기능이 온전히 작동할 것 같지 않은 하층민의 늙은 남자가 아직 살아있음을 그런 식으로 확인한다.


무당과 남창이 국정을 좌지우지 하는 나라에서 성매매의 합법성을 논하는 건 의미가 없다.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돈을 줄 의사가 있는 구매자와 성매매로 생을 유지해야하는 사람들이 있는 건 현실이다. 모든 노동에 합당한 댓가가 주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성매매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본다. 보통 투명하지 못하고 음습한 장소에서 계급적인 착취와 인권유린의 독버섯이 자란다.


자본주의는 성매매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회장님에게 500만원을 받고 몸을 파는 창녀와 늙은 노동자에게 6,000원의 쌍화탕을 파는 조건으로 젖가슴을 허용하는 다방레지로 신분을 세분화 한다. 신분이 갈려진 채로 서로를 이해 할 정도의 교류가 없는 사람들은 서로를 질시하거나 경멸한다. 미성년 아이돌들은 성적인 메시지가 듬뿍 담긴 몸동작을 더 많은 관심에 딸려오는 돈과 바꾸려고 애쓴다.


한씨 아저씨가 행복한 얼굴로 새로 온 40대 다방레지의 탱탱한 가슴을 이야기하다가 인상을 찡그렸다. 지난 주에 아주 더러운 놈을 봤단다. 대낮에 개방된 공간에서 다방레지의 아랫도리에 손을 넣고 주무르는 추잡한 놈이 있었단다. 자기는 가슴만 만지지 그런 짓은 안 한다고 참 더럽다는 말을 반복했다. 돈이나 많이 받는 것도 아니고 당하는 입장에서는 참 더러웠을 것 같다. 그 더러웠을 기분을 공감한 것 같지는 않았다.


나름 확고한 도덕관인 건지 부럽다는 건지 정확한 의중은 알 수가 없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왠지 대통령과 정부 여당을 성토하는 야권의 도덕성이 저렇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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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 돼지같은 가축들의 주인에 대한 충성심은 보통 먹이를 먹는 만큼 자란다. 송로버섯과 샥스핀을 얻어먹은 이정현씨가 혼신의 단식으로도 최순실이란 이름이 드러나는 것을 막지 못했다. 손석희 뉴스에서 참담한 내용들이 까발려졌다. 촛불집회가 주말마다 열리고 종편채널에서도 자극적인 뉴스들을 쏟아냈다.


박정희가 통치하던 시절에 인생의 가장 찬란한 시기를 보냈을 노인이 따님 대통령을 공격하는 이들에게 분노를 토했다. 최순실이 나쁜년이지 박근혜는 죄가 없다고. 몇 주간 폭로뉴스로 말이 없어지긴 했지만 마음이 바뀐 것 같진 않다. 생각이 믿음의 영역에 안착을 하면 어떤 논리와 증거로도 설득할 수 없다. 종교의 영역에서 스스로 행복하고 타인에게 상처주지 않는다면 굳이 바꿔야 할 필요를 강하게 느끼지도 못한다. 그는 그의 삶을 살고 나는 나의 삶을 산다. 왼손에 약지와 중지가 온전하게 붙어있고 젊음이 있던 시절을 기억 속에서 미화하는 것도 같다.


기독교 성경에 따르면 전지전능의 유일신을 믿는 신앙을 간직한 사람들을 데리고 이집트를 탈출한 모세는 그들과 함께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는다. 일주일이면 갈 거리를 40년 동안 헤맨다. 노예시절의 기억을 체험에 담지 못한 이들만이 그들의 신이 약속했다는 땅에 점령군으로 입성한다.


유신의 공포와 위엄에 적극적으로, 혹은 소극적으로 굴복한 사람들은 그대로 굳어서 한 세대를 살다 간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능력을 가졌으면서 스스로의 판단에 반하는 타인의 권위에 굴종해야할 때 심리적 방어기제로 명령권자를 신격화하고 상황을 합리화한다. 과오를 인정하기보다 스스로의 삶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면죄부를 주고 싶어 하는 것도 자신에게 고통을 주고 싶어 하지 않는 본능에 가깝다. 사람답게 살자는 말은 항상 쉽다. 말처럼 살기가 쉽지 않다.


나라가 이 모양인데 잘 지내고 있냐는 안부 전화를 받았다. 박근혜가 그런 사람인줄 본능적으로 알고 절망하던 사람들은 정권출범초기에 일지감치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명박 정권을 버티고 또다시 오년을 버텨낼 자신이 없어서였다. 지내고 보니 박근혜는 어느 세대에게 집단최면으로 기억되는 아버지의 업적을 지워 버리는, 누구도 하지 못한 위업을 달성하였다.


박근혜가 내려와도 사회의 부조리들이 갑자기 크게 변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다만 그 기억을 체험하고 공유한 세대가 만들어가는 사회는 지금보다 긍정적일 것이라는 희망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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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우


편집 : 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