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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09. 09. 월요일

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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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열흘 무지하게 화가 나 있었다. 국회의원이라는 사람이 비밀 회합에서 '밥솥폭탄 매뉴얼 인터넷에 떠 있다'는 식으로 떠들어대고 유사시 어디 어디를 습격한다는 식의 분임 토의가 이루어진 광경이 담긴 녹취록에다가 '뼈 속까지 평화주의자'라는 얼토당토 없는 변명과 '농담이었다'는 망발에 이르는 수순은 평정을 잃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들의 시대착오는 경멸 받아야 하고 나아가 그들이 지닌 정치적 영향력은 축소돼야 마땅하다고 여긴다. 그리고 만약 ‘유사시’에 그런 행동을 감행하는 자가 있다면 나는 그를 총으로 쏘아 죽이거나 몽둥이를 휘둘러 쓰러뜨릴 것이라는 각오에도 변함이 없다.


그들은 참으로 멍청했다. 바보스러웠고 우스꽝스러웠으며 망상에 가까운 현실 인식을 선보였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의 증거가 없다는 전제로 이석기 의원을 비롯한 RO인지 무엇인지 모를 조직원들의 ‘내란음모’ 혐의가 무죄로 판결나기를 바란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인명 살상과 시설 파괴를 언급한 그들의 망발이 ‘사상의 자유’ 수준을 넘어선다고 판단하지만 우리나라 헌법 정신은 미욱한 나의 의견을 따라서는 곤란할 것 같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계획 수립의 증거 없이 '어떻게 하자'는 ‘말’ 때문에 처벌 받는 것은 이른바 ‘자유민주주의’ 정신에도 어긋나지 않겠는가. 그렇게 되면 과거 노무현, 김대중 정권 시절 군부의 궐기를 주창하고 다녔던 이들의 공소시효를 따져 봐야 하지 않겠는가.


이석기 일파는 참으로 밉살스러웠다. 자신들만의 골방에서 자신들만의 사고 체계 속에 갇힌 채 자신들의 말세 신앙을 공유하면서 그 신앙 고백들을 누가 듣고 있는지도 모른 채 떠들어대는 모습은 한 대 쥐어박고 싶을 만큼 한심했다. 어제 만난 어느 선배 말대로 '내 청춘의 일부도 그들 속에 있을 것인데'


그러나 이석기 이하 여러 사람들이 언급했지만 나는 그들의 착각이 빚어낸 공포의 일단을 본다. 만약 ‘그때’가 오면 미행하던 국정원 직원 한 명이라도 해치우고 죽겠다고 칼을 갖고 다닌다는 이의 고백을 들으며 그의 광기를 탓하기에 앞서 그의 광기의 배경을 살필 필요가 있다고 여긴다.


그들은 정말로 전쟁이 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지난 봄의 떠들썩한 상황에서 전쟁 난다고 흥분했던 것은 조중동의 극우파와 이석기 일파 정도 밖에 없었다고 보지만 (다들 설마 나기야 하랴? 분위기였다고 본다) 그들의 자발없는 언행은 그 현실적인 공포를 감안하고 들여다보아 주는 편이 옳을 것이다.


어찌 보면 그들의 공포는 우리 탓이었다. 우리 나라의 부족함 때문이고 우리 민주공화국의 미진함이 빚어낸 산물이었다. 그들은 우리 대한민국의 흑역사, 즉 6.25 발발 후 후퇴하는 국군과 경찰이 참빗으로 훑어내 듯 수십 만의 생명을 쓸어냈던 ‘보도연맹’의 악몽에 사로잡힌 공포 영화 속 주인공들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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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달 사이에 20만에서 최대 50만까지 왔다 갔다 하는 수의 대한민국 국민들이 죽어 갔다. 그것도 보도연맹은 사상 검사들이 단체 대표 직함을 달았고 고위층들이 앞장을 섰고 과거 좌익이었던 이들은 여기 들어야 광명을 찾는다는 식의 선전을 통해 조직됐던 단체였다.


즉 대한민국 정부가 꾸려놓고 대한민국 정부가 집합시키고 대한민국 정부가 그 뒤통수에 총알을 박거나 몽둥이로 박살내 죽여서 폐광 속에 골짜기에 바다 속에 묻어 버렸다. 나치도 그 짧은 시간에 그렇게 많은 유태인을 죽이지 못했고, 크메르 루즈도 그 신속 정확 시침 뚝의 수완에 감탄을 금치 못했을 것이다. 이석기 일파는 그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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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민이 국군에 의해 학살 당한 곳 중 하나인 섯알오름 희생자 터. 대정읍 상모리에 위치.


여기서 질문은 우리에게 돌아온다. '북한은 다 정의, 남은 다 반역'이라는 이석기의 앙상한 현실 인식을 비웃는 것도 좋고 혜화 전화국 운운하던 그들의 입을 프라이팬으로 쳐도 응당하다고 본다. 하지만 과연 그들의 공포 역시 그들의 망상이었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과연 ‘유사시’가 벌어졌을 때 보도연맹 희생자와 월북자 가족 명단을 수십 년째 추적 보관하고 있다는 한국 경찰과 ‘좌익 세력 격리’를 노무현 정권 때에도 공식 서류에 담았던 교육부와 수만 단위의 좌익 세력을 파악하고 있다는 국정원이 63년 전과 똑같은 일을 하지 않을 만큼 우리들의 민주주의가 성장했고 그 정도는 제어할 수 있는 토양이 형성되었다고 호언할 수 있을까? 수십 만의 인명을 정부가 싹쓸이해 놓고도 63년이 지나도록 사과 한 마디, 보상 한 푼 하지 않는 ‘민주공화국’을 그들이 믿을 수 있었을까 말이다.


결국 증오의 원천은 공포. 이석기 일파는 예비 검속 내지 제2의 보도연맹의 희생자가 될 것이라는 공포에 시달리고 있었고, 그들의 해괴한 언동을 본 상당수의 대한민국 국민들은 '저것들이 정말 전쟁나면 이쪽에 총 들 놈들이구나'라고 공포에 질린다. 이 공포를 해결하는 것은 결국 ‘민주주의’의 확대 뿐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민주주의란 무슨 선거 절차나부랭이나 삼권분립 따위를 뜻하지 않는다.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기본 정신이다.


보수적인 사람이건 진보적인 사람이건 '꽃 중의 꽃 건혜님 꽃'을 부르는 종북주의자(그 사고 패턴은 종북주의자 그 자체 아닌가)든 '북은 다 정의, 남은 다 반역'이라고 지껄이는 수구꼴통(이건 남한 수구꼴통의 사고 방식 그대로이다)이든 자신의 의사와 표현을 전개할 자유, 또 그를 빌미로 인간 이하의 처우를 받지 아니하고 헌법과 법률에 규정된 국민의 기본권을 누릴 수 있다는 믿음, 그리고 이 민주 공화국의 정부와 국민들이 인간의 존엄을 무너뜨리는 범죄에 대해 저항할 수 있을 것이라는 합의가 확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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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포함하여) 이석기 일파를 미워하는 사람들일수록 명심해야 하고 이석기가 ‘정의’라고 표현했던 북한의 왕조를 비웃는 사람들일수록 새겨야 할 것은 이것인 듯 싶다. 이석기 일파같은 시대착오 집단을 없애는 것은 처벌이나 탄압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확대를 통한 공포의 축소, 그리고 그들의 초라함을 스스로 깨우치게 하는 일이라는 것을. '유사시에 한 명이라도 죽이고 죽겠다'며 식칼을 차에 싣고 다닌다는 멍청한 위인의 뒤통수를 휘갈기며 “이 멍청아 우리나라가 그런 나라가 아니야.” 라고 엉덩이를 차 줄 수 있는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그러자면 최소한 <천안함 프로젝트> 같은 영화 정도가 서북청년단 같은 사람들의 협박 전화로 간판에서 내려지고, 자본론 가르친다고 신고 되고 이석기 사면했다는 연유로 당시 청와대 민정 수석 누구였냐고 으르대고 일부 조직원의 망동 때문에 수만 명의 진성 당원을 가진 정당을 해산해야 한다고 설치는 풍경에서는 벗어나고 그에 맞서야 할 것이다. 또 정보기관이 선거에 개입하고 경찰은 그걸 감추고 바른 말을 하는 경찰은 징계 위기에 몰리는 그런 분위기와 싸워야 할 것이다.


우리 사회가 이석기 일파의 그 불쌍한 공포를 합리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서는 안 될 일이기 때문이다.







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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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 보리삼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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