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기사 추천 기사 연재 기사 마빡 리스트




940a.png



1889년 프러시아 헌법을 근거로 만들어진 메이지 헌법의 핵심은,


“헌법은 황권이 주는 하나의 선물”

 

이라는 것이다. 이는 논리적으로 보자면,

 

“내 권력을 인간들에게 잠시 양도해 준 것이다.”


란 의미가 된다. 즉, 헌법은 덴노의 수중에 있을 뿐이고, 영원히 대를 잇는 덴노 가계의 전통(진무덴노 이후 2600년이나 이어졌으니)에 따라 일본의 헌법은 영원히 일본 황실의 소유란 의미가 된다. 여기서 다시 한 번 무시무시한 이야기가 펼쳐지는데, 메이지 유신 이후로 덴노는 일본의 절대 권력자이며 일본의 국가 주권의 핵심이란 정치적 위치에 있다. 문제는 보통의 권력자라면 절대 권력을 넘기더라도 그에 상응할 만한 ‘책임’을 지는데, 덴노에겐 그게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대통령의 통치권이라 해도 임기 중에 발생했던 국정문제에 있어서는 책임을 져야 한다. 만약 그게 여의치 않더라도 역사적 심판이란 책임을 지는 게 통상적인 모습이다. 그러나 덴노의 권력은 이런 하찮은(?!) 인간의 권력이 아니라 신의 이름으로 내려진 권력이다. 즉, 하찮은 인간이 감히 평가할 수 없는 영역이란 의미다. 이는, 문서로 명시돼 있다.


“덴노는 어떤 이유에서도 권좌에서 물러날 수 없으며, 주권 행사에서 법의 테두리를 벗어났다고 해서 책임을 지지 않는다. (중략) 그런 책임은 정부의 대신들과 유관 조직이 져야 한다. 주권과 관계된 계약을 제외하고는 덴노는 어떠한 비난의 대상도 되지 않는다. 원칙적으로 덴노는 법의 적용 대상에서 제외된다. 특히 형법에 관해서는 어떠한 법원도 덴노를 기소할 수 없기 때문에 법률의 적용 대상이 아니다.”

- 1944~45년판 <일본연감> 中 발췌


이 정도면 덴노는 인간이 아니라 신의 영역이라 볼 수 있다. 여기서 나오는 것이 바로 덴노의 ‘무과오원칙(無過誤原則)’이다. 덴노는 신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덴노는 인간의 몸으로 태어났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실수를 한다. 아니, 실수를 하지 않더라도 실수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 인간의 삶이라 말할 수 있다. 이런 불완전한 인간이 국가를 통치하다 보면 분명 ‘정책적인 실수’를 할 수 밖에 없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덴노는 의사 결정권을 다른 사람에게 맡김으로써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잘못으로부터 보호 받는다는 것이다.


자, 그렇다면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히로히토 덴노는 태평양 전쟁에 책임이 없는 것일까?



Hirohito.jpg



덴노를 바라보는 사람들


“나 개인으로서 일반 국민과 다를 바가 없지만 총리대신 이라는 직책을 수여받고 폐하의 위광을 받음으로써 비로서 빛난다. 폐하의 신임이 있고 이 위치(총리대신)에 있기 때문에 빛나고 있는 것이다.”

- 도조 히데끼의 총리 시절 발언 中

 

덴노라는 항성의 빛을 받아 빛나는 행성이 자신이라고 말하는 도조 히데끼. 이는 도조 히데끼 개인만의 주장이 아니었다. 도쿄 전범재판에 출석했던 전범들 모두 덴노를 앞에 놓았다. 이들은 어떤 정치적 신념이나 주장 없이 맹목적으로 덴노를 추종했다고 말한다. 이 대목이 얼마나 무서운지는 따로 설명을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한 국가를 이끄는 정치 지도자가 개인의 신념이나 정치적 주장 없이 신격화 된 개인을 위해 움직였다고 말하는 것. 물론, 처벌을 피하기 위한 핑계일 수도 있겠지만, 덴노에 대한 맹목적 충성과 신격화는 태평양 전쟁 내내 일본이 보여줬던 이야기다.


여기서 다시 도조 히데끼의 발언을 곱씹어 보자,


“...폐하의 신임이 있고 이 위치(총리대신)에 있기 때문에 빛나고 있는 것이다.”


즉, 도조 히데끼는 덴노의 신임을 얻었기에 그 자리에서 활약했다는 것이다. 이 의미는 중요하다. 덴노의 의중에 따라 권력의 향배가 움직였고, 일본의 정치체제는 얼마나 덴노와 가깝게 지내느냐가 권력의 바로미터가 됐다. 소위 말하는 문고리 권력의 등장이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일본 정치체제는 덴노와 최대한 가깝게 지내는 자들에 의해 좌우됐고, 그 결과 덴노와 가깝게 지내거나 접촉기회를 많이 얻을 수 있는 관료(官僚)들이나 군인들의 입지가 강화됐고, 국가의 근간이 되는 일반 국민들의 발언권이나 정치적 의사표현은 무시된다. 소위 말하는 관존민비(官尊民卑)의 완성이다.


이러다 보니 국민들을 계몽의 대상, 수탈의 대상, 통치의 대상으로만 바라보게 됐다.


t4.jpg

도조 히데끼 

1884년 7월 30일 ~ 1948년 12월 23일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


그 결과가 바로 태평양 전쟁이다. 국민들은 덴노와 덴노 주변에 포진 돼 있는 몇몇 인물들의 ‘판단’에 의해 전쟁에 끌려 나갔고, 그들의 한 마디를 믿고 빗발치는 총탄 속을 헤치고 만세돌격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책임은 그 누구도지지 않았다.


당장 덴노의 경우는 ‘천황 무답책(天皇無答責)’이라 해서 그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존재이다. 이는 일본의 메이지 헌법이 보장했다. 메이지 헌법 제3조 ‘덴노는 신성하며 침범할 수 없다.’와 메이지 헌법 제55조 ‘국무대신은 덴노를 보필하며 그 책임에 임한다.’라는 조항을 통해 덴노는 그 어떠한 경우에도 책임을 지는 일이 없음을 명시했다. 그렇다면, 덴노가 임명한 정부 관료들은 어떠할까? 이들은 명목상의 일본 정부이지만, 내각 총리대신. 즉, 수상의 경우는 각료들의 대표일 뿐이지 국가 정책을 기획하고 이를 실천한 후 그 결과에 책임을 지는 존재가 아니었다. 설사 어떠한 발언권이 있다고 하더라도 당시의 권력은 군부에서 나왔기에 제대로 된 목소리를 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렇다면, 군부는 어땠을까? 명목상의 행정부는 일본의 총리대신이 이끄는 내각이었지만, 실제로 일본을 이끈 건 육해군의 고위 장성들이다. 이들이 실질적으로 국정을 주도하고, 타국과의 외교를 관장했으며, 전쟁을 기획했고 이를 실천에 옮긴 존재들이다. 그렇다면, 이들에게 책임을 물어야 할까?


일본의 역사 소설가 시바 료타로의 역사관. 소위 말하는 시바 사관(司馬史觀)을 보면, 『밝은 메이지(明治)』와 『어두운 쇼와(昭和)』로 근대 일본을 바라봤는데, 메이지 시절은 삼권분립의 토양이 만들어지고, 근대로 나아가는 역동적인 시대였지만, 쇼와 시절은 군부가 삼권 이외의 ‘통수권’을 가지고 국정을 농단한 ‘정신 위생에 나쁜 시대’라고 바라봤던 것이다. 한 명의 소설가가 주장하는 내용이라 큰 의미를 둘 수 없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실제로 시바 료타로의 시바사관을 들먹인 이가 극우파인 후지오카 노부카츠란 점을 보면 큰 의미를 두지 않는 것이 정신 위생에 좋을지도 모르겠지만), 그 시대를 단적으로 정리할 수 있는 정의란 점에서는 한 번쯤 생각해 볼 여지는 있을 것이다.


여기서부터 이야기는 다시 복잡해진다. 군부가 덴노에게 위임 받은 통수권을 제멋대로 농단해서 전쟁으로 이어졌다는 것이 전후 일본의 주장이지만, 이는 ‘비겁한 변명’일 뿐이었다.


USS_Bunker_Hill_hit_by_two_Kamikazes.jpg


당시 덴노였던 히로히토는 자신의 권력을 확보하기 위해 육군과 정부를 분리했고, 다시 육군과 해군을 따로 떨어뜨렸다. 아울러 옥새를 꼭 쥔 채 자신에게 올라오는 보고서를 꼼꼼히 다 확인한 후에 도장을 찍었다. 히로히토 덴노는 상황을 통제할 수 있는 수단이 없었던 것이 아니었다. 아니, 그 이전에 자신에게 부여됐던 신격화된 이미지만으로도 충분히 군부를 제어할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개전(開戰) 당시 총리 자리에 있었던 도조 히데끼의 성격과 그의 행적만 봐도 알 수 있다.


“덴노의 승낙이 없으면 한 발도 움직이지 못한다.”


이 발언을 언제 했을 것 같은가? 이는 덴노의 아버지였던 다이쇼 덴노의 서거 뉴스를 듣자마자 히로히토의 덴노 승계를 축하하며 내뱉었던 말이다. 이때 당시 도조 히데끼는 중령계급이었는데, 이때 ‘한 발도 움직이지 못한다.’의 의미는 만주 침공을 의미했던 것이다. 훗날 만주에서의 도조 히데끼의 활약(?)을 생각해 본다면, 도조 히데끼의 덴노에 대한 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이쇼 덴노의 경우는 그 별명이 모든 걸 대변했다. ‘존재감이 없는 덴노’ 이것이 그의 별명이었다. 방탕한 삶을 즐겨 ‘기다리는 여인’ 즉, 측실을 엄청나게 뒀었고, 어딘지 나사 빠진 행동 때문에 정신병을 앓았다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실제로 정신병이라는 학설이 지배적이다.  집권 말기에 히로히토 왕세자가 섭정을 맡았기에 큰 무리 없이 황위를 넘겼다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그렇다면, 당시 통수권을 농단했던 일본 군부가 히로히토에게 잘못된 사상을 주입하거나 거짓된 정보로 덴노의 판단력을 흐렸던 걸까? 이 역시도 불가능한 이야기다.


당시 일본 정부와 관료들, 군 장성들은 덴노에 대한 신격화가 극에 달했던 상황이다. 이 덕분에 덴노의 ‘무과오성’이 국정을 운영하는 자들의 기본적인 사고체계 안에 뿌리 깊이 박혀 있었다. 이 때문에 덴노의 사고체계에 영향을 끼칠만한 그 어떤 의견이나 발언도 덴노에 대한 불경죄로 간주됐다. 또한 모든 통치권을 가지고 있는 덴노를 빼고는 그 어떠한 정책도 입안될 수 없었기에 아무리 사소한 일이든 그것이 일본 정부에 관계된 일이라면 덴노가 있는 자리에서 결정되는 관행이 생겼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다 보니 일본 정부의 의사결정 과정은 좋게 말하면 보수적으로, 좀 더 직설적으로 표현하자면 복지부동(伏地不動)으로 일관 됐다. 덕분에 일본 정부는 과단성 있게 처리해야 할 정책들도 서로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움직여야 했고, 서로 책임을지지 않으려 애썼다. 이 때문인지 당시 관료들과 정치인들은 그들 특유의 ‘애매모호’한 용어들과 표현들로 자신들의 의사를 표현했고, 이는 의사소통의 어려움을 넘어 책임소재 파악도 어렵게 만들었다.


일본의 “무책임한 정치”가 극에 달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로히토 덴노가 마음만 먹었다면, 일본은 전쟁을 피할 수 있었다. 아무리 군부가 통수권을 가지고 국정을 농단했다 하지만, 덴노에게는 이를 막을, 혹은 최소한 견제할 수 있는 힘이 있었다. 아무리 좋게 봐도 미필적 고의로 전쟁을 방조했다고 볼 수 있고, 좀 더 직설적으로 표현하자면 전쟁 기류에 편승했다고 볼 수 있다.


c0039224_4981b04cdedf7.jpg


이는 당시 궁내청(宮內廳 : 일본 황실의 일을 맡아서 하는 관청) 관료들의 기록만 봐도 알 수 있는데, 만주 문제가 터졌을 때는 모르는 척 한 발 물러나서 상황을 관망했지만, 관동군의 독단적인 중국 침략 보고를 들었을 때 인상을 찡그리며 화를 냈었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였다. 이후 히로히토는 또다시 이를 용인했다. 이렇게 보면, 히로히토가 우유부단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그는 상황을 통제할 수 있었고, 실제로 정보를 계속해서 확인했고, 정보 획득과 정책 실행을 위한 실질적인 움직임을 보였다.


1936년 덴노의 문장이 새겨진 명령서로 창설된 낯선 이름의 부대가 하나 있었다. 정확한 부대명은,


“전염병 예방과 수질 정화 부대”


였는데, 훗날 731 부대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이 부대의 병사들과 장교들은 자신들이 덴노의 칙령에 의해 창설된 유일한 부대라며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게 된다.


1937년 11월 덴노는 황궁 내에 자기만을 위한 전쟁 상황실을 설치하고, 이후 모든 전투를 꼼꼼히 챙겨 보게 된다. 놀랍게도 이 상황실에는 수상마저도 출입이 엄격히 통제됐다.


다시 말하지만, 히로히토는 태평양 전쟁을 막을 수 있는 위치에 있었고, 마음만 먹었다면 충분히 전쟁을 막을 수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전쟁까지 달려갔던 것일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크게 두 가지 정도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히로히토를 포함한 일본의 의사결정권자들의 오판

1930년대 말 일본의 의사결정권자들은 유럽에서 ‘새 시대’가 열리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 히틀러가 전쟁에서 이길 것이고, 이렇게 열린 새 시대에서 일본은 동아시아의 패권을 거머쥘 것이라 믿고 있었다. 1940년 독일과 영국이 한참 영국본토항공전(Battle of Britain)으로 내닫고 있던 그때 히로히토와 일본 수뇌부들은 독일이 승리할 것이라 믿고 있었다. 이는 그들만이 아니라 일본 전체의 공통된 분위기였다. 물론, 제정신(!?)인 사람들도 있었는데, 주영 대사였던 요시다 시게루(전후 일본의 수상이 됐다)와 후임인 시게미쓰 마모루가 그 주인공인데, 이들은 영국이 곧 무너질 것이란 독일의 선전을 너무 믿지 말라고 히로히토에게 간청을 한다.


둘째, 히로히토의 근시안적 태도

히로히토의 근시안적인 모습을 잘 보여준 것이 진주만 공습 이후의 태도였다. 당시 히로히토는 곧 미국과 협상 할 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었다. 그리고 이 협상을 통해 아시아에서의 일본의 지위를 인정받을 것이란 희망을 내비쳤다.


무과오성을 말하던 살아있는 신 덴노는 인류와 일본 국민들에게 엄청난 과오를 저질렀던 것이다.



Hirohito's_Title_Card.png



 

참고자료

 

1. 전쟁국가 일본/ 살림출판사/ 이성환

2. 호호당 선생의 ‘프리스타일’

3. 세계전쟁사/ 육군사관학교 전사학과/ 황금알

4. 러일전쟁과 을사보호조약/ 이북스펍/ 이윤섭

5. 조선역사 바로잡기/ 가람기획/ 이상태

6. 다시 쓰는 한국근대사/ 평단문화사/ 이윤섭

7. 대본영의 참모들/ 나남/ 위텐런 지음, 박윤식 옮김  

8. 나모위키

9. 쇼와 16년 여름의 패전/ 추수밭/ 이노세 나오키 지음

10. 『중일 전쟁』 용, 사무라이를 꺾다/ 미지북스/ 권성욱 지음

11. 나는 일본군, 인민군, 국군이었다 / 서해문집/ 김효순 지음

12. 석유전쟁/ 매일경제신문사/ 정기종 지음

13. 우리의 눈으로 본 일본제국 흥망사/ 궁리/ 이창위 지음

14. 연합함대 그 출범에서 침몰까지/ 가람기획/ 박재석, 남창훈 지음

15. 프레시안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24246

16. 일본의 이중권력, 쇼군과 천황/ 살림출판사/ 다카시로 고이치

17. 히로히토 신화의 뒤편/ 을유문화사/ 에드워드 베르 지음

18. 일본의 가장 긴 하루/ 가람기획/ 한도 가즈토시 지음





1부 

[러일전쟁]


2부

드레드노트의 탄생

1차 세계대전, 뒤바뀐 국제정치의 주도권

일본의 데모크라시(デモクラシー)

최악의 대통령, 최고의 조약을 성사시키다

각자의 계산1

8년 의 회, 던 축 

일본은 어떻게 실패했나2

만주국, 어떻게 탄생했나



외전

군사 역사상 가장 멍청한 짓

2차대전의 불씨

그리고, 히틀러

실패한 외교, 히틀러를 완성시키다

국제정치의 본질



3부

태평양 전쟁의 씨앗1

태평양 전쟁의 씨앗2

도조 히데키, 그리고 또 하나의 괴물

일본을 늪에 빠트린 4명의 '미친놈'

대륙의 각성완료, 다급해진 일본

대동아(大東亞)의 환상에 눈 먼 일본

일본, 건드리지 말아야 할 걸 건드렸다 1

일본, 건드리지 말아야 할 걸 건드렸다 2

일본의 패배

일소중립조약이 파기되던 순간 1

일소중립조약이 파기되던 순간 2

천조국, 움직이다



4부

왜 일본은 미국과 전쟁을 하려고 했을까

신성불가침으로 만들어진 권력, 덴노(天皇)






100931659.jpg


91192701.jpg


펜더가 디비주는 전쟁으로 보는 국제정치


조약, 테이블 위의 전쟁

러시아 vs 일본 한반도에서 만나다





펜더


편집: 꾸물

Profile
딴지일보 공식 계정입니다.